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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mera División
발렌시아 CF 문장

발렌시아 CF

Valencia Club de Fútbol
VALENCIA CLUB DE FÚTBOL · LOS CHE 1919-2025

메스타야 · 라리가 6회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 UEFA컵

스페인 왕국 축구사에서 화려함과 스타일리시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렸던 팀의 전설 열한 명을 골랐다. 필자가 고른 열한 명과 후보 열다섯까지 스물여섯 개의 이름을 함께 남긴다.

오렌지빛 영광, 지중해의 심장을 걷다

발렌시아 CF. 로스 체(Los Che; 발렌시아 사람들이 서로를 부르는 감탄사 che에서 온 구단 별칭)라고 불리는 이 구단은 지중해 연안의 자존심이며, 라리가 역사에 각인을 남긴 제3의 혁명으로 통한다.

바르사와 레알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본보단 철학으로, 스타보다 조직으로 시대를 흔들었던 발렌시아. 1930년대의 황금 시기를 지나, 1970년대의 부침을 견디고, 21세기 초반에는 라파엘 베니테스(Rafael Benítez Maudes; 스페인 축구 감독, 1960-) 감독 아래에서 라리가를 두 차례 정복하며 단숨에 유럽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칸테라(Cantera; 채석장이라는 뜻으로 스페인에서 구단 유소년 조직을 가리키는 말)에서 영혼을 기르고, 마르세유에서 날개를 빌려오고, 아르헨티나에서 예술을 수입한 발렌시아는 메스타야에서 그 모든 것을 승화시켰다.

이 구단이 들어 올린 라리가는 여섯 번이고, 그 여섯 번이 1941-42시즌부터 2003-04시즌까지 예순두 해에 흩어져 있다. 한 세대가 트로피를 몰아 가진 적이 없다는 뜻이며, 열한 자리를 고르는 일이 곧 서로 다른 네 시대를 한 줄에 세우는 일이 된다.

이 콘텐츠는 그 발렌시아 CF, 혼과 승부와 아름다움과 실리를 모두 품었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물여섯 명을 기리는 연대기다.

선정 전술: 106년을 세운 4-4-2

아래에서 한 자리씩 부르고, 완성된 대형은 글 끝에서 펼친다.

배치는 4-4-2다. 앞선 라리가 편들이 4-3-3과 4-2-4로 열한 자리를 나눈 것과 달리 이 명단은 중원을 넷으로 채웠다. 이유는 이 구단이 유럽의 꼭대기에 가장 가까이 갔던 시기의 모양에 있다. 2000년과 2001년, 발렌시아는 두 해 연속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올랐고 그때 중원은 알벨다가 뒤를 덮고 좌우가 폭을 만드는 구조였다. 여기에 1970년대의 클라라문트와 1980-90년대의 페르난도 고메스를 얹으면 네 자리가 시대별로 하나씩 채워진다.

1.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 골키퍼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골키퍼 상세 정보 디자인

그의 머리는 은빛이었고, 그의 눈은 전광판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산티아고 카니사레스(José Santiago Cañizares Ruiz; 스페인 골키퍼, 1969-). 그는 발렌시아 CF가 21세기 초 스페인과 유럽을 뒤흔들던 시절 기둥이자 정신의 중심이 되던 골키퍼였다. 발렌시아 통산 413경기, 라리가 우승 2회, UEFA 챔피언스 리그 2연속 결승, 라리가 최우수 골키퍼 4회, 스페인 축구 대표팀 46경기. 위 모든 통계는 카니사레스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숫자적 장치에 해당한다.

그가 메스타야에 온 1998년은 안도니 수비사레타(Andoni Zubizarreta Urreta; 스페인 골키퍼, 1961-)가 은퇴한 해다. 스페인 축구가 아는 가장 큰 장갑을 물려받는 자리였고, 그는 열 해를 그 자리에서 보냈다.[1]

그는 공을 잡는 손보다 공을 기다리는 자세가 더 인상적인 골키퍼였다. 발렌시아가 점유율에서 밀리던 경기, 선수들이 지쳐서 느려지는 70분 이후, 그는 광기 어린 고함으로 동료를 깨우고 기적 같은 선방으로 1-0 스코어를 유지시키던 자였다.

두 장면 모두 카니사레스. 각도를 먼저 줄이고 마지막에 손을 쓰는 순서가 같다.

