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 왕국
Reino de España라리가
Primera División레알 마드리드 CF
Real Madrid Club de Fútbol흰 유니폼 · 유러피언컵 5연패 · 갈락티코 · 라 데시마
전설은 매번 새롭게 쓰이지만, 왕조는 한 번 건설되면 모든 이들의 기준이 된다. 디스테파노부터 호날두까지, 푸슈카시부터 라모스까지, 왕관이 씌워진 백색의 신들을 찬미하는 기록이다. 필자가 고른 열한 명과 후보 열다섯, 추가 열다섯까지 마흔한 개의 이름을 함께 남긴다.
신들이 입은 유니폼은 흰색이었다
레알 마드리드 CF. Real Madrid Club de Fútbol. 그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축구 팀을 넘어, 권위와 승리, 자부심과 숭배가 얽힌 구단 그 자체의 신화를 마주한다.
이 팀은 전술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들은 전술을 만든 팀이 아니라, 전술이 그들을 피해서 움직인 팀이기 때문이다. 모든 구단은 리그 우승을 꿈꾸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늘 왕좌에 앉아 있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최다 우승 14회. 라리가 최다 우승 35회. 수많은 개인 수상자들, 그리고 시대를 움직인 네 글자 Real.[6]
그렇기에 이 콘텐츠는 단지 좋은 선수의 명단이 아니다. 레알 마드리드라는 120년짜리 서사를 끌어내어, 그 찬란한 계보 위에 다시 존재의 무게를 올려놓는 작업이다.
이 팀에는 단 하나의 특징만이 존재했다. 이기는 것. 다른 팀이 축구의 아름다움을 고민할 때 레알은 그 아름다움을 소유하겠다고 선언했고, 다른 팀이 전술을 짜고 시스템을 다듬을 때 레알은 우리는 전설을 뛴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등장한 이름들. 헨토, 디스테파노, 푸슈카시, 레몽 코파, 라울, 호날두, 모드리치. 그들은 매번 같은 대사를 반복했다.
열한 자리를 정하는 동안 필자가 가장 오래 붙들고 있던 질문은 이 구단이 왜 매번 시대의 꼭대기에 있었는가였다. 답은 명단을 세로로 세웠을 때 나왔다. 1950년대의 디스테파노, 그 곁의 푸슈카시, 그리고 2010년대의 호날두까지, 이 구단은 서로 다른 세 시대에 걸쳐 축구사 최상위의 이름을 세 번 보유했다.
선정 전술: 120년을 세운 4-2-4
앞선 라리가 편들이 4-3-3으로 열한 자리를 나눈 것과 달리 이 명단은 4-2-4로 세웠다. 이유는 이 구단의 창세기에 있다. 1950년대 레알은 WM에서 넘어오던 과도기의 대형을 썼고, 앞에 네 명을 세운 채 디스테파노가 중원까지 내려와 공격을 다시 시작하는 구조로 유러피언컵 5연패를 완성했다. 전방 넷과 중원 둘이라는 배치는 복원이라기보다 이 구단이 실제로 통치하던 모양이다.
중원 두 자리에 디스테파노와 모드리치를 함께 둔 것도 같은 까닭이다. 디스테파노는 9번 자리에 못 박히는 선수가 아니었고, 모드리치는 스물세 해를 건너뛰어 그 자리의 기능을 다시 수행한 선수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시간은 60년이 넘지만, 공을 받기 전에 다음 장면을 정해 두는 습관은 같다.
1. 이케르 카시야스 - 골키퍼

아르헨티나의 공격수였던 호르헤 발다노(Jorge Alberto Francisco Valdano Castellano; 아르헨티나 공격수·감독, 1955-)의 회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가 그를 성자라고 불렀다면 그건 그가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의 선방에 너무 자주 구원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케르 카시야스(Iker Casillas Fernández; 스페인 골키퍼, 1981-)의 전성기는 10대 후반부터 시작됐다. 스무 살에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교체로 투입되어 전설을 시작했는데, 세사르 산체스(César Sánchez Domínguez; 스페인 골키퍼, 1971-)의 부상 때문이었다. 그는 어린 왕이라고 불렸고, 그가 나이를 먹었을 때는 이미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전체가 그의 시선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의 결승 무대는 사실 그보다 두 해 앞서 열렸다. 1999-2000시즌 파리 결승에서 레알은 발렌시아 CF를 3-0으로 꺾었고, 그날 골문에 선 사람이 열아홉 살 나흘의 카시야스였다.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를 통틀어 결승에 선발로 나서 우승한 최연소 골키퍼이며, 아홉 살에 구단 유소년 팀 문을 밟은 소년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그 자리에 도달했다.
2002년 글래스고의 결승은 정반대의 방식으로 같은 이야기를 썼다. 경기 막판 세사르 산체스가 쓰러졌고 벤치에서 올라온 카시야스가 레버쿠젠의 마지막 공세를 연달아 걷어냈다. 지네딘 지단(Zinédine Yazid Zidane; 프랑스 공격형 미드필더·감독, 1972-)의 왼발 발리로 벌어 둔 한 골을 끝까지 지킨 손이 그의 손이었다. 마드리드가 그를 성 이케르(San Iker; 스페인 언론과 팬이 붙인 별명)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고, 발다노의 회고에 나오는 성자가 이 별명이다.
카시야스는 경기의 구조를 마지막에서 재정의하는 사상가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1대1 상황에서의 간결한 접근, 페널티킥 순간 정지된 눈빛으로 상대의 흐름을 잡아내는 높은 선방률, 크로스를 읽어내는 눈의 구조화 덕택에 182cm라는 작은 키에도 레알 마드리드는 물론 스페인 대표팀에서 부동의 1번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골키퍼의 키를 두고 벌어지는 논쟁에서 그가 자주 호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공중볼을 지배하는 유형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대신 슈팅이 발을 떠나기 전에 이미 각도를 좁혀 두는 쪽으로 자기 몸의 한계를 옮겼다.
