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페인 왕국
Reino de España라리가
Primera División
세비야 FC
Sevilla Fútbol Club네르비온 · 라리가 1회 · 코파 델 레이 5회 · UEFA컵과 UEFA 유로파 리그 7회
UEFA 유로파 리그와 그 전신 UEFA컵을 합쳐 일곱 번 들어 올려 유로파의 제왕이라는 이름을 얻은 구단이 있다. 피스후안의 뜨거운 심장, 안달루시아의 영광을 함께 걸어온 세비야의 전설 열한 명과 후보 열다섯, 스물여섯 개의 이름을 불러 본다.
핏빛 환희, 안달루시아의 심장
세비야 FC. 로스 히스팔렌세스(Los Hispalenses; 세비야의 로마 시대 이름 히스팔리스에서 온 구단 별칭), 그들은 항상 붉게 타올랐다. 최초의 슈퍼스타 캄파날 1세부터 훗날 자라난 수비수 캄파날 2세까지.
영광의 정점에서든, 패배의 나락에서든 피스후안 경기장의 박동은 스페인 남부의 햇살과 같은 뜨거움으로 오늘도 팬들의 심장을 두드린다.
라리가의 정점은 늘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 집중되었지만, 언제나 중원의 투혼과 측면의 비명을 통해 세비야는 이변의 주인공이 아닌 중심의 전설로 기억된다.
그 불균형은 트로피 진열장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세비야가 가진 라리가 트로피는 1945-46시즌의 하나뿐이다. 대신 유럽으로 나가면 사정이 뒤집힌다. 2006년 에인트호번에서 2023년 부다페스트까지 UEFA컵과 UEFA 유로파 리그 결승에 일곱 번 올라 일곱 번을 모두 이겼고, 이 대회 최다 우승 기록이 이 구단의 것이다. 리그에서 한 번 우승한 구단이 유럽에서는 일곱 번을 이겼다.
이 콘텐츠는 세비야 FC라는 이름 아래, 불꽃과 승부를 품어낸 스물여섯 명의 선수들을 기억하고자 하는 서사다.
선정 전술: 양 날개로 여는 4-4-2
열한 명 가운데 일곱이 UEFA컵이나 UEFA 유로파 리그 트로피를 들었다. 나머지 넷 가운데 둘은 구단의 단 한 번뿐인 라리가 우승을 함께 들었고, 남은 둘은 세비야에서 우승 트로피 없이 400경기 넘게 뛰었다. 유럽의 밤과 그 밤이 오기 전의 긴 시간이 한 명단에 함께 들어 있다. 골문부터 한 자리씩 부르고, 열한 명이 함께 선 대형은 글 끝에서 펼친다.
골문에는 팔로프가 선다. 그 앞 네 명은 히메네스와 아우베스가 양쪽을 잡고 하비 나바로와 마르셀리노 캄파날이 가운데를 나눈다. 왼쪽의 히메네스는 자리를 지키고 오른쪽의 아우베스는 올라가므로 수비선은 늘 오른쪽으로 기운다.
중원은 알코네로가 한 칸 뒤에서 공을 받고 라키티치가 한 칸 앞에서 방향을 정한다. 바깥은 왼쪽에 레예스, 오른쪽에 헤수스 나바스다. 오른쪽의 아우베스와 나바스는 2000년대 중반 세비야에서 실제로 같은 측면을 나눠 쓴 짝이라, 이 대형에서 가장 오래 손발을 맞춘 조합이 오른쪽에 있다.
최전방에는 기예르모 캄파날과 카누테가 선다. 한 명은 1930년대 네르비온의 공격을 이끈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이고, 한 명은 2000년대 두 번의 유럽 결승에서 모두 골을 넣은 192cm의 공격수다. 양 날개가 올린 공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높이에서 받는다.
1. 안드레스 팔로프 - 골키퍼

피스후안의 11번가, 강철처럼 뜨거운 골대 뒤에서 그는 늘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패배 앞에서도, 승리 뒤에서도 그는 단지 남아 있는 자로서 사명을 품고 있었다.
2005년, 발렌시아 CF에서 세비야 FC로 이적을 택한 서른한 살의 백업 골키퍼 안드레스 팔로프(Andrés Palop Cervera; 스페인 골키퍼, 1973-)를 기대하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으나, 그는 한 도시의 믿음과 찬양을 모두 이끌어낸 사내가 되었다. 메스타야에서 그는 발렌시아 역대 베스트 11의 골키퍼 산티아고 카니사레스(José Santiago Cañizares Ruiz; 스페인 골키퍼, 1969-) 뒤에서 오래 기다린 두 번째 골키퍼였다.