그가 골대 앞에 서 있으면, 내 발끝이 평소보다 5cm는 짧아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티에리 앙리가 카니사레스를 두고

특히 2000-01시즌 4강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맞대결에서 슈퍼세이브의 연속으로 팀을 구하던 장면이나 2003-04시즌 UEFA컵 우승 장면은 그의 커리어에 있어 하이라이트였다. 트로페오 리카르도 사모라(Trofeo Ricardo Zamora; 라리가 최소 실점 골키퍼에게 주는 상)는 네 번 가져갔고, 그중 세 번이 발렌시아의 황금기와 겹친다.

가장 유명한 부상도 그의 것이다. 2002 FIFA 월드컵을 앞두고 애프터셰이브 병이 발등에 떨어져 힘줄이 끊어졌고, 그 자리를 스무 살의 이케르 카시야스가 물려받았다. 스페인 골문의 세대가 바뀐 순간을 만든 것이 유리병 하나였다.[1]

희끗한 머리카락, 장인의 루틴, 그리고 침착한 표정 속 날카로운 눈빛. 발렌시아 CF의 가장 완벽한 마지막 수비자였다.

2. 리카르도 아리아스 - 센터백

리카르도 아리아스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그는 전술서에 자주 등장하지 않았고, 하이라이트 영상도 많지 않다. SNS에서는 더욱이 호출되지 않는 선수이기도 하다. 그러나 발렌시아라는 클럽이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를 묻는다면, 그 중심엔 늘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리카르도 아리아스(Ricardo Penella Arias; 스페인 수비수, 1957-). 1976년부터 1992년까지 오직 발렌시아 유니폼만을 입고 열여섯 해 동안 500경기 이상을 출전한 레전드이다. 패배를 지연시켰고, 혼란을 잠재웠고, 기억을 축적했던 센터백이다.

빌드업에 관여하는 리카르도 아리아스.

그는 외치는 대신 몸을 던지는 수비를 했다. 마치 첼시의 존 테리나 게리 케이힐 같은 느낌이 있다. 투쟁보다는 위치로 침묵했고, 팀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공간을 메웠으며, 동료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등을 내주던 수비수였다. 헌신의 상징이라는 말이다.

그 헌신이 기록으로 남은 해가 1986년이다. 발렌시아는 1985-86시즌을 마치고 세군다 디비시온으로 떨어졌고, 그는 남았다. 2부에서 서른네 경기를 뛰어 한 해 만에 팀을 1부로 되돌렸다.[2] 스페인 대표팀 경력은 1979년 포르투갈전 전반 마흔다섯 분이 전부다. 열여섯 해를 한 구단에서 보낸 수비수의 대표팀 기록이 한 경기라는 사실이 그의 위치를 설명한다.

그리고 팀을 승격시킨 뒤, 마지막 홈경기에서 눈물을 흘리는 팬들에게 그가 건넨 한 마디.

감사합니다.

Gracias.

리카르도 아리아스가 메스타야의 관중에게

3. 로베르토 아얄라 - 센터백

로베르토 아얄라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전형적인 키가 큰 센터백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파비오 칸나바로처럼 멀리 점프했고, 판단력이 빨랐으며, 몸싸움은 판데이크와 같았다.

로베르토 아얄라(Roberto Fabián Ayala; 아르헨티나 수비수, 1973-). 엘 라톤(El Ratón; 생쥐)이라는 별명처럼 민첩했지만 단순한 속도나 예측이 아니라 전장의 외침 같았고, 전율을 동반한 물리적 존재감 같았던 수비수였다. 177cm의 센터백이 2000년대 유럽에서 살아남은 방식이 그 별명 안에 들어 있다.

두 차례의 라리가 우승과 끝내는 UEFA컵, UEFA 슈퍼컵 우승까지 이끌며 2004년에는 미니 트레블을 이끌었고, 주장으로서 발렌시아는 물론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에서도 수비수 한정 역대 최다 출전이라는 금자탑을 쌓은 게 아얄라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 통산 115경기이며 주장으로 나선 63경기는 대표팀 기록이다.[3]

레알 마드리드전 헤더 골.

아얄라의 존재는 단순한 상징을 넘어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라는 거함 둘을 축구로 배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줬고, 2000년대 초반 유럽의 전술 흐름을 뒤흔들던 팀이 발렌시아가 될 수 있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가 메스타야에 온 값은 625만 파운드였다. AC 밀란에서 넘어온 2000년 여름이고, 그 여름부터 일곱 해 동안 275경기를 뛰었다.[3] 2001년 밀라노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같은 아르헨티나 사람 마우리시오 페예그리노(Mauricio Andrés Pellegrino; 아르헨티나 수비수·감독, 1971-)와 짝을 이뤄 선발로 나섰고, 그 대회 최우수 수비수로 뽑혔다.