2. 호세 산타마리아 - 센터백

호세 산타마리아(José Emilio Santamaría Iglesias; 우루과이 수비수, 1929-2026)는 레알 마드리드의 최전성기를 지탱했던 철벽으로서 남미의 지능과 유럽의 조직을 모두 품은 완성형 수비수였다.[4]
그가 베르나베우에 도착한 것은 1957년이다. 몬테비데오의 클루브 나시오날 데 풋볼에서 아홉 해를 보내고 넘어왔으니, 유러피언컵 5연패가 이미 두 번 채워진 시점에 남미 최고의 수비수가 합류한 것이다. 스페인 언론이 그에게 붙인 별명은 벽(El Muro)이었다.
1959-60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결전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골을 헌납한 사례가 있으나, 그의 경력 전체를 조명해 보았을 때 이는 귀여운 실수 정도였다. 그날 레알은 7-3으로 이겼고 푸슈카시가 네 골, 디스테파노가 세 골을 넣었다.
레알 마드리드 CF 소속으로 337경기에 나섰던 호세 산타마리아는 라리가 6회, 유러피언컵 4회 우승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1960년 인터콘티넨털컵 개막 시즌에서 남미의 대장이었던 CA 페냐롤을 5-1로 완파하는 데 큰 공헌을 하며 전 세계 대장으로 군림하였다.
피지컬이 전부는 아니었던 수비수다. 뛰어난 위치 선정, 공중볼을 장악하는 능력, 1대1 상황에서의 심리전, 그리고 디스테파노와 푸슈카시와 레몽 코파의 실수를 덮던 존재감이 함께 있었다. 때문에 호세 산타마리아는 중앙 수비수였음에도 경기를 읽는 미드필더처럼 활약하기도 했는데, 그의 활약 덕택에 좌우 수비 동료였던 마르키토스나 라파엘 레스메스 역시 수준급 수비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우루과이에서 스무 경기를 뛴 뒤 스페인으로 국적을 옮겨 대표팀 경기를 다시 치른 이력도 그의 시대를 보여준다. 1954년 스위스에서는 우루과이의 최후방을 맡아 4위를 만들었고, 1962년 칠레에서는 스페인 유니폼을 입고 같은 무대에 섰다. 국적과 대표팀의 경계가 오늘의 규정만큼 단단하지 않던 시기였고, 그 틈으로 남미의 수비 문법이 마드리드 최후방에 이식됐다.
스무 해 뒤 그는 감독으로 한 번 더 그 경계 위에 선다. 1982년 자국에서 열린 FIFA 월드컵의 스페인 대표팀을 지휘한 사람이 호세 산타마리아다. 우루과이에서 나고 자라 스페인 대표로 뛰고 스페인 대표팀을 이끈 이력서는 그때도 흔치 않았다.
3. 페르난도 이에로 - 센터백

수비수의 틀을 부수고, 레알 마드리드 시대 교차점에서 모든 걸 걸었던 세기말의 심장 페르난도 이에로(Fernando Ruiz Hierro; 스페인 수비수, 1968-). 현대적 센터백의 원형이면서 그보다 더 많은 걸 이뤄낸 완전한 주장이다.
1990년대 바르셀로나 드림팀에 영원한 주장 주제프 과르디올라가 존재했다면, 마드리드시가 내세울 인물은 페르난도 이에로였다.
1989년 여름, 스물한 살의 그는 레알 바야돌리드에서 마드리드로 건너왔다. 처음부터 최후방에 서 있던 것도 아니다. 중원에서 뛰던 1991-92시즌에는 리그에서만 21골을 넣었고 이 숫자가 그의 한 시즌 최다 득점으로 남았다. 뒤로 내려간 뒤에도 그 킥과 골 감각은 그대로 따라 내려왔다.
601경기 127골. 수비수임에도 127골을 몰아치며 라리가 우승 5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3회, 심지어 인터콘티넨털컵에서 2회 우승을 일궈낸 기록은 바르사의 로날트 쿠만에 비빌 정도의 스탯과 성과였다.
그는 센터백이었지만 미드필더처럼 설계했고, 공격수만큼이나 골을 넣었으며, 주장으로서 팀 전체의 윤리를 통제했다. 그가 없었다면 은퇴 직전의 부트라게뇨와 막 전성기를 맞이했던 라울의 시대 사이의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을 듯싶다.
프리킥과 페널티킥을 모두 처리할 수 있는 킥력과 포지셔닝으로 완성된 수비 지능은 가히 최강이었으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집중력과 대인 방어 능력은 그의 장기 중 하나였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레알 마드리드가 경기에서 무너져도 이에로만큼은 두 발로 온전히 서서 상대 공격수를 저지했다는 점이다.
마놀로 산치스(Manuel Sanchís Hontiyuelo; 스페인 수비수, 1965-)가 은퇴하면서 주장 완장이 그에게 넘어왔고, 2002년 글래스고에서 라 노베나를 들어 올린 주장이 그였다. 스페인 대표로도 89경기 29골을 남겼으니 수비수의 기록표로 읽기는 어려운 숫자다.
그가 뛴 1990년대의 레알은 우승과 침체를 한 해 걸러 오갔다. 킨타 델 부이트레의 마지막과 라 세프티마, 그리고 세기말의 혼란이 전부 그의 열네 시즌 안에 들어 있다. 시대가 흔들릴 때 명단에서 이름이 지워지지 않은 선수가 이 자리에 선다.