2006-07시즌 UEFA컵, 전설의 시작. 기억하라. 골키퍼가 제 골문을 비우고 상대 골문 앞으로 달려 나간 그날의 저녁을.
2007년 3월 15일, UEFA컵 16강 2차전 샤흐타르 도네츠크 원정. 세비야는 1-2로 뒤진 채 탈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추가시간 94분 코너킥에 팔로프가 상대 문전까지 올라가 머리로 동점골을 넣었다. 연장전에 교체로 들어간 에르네스토 체반톤(Ernesto Javier Chevantón Espinosa; 우루과이 공격수, 1980-)이 결승골을 넣어 세비야가 3-2로 올라갔다.[1] 이는 전술이 아니었고, 전술로 환원될 수 없는 세비야의 광기였고, 기적이었다.
그는 골문 앞을 떠나 상대 골문으로 질주했고, 자신의 심장을 득점으로 바꿔 팀을 구해냈다. 그 대회의 마지막 밤은 두 달 뒤 글래스고 햄던 파크에서 왔다. RCD 에스파뇰과 연장까지 2-2로 비긴 결승 승부차기에서 그는 세 번을 막았고, 결승 최우수 선수로 뽑혔다.[2] 신들린 선방을 연이어 보여준 그 시즌 이후 팬들은 그를 산 팔로프(San Palop; 성인 팔로프)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2. 마르셀리노 캄파날 - 센터백

그를 부를 때, 사람들은 먼저 수비수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는다. 그는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벽이기보다 세비야의 심장 박동에 맞춰 뛰었던 선량한 거인에 가까웠다.
1950년대 스페인 왕국의 유일한 미래라고 불렸던 마르셀리노 캄파날(Marcelino Vaquero González del Río; 스페인 수비수, 1932-2020)은 빛을 지닌 수비수, 희망을 걸 수 있는 청년으로 떠올랐다. 당시 스페인은 여전히 전후(戰後)의 어둠을 통과하고 있었고, 전쟁과 검열, 침묵 속을 걷고 있었다. 그 시기에 그는 스물세 살의 나이로 스페인 대표팀 주장 완장을 찼고, 1954년에는 스페인 올해의 스포츠인으로 뽑혔다.[3]
1912년 아빌레스 출생. 공격수. 1929-1946년 세비야.
1932년 히혼 출생. 수비수. 1950-1966년 세비야.
두 캄파날은 삼촌과 조카다. 마르셀리노는 열여섯 살에 고향 아스투리아스를 떠나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를 거쳐, 삼촌 기예르모가 이미 이름을 떨치고 있던 세비야로 왔다. 당시 신문은 같은 이름의 두 사람을 구분하려고 삼촌을 캄파날 1세, 조카를 캄파날 2세로 적었다.[3] 세비야는 오직 기예르모 캄파날을 GOAT로서 내미는데, 조카 마르셀리노 역시 그 이름을 이어받을 만한 선수로 팬들에게 캄파날 2세(Campanal II)라고 기려지고 있다.
열여섯 해를 세비야에서 보냈다. 1956년 첫 발롱도르 투표에서 1점을 받아 21위에 이름을 올렸고, 세비야가 라리가 준우승 자격으로 처음 나간 1957-58시즌 유러피언컵에서는 1회전에서 SL 벤피카를 넘어 8강까지 갔다. 8강 상대는 알프레도 디스테파노(Alfredo Stéfano Di Stéfano Laulhé; 아르헨티나 태생 스페인 공격수, 1926-2014)의 레알 마드리드였고, 원정 첫 경기 0-8 뒤 홈에서 2-2로 비겼다.[4]
레알 마드리드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FC 바르셀로나가 그를 원했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고, 세비야에서 끝내 우승 트로피를 들지 못했다. 라리가 준우승과 두 번의 코파 델 레이 결승 패배가 그의 열여섯 해에 남은 가장 높은 자리다. 그런데도 그는 캄파날이라는 이름만으로 팬들에게 세비야 수비의 형상이 되었고, 그의 모든 슬라이딩 태클은 책임의 발현이었다.
3. 하비 나바로 - 센터백

그의 이름을 부를 때, 팬들은 언제나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꺼낸다. 존경과 아픔.
하비 나바로(Francisco Javier Vicente Navarro; 스페인 수비수, 1974-)는 발렌시아 유소년 출신으로 1군 자리를 얻지 못해 엘체 CF로 옮겼다가, 막 1부로 돌아온 세비야 FC에 2001년 입단했다.[5] 그리고 팀의 주장이자 영혼으로 성장했는데, 특히 2006년과 2007년 UEFA컵 2연패를 차지하고 2007년 코파 델 레이 우승까지 차지할 때 핵심 중의 핵심이 되었던 센터백이었다.
