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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문장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Manchester United Football Club
MANCHESTER UNITED FOOTBALL CLUB · THE RED DEVILS 1878-2026

올드 트래퍼드 · 리그 우승 20회 · FA컵 13회 ·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3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대 최고의 전설 열한 명과 후보 스물다섯, 서른여섯 개의 이름을 필자의 견해로 골랐다.

붉은 신화, 맨체스터를 적시는 중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레드 데빌스(Red Devils)라는 별명은 그저 위협적인 수식어가 아니라, 축구라는 종교가 가진 가장 고전적이고도 강렬한 신화의 이름이다.

잉글랜드 북서부, 산업의 그을음을 두르고 태어난 이 클럽은 항상 고난과 부활, 상처와 환희, 노동과 영광 사이에서 축구를 써 내려왔다. 시작은 1878년 랭커셔 요크셔 철도의 뉴턴 히스 차량 기지였다. 철도 노동자들이 다른 부서와 공을 차던 팀이 1892년 풋볼 리그에 들어갔고, 1902년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름을 바꿨다.[1]

1958년, 맷 버스비(Sir Matt Busby; 스코틀랜드 축구 감독, 1909-1994) 경 재임 시절, 뮌헨 참사. 그러나 그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선 기적. 조지 베스트, 데니스 로, 바비 찰턴이라는 삼두의 찬가. 그 열 해의 이야기는 1967-68시즌의 열한 명을 고른 글에 따로 적었다.

이후 맞이한 알렉스 퍼거슨(Sir Alex Ferguson; 스코틀랜드 축구 감독, 1941-) 경 재임 시대. 수많은 트로피, 수많은 순간. 그리고 1999년, 캄 노우에서의 3분 드라마로 완성된 트레블의 전설.

맨 유나이티드는 언제나 축구라는 서사의 중심이었고, 그 신화는 오늘도 올드 트래퍼드라는 신전 위에 새겨지고 있다.

이 콘텐츠는 그 레드 데빌스라는 이름 아래 영원히 불릴 36인의 레전드를 기록한 서사적 예배이다.

명단은 2025년 5월에 골랐다. 데니스 로가 세상을 떠난 지 넉 달이 지난 봄이었고, 그달 21일 맨 유나이티드는 빌바오의 UEFA 유로파 리그 결승에서 졌다. 그 뒤의 일은 이 명단 안에서 일어났다. 2026년 1월 구단은 후벵 아모링 감독을 내보내고, 후보 명단에 이름이 있는 마이클 캐릭에게 팀을 맡겼다. 캐릭은 첫 두 경기에서 맨체스터 시티와 아스널을 이겼고 열여섯 경기에서 11승을 거둬 팀을 UEFA 챔피언스 리그로 돌려놓았다. 5월 22일 구단은 그와 2028년까지 계약했다.

바비 찰턴: 맨 유나이티드를 한 사람으로 말해야 한다면

참고로 바비 찰턴은 맨 유나이티드 압도적 GOAT를 넘어 영국 축구의 150여 년 역사 슈퍼스타로서 권위를 가진다. 마치 레알 마드리드의 디스테파노, 바르사의 메시, 바이언의 베켄바워처럼. 구단도 같은 말을 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대표할 한 사람을 골라야 한다면, 논쟁할 것이 없다.

There really is no debate.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가 바비 찰턴을 두고

열한 명을 부르기 전에 바비 찰턴(Sir Robert Charlton; 잉글랜드 미드필더·공격수, 1937-2023) 한 사람을 먼저 세운다.

붉은 셔츠를 입고 잔디 위에 쪼그려 앉아 가죽 공을 두 손으로 든 젊은 바비 찰턴
올드 트래퍼드의 젊은 바비 찰턴. 사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 1956년 10월 6일데뷔전 두 골

    발목을 삔 것을 감독에게 숨기고 나갔다. 열여덟 살이었다.

  2. 1958년 2월 6일뮌헨

    동료 여덟을 잃은 비행기에서 스무 살의 그는 살아남았다.

  3. 1966년 7월 30일월드컵

    잉글랜드의 우승, 그리고 그해의 발롱도르.

  4. 1968년 5월 29일웸블리

    주장으로 두 골을 넣고 유러피언컵을 들었다. 뮌헨에서 열 해 뒤였다.