4. 마르셀루 - 레프트백

선수 급 자체가 호베르투 카를루스(Roberto Carlos da Silva Rocha; 브라질 왼쪽 수비수, 1973-)에 비하면 초라하고, 심지어 브라질 내에서는 역대 레프트백 계보 4~5순위에 나아가서야 호출되는 존재. 마르셀루(Marcelo Vieira da Silva Júnior; 브라질 왼쪽 수비수, 1988-)를 이 자리에 세우면서 필자가 가장 먼저 적어 두어야 할 문장이 그것이다.
이 명단은 선수의 절대 등급을 줄 세운 표가 아니다. 그랬다면 왼쪽은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자리이고 논쟁조차 없다. 시속 150킬로미터를 넘긴 왼발, 열한 시즌, 유러피언컵 3회 우승자가 후보 명단으로 내려간 까닭은 이 열한 명이 한 팀으로 맞물리는 방식을 먼저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셀루는 레알 마드리드 CF에서만큼은 호날두와 완벽한 파트너였고, 리그 내 라이벌 조르디 알바, 필리피 루이스, 후안 베르나트를 찍어버릴 만큼 위대한 존재였다.
플루미넨시 FC에서 넘어온 열여덟 살짜리에게 붙은 이적료는 800만 유로였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2006년부터 2022년까지 라리가 우승 6회,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5회, UEFA 슈퍼컵은 물론 FIFA 클럽 월드컵까지 무려 4회에 걸쳐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등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가장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린 선수 중 한 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를 숫자로만 정의하면 마르셀루의 위대함은 반드시 누락된다. 그는 수비가 불안했지만, 포지션을 벗어났고, 때론 어깨춤을 추며 상대를 도발했으며, 심지어 전술적으로 리스크 요인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마르셀루가 있어야만 레알 마드리드 2010년대 퍼즐이 완성될 수 있었고, 호날두가 더욱 빛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마르셀루는 늘 선발 명단에 본인의 이름을 마킹했고, 2016-17시즌과 2017-18시즌은 그가 가장 완성형 선수였음을 천명하는 듯한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었다.
숫자 하나를 더 놓으면 이 자리의 근거가 분명해진다. 2014년 5월 리스본의 결승, 라모스가 후반 추가시간에 동점 헤더를 꽂고 넘어간 연장에서 박스 바깥으로 흘러 나온 공을 감아 넣어 4-1을 만든 사람이 마르셀루다. 레프트백이 유럽 결승의 연장에서 쐐기를 박는 장면은 이 팀이 왼쪽을 어떻게 썼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2022년 4월 30일, 그는 스물다섯 번째 트로피를 들었다. 파코 헨토의 스물네 개를 넘어선 순간이며 레알 마드리드 120년에서 가장 많이 우승한 선수가 됐다. 이 명단의 왼쪽 두 자리가 구단 최다 우승 기록을 나란히 쥐고 있다.
왼쪽 측면에서 호날두가 안으로 접어 들어가면 그 바깥은 비어 버린다. 그 빈 땅을 한 시즌도 아니고 10년 넘게 혼자 관리한 선수를 대체하는 일은 등급표로 풀리지 않는다.
5. 세르히오 라모스 - 라이트백

골로 경기를 구했고, 피로 팀을 지켰던 레알 마드리드의 마지막 야성.
세르히오 라모스는 클럽 엠블럼을 유니폼에 단 것이 아니라, 가슴속에 새긴 채 뛰었다.
루카 모드리치가 팀 동료 시절의 라모스를 회고하며
레알 마드리드에 기적이 필요할 때 늘 존재하던 선수는 호날두도 있었으나 세르히오 라모스(Sergio Ramos García; 스페인 수비수, 1986-)의 존재감은 더욱이 강력했다.
세비야 FC에서 그를 데려오는 데 든 돈은 2700만 유로였다. 2005년 기준 스페인 수비수 이적료 최고액이었고 그때 그의 나이가 열아홉이었다.
레알 마드리드 통산 671경기 101골. 라리가 우승 5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4회, UEFA 슈퍼컵 우승 3회, FIFA 클럽 월드컵 우승 4회, 발롱도르 순위권 진입 총 6회. 주장, 핵심, 투쟁, 승리의 상징이다.
그는 수비수였으나 상대가 가장 두려워하던 순간은 그가 페널티 박스 안에서 점프를 시도할 때였고, 이는 곧 골이라는 결말을 초래하곤 하였다. 공중볼 경합 능력은 축구사 이래 역대급 재능 중 한 명이었으며, 그 근원은 투지였고,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존재감은 과거 네덜란드의 로날트 쿠만이나 프랑스의 로랑 블랑, 이탈리아의 자친토 파케티를 호출할 지경이었다.
대인 마킹과 인터셉트 능력 역시 준수하여 라리가 최고급 수비수로 매 시즌 이름을 마킹하였으며, 스페인 왕국에서는 가장 투구를 쓴 투사스러운 수비수였다. 무너질 듯한 90+3분의 시계 안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를 구해낸 자다.
그 90+3분은 2014년 5월 24일 리스본이다. 알레띠에 0-1로 끌려가던 경기의 후반 추가시간 3분에 그의 머리가 닿았고, 레알은 열두 해를 기다린 라 데시마를 연장에서 가져갔다. 두 해 뒤 밀라노의 같은 대진에서도 선제골은 그의 몫이었다. 유럽 최고 무대의 결승에서 두 번 골문을 연 수비수는 축구사에 흔하지 않다.
라리가에서 받은 퇴장은 열아홉 번으로 역대 공동 최다다. 야성이라는 말이 비유로만 남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명단이 그를 라이트백에 세운 것은 그의 출발점을 기록해 두기 위해서다. 세비야 FC에서 올라온 열아홉 살의 라모스는 오른쪽 측면 수비수였고, 마드리드에서도 첫 시즌들을 그 자리에서 보냈다. 중앙으로 들어간 뒤의 라모스가 더 유명하지만, 4-2-4의 오른쪽을 단독으로 감당하면서 세트피스에서 문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수비수라는 조건에 맞는 이름은 이 구단 역사에서 그리 많지 않다.
