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 인터콘티넨털컵
1960 인터콘티넨털컵: 레알 마드리드 vs CA 페냐롤, 첫 클럽 세계 챔피언을 가린 0-0과 5-1
유러피언컵 5번 우승의 레알 마드리드와 첫 코파 데 캄페오네스 데 아메리카 우승팀 CA 페냐롤이 만난 첫 인터콘티넨털컵. 진흙탕 센테나리오의 0-0과 베르나베우 첫 10분의 3골, 승점으로 가린 첫 클럽 세계 챔피언을 경기 기록으로 읽는다.

제1회인터콘티넨털컵
Copa Intercontinental 1960
1960년 7월 3일, 몬테비데오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Estadio Centenario)의 잔디는 진흙탕이었다. 경기 몇 시간 전에 폭풍우가 쏟아졌다. 그 위에 유럽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 CF(Real Madrid Club de Fútbol)와 남미 챔피언 CA 페냐롤(Club Atlético Peñarol)이 섰다. 두 대륙의 챔피언 구단이 처음으로 공식 경기에서 만난 날이다. 대회 이름은 인터콘티넨털컵(Copa Intercontinental)이었다. [3]

유럽 챔피언과 남미 챔피언
두 대륙의 챔피언을 해마다 맞붙이자는 제안은 1958년에 나왔다. 유럽 축구 연맹(UEFA; 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의 사무총장 피에르 들로네(Pierre Delaunay)가 히우지자네이루에서 열린 남미 축구 연맹(CONMEBOL; Confederación Sudamericana de Fútbol) 총회에 이 구상을 내놓았다. 남미에는 아직 유럽의 유러피언컵 같은 대륙 클럽 대회가 없었다. 남미의 챔피언을 먼저 정해야 했고, 그렇게 생긴 대회가 1960년의 코파 데 캄페오네스 데 아메리카다. 지금의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다. 남미 쪽에는 클럽 대회가 국가대표 대회인 남미 선수권의 자리를 빼앗을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3]
이름도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것은 아니다. FIFA는 클럽 대회에 월드컵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대회는 인터콘티넨털컵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신문들은 이긴 쪽을 세계 챔피언이라고 불렀다. 트로피는 금빛 공을 두 기둥이 받치는 모양이었고, 받침에는 두 대륙의 문장이 붙었다. [3]
우승팀은 두 경기의 승점으로 가렸다. 이기면 2점, 비기면 1점이었고, 두 팀의 승점이 같으면 재경기를 치렀다. 이 규정은 이듬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1961년 페냐롤은 SL 벤피카(Sport Lisboa e Benfica)에 리스본에서 0-1로 지고 몬테비데오에서 5-0으로 이겼다. 합계는 5-1이었지만 1승 1패로 승점이 같아, 이틀 뒤 센테나리오에서 재경기를 치르고서야 우승했다. [2]
5번 우승한 레알 마드리드, 첫 남미 챔피언 페냐롤

레알 마드리드는 1959-60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다섯 번째 연속 우승을 했다. 5월 18일 글래스고 햄든 파크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7-3으로 이긴 결승에서 페렌츠 푸스카스(Puskás Ferenc; 헝가리 공격수, 1927-2006)가 네 골, 알프레도 디스테파노(Alfredo Di Stéfano; 아르헨티나 태생 스페인 공격수, 1926-2014)가 세 골을 넣었다. 그 경기는 1959-60 유러피언컵 결승 H/L에 장면별로 남겼다. 시즌 도중 감독을 맡은 미겔 무뇨스(Miguel Muñoz; 스페인 감독, 1922-1990)가 그대로 인터콘티넨털컵 벤치에 앉았다. 리그에서는 두 해 연속 FC 바르셀로나에 우승을 내준 시즌이었다. [3]
페냐롤은 그해 처음 열린 코파 데 캄페오네스 데 아메리카에서 한 번도 지지 않고 우승했다. 로베르토 스카로네(Roberto Scarone; 우루과이 감독) 감독 아래 주장 윌리엄 마르티네스(William Martínez; 우루과이 수비수)가 수비를 이끌었고, 그 대회에서 일곱 골을 넣은 에콰도르의 알베르토 스펜세르(Alberto Pedro Spencer Herrera; 에콰도르 공격수, 1937-2006)와 루이스 쿠비야(Luis Alberto Cubilla; 우루과이 공격수, 1940-2013)가 앞에 섰다. [3]
두 구단이 공식 경기에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유럽과 남미의 이름난 구단끼리는 친선 경기를 자주 치렀다. 레알 마드리드가 디스테파노를 처음 본 것도 그런 자리였다. 1952년 3월, 창단 50주년을 기념한 대회에 콜롬비아의 미요나리오스가 초청됐다. 3월 30일 새 차마르틴 경기장에서 미요나리오스가 레알 마드리드를 4-2로 이겼고, 디스테파노가 두 골을 넣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그날 구단의 역사를 바꿀 선수를 찾아냈다. [5]
결승 1차전: 센테나리오의 0-0