탄광 마을 애슈링턴의 축구 집안에서 태어났다. 친척 어른이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영웅 재키 밀번이었으니 갈 곳은 정해져 있는 듯했지만, 소년은 1948년 FA컵 결승을 라디오로 듣고 버스비의 맨체스터를 골랐다. 1953년 맨체스터에 온 그는 그곳을 낙원이라 불렀다. 던컨 에드워즈(Duncan Edwards; 잉글랜드 미드필더, 1936-1958), 에디 콜먼 같은 또래와 FA 유스컵을 세 번 내리 들었다.[2]

1군의 문은 친구들보다 늦게 열렸다. 1956년 10월 6일, 대표팀에 불려 간 선배의 빈자리였고 상대는 공교롭게 찰턴 애슬레틱이었다. 20분과 25분에 두 골을 넣었고 전반이 끝나기 전에 해트트릭 기회까지 놓쳤다. 그런데 버스비는 다음 경기에서 그를 뺐다. 내 팀에는 열한 명의 자리밖에 없다는 것이 감독의 말이었다. 그 첫 시즌에 그는 열일곱 경기에서 열두 골을 넣었고 팀은 리그를 2연패했다.

1958년 2월, 베오그라드에서 츠르베나 즈베즈다와 비기며 유러피언컵 4강을 확정한 경기에서도 그는 두 골을 넣었다. 돌아오는 길에 연료를 넣으러 내린 뮌헨에서 비행기는 세 번째 이륙 시도 끝에 추락했다. 스물세 명이 숨졌고 그 가운데 여덟이 동료였다. 가벼운 부상으로 살아남은 그는 한 달이 채 안 돼 다시 경기장에 섰고, 선수가 절반밖에 남지 않은 팀은 그해 FA컵 결승까지 올라갔다.

그 뒤의 열 해가 찰턴의 생애다. 1966년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을 이끌고 그해 발롱도르를 받았다. 1968년 5월 29일 웸블리, 벤피카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두 골을 넣었고 큰 손잡이가 달린 트로피를 제 손으로 들어 올렸다. 구단에 있는 동안 월드컵과 유러피언컵과 발롱도르를 다 가진 맨 유나이티드 선수는 지금까지 그 하나다.

찰턴이 갖고 있던 기록숫자넘겨받은 사람과 날
구단 최다 출전758경기라이언 긱스, 2008년 5월 21일 모스크바
구단 최다 득점249골웨인 루니, 2017년 1월 21일 스토크
잉글랜드 최다 득점49골웨인 루니, 2015년 9월 8일 웸블리

1973년 그가 떠날 때 구단의 출전 기록과 득점 기록은 다 그의 것이었다. 두 기록은 서른 해 넘게 버티다가 이 명단의 두 후배에게 넘어갔다. 긱스가 출전 기록을 넘은 경기는 하필 2008년 모스크바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이었다. 뮌헨에서 쉰 해가 되는 해였다.

선수로 끝난 사람도 아니다. 1984년 이사로 돌아와 202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1986년 구단 이사들이 새 감독 후보인 애버딘의 감독을 글래스고에서 만났을 때의 일을 퍼거슨이 훗날 적었다. 자기가 구상을 설명하는 동안 찰턴이 옆자리 이사를 쿡 찌르며 저게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버스비의 팀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퍼거슨의 시대를 여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명단의 열한 명은 그 두 시대에서 왔다.

뮌헨에서 살아남았고, 웸블리에서 갚았다.그리고 자기 기록을 후배들이 넘는 것을 관중석에서 지켜봤다.

선정 전술: 두 감독의 시대를 포갠 3-4-1-2

대형은 3-4-1-2다. 골문에는 슈마이켈이 서고, 그 앞 세 명은 왼쪽부터 어윈, 퍼디낸드, 비디치다. 퍼디낸드가 한 발 뒤에서 스위퍼로 남고 어윈과 비디치가 좌우 스토퍼로 나선다. 4백과 3백 가운데 3백을 고른 까닭은 어윈 절에 적었다.

가운데 줄은 롭슨과 스콜스가 한복판을 맡고 긱스가 왼쪽, 베스트가 오른쪽 날개를 편다. 그 앞에 찰턴이 서고, 맨 앞은 로와 루니다.