2006년 5월 10일 에인트호번에서 열린 UEFA컵 결승에서 세비야는 잉글랜드의 미들즈브러 FC를 4-0으로 꺾었다. 공식 최우수 선수는 두 골을 넣은 엔초 마레스카(Enzo Maresca; 이탈리아 미드필더, 1980-)였지만, 그날 수비를 이끌고 경기를 지배한 사람을 거론하라면 하비 나바로를 빼놓을 수 없다. 네 번째 골은 카누테가 넣었다.[6]
부상을 극복해냈던 수비수. 토트넘 홋스퍼의 레들리 킹(Ledley Brenton King; 잉글랜드 수비수, 1980-)과 마찬가지로 고질적인 부상에 시달렸고, 의사는 그에게 축구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악몽과도 같은 진단을 내렸다.
무릎은 반복적으로 찢겼고, 경기마다 통증을 안고 뛰었다고 그는 설명했으나 그 시절 라리가를 보면 하비 나바로는 매번 피스후안의 심장으로 그라운드를 나서고는 했었다. 오른쪽 무릎은 끝내 회복되지 않았고, 그는 2009년 서른다섯에 축구화를 벗었다.[5]
때문에 그의 태클은 자기 부정의 고백이었고, 리더십은 피로 쓴 명령문과 같았다. 모든 세비야 FC 팬들이 그를 회고할 때 캄파날이 전설을 열었고, 나바로가 계승했다고 언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
4. 마놀로 히메네스 - 레프트백

카드 오타 위 카드의 출생일 1974년 2월 6일과 키 182cm는 같은 수비진의 하비 나바로의 값이 잘못 들어간 것이다. 마놀로 히메네스는 1964년 1월 26일 세비야 근교 아라알에서 태어났다.
선수와 감독으로 세비야 FC의 전설이 된 사내 마놀로 히메네스(Manuel Jiménez Jiménez; 스페인 수비수·축구 감독, 1964-). 수비수, 사령관, 그리고 세비야 철학의 원형으로 불리는 선수다. 세비야가 낳은 진짜 축구적 사유의 아이콘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감독으로서보다 왼쪽에서의 모든 순간이 더 깊었던 수비수였기도 하다.
막는다는 개념을 철학적으로 재해석한 플레이 스타일이 유명한데, 1984년부터 1997년까지 세비야 FC에서만 뛰며 상대의 패턴을 미리 파악해서 차단하고, 상대가 발을 움직이기 이전에 태클을 시도하는 모습은 상대 공격수의 생각 자체를 원천 차단하는 것과 비슷해 보였었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 한 시즌만 레알 하엔에서 보냈다.[7]
라리가, 코파 델 레이, 유러피언컵,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UEFA컵 등 굵직한 타이틀 하나 없지만 침체기에 둘러싸인 세비야 FC의 모든 순간을 지탱한 수비수였으며, 때문에 총 413경기에 나서 세비야 FC 역대 최다 출전 4위에 본인의 이름을 마킹하고 있기도 하다.
2007년 10월, 후안데 라모스(Juan de la Cruz Ramos Cano; 스페인 축구 감독, 1954-) 감독이 토트넘 홋스퍼로 떠나자 그 자리를 이어받은 사람이 2군을 맡고 있던 히메네스였다. 회장 호세 마리아 델니도(José María del Nido Benavente; 세비야 FC 회장)는 오래 맡길 감독이라는 뜻으로 그를 아라알의 벵거(el Wenger de Arahal)라고 불렀다.[7] 카드에 적힌 파파치스(Papatzis)는 훗날 AEK 아테네를 맡았을 때 그리스 팬들이 붙인 별명이다. 전술의 대가라는 이름은 세비야를 떠난 뒤에도 그를 따라다녔다.
5. 다니 아우베스 - 라이트백

대부분의 팬들은 다니 아우베스(Daniel Alves da Silva; 브라질 수비수, 1983-)를 두고 FC 바르셀로나 시절의 세련된 전술의 부속품, 혹은 메시의 파트너, 혹은 세 얼간이 및 MSN의 조력자로만 기억한다.
더 나아가면 유벤투스 FC에서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했을 때, PSG에서 말년을 태웠을 때, 상파울루 FC에서 상파울루주 주립 리그(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 우승을 차지하던 2021년만을 기억한다. 하지만 다니 아우베스는 세비야 FC에서 날 것의 광기를 품었었고, 2003년부터 2008년까지의 활약으로 유럽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리던 만큼 혁신적인 수비수였다.