1대1 방어의 교과서. 세트피스 득점력은 센터백 기준 탑. 후방에서 그라운드 전체를 지휘하는 리더십. 위 세 박자가 고루 분포된 로베르토 아얄라는 2000년대 센터백 티어 리스트에서 상위권에 놓일 만큼 우월했었다.

4. 아메데오 카르보니 - 레프트백

아메데오 카르보니 레프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그가 스페인 땅에 도착했을 때 그 누구도 이 풀백은 역사에 남을 선수야라고 단언할 사람은 없었다. 여느 이탈리아 선수처럼 화려한 스타가 아니었고, 지극히 평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른을 넘겨 스페인에 도착한 이 이탈리아인은 열 해 동안 발렌시아의 왼쪽을 누구보다 완벽하게 지배했다.

아메데오 카르보니(Amedeo Carboni; 이탈리아 왼쪽 수비수, 1965-). 그가 유럽 무대에서 가장 오랜 시간 활약한 이탈리아 레프트백 중 하나이자, 스페인 축구 팬들이 수비수의 시간이라는 개념을 처음 배우게 만든 이방인이었다.

발렌시아에서 그가 치른 공식전은 350경기이고 득점은 하나다. 1999년 5월 6일 레알 소시에다드를 상대로 넣은 그 한 골이 아홉 시즌의 전부다.[4] 라리가 우승 2회와 UEFA 챔피언스 리그 2연속 결승 진출을 이끄는데 선봉장이 되었던 아메데오는 39세 7개월이라는 나이에 UCL 무대를 밟음으로써 챔스 역대 최고령 출전 기록을 쌓기도 했었다. 2004년 예테보리에서 UEFA컵을 들어 올렸을 때 그는 서른아홉이었고, 유럽 클럽 대회를 우승한 최고령 선수로 기록됐다.[4] 서른둘에 도착해 마흔한 살까지 아홉 시즌을 뛰었으니, 스페인에서 보낸 시간이 이탈리아의 어느 구단에서 보낸 시간보다 길다.

그는 빠르지도 않았고, 화려함은 더욱 없었지만, 수비수는 원래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증명한 사내였다. 완벽한 위치 선정과 컷팅 타이밍, 거친 듯 정교한 태클, 라인 간 간격 조율 능력의 미덕, 상대를 지워버리는 방식의 수비 능력까지 말디니와 카푸와 튀람을 호출하게 만드는 항목들이 모두 그에게 있었다.

39세에 메이저 무대를 지배한 라틴의 대장. 이것이 아메데오 카르보니다.

5. 조슬랭 앙글로마 - 라이트백

조슬랭 앙글로마 라이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위 카드의 345경기 1골 17도움은 같은 시기 왼쪽을 지킨 아메데오 카르보니의 기록이 잘못 들어간 것이다. 구단 공식 집계 기준 앙글로마의 발렌시아 기록은 177경기다.

그는 단순히 빠른 선수, 단순히 강한 선수라고 정의하기에 매우 부족하다. 그는 풀백이라는 포지션을 완성형으로 재정의한 최초의 라이트백이었다.

조슬랭 앙글로마(Jocelyn Angloma; 프랑스 오른쪽 수비수, 1965-)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단련되었고, 스페인에서 완성형 축구선수로서 군림했다.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서 토리노 FC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를 거쳐 서른둘이던 1997년 메스타야에 도착했고, 다섯 시즌 동안 구단 공식 집계로 177경기를 뛰었다. 라리가 기록은 121경기 5골이다.[5] 발렌시아 황금시대의 주역이며, 라리가와 UCL 무대에서 프랑스인의 위대함을 연출했던 수비수였다.

수비 시에는 완벽한 1대1 대응 능력으로 본인의 범위는 완벽하게 커버해냈고, 공격 시에는 측면에서 중앙까지 자율적으로 침투했다. 하프라인 위에서도 2선 플레이메이커처럼 빌드업에 관여했으며, 당시 감독들은 조슬랭 앙글로마를 선발 명단에서 배제하는 것이 힘들었을 만큼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았었다.

히바우두를 지워 버리는 앙글로마.

1999-2000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SS 라치오를 상대하며 알레산드로 네스타와 파벨 네드베트 사이를 오가며 좌우 모두를 지배한 것은 그의 커리어에 있어 백미다.