열한 명 가운데 셋은 버스비의 사람이다. 찰턴과 베스트와 로, 유나이티드 트리니티다. 일곱은 퍼거슨의 사람이다. 슈마이켈과 어윈, 긱스, 스콜스는 1999년 트레블의 선수이고, 퍼디낸드와 비디치, 루니는 2008년 모스크바의 선수다. 긱스와 스콜스는 두 번 다 있었다. 남은 한 사람 롭슨은 그 사이의 우승 없는 시절을 주장으로 버틴 사람이다. 구단이 유럽 정상에 선 세 번, 1968년과 1999년과 2008년에 전부 이 열한 명 중 누군가가 뛰었다.

1. 페테르 슈마이켈 - 골키퍼

페테르 슈마이켈 골키퍼 상세 정보 디자인

골문을 삼켜버린 사자.

그는 골키퍼였으나 단지 공을 막는 선수를 넘어 신전의 문을 지키던 사자와 같았다.

페테르 슈마이켈(Peter Bolesław Schmeichel; 덴마크 골키퍼, 1963-). 덴마크 왕국 출신의 거대한 사내는 1991년 맨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뒤, 골문이라는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퍼거슨이 그를 처음 본 곳은 스페인의 전지훈련장이다. 덴마크의 브뢴뷔가 같은 훈련장을 쓰고 있었다. 골키퍼 코치 앨런 호지킨슨이 덴마크로 건너가 경기를 봤고, 10분 만에 찾던 골키퍼라는 것을 알았다고 자서전에 적었다. 그는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저 선수가 리그 우승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50만 파운드면 세기의 헐값이라고 말했다. 계약은 1991년 8월에야 끝났다.[3]

그의 몸은 두꺼웠고, 그의 팔은 닿지 않을 곳이 없었으며, 그의 외침은 수비진 전체를 지배했다. 핸드볼 골키퍼처럼 팔다리를 별 모양으로 벌리고 튀어나오는 선방이 그의 서명이었다. 입단 이듬해 여름에는 덴마크 대표팀의 골문을 지키며 UEFA 유로 1992를 우승했다.

1990년대, 리버풀의 오랜 지배 이후 아스널과 혈전을 펼치던 맨 유나이티드의 최전성기.

5번의 프리미어 리그 우승, 3번의 FA컵 우승, 그리고 대망의 1998-99 트레블.

그 모든 장면의 뒤에는 슈마이켈의 거대한 그림자가 존재했었다. 트레블의 봄만 봐도 그렇다. 1999년 3월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인테르의 이반 사모라노가 문전에서 찍은 헤더를 그가 쳐 냈다. 4월 14일 FA컵 준결승 재경기에서는 1-1이던 후반 마지막 순간에 데니스 베르흐캄프의 페널티킥을 막았다. 그 킥이 들어갔다면 트레블은 거기서 끝났다. 본인은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막았다고 했다.

5월 26일 캄 노우의 결승은 그가 맨 유나이티드에서 치른 마지막 경기다. 징계로 빠진 로이 킨을 대신해 주장 완장을 찼다. 0-1로 뒤진 후반 추가시간, 베컴의 코너킥에 그는 골문을 비우고 상대 문전까지 올라갔다. 수비가 그에게 쏠린 틈에 공이 흘렀고 동점골이 났다. 바이언과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전에서도 후반 추가시간까지 팀을 기적적으로 버텨낸 수호신. 그는 트로피를 들고 떠났다.

193cm. 하지만 그보다 더 거대했던 건, 그가 지킨 맨 유나이티드라는 이름의 자존심이었다. 여덟 시즌 398경기에서 남긴 무실점 180경기는 2023년 다비드 데헤아가 넘을 때까지 구단 기록이었다.

2. 데니스 어윈 - 좌 스토퍼

데니스 어윈 좌 스토퍼 상세 정보 디자인

퍼거슨 전술의 가장 황금 비율이었던 자.

4백과 3백 중 필자는 3백을 택한다. 그리고 게리 네빌과 데니스 어윈 중 어윈을 택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퍼기 경 체제에서 가장 완벽에 가까운 사내였기 때문이다.

좌측의 지성, 안정감, 킥의 품격이라는 삼위일체를 담당할 인물에 데니스 어윈(Denis Joseph Irwin; 아일랜드 수비수, 1965-)이라는 답안은 그에 대한 정확한 정답이다.

1990년부터 2002년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왼쪽을 지킨 이 사내는 축구가 예술이기 이전에 책임이어야 함을 보여준 리더였다.