2003년 1월, 브라질 바이아에서 임대로 건너온 열아홉 살의 청년은 스페인의 기후보다 더 뜨거운 성질을 갖고 있었고, 그 열기는 경기장 안에서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았었다. 그해 여름 FIFA U-20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이끌고 대회 세 번째 선수로 꼽히자 세비야는 그를 완전히 사들였다.[8]
세비야에서 측면 수비수라는 틀을 부숴버린 다니 아우베스는 밀란의 카푸, 인테르의 마이콩의 위에 서지 못했으나 충분히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했었다. 스페인에서는 오른쪽 지역 자체를 다니 존이라고 명명하면서 그의 존재감을 인정했는데, 2000년대 다니 아우베스의 영향력은 드리블, 패스, 크로스 능력은 물론 중앙 미드필더 역할까지 넘나드는 전술적 탈경계자로 군림하기도 했었다. 타란툴라(The Tarantula)라는 별명은 상대 측면을 여러 갈래로 휘감던 그 움직임에서 왔다.
세비야 시절의 다니는 지금처럼 세련된 유형은 아니었으나 공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찼고, 표정은 매서웠으며, 심판과 부딪히는 일이 잦았던 말썽꾸러기이기도 하였었다. 2008년 여름 바르셀로나가 그를 데려가며 낸 이적료는 3250만 유로였고, 당시 기준 수비수 역대 세 번째 금액이었다.[8]
6. 페드로 알코네로 - 수비형 미드필더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사도 적고, 영상은 더욱 드물다. 그러나 1945-46시즌 라리가 우승이라는 세비야 역사상 단 한 번의 정규리그 정상을 논할 때, 그의 이름은 반드시 거론돼야 한다.
페드로 알코네로(Pedro Alconero Arzagoitia; 스페인 미드필더, 1919년 출생). 비스카야의 바라칼도에서 태어난 이 바스크 출신의 미드필더는 1941년부터 1952년까지 세비야에 몸담으며 약 290경기를 소화했고, 중원의 사령관으로 군림했었다. 1941년부터 아홉 시즌 동안 리그 경기를 세 번밖에 거르지 않았고, 라리가에서만 272경기를 뛰었다.[9]
그는 오늘날을 기준으로 설명할 때 클린한 수비형이면서 빌드업을 시작하는 후방 조율자였는데, 이탈리아식 표현으로는 레지스타(Regista; 뒤에서 경기를 조율하는 미드필더), 영어식 표현으로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Deep-lying playmaker) 정도면 적당할 듯싶다.
1945-46시즌은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아틀레틱 클루브의 틈바구니 안에서 세비야 FC가 우승을 차지했던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는데, 세비야는 알코네로를 중심으로 중원을 장악했고, 경기를 잠그고, 유리하게 풀고, 경합을 통제했다. 우승은 마지막 날에 정해졌다. 1946년 3월 31일 바르셀로나의 레스 코르츠(Camp de Les Corts; FC 바르셀로나의 옛 홈 경기장)에서 승점 1점 차 2위 바르셀로나를 만났고, 비기기만 해도 되는 경기에서 7분 만에 후안 아라우호(Juan Araujo Pino; 스페인 공격수)가 선제골을 넣어 1-1로 버텼다.[10] 그 시즌은 기예르모 캄파날이 세비야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이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요한 네이스컨스나 빌럼 판하네험과 같은 존재라면 바로 이 선수가 아닐지.
7. 이반 라키티치 - 중앙 미드필더

세비야의 건축가, 바르사의 엔진, 크로아티아의 지휘자. 이반 라키티치(Ivan Rakitić; 크로아티아 미드필더, 1988-)의 축구 지능과 기술은 전술가의 것이었고, 결국 국가대표 동료 루카 모드리치, 마르첼로 브로조비치, 마리오 파샬리치 등과 함께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를 호령하는 중원의 핵으로 성장했다.
라키티치는 스위스 바젤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독일의 FC 샬케 04에서 성장했으나 2011년 1월 세비야 FC에 입단하던 순간부터 유럽 정상급 미드필더로 군림하기 시작했었다.