경력의 마지막 문장은 축구 선수의 이력서에 잘 없는 형식이다. 프랑스 대표로 뛰었던 그는 클럽 경력을 마친 뒤 마흔을 넘겨 고향 과들루프 대표팀에 합류해 2006년부터 2007년까지 열네 경기를 더 뛰었다.[5] 태어난 섬의 유니폼을 가장 마지막에 입은 셈이다.

6. 다비드 알벨다 - 수비형 미드필더

다비드 알벨다 수비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지중해의 심장. 발렌시아 그 자체.

발렌시아라는 클럽은 종종 화려한 드리블, 환상적인 득점 장면으로 회자되곤 하지만, 사실 이 팀이 유럽의 심장부까지 올라섰던 가장 큰 이유는 중원을 완벽하게 잠가버린 한 남자의 헌신적 침묵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다비드 실바는 자유롭게 돌았고, 멘디에타는 앞으로 질주했으며, 아얄라는 전진 수비를 택할 수 있었고, 카니사레스는 더 깊이 내려설 수 있었다.

다비드 알벨다(David Albelda Aliqués; 스페인 수비형 미드필더, 1977-)의 발렌시아 통산 기록은 482경기 9골 14도움이며, 라리가에서만 385경기 8골 12도움이다. 통산 다섯 개의 트로피와 UCL 2년 연속 결승전의 주역이고, 21세기 스페인 중원 시스템의 시조라 부를 만하다.

볼이 아니라 공간을 읽고 미리 도달하는 위치 감각, 중앙과 측면을 동시에 읽고 미리 도달하는 커팅 구조, 자신의 페널티 박스에서 상대 페널티 박스까지의 통제, 상대가 무엇을 할지를 예상하는 것을 넘어서 내 동료는 무엇을 못할지를 먼저 예상하는 반응. 이 모든 것은 축구에 철학을 담은 전형적인 사유자의 스타일이고, 보통 이런 선수들은 한 클럽에서 GOAT로서 추앙된다. 단순히 골을 많이 넣고 경기를 많이 뛰었다는 숫자 따위의 장치가 언론이나 SNS에서는 먹혀도 팬들에게 안 먹히는 이유는 서사의 유무에 따른다.

다비드 알벨다는 그 시절 루벤 바라하(Rubén Baraja Vegas; 스페인 중앙 미드필더, 1975-)와 함께 발렌시아 중원의 핵심으로 군림했었다.

모두가 마리오 켐페스를 외치고, 다비드 실바를 부르지. 하지만 발렌시아의 진짜 유니폼은 알벨다의 땀에서 시작됐거든.

마누엘 펠레그리니가 알벨다를 두고

그 서사가 가장 험하게 드러난 때가 2007년 12월이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로날트 쿠만(Ronald Koeman; 네덜란드 축구 감독, 1963-) 감독이 주장 알벨다와 카니사레스, 미겔 앙헬 앙굴로를 한꺼번에 1군 명단에서 제외했다. 세 사람은 넉 달 동안 훈련장에만 있었고, 쿠만이 경질된 뒤 보로(Salvador González Marco ‘Voro’; 스페인 축구 감독, 1963-) 감독이 이들을 다시 불렀다. 그해 발렌시아는 강등권 근처에서 시즌을 마쳤고, 돌아온 주장이 남은 경기를 지켰다.[6]

바르셀로나에 부스케츠, 맨시티에 로드리, 라치오에 네스타가 존재했다면, 발렌시아는 그에 응수해 알벨다를 내밀 수 있다. 발렌시아 CF라는 이름의 진심 속에 위치한 자다.

7. 호세 클라라문트 - 왼쪽 미드필더

호세 클라라문트 왼쪽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메스타야의 오래된 잔디엔 늘 왼쪽 라인에서 반듯하게 흐르던 한 줄기 움직임이 있었다. 발렌시아 팬들 사이에서 역사상 가장 우아한 주장으로 회자되는 미드필더, 호세 클라라문트(José Claramunt Torres; 스페인 미드필더, 1946-)의 궤적이었다.

1970년대 발렌시아의 아이코닉 스타였던 호세 클라라문트는 패스의 아티스트로서 라리가를 지배했고, 끝내 유럽 대항전에서도 힘을 발휘했는데 그가 뽐낸 건 기교보다는 균형감에 가까웠다. 수비 상황에서는 중앙에서 간격을 메우고, 공격 전개 시 의도적인 늦은 전진으로 후속을 만들며, 터치 하나에 리듬을 실어 패스를 하여도 공간이 생기도록 유도했었다.