6. 루카 모드리치 - 중앙 미드필더

작은 몸으로 거인을 굴복시킨 사내. 그는 체구는 작았어도 크라위프를 좇는 자로서 2010년대 중앙 미드필더의 왕이었고,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라는 두 거인을 무너뜨리고 끝내 발롱도르를 들어 올린 사내였다.
2012년 토트넘 홋스퍼를 떠나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한 루카 모드리치(Luka Modrić; 크로아티아 중앙 미드필더, 1985-)는 2025년 현재까지 590경기에 나서며 43골 95도움을 기록했고, 라리가 우승 4회는 물론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6회를 차지하며 대선배 파코 헨토를 호출하고 있다.
주장 경력 역시 푸슈카시 페렌츠의 어깨를 넘보게 되었으니 푸슈카시와 헨토와 크라위프와 호날두라는 축구사 역대 최고의 선수들의 어깨에 나란히 선 모드리치가 베스트 11 콘텐츠에 이름을 올리지 못할 이유가 하등 없어 보인다.
양발을 모두 사용하며 달렸으며, 로빙 패스의 곡선미는 원형의 미학이고, 전방 압박 회피 드리블은 조회수 백만을 불러올 지경이었다. 축구의 전체 경기를 보지 않고도 모드리치의 팬이 아닌 사람은 딱히 많지 않다. 오죽하면 이니에스타와의 비교가 축구계 뜨거운 논쟁거리이니 모드리치의 위대함은 더 설명하지 않아도 좋아 보인다.
2018년의 발롱도르는 그 가운데에서도 결이 다르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열 해를 메시와 호날두가 둘이서 나눠 가졌고 그 줄을 끊은 사람이 모드리치다. 2007년 카카(Ricardo Izecson dos Santos Leite ‘Kaká’; 브라질 공격형 미드필더, 1982-) 이후 11년 만이었으며, 같은 해 그는 크로아티아를 FIFA 월드컵 결승까지 끌고 가 골든볼을 받았다.
첫 시즌의 그가 스페인 언론에서 최악의 영입으로 꼽혔다는 사실도 함께 적어 둔다. 2012년이 저물 무렵 마르카(Marca; 1938년 창간한 스페인 스포츠 일간지)의 독자 투표가 그해 리그 최악의 영입 1위에 그를 올렸다. 한 해 뒤 같은 언론이 그를 팀의 심장으로 부르기까지 걸린 시간이 열 달 남짓이었다. 이 구단에서 판단이 뒤집히는 속도를 보여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7.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 올라운더

메시를 설명할 때 두 줄 이상 설명하는 게 사치인 만큼, 알프레도 디스테파노(Alfredo Stéfano Di Stéfano Laulhé; 아르헨티나 태생 스페인 공격수, 1926-2014)를 설명할 때 두 줄 이상 설명할 필요 자체가 없다.
축구를 전술로 바꾼 초월자.
전 포지션의 질서를 재편한 첫 번째 선수.
레알 마드리드 통산 396경기 308골 122도움.
유러피언컵 5연패를 대장으로서 이끈 자.
라리가 우승 8회, 인터콘티넨털컵 우승 1회.
라리가 득점왕 5회.
발롱도르 1957·1959년 수상, 순위권 진입 총 5회.
1989년 슈퍼 발롱도르.
UEFA 창립 50주년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선수(2003년).
세 대륙의 심장을 점령한 유일한 왕들의 신.
전 세계 역대 최고의 선수 여덟 명 가운데 한 명.이 열거는 한 항목씩 풀면 각기 한 장을 요구한다. 골키퍼와 센터백 사이까지 내려와 수비하고, 중원에서 빌드업을 설계하고, 전방에선 직접 골을 넣었으며, 윙에서는 공간을 벌리고, 공격수에게 포지셔닝을 가르쳐 주던 존재였다.[1]
5연패를 한 줄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그는 다섯 번의 결승에 모두 나섰고 다섯 번 모두 골을 넣었다. 1956년 파리에서 스타드 드 랭스를 상대로 한 골, 1957년 베르나베우에서 ACF 피오렌티나를 상대로 페널티킥 한 골, 1958년 브뤼셀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74분에 한 골, 1959년 슈투트가르트에서 다시 랭스를 상대로 후반 시작 2분 만에 한 골, 그리고 1960년 글래스고에서 세 골이다. 다섯 결승에 일곱 골이며 이 계보를 가진 선수는 축구사에 그 혼자다.
펠레는 시였고, 마라도나는 폭발이었으며, 메시는 감정이었지. 하지만 디스테파노는 전체일 걸.
프란츠 베켄바워가 디스테파노를 두고
독일 축구사가 낳은 가장 위대한 선수 가운데 한 명이 날린 찬사다. 애당초 디스테파노는 당시 펠레는 물론 유명한 선수들과 대부분 친했다.
GOAT 중 GOAT라 불리는 자
선수 시절에는 푸슈카시 페렌츠와, 레몽 코파와, 펠레와 견주어졌고 은퇴 후에는 요한 크라위프와, 디에고 마라도나와, 리오넬 메시와 견주어지는 서사로 존재하는 것이 알프레도 디스테파노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 통산 396경기 308골 122도움을 기록했지만 이조차 공식 기록보다 미달한 수치로 보고되고 있으며, 유러피언컵 5연패를 이끈 것은 물론 라리가 8회 우승을 대장으로서 이끌었으니 실력으로는 깔 게 없다.
최전방 스트라이커,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풀백, 센터백, 심지어 골키퍼 포지션까지 모두 소화했는데 그냥 소화한 수준이 아니라 웬만해서는 수준급이었다. 때문에 축구사 이래 유일하게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정의된다.