CA 페냐롤Club Atlético Peñarol
- 골키퍼루이스 마이다나우루과이
- 수비수산티아고 피노우루과이
- 수비수윌리엄 마르티네스 (주장)우루과이
- 미드필더발테르 아게레우루과이
- 미드필더네스토르 곤살베스우루과이
- 미드필더살바도르브라질
- 공격수루이스 쿠비야우루과이
- 공격수카를로스 리나차아르헨티나
- 공격수후안 호흐베르그우루과이
- 공격수알베르토 스펜세르에콰도르
- 공격수카를로스 보르헤스우루과이
감독로베르토 스카로네우루과이
레알 마드리드 CFReal Madrid Club de Fútbol
- 골키퍼로헬리오 도밍게스아르헨티나
- 수비수호세 산타마리아우루과이·스페인
- 수비수마르키토스스페인
- 미드필더파친스페인
- 미드필더호세 마리아 사라가 (주장)스페인
- 미드필더호세 비달스페인
- 공격수루이스 델솔스페인
- 공격수카나리우브라질
- 공격수알프레도 디스테파노아르헨티나·스페인
- 공격수페렌츠 푸스카스헝가리
- 공격수마놀린스페인
감독미겔 무뇨스스페인
7월 3일 센테나리오에는 7만 1,872명이 들어왔다. 진흙이 고인 그라운드에서 전반에는 우루과이의 공을, 후반에는 스페인의 공을 썼다. 주심은 아르헨티나의 호세 루이스 프라다우데(José Luis Praddaude)였다. 레알 마드리드는 왼쪽 윙어 파코 헨토(Francisco Gento; 스페인 윙어, 1933-2022)가 다쳐 마놀린(Manuel Bueno “Manolín”)을 세웠다. [2][3]
전반이 끝나기 전 관중석은 페널티킥을 외쳤다. 후안 호흐베르그(Juan Eduardo Hohberg; 아르헨티나 태생 우루과이 공격수, 1926-1996)가 디스테파노와 부딪혀 넘어졌지만 주심은 휘슬을 불지 않았다. 후반 초반에는 푸스카스가 수비 뒤로 빠져나갔다. 골키퍼 루이스 마이다나(Luis María Maidana; 우루과이 골키퍼)가 공을 놓쳤고, 주장 마르티네스가 골라인 앞에서 걷어 냈다. 페냐롤의 발테르 아게레(Walter Aguerre)가 찬 공은 크로스바를 스치고 나갔다. 경기는 0-0으로 끝났다. 무뇨스 감독은 이길 수도 있었던 경기라고 했고, 스카로네 감독은 무거운 그라운드에서 전반에 힘을 다 쓴 것이 후반의 발목을 잡았다고 했다. [3]

결승 2차전: 베르나베우의 첫 10분

레알 마드리드 CFReal Madrid Club de Fútbol
- 골키퍼로헬리오 도밍게스아르헨티나
- 수비수호세 산타마리아우루과이·스페인
- 수비수마르키토스스페인
- 미드필더파친스페인
- 미드필더호세 마리아 사라가 (주장)스페인
- 미드필더호세 비달스페인
- 공격수루이스 델솔스페인
- 공격수추스 에레라스페인
- 공격수알프레도 디스테파노아르헨티나·스페인
- 공격수페렌츠 푸스카스헝가리
- 공격수파코 헨토스페인
감독미겔 무뇨스스페인
CA 페냐롤Club Atlético Peñarol
- 골키퍼루이스 마이다나우루과이
- 수비수산티아고 피노우루과이
- 수비수윌리엄 마르티네스 (주장)우루과이
- 미드필더발테르 아게레우루과이
- 미드필더프란시스코 마제브스키우루과이
- 미드필더살바도르브라질
- 공격수루이스 쿠비야우루과이
- 공격수카를로스 리나차아르헨티나
- 공격수후안 호흐베르그우루과이
- 공격수알베르토 스펜세르에콰도르
- 공격수카를로스 보르헤스우루과이
감독로베르토 스카로네우루과이
두 달 뒤인 9월 4일, 비가 내리는 마드리드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Estadio Santiago Bernabéu)에서 2차전이 열렸다. 관중은 자료마다 10만 명에서 12만 5,000명으로 갈린다. 잉글랜드의 켄 애스턴(Kenneth George Aston; 잉글랜드 주심, 1915-2001)이 주심을 맡았다. 레알 마드리드는 다친 데서 돌아온 헨토를 왼쪽에, 카나리우 대신 추스 에레라(Jesús “Chus” Herrera; 스페인 윙어)를 오른쪽에 세웠다. 페냐롤은 미드필더 네스토르 곤살베스(Néstor “Tito” Gonçalves)가 편도선염으로 빠졌다. [1][2][3]
경기는 시작하자마자 기울었다. 2분, 마이다나가 늦게 나온 틈에 푸스카스가 비스듬히 찬 공이 골문으로 들어갔다. 1분 뒤에는 푸스카스의 먼 거리 슈팅이 디스테파노에게 맞고 방향을 바꿨다. 8분에는 푸스카스의 프리킥이 낮게 휘어 들어갔다. 10분이 지나기 전에 3-0이었다. 전반이 끝나기 직전 에레라가 문전에서 네 번째 골을 넣었고, 후반 54분에는 마이다나가 골문을 비우고 나온 사이 헨토가 먼 거리에서 다섯 번째 골을 넣었다. 페냐롤은 80분 스펜세르의 슈팅이 두 골대를 차례로 맞고 들어가 한 골을 만회했다. [1][2][3][4]