그 균형감이 트로피로 바뀐 해가 1971년이다. 발렌시아는 1970-71시즌 라리가를 가져갔고, 구단의 네 번째 우승이자 1947년 이후 스물네 해 만의 우승이었다.[7] 165cm의 미드필더가 열두 시즌 동안 한 구단에서만 381경기 83골을 남겼다는 기록도 함께 적어 둔다.

때문에 그가 활약하던 시기의 발렌시아는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에도 밀리던 구단이 아니었으며, 클라라문트의 왼발은 유일한 팀으로 만들어내었었다. 고향 푸솔의 경기장에는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8. 가이스카 멘디에타 - 오른쪽 미드필더

가이스카 멘디에타 오른쪽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라리가와 세리에 A의 미드필더가 전 유럽을 지배하던 시절, 그 중심에 서있던 사내는 가이스카 멘디에타(Gaizka Mendieta Zabala; 스페인 미드필더, 1974-)였다고 단언해도 동의할 팬들이 많을 것이다.

볼을 다루는 기술, 공간을 지배하는 지성, 한 팀을 시대로 끌어올리는 리더십 세 박자를 갖춰 오른쪽에서는 루이스 피구, 전방에서는 지네딘 지단을 호출하던 자. UEFA 올해의 미드필더를 1999-2000시즌과 2000-01시즌에 연달아 받았고, 옹즈 드 옹즈도 2000년과 2001년에 가져갔다.

2000년대 초반, 미드필더들이 유럽 축구의 중심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안에서 가장 많은 거리를 뛰고, 가장 정확한 방향으로 패스를 뿌리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발로 팀을 구한 사내가 있다면 그가 바로 멘디에타였다.

그 순간이 가장 크게 찍힌 경기가 2001년 5월 23일 밀라노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이다. 그는 경기 시작 직후 페널티킥을 넣어 FC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앞서 나갔고, 승부차기에서도 자기 차례를 성공시켰다. 발렌시아는 그 승부차기에서 졌다.[8] 두 해 연속 결승에서 진 팀의 주장이 유럽 최고의 미드필더로 뽑힌 해이기도 하다.

볼을 소유할 때 잃지 않고 유지하는 시간, 패스의 정확도, 슈팅의 날카로움이 모두 예술과 같았던 멘디에타는 경기의 리듬을 조율했고, 그 리듬 위에 발렌시아라는 이름이 유럽의 음악 중 하나가 되었었다. 박스 투 박스 플레이메이커, 2차 침투형 득점원, 전방 압박의 트리거, 정신적 리더. 그는 통계 사이트에서 사이드에 위치하는 미드필더로 정의되나 실제로는 위 네 가지에 해당하는 공간에서 뛰던 포지션 소유자였다.

스페인에 세 명의 지휘자가 있었다. 라울, 과르디올라, 그리고 멘디에타.

스페인 일간 Marca가 멘디에타를 두고

그가 결승에서 진 그해 여름, SS 라치오는 4770만 유로를 내고 그를 데려갔다. 당시 기준 축구사 여섯 번째 이적료였다.[8] 발렌시아의 황금기가 선수를 팔면서도 이어졌다는 사실이 이 구단의 성격을 말해 준다.

9. 페르난도 고메스 콜로메르 - 공격형 미드필더

페르난도 고메스 콜로메르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발렌시아라는 도시와 같이 자라난 유소년, 세대의 어깨 위에 발렌시아를 올려놓고 버틴 사내. 클럽은 흔히 스타를 남기지만, 페르난도 고메스 콜로메르(Fernando Gómez Colomer; 스페인 미드필더, 1965-)는 클럽을 자신 속에 남긴 선수였다. 파올로 말디니와 자친토 파케티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유소년 팀부터 열여섯 해를 발렌시아 CF에서만 뛰며 명예, 헌신, 기술, 정신이라는 모든 미덕을 가진 진정한 클럽의 아이콘으로 기억되는 선수였다.

발렌시아 CF
556경기 123골 이상
라리가 출전
420경기, 구단 역대 1위
구단 통산 득점
역대 4위
함께한 시간
1983-1998년, 열여섯 시즌

학구열도 뛰어나 엘 카테드라티코(El Catedrático; 교수)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던 페르난도는 시즌 중 대부분의 골을 중거리 슈팅으로 성공시켰을 만큼 공간의 미학을 이해하던 선수이기도 하였다. 그는 패스를 뿌리는 10번이었고, 동시에 골을 넣는 해결사였으며, 심지어 수비 시엔 가장 먼저 백패스를 감수하던 봉쇄자였다.