중원을 넘나드는 조율. 2선에서의 창의적인 움직임. 수비 전환 시 인지 속도와 후방 빌드업. 이 모든 것이 세비야 시스템 속에서 성립되었는데, 때문에 2013-14시즌에는 UEFA 유로파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2014년 5월 14일 토리노의 유벤투스 스타디움, SL 벤피카와의 결승. 연장까지 0-0이던 경기를 세비야가 승부차기 4-2로 가져갔고, 주장 완장을 찬 라키티치가 결승 최우수 선수로 뽑혔다.[11] 그해 여름 그는 바르셀로나로 떠났고, 2020년 가을 돌아와 2023년 부다페스트에서 두 번째 UEFA 유로파 리그 트로피를 들었다.
바르셀로나의 2014-15시즌 트레블과 세비야의 UEFA 유로파 리그 2회 우승, 조국 크로아티아가 2018 FIFA 월드컵 결승까지 갈 수 있었던 이유에는 라키티치의 존재감이 매우 컸다.
8.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 - 레프트 윙

그는 피스후안이 길러낸 가장 섬세하고, 폭발적인 청춘이었다. 왼쪽 측면에서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José Antonio Reyes Calderón; 스페인 공격수, 1983-2019)가 볼을 받고 출발하면 팬들은 일어서기 시작한다.
그 시절, 우리는 축구를 볼 때 레예스의 드리블이 시작되면 지금 무언가 일어난다는 감정을 다들 품고 있었다. 마치 프리미어 리그의 에덴 아자르나 알렉시스 산체스가 그러한 존재감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레예스는 세비야 근교 우트레라에서 태어난 세비야 유스 출신으로, 1999-2000시즌 레알 사라고사를 상대로 만 16세에 1군 무대에 데뷔한 천재였으며, 이후 2004년까지 구단의 희망이자 이정표로 활약했었다.[12] 진주(la Perla)라는 별명도 그 고향에서 따라왔다.
눈을 의심할 정도의 스피드. 수비 라인을 찢어발기는 전진성. 빠른 볼 터치, 유려한 드리블. 골이나 도움을 무조건 생산하고 내려오는 관성.
위 네 가지 키워드는 아스널 FC 이적의 신호탄이 되었다. 2004년 1월 아스널로 떠나 2003-04시즌 프리미어 리그 무패 우승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아르센 벵거 감독의 극찬을 이끌어내기도 했었다. 그리고 2012년 겨울 피스후안으로 돌아와 UEFA 유로파 리그 트로피를 연달아 들었다.
2019년 6월 1일, 교통사고로 인해 만 35세의 나이에 세상과 안녕을 말한 호세 레예스를 두고 세비야 팬들은 장미꽃 대신 스파이크를 놓았다. 그에겐 경기보다 뛴 기억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축구선수가 아니라 속도를 품은 슬픔이었지. 세비야의 가장 아름다운 선수.
루이스 파비아누(Luís Fabiano Clemente; 브라질 공격수, 1980-)가 레예스를 두고
그는 아직도 세비야 역사상 가장 뜨겁고, 섹시했던 청춘으로 회자되고 있다.
9. 헤수스 나바스 - 라이트 윙

카드 오타 위 카드의 출생 연도 1983년은 1985년의 오기다. 헤수스 나바스는 1985년 11월 21일 로스 팔라시오스 이 비야프랑카에서 태어났다.
2003년부터 2013년. 2017년부터 2024년. 무려 705경기에 출전하며 UEFA컵과 UEFA 유로파 리그를 네 번 들어 올렸고, 서른일곱의 나이에 UEFA 유로파 리그 올해의 선수로 뽑혔던 라이트 윙.[13]
그는 한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이탈리아의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Claudio Marchisio; 이탈리아 미드필더, 1986-)와 같이 미친 듯이 잘생긴 외모로 유명한데, 잘생겼다라는 말로는 부족하고 빛이 얼굴을 포기하지 못한 형태에 가까웠고, 그 아름다움이 절제된 속도와 팀을 향한 충성으로 구체화된 존재 같았다.
헤수스 나바스(Jesús Navas González; 스페인 윙어·측면 수비수, 1985-)는 172cm, 60kg이라는 작은 피지컬을 지녔으나 빠르고, 날카로웠으며, 상대 수비를 벗겨내는 능력만큼은 나이를 들어서도 유지했던 전형적인 스패니시 축구 선수였다.
| 대회 | 경기 |
|---|---|
| 라리가 | 516 |
| 코파 델 레이 | 68 |
| UEFA 유로파 리그·UEFA컵 | 65 |
| UEFA 챔피언스 리그 | 47 |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 5 |
| UEFA 슈퍼컵 | 4 |
| 합계, 구단 역대 1위 | 705 |
세비야 팬들은 그를 엘 두엔데 데 로스 팔라시오스(El Duende de Los Palacios; 로스 팔라시오스의 요정)라고 부른다. 그가 나고 자란 세비야 근교 마을의 이름이 별명에 그대로 들어 있다. 남미, 특히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팬덤 사이에서도 그의 얼굴을 두고 그리스 조각상, 유니폼을 입은 성모마리아 등으로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고 카더라.