금빛 화살(La Saeta Rubia; 금발의 화살이라는 뜻으로 스페인 언론이 붙인 별명)이라는 별명은 속도만을 설명하지 않는다. 화살이 어디서 출발하는지를 매번 상대가 몰랐다는 쪽에 가깝다.
그가 한 번도 서지 못한 무대도 있다. FIFA 월드컵이다. 아르헨티나 대표로 여섯 경기를 뛰었고 콜롬비아에서는 비공인 경기를 치렀으며 스페인 대표로는 1957년부터 1961년까지 서른한 경기에 나서 스물세 골을 넣었는데, 스페인은 1958년 본선에 오르지 못했고 1962년 칠레 대회에서는 개막 직전의 근육 부상으로 그가 명단에서 빠졌다. 세 나라의 유니폼을 입고도 월드컵 기록이 한 줄도 없는 선수의 이름이 역대 최고 논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레알로 가는 여정
1953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Santiago Bernabéu de Yeste; 스페인 축구 행정가·레알 마드리드 회장, 1895-1978) 회장이 콜롬비아에서 뛰던 디스테파노에게 러브콜을 날렸을 때 바르셀로나 역시 그에 대한 영입을 시도했고, 실제로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을 뻔했으나 스페인 정부의 개입으로 그는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조차 유벤투스 FC까지 합류해 디스테파노를, 훗날에는 푸슈카시 페렌츠 영입까지 시도했으니 하마터면 21세기 레알 마드리드 포지션이 유벤투스가 될 뻔하기도 했었다.
알프레도 디스테파노의 이적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8. 파코 헨토 - 레프트 윙

파코 헨토(Francisco Gento López; 스페인 왼쪽 윙어, 1933-2022)는 레알 마드리드 CF 역사상 가장 빠른 선수이며, 가장 빠른 치달 스킬로 모든 경기는 물론 결승전에서까지 측면을 씹어 먹던 존재였다.[3]
팀 통산 600경기 183골. 라리가 우승 12회로 역대 1위, 유러피언컵 우승 6회로 역대 1위. 2022년 마르셀루가 넘어서기 전까지 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 기록자였다.
그를 데려온 경위부터 이 구단답다. 1953년, 라싱 데 산탄데르의 2군에 머물던 그는 독감으로 자리가 빈 1군에 올라 레알 마드리드와의 홈 경기에 나섰다. 그 한 경기를 보고 마드리드가 사흘 만에 그를 데려갔다.
그는 윙어로 정의하기 전에 치달의 원조였다. 스피드와 볼 컨트롤이 결합된 세계 최초의 윙어이며, 낮고 빠른 크로스로 푸슈카시에게 수많은 도움을 조달했고, 박스 외곽에서 단순 스피드가 아닌 기교로서 탈압박했다. 이 네 가지 포인트만 이해하면 어떤 존재였는지 체감할 수 있다.
칸타브리아의 광풍(La Galerna del Cantábrico; 칸타브리아 해안에 몰아치는 돌풍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별명은 그의 고향 지방에서 왔다. 북부 해안의 바람이 예고 없이 방향을 바꾸며 들이치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고, 상대 오른쪽 수비수들이 겪은 일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알프레도 디스테파노가 어느 날 헨토에게 말을 건넸다고 전해진다.
봐, 관중들이 네게 보내는 박수야.
Mira, la multitud te está aplaudiendo.
알프레도 디스테파노가 경기 중 헨토에게
여덟 번의 결승은 1956·1957·1958·1959·1960·1962·1964·1966년이다. 앞의 다섯은 디스테파노와 푸슈카시가 서 있던 팀이고, 마지막 하나는 스페인 선수들로만 짠 예예 세대의 팀이다. 1966년 5월 브뤼셀 에이젤에서 FK 파르티잔을 2-1로 뒤집은 그날의 주장이 헨토였고, 구단이 그때까지 들어 올린 여섯 개의 유러피언컵을 전부 손에 쥔 선수는 그 라커룸에 그 혼자였다.
유러피언컵 결승에 여덟 번 나선 선수는 축구사에 그 혼자다. 왕조의 처음과 끝에 같은 왼쪽 선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이 자리는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9.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라이트 윙

축구가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가장 완벽한 신체의 대답이라면 필자는 한 명을 말한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 dos Santos Aveiro; 포르투갈 공격수, 1985-)다.
훈련을 해서 신이 됐고, 노력으로 물리 법칙을 거스른 존재.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호날두를 두고
카를로 안첼로티(Carlo Ancelott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59-) 감독이 그를 두고 남긴 말이다.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순위 10 중 7위에 올렸다고 댓글창이 터졌지만, 이미 상위 여덟 자체가 신이라 불리는 존재로서 권능의 영역임을 이해하길 바란다.
레알 마드리드에서만 438경기에 출전해 450골을 넣은 그는 푸슈카시와 라울을 넘어서 골의 상징이라 불렸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골 기록인 140골을 넣어 라이벌인 리오넬 메시와 격차를 벌린 공격수였다. 포르투갈과 잉글랜드와 스페인과 이탈리아, 네 나라의 리그를 모두 석권했고 발롱도르는 다섯 번 가져갔다.
그 아홉 해를 한 시즌씩 끊으면 이렇게 된다.
| 시즌 | 공식전 골 | 그해의 자리 |
|---|---|---|
| 2009-10 | 33 | 9400만 유로의 첫해, 아홉 시즌 가운데 가장 적은 득점 |
| 2010-11 | 53 | 라리가 40골로 당시 리그 한 시즌 최다 득점 |
| 2011-12 | 60 | 승점 100으로 들어 올린 라리가 |
| 2012-13 | 55 | 무리뉴 체제의 마지막 시즌 |
| 2013-14 | 51 | 라 데시마, UEFA 챔피언스 리그 한 시즌 17골 |
| 2014-15 | 61 | 구단 한 시즌 최다 득점 기록 |
| 2015-16 | 51 | 밀라노에서 가져온 운데시마 |
| 2016-17 | 42 | 라리가와 UEFA 챔피언스 리그 동시 석권 |
| 2017-18 | 44 | 3연패, 그리고 토리노의 오버헤드킥 |
| 아홉 시즌 | 450 | 438경기 |
첫 시즌의 33골이 그의 마드리드 최저 기록이다. 나머지 여덟 시즌은 전부 마흔 골을 넘겼고, 서른을 넘긴 마지막 두 해에도 그 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역습 스피드의 종결자였고, 세트피스 상황에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페널티 박스 내에서 위치 선정의 천재였다. 수비수 앞에 서는 대신 수비수의 움직임을 예측한 초월적 존재이기도 했다.