투박한 시절의 10번에 국한되지 않고, 현대 전술과도 잘 맞는 이중 역할형 플레이메이커로서 20세기의 미들라이커로 군림했던 페르난도. 아리아스와 마찬가지로 그도 1986년의 강등을 피하지 않았고, 2부에서 한 시즌을 뛴 뒤 팀과 함께 올라왔다.[9] 구단이 재정난에 말렸을 때조차 난 이 도시가 필요로 할 때 가장 먼저 나갈 수 없다며 자발적 연봉 삭감을 구단에 역제안했던 그의 모습은 진정한 리더라는 이름 아래에 빛날 수 있는 일화 중 하나였다.

페르난도를 모른다면, 당신은 발렌시아 팬이 아니라 그냥 라리가를 본 사람일 뿐이다.

스페인 일간 Sport가 페르난도 고메스를 두고

10. 마리오 켐페스 - 세컨드 스트라이커

마리오 켐페스 세컨드 스트라이커 상세 정보 디자인

발렌시아의 호날두. 지중해가 낳은 월드 스타. 발렌시아의 첫 번째 월드 클래스. 마리오 켐페스(Mario Alberto Kempes Chiodi; 아르헨티나 공격수, 1954-)는 속도와 파괴력, 골 감각과 슈팅 각도, 그리고 라틴 특유의 드라마틱한 감정을 모두 갖춘 사내였다.

발렌시아 통산 246경기 149골.

라리가 득점왕 2회, 1976-77시즌 24골과 1977-78시즌 28골.

1978 FIFA 월드컵 득점왕이자 대회 최우수 선수.

1978년 결승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두 골.

1978-79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

1979-80시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1980년 유러피언 슈퍼컵 우승.

엘 마타도르. 1970년대 후반 발렌시아를 스페인의 클럽에서 세계의 클럽으로 옮긴 이름.

1976년, 그는 로사리오 센트랄에서 메스타야로 건너왔다.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105경기 85골을 넣고 온 스물두 살짜리였고, 도착한 첫해와 이듬해에 연달아 라리가 득점왕을 가져갔다.[10]

1978년의 여름이 그를 다른 층위로 올린다. 자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여섯 골을 넣어 득점왕이 됐고, 결승 연장 105분에 넣은 골이 우승을 확정했다. 그해 남아메리카 올해의 선수와 옹즈도르가 함께 따라왔다. 월드컵 득점왕과 라리가 득점왕을 같은 시기에 가진 선수가 그때의 발렌시아에 있었다.

마리오 켐페스는 트로피의 천재이며, 골 망 앞에서는 그 누구보다 월드 클래스였다. 2선에서 출발하는 속도 폭발형 침투, 슈팅이 아니라 총격에 가까운 강한 킥력, 드리블 돌파가 아닌 직선의 타격으로 찢는 플레이, 감정선이 격정적이면서도 순간 결정은 냉정한 판단, 압박감이 가장 심할 때 터져 나오는 득점 행진, 무대가 클수록 강렬해지는 퍼포먼스, 경기장 밖에서도 아이돌 같은 존재감. 그는 21세기 미디어 스타 호날두와 마찬가지로 득점이라는 단어에 스타성이라는 숨결을 불어넣었던 공격수였다.

11. 에드문도 문도 수아레스 - 센터 포워드

에드문도 문도 수아레스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발렌시아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순간의 심장. 1939년 내전 후, 폐허가 된 스페인에서 축구가 사람들의 삶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 축구를 가장 먼저 득점으로 바꿔낸 사내. 왕조 이전의 신화, 문도(Edmundo Suárez Trabanco ‘Mundo’; 스페인 공격수, 1916-1978)다.

그는 1940년대에 골을 넣었다. 전쟁의 그림자가 경기장 위에 드리워졌던 시절, 사람들은 절망 대신 문도의 골을 기다렸다. 그가 골을 넣으면 광장은 살아났고 기억은 환호로 다시 쓰였다.

발렌시아 통산 337경기 238골로 구단 역대 득점 1위이며, 라리가 우승 3회는 1941-42시즌과 1943-44시즌과 1946-47시즌이고, 코파 델 레이 우승은 1941년과 1949년이다. 트로페오 피치치는 1941-42시즌 27골과 1943-44시즌 28골로 두 번 가져갔다.[11]

그는 골잡이였지만 기계는 아니었다. 그의 골에는 서사가 있었고, 그 서사는 한 도시의 감정을 움직였으니 모든 팬들의 마음속에 문도라는 이름은 언제나 가장 강렬한 브랜드였다.