퍼거슨의 눈에 든 것은 1990년 FA컵 준결승이다. 2부 리그 올덤 애슬레틱의 풀백으로 맨 유나이티드를 두 경기 내내 괴롭혔다. 그해 6월 맨 유나이티드는 60만 파운드 남짓에 그를 데려왔다. 올덤의 조 로일 감독은 퍼거슨이 스무 번 넘게 사람을 보내 지켜봤는데 나쁜 보고가 한 번도 없었다더라고 전했다. 맨체스터 시티와 셰필드 웬즈데이도 그를 원했지만 어윈은 올드 트래퍼드를 골랐다.[4]

그게 데니스 어윈의 실체다. 그는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는다.

조 로일이 데니스 어윈을 두고

데니스 어윈의 킥은 굉장히 날카로운데, 또 굉장히 절제되어 있다. 수비 시에는 무너지지도 않는다. 여기서 풀백의 기본 요소를 모두 갖췄다 볼 수 있다.

페널티킥, 프리킥, 크로스, 빌드업. 그가 보여준 모든 행동은 신뢰라는 단어로 귀결됐다. 수비수이면서 팀의 페널티킥과 프리킥을 맡아 찼고, 열두 해 동안 529경기에서 서른세 골을 넣었다. 디자인의 별명은 퍼거슨의 입에서 나왔다. 2013년 그는 자신의 역대 최고 팀을 고르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도 데니스 어윈만은 확실히 들어간다고 했고, 자기는 그를 10점 만점에 8점이라 불렀다고 덧붙였다. 어느 경기에 내보내도 8점은 한다는 뜻이다.

좌우 풀백 모두 가능했고, 상대를 달래는 카리스마와 경기를 조율하는 두뇌를 동시에 가진 그는 전술적 만능열쇠라는 별명조차 부족할 정도였다. 처음 온 시즌에는 오른쪽에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을 들었고, 그 뒤 왼쪽으로 옮겨 프리미어 리그를 일곱 번 우승했다. 트레블의 해에는 한 가지를 놓쳤다. 리그 막판 안필드에서 퇴장당하는 바람에 FA컵 결승을 징계로 걸렀다. 나흘 뒤 캄 노우의 결승에는 선발로 나섰다.

비디치가 벽이라면, 어윈은 균형이고. 퍼디낸드가 황족이라면, 어윈은 절제된 무예였다.

3. 리오 퍼디낸드 - 스위퍼

리오 퍼디낸드 스위퍼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FA컵 우승 2회는 아래 줄의 리그컵 우승이 겹쳐 적힌 것이다. 퍼디낸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FA컵을 들지 못했다.

품격을 걷던 수비수.

비디치가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 중 90%가 퍼디낸드 때문이었고, 이로 인해 팬들은 퍼디치 라인을 맨 유나이티드의 절대적 수비 라인으로 여긴다.

그는 잉글랜드 수비수였지만, 어떤 유럽 거물보다 세련되었고, 어떤 남미 수비수보다 유연했다.

189cm라는 큰 키를 가졌음에도 리오 퍼디낸드(Rio Gavin Ferdinand; 잉글랜드 수비수, 1978-)가 삼던 가장 큰 무기는 시야와 타이밍, 그리고 축구 지능이었다.

2002년, 당시 수비수 이적료 세계 최고액 수준으로 리즈 유나이티드를 떠나 맨 유나이티드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단순한 대형 계약자가 아니었다. 맨 유나이티드의 수비 문법을 바꿔놓을 예언자. 약 3,000만 파운드였고 그때까지 영국에서 치러진 가장 큰 이적료였다. 그는 두 해 전 리즈로 갈 때도 같은 기록을 세운 선수다.[5]

출발은 순탄하지 않았다. 2003년 9월 도핑 검사에 나가지 않아 이듬해 1월부터 여덟 달 출장 정지를 받았다. 그 공백에 맨 유나이티드는 2004년 FA컵을 우승했고, 그는 유로 2004도 놓쳤다. 리그를 여섯 번 우승한 수비수가 FA컵만은 끝내 들지 못한 사연이다.

태클, 몸싸움, 압박 등 3박자를 고루 갖췄던 퍼디낸드는 빌드업 능력도 수준급이었는데 이는 맨유 축구사에서 경기를 설계하는 센터백으로 최초 수준이었다는 상징성을 갖기도 한다.

2008년 5월 21일 모스크바, 비 내리는 루즈니키에서 그는 주장 완장을 차고 있었다. 승부차기 끝에 첼시를 누른 뒤 그와 긱스가 함께 빅 이어를 들어 올렸다. 열두 해 동안 455경기를 뛰고 2014년에 떠났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비라는 단어에 가장 처음으로 우아함을 입힌 사내.