레알 마드리드에 입단한 첫날부터 모든 훈련장 1등 출근, 비시즌 중에서도 체지방 6퍼센트 유지, 경기 중 기계처럼 루틴을 반복하며, 심지어 잠을 자는 와중에서도 몸을 관리한 호날두. 매년 골과 도움과 스탯에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해 나간 펠레 이후 최초의 존재다. 결국 GOAT가 되었다.
2018년 4월 3일, 토리노
그의 신체가 무엇을 해냈는지를 한 장면으로 보려면 공중에서 몸을 뒤집어 차 넣는 골만큼 정확한 자료가 없다. 2018년 4월 3일 유벤투스 원정, 다니 카르바할(Daniel Carvajal Ramos; 스페인 오른쪽 수비수, 1992-)이 올린 공을 등지고 뛰어올라 지면에서 2미터 77센티미터 높이에서 오른발로 때려 넣었다. 잔루이지 부폰(Gianluigi Buffon; 이탈리아 골키퍼, 1978-)의 골문이었고, 조금 전까지 그의 모든 터치에 야유를 보내던 홈 관중이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그날 레알은 3-0으로 이겼고 호날두는 UEFA 챔피언스 리그 열 경기 연속 득점이라는 기록도 함께 세웠다. 원정 팬이 상대 선수에게 일어선 장면은 이 대회 역사에서도 몇 되지 않는다.
삥이의 클립챔스 오버헤드킥 골 모음.Zip영상 보러 가기 →
팬과 미디어와 선수와 감독 모두가 그에 대한 찬사와 비판을 진지하게 했다는 것 자체로서 그는 역사의 중심에 섰다. 21세기 미디어 스타라는 말로는 담기지 않는, 철학 위를 걷던 자다. 리오넬 메시와의 라이벌리가 크라위프와 베켄바워의 그것만큼의 파급력과 흥행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사는 더욱 완벽해진다.
10. 푸슈카시 페렌츠 - 세컨드 스트라이커

축구사에서 가장 위대한 왼발의 주인, 전설과 서사와 미학과 기록을 동시에 품은 득점의 신. 푸슈카시 페렌츠(Puskás Ferenc; 헝가리 인사이드 레프트, 1927-2006)다.
이름을 먼저 짚고 간다. 헝가리는 성을 앞에 쓰므로 원어 순서로는 푸슈카시 페렌츠이고, 한국에는 같은 철자를 스페인어식으로 읽은 푸스카스라는 형태로 먼저 들어왔다. FIFA가 2009년 제정한 상의 이름이 국내에서 푸스카스상으로 굳은 것도 그 경로 때문이다. 이 글은 본문에서 원어 순서를 따른다.
질주하는 소령
- 헝가리 대표팀 85경기 84골
- 1952 헬싱키 올림픽 금메달
- 1953년 웸블리에서 잉글랜드를 6-3으로
- 1954 FIFA 월드컵 준우승
- 부더페슈트 혼베드 FC 영구 결번 10번
매직 마자르의 심장.
베르나베우의 10번
- 레알 마드리드 262경기 242골
- 유러피언컵 우승 3회, 라리가 우승 5회
- 유러피언컵 결승 한 경기 4골, 1960년의 유일무이한 기록
- 유러피언컵 결승 해트트릭 2회, 역시 유일무이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59-60·1961-62·1963-64시즌
라리가 득점왕 4회.
헝가리 풋볼의 상징이며 축구사 이래 역대 Elo 레이팅 1위의 대표팀을 이끈 주장이다. 그 기록은 2025년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2]
휘어지는 왼발
그를 부르던 이름은 질주하는 소령(Galoppozó Őrnagy; 부더페슈트 혼베드 FC가 군 소속 구단이라 붙은 별명)이었다. 군인 계급이 그대로 별명이 된 공격수의 왼발은 1953년 11월 웸블리에서 가장 유명한 증거를 남겼다. 잉글랜드가 안방에서 유럽 대륙의 팀에 처음으로 무너진 그 경기에서 헝가리가 6-3으로 이겼고, 푸슈카시는 달려드는 수비수를 발바닥으로 속여 뒤로 빼낸 뒤 그대로 왼발로 밀어 넣었다.
공이 떨어지는 대신 휘어지게 차는 매직 같은 능력으로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왼발이라고 불렸다. 1954년 스위스에서 헝가리를 상대한 대한민국의 골키퍼 홍덕영이 공을 막으려 하니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고 회고한 것처럼 파워도 엄청났던 선수였다.
드리블과 위치 선정과 공간 지능까지 겸비한 완성형 공격수로서, 크라위프처럼 측면으로 흘러 크로스 루트까지 설계한 지능형 공격수이기도 했던 푸슈카시 페렌츠다.
나라를 잃고 다시 태어난 자리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소련군에 진압되면서 그는 나라를 떠나야 했다. 헝가리 협회는 돌아오지 않은 그를 제소했고 UEFA는 두 해 출전 금지로 답했다. 두 해 넘게 공식전을 뛰지 못했고 체중이 불었으며 서른한 살에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전성기가 끝났다는 시선이 따라붙던 시점이다.