1941-42시즌은 그 이름이 처음으로 도시 전체를 흔든 해다. 라리가 득점왕과 구단 역사상 최초의 라리가 우승이 같은 시즌에 왔고, 지중해에 면한 이 도시는 마치 폭발이 일어난 것 같은 굉음을 쏟아냈다. 내전이 끝난 지 세 해 만이었고, 스페인의 다른 도시들이 아직 배급표를 들고 줄을 서던 시기였다.

그는 지금도 발렌시아의 모든 레전드가 경기를 시작하기 전 바라보는 이정표다. 마리오 켐페스, 가이스카 멘디에타, 다비드 비야, 호세 가야, 이강인 모두 문도의 그림자 아래에서 자신만의 시대를 만들었다.

그는 시작이었다.서사의 첫 문장이었고, 아직도 메스타야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존재다.

마침내,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발렌시아 CF 역대 베스트 11 표제 4-4-2 대형으로 배치한 발렌시아 CF 역대 베스트 11 발렌시아 CF 역대 베스트 11 후보 15인 편집물
표제, 열한 명의 대형, 후보 15인. 1940년대의 문도부터 2010년대의 알벨다까지 스물여섯 명이 한 흐름에 들어간다.

이 명단은 발렌시아 CF의 성공 시대에 침투한 26인의 명단이다.

카니사레스가 뒤를 닫고, 카르보니와 앙글로마가 양쪽 선을 오르내리며, 아리아스와 아얄라가 중앙을 나눈다. 그 앞에서 알벨다가 공을 회수해 페르난도 고메스에게 넘기고, 클라라문트와 멘디에타가 좌우의 폭을 만들면 켐페스가 뒷공간으로 달리고 문도가 문전에서 마지막 접촉을 맡는다.

발렌시아는 늘 같은 조건에서 싸웠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보다 적은 돈으로, 팔려 나가는 주축을 매번 다시 채우면서, 그럼에도 유럽의 결승까지 올라가야 했다. 열한 자리가 네 시대에 흩어진 까닭도 여기에 있다. 한 세대가 오래 머물 수 있는 구단이 아니었다.

라리가 여섯 번 가운데 셋을 문도가, 하나를 클라라문트가, 둘을 아얄라와 알벨다와 카니사레스가 가져왔다. 이 명단의 열한 자리는 그 여섯 번의 우승 트로피를 한 명도 빠짐없이 나눠 들고 있다.

오렌지빛 영광, 지중해의 심장.스물여섯 개의 이름이 한 장에 들어간 까닭이다.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후보 15인

메스타야가 배출한 이름은 열한 자리로 끝나지 않는다. 표지에 선 다비드 비야와 다비드 실바도 이 명단에 있다. 편집물 안의 이름을 검색 가능한 텍스트로 아래에 다시 적는다.

  • 이그나시오 에이사기레Ignacio Eizaguirre Arregui · 골키퍼

    전쟁의 상흔 속에서도 클린시트를 만들어냈던, 초창기 발렌시아의 첫 벽이다.

  • 호세 마누엘 셈페레José Manuel Sempere Maciá · 골키퍼

    시대의 틈에서 가장 조용히 오래 남았던 남자, 발렌시아의 그림자 지킴이다.

  • 미겔 텐디요Miguel Tendillo Belenguer · 센터백

    황금기를 열기 전, 가장 먼저 몸을 던졌던 전위 수비의 정석이다.

  • 카를로스 마르체나Carlos Marchena López · 센터백

    월드컵과 유로와 라리가를 넘나든 전술의 무게중심, 2000년대 전환기의 해석자다.

  • 호세 가야José Luis Gayà Peña · 레프트백

    지금 이 순간에도 메스타야를 품고 달리는 발렌시아의 근본을 잇는 주장이다.

  • 호세 카레테José Carrete de Julián · 라이트백

    오른쪽을 묵묵히 왕복하던 정직한 풀백, 클래식 라리가의 상징 같은 사내다.

  • 안토니오 푸차데스Antonio Puchades Casanova · 수비형 미드필더

    중원을 전장처럼 누비며 전후 스페인 축구를 일으킨 장인의 초상이다.

  • 다니 파레호Daniel Parejo Muñoz · 중앙 미드필더

    비난 속에서 중심이 된 남자, 시간의 리더십을 품은 조율자다.