마지막 경기는 2024년 12월 22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레알 마드리드전이었다. 세비야에서 들어 올린 트로피는 UEFA 유로파 리그 넷에 코파 델 레이 둘, UEFA 슈퍼컵과 수페르코파 하나씩으로 구단 선수 가운데 가장 많고, 스페인 대표팀에서는 FIFA 월드컵과 두 번의 UEFA 유로, UEFA 네이션스 리그를 모두 가졌다.[13]
10. 기예르모 캄파날 - 센터 포워드

세비야 FC의 기원. 라리가 최초의 위대한 전사. 레알의 디스테파노와 호날두, 바르사의 메시, 빌바오의 텔모 사라, 알레띠의 아라고네스, 발렌시아의 문도. 그리고 세비야는 캄파날.
팀이 없던 시절에 팀을 만들고,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스스로 신화가 된 공격수 기예르모 캄파날(Guillermo González del Río García; 스페인 공격수, 1912-1984). 세비야 FC라는 지역의 스포츠 클럽에서 첫 번째 슈퍼스타로 정의되는 공격수다.
1929-30시즌, 열일곱 살에 히혼을 떠나 세비야 입단.
1933-34시즌 세군다 디비시온 17경기 28골, 팀 득점의 절반으로 1부 승격.
1934 FIFA 월드컵 스페인 대표, A매치 3경기 2골.
코파 델 레이 우승 1935년과 1939년.
1945-46시즌 라리가 우승, 세비야에서 뛴 마지막 시즌.
통산 310경기 257골, 세비야 역대 최다 득점자.
스투카 공격진의 한가운데. 구단의 첫 코파 델 레이 둘과 첫 라리가가 모두 그의 시대에 왔다.이 숫자들은 그가 세비야에 남긴 존재의 빛이기도 하다. 득점은 집계 방식에 따라 더 많게는 공식전 269골까지 잡히는데, 어느 집계를 따르든 206골의 후안 아르사를 앞선 구단 1위다.[14] 세비야라는 지역에서 기예르모는 종교를 의미한 사제도, 신자도 아닌 신(神)으로서 추앙되고 있다.
당시 스페인 축구는 거칠고 미완의 시대였고, 기술보다 힘이 앞서던 전장에서 그는 축구에 리듬을 입히고, 생각을 불어넣었고, 무게를 품은 터치로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어내곤 하였다.
기예르모 캄파날은 당시 스트라이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전술적 사고력과 유연함을 가졌었는데, 그가 이끈 로페스, 페피요, 라이문도, 베로칼과의 다섯 공격진은 급강하 폭격기의 이름을 따 스투카(Stuka; 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 급강하 폭격기)라고 불렸다.[14] 네르비온 경기장(Estadio de Nervión; 1958년까지 쓴 세비야의 홈 경기장)에서 그는 축구라는 단어에 운명을 입힌 자로서 추앙되고는 했었다. 은퇴 뒤에는 세 차례 세비야의 감독을 맡았다. 조카 마르셀리노가 세비야 유니폼을 처음 입은 1950년, 벤치에 앉아 있던 감독도 그였다.
11. 프레데리크 카누테 - 센터 포워드

카드 오타 위 카드의 UEFA 유로파 리그 우승 4회는 헤수스 나바스 카드의 값이 잘못 들어간 것이다. 카누테가 세비야에서 든 트로피는 2005-06시즌과 2006-07시즌의 UEFA컵 두 개다.
말리의 빛. 프랑스 리옹 근교에서 태어나 프랑스 유소년 시스템에서 성장했지만 말리를 선택한 프레데리크 카누테(Frédéric Oumar Kanouté; 말리 공격수, 1977-)는 세비야의 유럽 도약기 중심이자, 전술의 정점에서 늘 침묵의 해결사로 불리던 공격수였다.