베르나베우 회장은 그 시선에 값을 매기지 않았다. 마드리드에서의 그는 여덟 시즌 동안 242골을 넣었고, 1960년 글래스고의 결승에서 네 골을 넣어 유러피언컵 결승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남겼다. 소련군의 진압 앞에서 나라를 떠나야 했던 비극 속에서도 레알 마드리드에서 재탄생한 인간 의지의 상징이며, 디스테파노와 함께 레알 마드리드를 지구상 가장 유명한 클럽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마드리드의 그는 서른셋에서 서른일곱 사이에 라리가 득점왕을 네 번 했다. 1959-60시즌 25골, 1960-61시즌 28골, 1962-63시즌 26골, 1963-64시즌 21골이다. 1962년 암스테르담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는 SL 벤피카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고도 3-5로 졌는데, 결승에서 세 골을 넣고 준우승 메달을 받은 선수 역시 흔치 않다. 같은 해 그는 스페인 국적으로 FIFA 월드컵 무대에도 섰다. 서른다섯의 나이였고, 여덟 해 전 같은 대회의 결승에서 준우승 메달을 걸었던 사람이 이번에는 다른 나라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국제축구연맹은 2009년 FIFA 푸스카스상이라는 명칭으로 가장 아름다운 골을 정의했다. 그의 이름이 매년 한 번씩 호명되는 방식이다.
11. 라울 곤살레스 - 세컨드 스트라이커

레알 마드리드의 유년기, 청춘, 그리고 자부심. 누구보다 많은 골을 넣었고 그보다 더 많이 희생을 선택한 진짜 주장 라울 곤살레스(Raúl González Blanco; 스페인 공격수, 1977-)다.
이 이름이 흰 유니폼을 입은 경위부터가 마드리드 더비다. 라울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유소년 팀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헤수스 힐(Jesús Gil y Gil; 스페인 사업가·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회장, 1933-2004) 회장이 비용을 줄이겠다며 유소년 팀을 통째로 닫아 버리자 소년기에 갈 곳을 잃었다. 그를 받아 간 쪽이 강 건너 레알 마드리드였고, 뒤의 성장은 전부 흰 유니폼 안에서 이루어졌다.
1994년 10월 29일, 열일곱 살 124일의 그가 사라고사 원정에서 1군 데뷔를 했다. 첫 골은 일주일 뒤 베르나베우에서 나왔고 상대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였다.
레알 마드리드 통산 741경기 323골. 라리가 6회, UEFA 챔피언스 리그 3회 우승. 인터콘티넨털컵 2회 우승으로 전 세계 대장에 공식 임명되기도 했다. 레알 역사상 최초의 300골에 3챔스 클럽이며, 10번도 7번도 아닌 9.75번의 상징이다.
라울은 스타를 만들던 구조였었다. 푸슈카시처럼 날아오르진 않았지만 그 자리에 누구보다 오래 있었고, 호날두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그 유니폼을 누구보다 조용히 적셨고, 그는 늘 득점보다 팀의 승리를 먼저 골랐다.
2000년 파리에서도, 2002년 글래스고에서도 그는 결승에서 골을 넣었다. 유럽 최고 무대의 결승에서 두 번 득점한 첫 선수이며, UEFA 챔피언스 리그 통산 71골은 호날두와 메시가 올라오기 전까지 역대 1위였다.
유스팀에서 1군까지 레알에서만 성장하여 최연소 주장으로 출발해 최장기 주전이라는 타이틀을 달성한 라울 곤살레스는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를 연결한 세대의 교차점이기도 하였다. 엘 클라시코에서 캄 노우 원정을 떠나 득점 후 쉿 셀레브레이션을 날린 건 레알 팬들의 집단 정체성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갈락티코 시대에 가장 비싼 선수가 아니면서 가장 오래 남은 선수였다는 사실이 이 자리의 근거다. 지단과 피구와 호나우두가 차례로 들어오고 나가는 동안 왼쪽 앞의 그 자리를 계속 지킨 사람은 유스 출신의 주장이었다.
마침내,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이 명단은 레알 마드리드 CF의 가장 위대했던 41인의 명단이다.
카시야스가 뒤를 닫고, 마르셀루와 라모스가 양쪽 선을 오르내리며, 산타마리아와 이에로가 중앙을 나눈다. 그 앞에서 디스테파노와 모드리치가 공을 받아 방향을 정하고, 헨토가 왼쪽 끝을 밟아 폭을 만들면 푸슈카시와 라울이 안쪽으로 들어오고 호날두가 반대편에서 문전을 향해 접어 들어간다.
헨토가 마지막 시즌을 치르고 서른여덟 해가 지나서야 호날두가 이 구단에서 첫 경기를 뛰었다. 두 사람이 밟은 잔디는 같았고 사이에 낀 시간만 달랐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자리에 세 번이나 신이 섰다. 1950년대에 디스테파노가, 그 곁에서 푸슈카시가, 반세기 뒤에 호날두가 섰다. 120년 동안 골문을 여는 자리만은 이 구단이 한 번도 남에게 내주지 않았다.
그 문장은 언제나 레알 마드리드였다.마흔한 개의 이름이 한 장에 들어간 까닭이다.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후보 15인
120년이 배출한 이름은 열한 자리로 끝나지 않는다. 편집물 안의 이름을 검색 가능한 텍스트로 아래에 다시 적는다.
- 프란시스코 부요Francisco Buyo Sánchez · 골키퍼
킨타 델 부이트레 시대의 골문을 지킨 스페인 수문장이다.
- 케일로르 나바스Keylor Antonio Navas Gamboa · 골키퍼
UEFA 챔피언스 리그 3연패의 골문을 지킨 코스타리카 골키퍼다.
- 마놀로 산치스Manuel Sanchís Hontiyuelo · 센터백
한 구단에서만 열여덟 시즌을 보낸 유스 출신 주장이다.