  • 다비드 실바David Josué Jiménez Silva · 왼쪽 미드필더

    모든 패스에 시가 담겨 있던 사내, 발렌시아가 길러낸 가장 섬세한 영혼이다.

  • 미겔 앙헬 앙굴로Miguel Ángel Angulo Valderrey · 공격형 미드필더

    그라운드 어디에서든 숨결을 채워넣던 유틸리티 플레이어다.

  • 파블로 아이마르Pablo César Aimar Giordano · 공격형 미드필더

    마라도나의 재림이자 메시의 우상, 발렌시아 팬들이 아직도 눈물로 기억하는 10번이다.

  • 호아킨 산체스Joaquín Sánchez Rodríguez · 라이트 윙

    좌센테 우아킨, 열정과 재치로 메스타야를 수놓았던 라이트윙의 시인이다.

  • 클라우디오 로페스Claudio Javier López · 레프트 윙

    번개처럼 가르고 시처럼 마무리하던 왼쪽의 폭풍이다.

  • 와우두Waldo Machado da Silva · 센터 포워드

    1960년대 골잡이의 상징, 발렌시아를 지탱한 브라질산 스트라이커다.

  • 다비드 비야David Villa Sánchez · 센터 포워드

    발렌시아의 마지막 왕자, 스페인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다.

기록을 확인한 곳

  1. 산티아고 카니사레스 — 영어 위키백과 「Santiago Cañizares」. 1998년 수비사레타의 은퇴 뒤 합류, 사모라상 네 번, 2002년 애프터셰이브 병 부상. 통산 출전은 집계 기준에 따라 413경기와 416경기로 갈린다.
  2. 리카르도 아리아스 — 영어 위키백과 「Ricardo Arias」. 1976-1992년 공식전 501경기, 1985-86시즌 강등과 이듬해 2부 34경기, 1979년 포르투갈전 대표팀 한 경기.
  3. 로베르토 아얄라 — 영어 위키백과 「Roberto Ayala」. 2000년 AC 밀란에서 625만 파운드에 이적, 일곱 시즌 275경기, 아르헨티나 115경기와 주장 63경기, 2001년 결승 선발 출전.
  4. 아메데오 카르보니 — 영어 위키백과 「Amedeo Carboni」와 스페인어 위키백과 「Amedeo Carboni」. 1997-2006년 공식전 350경기와 1999년 5월 6일 레알 소시에다드전의 유일한 득점, 2004년 UEFA컵 우승 당시 유럽 클럽 대회 최고령 우승자. 영어판은 같은 기간을 346경기로 센다.
  5. 조슬랭 앙글로마 — Valencia CF 「Jocelyn Angloma: 1997-2002」와 영어 위키백과 「Jocelyn Angloma」. 구단 공식 집계 177경기와 서른둘에 인테르에서 합류한 경위, 라리가 121경기 5골, 마르세유·토리노·인테르 경력, 2006-2007년 과들루프 대표 14경기.
  6. 2007년 12월의 1군 제외 — 영어 위키백과 「David Albelda」. 쿠만 감독이 알벨다·카니사레스·앙굴로를 명단에서 제외한 날짜와 복귀 경위.
  7. 1970-71시즌 라리가 — 영어 위키백과 「José Claramunt」와 구단 우승 연혁. 클라라문트의 라리가 294경기 54골과 1970-71시즌 우승, 고향 클럽 경기장의 명명.
  8. 가이스카 멘디에타 — 영어 위키백과 「Gaizka Mendieta」. 2001년 결승의 페널티 득점과 승부차기, UEFA 올해의 미드필더 2회, 2001년 라치오 이적료 4770만 유로.
  9. 페르난도 고메스 콜로메르 — 영어 위키백과 「Fernando Gómez Colomer」. 라리가 420경기로 구단 1위, 1986-87시즌 2부와 승격. 통산 출전·득점은 집계 기준에 따라 갈린다.
  10. 마리오 켐페스 — 영어 위키백과 「Mario Kempes」. 1976년 로사리오 센트랄에서 이적, 라리가 득점왕 두 시즌의 24골과 28골, 1978 FIFA 월드컵 6골과 결승 두 골.
  11. 에드문도 문도 수아레스 — 영어 위키백과 「Edmundo Suárez」. 구단 역대 최다 득점 238골, 라리가 우승 세 시즌, 피치치 1941-42시즌 27골과 1943-44시즌 28골, 생몰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