세비야 FC가 UEFA컵 2연패를 달성하던 시기, 피스후안의 골망을 가장 자주 흔든 사내는 루이스 파비아누와 함께 프레데리크 카누테였는데, 2005년부터 2012년까지 라리가, 코파 델 레이, UEFA컵에서 289경기 136골 25도움을 기록해 내며 팀의 간판스타로 존재했었다. 136골은 구단 역대 4위다.[14] 2006년 에인트호번과 2007년 글래스고, 두 번의 UEFA컵 결승에서 모두 골을 넣었다.[2][6]
192cm라는 압도적인 피지컬을 바탕으로 스페인을 넘어 유럽의 최전방을 지배했던 카누테는 2007년 발롱도르 11위에 올랐으며, 그해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을 만큼 커리어 하이를 경신하였었다.[15]
그의 플레이엔 침묵의 미학이 있었고, 공을 다루는 발끝엔 기도하듯 절제된 공존의 기술이 있었다. 달리는 망치보다 움직이는 설계자에 가까운 공격수였다.
2009년 1월 7일, 가자 지구 폭격이 이어지던 때 그는 코파 델 레이 데포르티보 라코루냐전에서 골을 넣은 뒤 팔레스타인이라고 적힌 셔츠를 내보였다. 스페인 왕립 축구 연맹 경기위원회는 모든 메시지 노출을 금한 규정을 들어 그에게 3000유로의 벌금을 매겼고, 주심은 그 자리에서 경고를 줬다.[15]
제가 축구를 하는 이유요?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프레데리크 카누테
마침내,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이 명단은 세비야 FC의 가장 위대했던 26인의 명단이다.
팔로프가 뒤를 닫고, 마르셀리노 캄파날과 하비 나바로가 중앙을 나눈다. 왼쪽의 히메네스가 자리를 지키는 사이 오른쪽의 아우베스가 나바스를 넘어 올라가고, 알코네로가 받아 라키티치에게 넘긴 공이 양 날개로 벌어진다. 레예스가 왼쪽에서 안으로 치고 들어오면 카누테가 높이로, 기예르모 캄파날이 발끝으로 마무리를 나눈다.
두 캄파날이 한 명단의 앞과 뒤에 서 있다. 삼촌은 최전방에서 구단의 첫 트로피들을 가져왔고, 조카는 열여섯 해 동안 트로피 없이 수비선을 지켰다. 1948년 코파 델 레이 이후 세비야가 다시 큰 트로피를 든 것은 2006년 에인트호번에서였고, 그 쉰여덟 해를 가장 오래 지킨 두 사람이 마르셀리노 캄파날과 마놀로 히메네스다.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후보 15인
피스후안의 이름은 열한 자리에서 끝나지 않는다. 구단 역대 득점 2위 후안 아르사와, 1946년 우승을 확정한 날 선제골을 넣은 후안 아라우호도 이 열다섯 안에 있다.
- 호세 마리아 부스토José María Busto Llano · 골키퍼
피스후안의 구시대 골문을 지킨 단단한 이름이다.
- 야신 부누Yassine Bounou · 골키퍼
팬들의 심장을 붙잡은 21세기의 신화적 선방이다.
- 안토니오 알바레스Antonio Álvarez Giráldez · 센터백
수비수이자, 훗날 팀을 이끈 지휘자다.
- 파블로 블랑코Pablo José Blanco Blanco · 센터백
세비야 유소년 철학의 뿌리를 만든 중심 수비수다.
- 페르난도 기야몬Fernando Guillamón Rodríguez · 라이트백
라이트백 계보의 첫 선을 그었던 사내다.
- 페르난도 나바로Fernando Navarro Corbacho · 레프트백
왼쪽 라인을 묵묵히 지켜낸 안정의 풀백이다.
- 엔리케 로라Enrique Lora Millán · 중앙 미드필더
중원에서 그라운드를 수평으로 깔아낸 리듬이다.
- 프란시스코 로페스Francisco Javier López Alfaro · 중앙 미드필더
1980년대 세비야 미드필더의 품격과 땀방울이다.
- 라파 파스Rafael Paz Marín · 공격형 미드필더
측면과 중앙을 넘나들던 지능형 창의의 상징이다.
- 에베르 바네가Éver Maximiliano David Banega · 공격형 미드필더
불안정 속에서 천재성을 쏟아낸 남미 마에스트로다.
- 후안 아르사Juan Arza Iñigo · 센터 포워드
1940-50년대 세비야의 공격을 이끌던 전설의 10번이다.
- 후안 아라우호Juan Araujo Pino · 센터 포워드
골망보다 빠르게 기억되는, 전후(戰後) 전방의 불꽃이다.
- 베르나르도 아코스타Bernardo Acosta Miranda · 센터 포워드
파라과이산 순도 높은 마무리의 대명사다.
- 다보르 슈케르Davor Šuker · 센터 포워드
짧았지만 강렬했던, 유럽 최고 공격수의 잔향이다.