결승1960 인터콘티넨털컵
CA 페냐롤 vs 레알 마드리드 CF

- 결승 1차전
- 0 : 0
- 결승 2차전
- 1 : 5
- 우승
- 레알 마드리드 CF
CA 페냐롤득점 없음
결승 1차전
레알 마드리드 CF득점 없음
CA 페냐롤스펜세르 80분
결승 2차전
레알 마드리드 CF푸스카스 2분 8분, 디스테파노 3분, 에레라 40분, 헨토 54분
진흙탕 센테나리오의 0-0, 베르나베우의 5-1. 레알 마드리드는 첫 10분에 3골을 넣었다.
승점 3 대 1, 첫 클럽 세계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는 1무 1승, 승점 3점으로 첫 인터콘티넨털컵을 들었다. 주장 호세 마리아 사라가(José María Zárraga; 스페인 미드필더, 1930-2012)가 트로피를 받았다.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일곱 골을 합작한 푸스카스와 디스테파노는 남미 챔피언을 상대로도 첫 세 골을 함께 만들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날을 구단의 첫 세계 챔피언 우승으로 센다. [3][4]
FIFA가 이 대회를 공식으로 인정한 것은 57년 뒤다. 2017년 10월 FIFA 평의회는 1960년부터 2004년까지 열린 인터콘티넨털컵의 우승팀을 클럽 세계 챔피언으로 인정하기로 했고,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이 이를 발표했다. 1960년의 레알 마드리드는 그렇게 기록상 첫 클럽 세계 챔피언이 됐다. [6]
페냐롤은 이 패배를 오래 안고 있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남미 챔피언이 되어 벤피카를 재경기 끝에 이겼고, 1966년에는 레알 마드리드를 다시 만나 센테나리오와 베르나베우에서 모두 2-0으로 이겼다. [2]

참고 자료
- 「Intercontinental Club Cup 1960」, RSSSF. 두 경기의 날짜·경기장·주심, 선발 명단, 2차전 득점 시각과 전반 스코어.
- 「Peñarol in Intercontinental Cup」, RSSSF. 1960년 두 경기의 관중과 심판진, 두 팀 감독, 1961년 벤피카와의 재경기, 1966년 레알 마드리드와의 두 경기.
- 「Há 60 anos, o Real Madrid destroçava o Peñarol e celebrava o primeiro título da Copa Intercontinental」, Trivela. 1958년 제안과 대회 이름, 트로피, 1차전의 그라운드와 공, 두 경기의 장면과 결장 선수, 두 감독의 말.
- 「Se cumplen 66 años de la primera Copa Intercontinental」, Real Madrid CF. 2차전 첫 10분의 세 골과 디스테파노의 골 장면, 구단 기록의 득점 시각.
- 「Se cumplen 74 años del primer partido de Di Stéfano en el Bernabéu」, Real Madrid CF. 1952년 창단 50주년 대회와 미요나리오스의 4-2 승리.
- 「FIFA may replace Confederations Cup with new club competition」, Reuters(SBS 게재), 2017년 10월 28일. 인터콘티넨털컵 우승팀의 클럽 세계 챔피언 인정.
2차전 득점 시각은 RSSSF와 삥이FC 도판을 따랐다(2·3·8·40·54·80분). 레알 마드리드 구단 기록은 3·4·9·44·51·66분으로 적는다. 2차전 관중은 RSSSF 두 페이지가 10만 명과 12만 5,000명으로 다르게 적는다. 구단 문장은 1960년 무렵의 도안이다.
댓글
광고·욕설·도배·연락처 홍보는 지웁니다. 링크가 들어간 댓글은 확인한 뒤 공개됩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 주세요.
댓글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잠시 뒤 다시 열어 주세요.
운영자 로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