- 호베르투 카를루스Roberto Carlos da Silva Rocha · 레프트백
왼발의 파괴력으로 풀백의 상한선을 다시 그은 브라질 수비수다.
-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José Antonio Camacho Alfaro · 라이트백
1970년대 후반부터 측면 수비의 기준을 세운 스페인 주장이다.
- 다니 카르바할Daniel Carvajal Ramos · 라이트백
2010년대 이후 오른쪽을 지킨 유스 출신 수비수다.
- 페르난도 레돈도Fernando Carlos Redondo Neri · 수비형 미드필더
중원의 우아함을 기준으로 만든 아르헨티나 미드필더다.
- 피리José Martínez Sánchez “Pirri” · 중앙 미드필더
예예 시대의 중원을 떠받친 스페인 미드필더다.
- 토니 크로스Toni Kroos · 중앙 미드필더
모드리치와 함께 열 해의 중원을 나눈 독일 미드필더다.
- 레몽 코파Raymond Kopa · 공격형 미드필더
디스테파노 곁에서 조립의 부담을 나눈 프랑스 공격수다.
- 지네딘 지단Zinédine Yazid Zidane · 공격형 미드필더
2002년 글래스고의 왼발 발리로 라 노베나를 가져온 선수다.
- 아만시오 아마로Amancio Amaro Varela · 라이트 윙
1960년대 오른쪽을 지배해 마법사로 불린 스페인 공격수다.
- 우고 산체스Hugo Sánchez Márquez · 센터 포워드
발리 슈팅의 교과서로 남은 멕시코 공격수다.
- 에밀리오 부트라게뇨Emilio Butragueño Santos · 센터 포워드
킨타 델 부이트레의 이름이 된 유스 출신 공격수다.
- 카림 벤제마Karim Hafiz Mostafa Benzema · 센터 포워드
호날두 이후 팀의 중심으로 옮겨 가 발롱도르까지 받은 프랑스 공격수다.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추가 15인
- 미겔 앙헬Miguel Ángel González Suárez · 골키퍼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의 골문을 오래 지킨 스페인 골키퍼다.
- 티보 쿠르투아Thibaut Nicolas Marc Courtois · 골키퍼
2022년 파리 결승에서 아홉 차례 선방으로 우승을 지킨 벨기에 골키퍼다.
- 하신토 킨코세스Jacinto Quincoces · 센터백
1930년대 스페인 수비의 대명사로 남은 선수다.
- 페페Képler Laveran de Lima Ferreira “Pepe” · 센터백
라모스와 짝을 이뤄 라 데시마의 최후방을 맡은 포르투갈 수비수다.
- 라파엘 바란Raphaël Varane · 센터백
스무 살에 결승 무대에 선 뒤 네 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를 함께한 프랑스 수비수다.
- 라파엘 고르디요Rafael Gordillo Vázquez · 레프트백
왕성한 활동량으로 1980년대 왼쪽을 채운 스페인 수비수다.
- 마르키토스Marcos Alonso Imaz “Marquitos” · 라이트백
유러피언컵 5연패 선수단의 오른쪽 수비를 맡았다.
- 첸도Miguel Porlán Noguera “Chendo” · 라이트백
킨타 델 부이트레와 함께 오른쪽을 지킨 유스 출신 수비수다.
- 울리 슈틸리케Ulrich Stielike · 수비형 미드필더
1980년대 중원의 균형을 맡은 독일 미드필더다.
- 샤비 알론소Xabier Alonso Olano · 수비형 미드필더
후방에서 경기의 속도를 조절한 스페인 미드필더다.
- 카제미루Carlos Henrique José Francisco Venâncio Casimiro · 수비형 미드필더
모드리치와 크로스 뒤를 혼자 감당한 브라질 미드필더다.
- 마르틴 바스케스Rafael Martín Vázquez · 공격형 미드필더
킨타 델 부이트레의 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 후아니토Juan Gómez González “Juanito” · 라이트 윙
베르나베우의 정서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남은 공격수다.
- 미첼 곤살레스José Miguel González Martín del Campo · 라이트 윙
오른쪽에서 킥과 침투를 함께 맡은 유스 출신 선수다.
- 산티야나Carlos Alonso González “Santillana” · 센터 포워드
헤더 득점의 기준으로 남은 스페인 공격수다.
기록을 확인한 곳
-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 Real Madrid C.F. 「Alfredo Di Stéfano」. 공식전 출전과 득점, 1953년 입단과 유러피언컵 5연패 기간. 통산 기록은 당대 집계 방식에 따라 자료마다 갈린다.
- 푸슈카시 페렌츠 — Real Madrid C.F. 「Ferenc Puskás」. 마드리드 시절 출전과 득점, 유러피언컵 3회 우승과 라리가 5회 우승. 한글 표기는 헝가리식 성명 순서를 따라 푸슈카시 페렌츠로 적었고, 제목에는 국내 검색 표기인 푸스카스를 썼다.
- 파코 헨토 — Real Madrid C.F. 「Francisco Gento」. 유러피언컵 6회 우승과 결승 여덟 차례 출전, 라리가 12회 우승.
- 호세 산타마리아 — Real Madrid C.F. 「José Santamaría」. 337경기 출전과 라리가 6회, 유러피언컵 4회 우승.
- 1950년대의 유러피언컵과 인터콘티넨털컵 — Real Madrid C.F. 「1951-1960」. 유러피언컵 5연패, 1960년 글래스고 결승의 7-3, 같은 해 CA 페냐롤을 꺾은 인터콘티넨털컵.
- 구단 우승 연혁과 레전드 명단 — Real Madrid C.F. 공식 레전드 목록. UEFA 챔피언스 리그 14회와 라리가 35회 우승, 구단이 레전드로 지정한 선수 명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