- 루이스 파비아누Luís Fabiano Clemente · 센터 포워드
유로파 전성기 피스후안에 울려 퍼진 골 소리의 주인. 그 시절 FIFA 온라인 개쎈캐다.
기록을 확인한 곳
- 팔로프의 샤흐타르전 헤더 — UEFA.com 「Sevilla No1 Palop recalls Shakhtar header」. 2006-07시즌 UEFA컵 16강 2차전, 1-2로 뒤진 추가시간 94분 코너킥 헤더와 연장 체반톤의 결승골.
- 2007년 UEFA컵 결승 — 영어 위키백과 「2007 UEFA Cup final」. 햄던 파크, 에스파뇰과 2-2 뒤 승부차기 3-1, 팔로프의 세 차례 선방과 결승 최우수 선수, 카누테의 연장 득점.
- 두 캄파날 — 스페인어 위키백과 「Guillermo Campanal」, 영어 위키백과 「Marcelino Campanal」. 마르셀리노가 기예르모의 조카라는 관계와 1세·2세 호칭의 유래, 1950-1966년 세비야, 스페인 대표 11경기와 스물세 살의 주장, 1954년 스페인 올해의 스포츠인.
- 1957-58시즌 유러피언컵 8강 — UEFA.com 「Real Madrid 8-0 Sevilla」. 원정 0-8과 홈 2-2. 1956년 발롱도르 21위는 삥이FC 시상관의 투표 기록과 같다.
- 하비 나바로 — 영어 위키백과 「Javi Navarro」, Libertad Digital 「Javi Navarro cuelga las botas」. 엘체를 거친 2001년 입단, 주장, 2009년 무릎 부상에 따른 은퇴.
- 2006년 UEFA컵 결승 — 영어 위키백과 「2006 UEFA Cup final」. 에인트호번, 미들즈브러전 4-0, 마레스카의 두 골과 결승 최우수 선수, 카누테의 네 번째 골.
- 마놀로 히메네스 — 스페인어 위키백과 「Manuel Jiménez Jiménez」. 1964년 1월 26일 아라알 출생, 1984-1997년 세비야와 1997-98시즌 레알 하엔, 공식전 413경기 구단 4위, 스페인 대표 15경기와 1990 FIFA 월드컵, 2007년 10월부터 2010년 3월까지 세비야 감독, 아라알의 벵거라는 델니도 회장의 표현과 AEK 아테네 시절의 파파치스.
- 다니 아우베스 — 영어 위키백과 「Dani Alves」. 2002-03시즌 바이아에서 임대, 2003 FIFA U-20 월드컵 뒤 완전 이적, 2008년 바르셀로나 이적료 3250만 유로, 타란툴라라는 별명.
- 페드로 알코네로 — 스페인어 위키백과 「Pedro Alconero」. 1919년 9월 3일 바라칼도 출생, 1941년부터 아홉 시즌 동안 리그 결장 세 경기, 라리가 272경기 6골.
- 1945-46시즌 라리가 우승 — Sevilla FC 「1-1: FC Barcelona-Sevilla (Liga)」. 1946년 3월 31일 레스 코르츠, 마지막 날 1-1, 아라우호의 7분 선제골.
- 2014년 UEFA 유로파 리그 결승 — 영어 위키백과 「2014 UEFA Europa League final」. 토리노, 벤피카전 0-0 뒤 승부차기 4-2, 주장 라키티치의 결승 최우수 선수.
- 호세 안토니오 레예스 — 영어 위키백과 「José Antonio Reyes」. 우트레라 출생, 1999-2000시즌 사라고사전 1군 데뷔, 2004년 1월 아스널 이적, 2019년 6월 1일 교통사고.
- 헤수스 나바스 — Sevilla FC 「Los 705 partidos de Jesús Navas」, UEFA.com 「Jesús Navas named 2022/23 UEFA Europa League Player of the Season」. 대회별 705경기, 2022-23시즌 올해의 선수(37세), 2024년 12월 22일 은퇴.
- 세비야 FC 역대 득점 — 스페인어 위키백과 「Máximos goleadores del Sevilla Fútbol Club」, Sevilla FC 「Guillermo Campanal」. 기예르모 캄파날 1위(공식전 331경기 269골), 후안 아르사 2위(206골), 카누테 4위(136골), 스투카 공격진. 기예르모의 통산 득점은 집계에 따라 214골에서 269골까지 갈린다.
- 카누테 — Goal 「Sevilla's Kanouté fined for Palestine message」, 영어 위키백과 「2007 Ballon d'Or」. 2009년 1월 데포르티보전 셔츠에 매겨진 3000유로 벌금과 2007년 발롱도르 11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