4. 네마냐 비디치 - 우 스토퍼

네마냐 비디치 우 스토퍼 상세 정보 디자인

맨유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방패.

그는 피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피가 유나이티드 수비의 색을 더 붉게 칠했다.

네마냐 비디치(Немања Видић; 세르비아 수비수, 1981-). 2006년 겨울, 세르비아의 이 거친 수비수가 맨체스터에 도착했을 때, 영국 팬들은 그저 터프한 수비수 하나 더 왔군 하고 취급했으나 그건 곧 예언된 전설의 서막이었다.

구단이 그의 영입을 알린 날은 2005년 12월 25일, 성탄절이다. 서류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휴일에 서둘러 발표한 것은 리버풀이 끼어드는 것을 막으려는 뜻이었다고 전해진다. 스파르타크 모스크바에 있던 그는 맨 유나이티드가 첫째, 피오렌티나가 둘째라고 공개적으로 말하고 있었다.[6]

비디치의 태클에는 칼날이 서린 듯 날카로웠고, 비디치가 바라보는 시야에는 전쟁터를 관통하던 세르비아 병사의 눈빛이 담겨 있었다.

공중볼, 대인마크, 클리어링, 터프한 몸싸움. 이 모든 항목에서 비디치는 2000년대 프리미어 리그 최강을 상징했고, 잉글랜드 수비의 표준이기도 하였다.

2002-2014 · 455경기리오 퍼디낸드

읽고 끊는 수비. 공을 빼앗은 다음 장면까지 본다.

2006-2014 · 300경기네마냐 비디치

부딪치고 걷어 내는 수비. 머리부터 들이민다.

둘이 함께 든 것: 프리미어 리그 다섯 번, 2008년 UEFA 챔피언스 리그, FIFA 클럽 월드컵.

두 사람은 서로를 이렇게 불렀다. 비디치는 한 쌍의 반쪽이었던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고, 퍼디낸드는 우리는 서로를 몰아붙였다고 했다. 둘이 선 2008-09시즌 맨 유나이티드는 리그 열네 경기를 내리 무실점으로 막았다. 프리미어 리그 기록이다.

클럽 통산 300경기를 뛰며, 다섯 번의 프리미어 리그 우승과 세 번의 리그컵 우승, 그리고 2008년 UEFA 챔피언스 리그까지 들어 올린 비디치는 모든 장면 속 주인공 중 하나였다.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선수에 두 번 뽑혔고, 마지막 네 시즌은 주장이었다. 2014년 인테르로 건너가 그가 한때 꿈꾸던 이탈리아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그가 무너졌던 장면조차 전설이었고, 그가 다시 일어서면 그날 밤에는 맨 유나이티드의 승리 소식이 SNS를 통해 퍼져나갔다는 게 우스갯소리는 아니었다.

5. 브라이언 롭슨 - 중앙 미드필더

브라이언 롭슨 중앙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446경기 97골은 구단 기록으로 461경기 99골이다. 1991-92시즌 리그컵은 팀이 우승했지만 롭슨은 결승에 뛰지 못했다.

캡틴 마블(Captain Marvel).

무너져가던 구단을 등에 업고 필드를 누비던 사내.

브라이언 롭슨(Bryan Robson; 잉글랜드 미드필더, 1957-)은 1981년, 론 앳킨슨의 부름을 받고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향했다.

올드 트래퍼드 잔디 위에 놓인 탁자에 앉아 계약서에 서명하는 브라이언 롭슨과 그를 둘러싼 구단 사람들
1981년 10월 올드 트래퍼드. 경기장 한가운데에서 계약서에 서명하는 브라이언 롭슨. 사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입단부터 장면이었다. 영국 최고 이적료 150만 파운드였고, 계약서는 사무실이 아니라 올드 트래퍼드의 하프라인에 탁자를 놓고 4만 7천 명 앞에서 썼다. 앳킨슨은 회장에게 이건 모험도 아니라고, 그는 순금이라고 말했다. 한 해 만에 주장 완장이 그에게 왔다. 1982년 월드컵에서 경기 시작 27초 만에 골을 넣고 돌아온 가을이었다.[7]

그리고 그는 긴 세월 승리의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주장이 되었다. 리버풀과 에버턴이 리그를 나눠 갖던 1980년대였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그를 유나이티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 중 한 명으로 브랜딩 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피치에 서 있었고, 실점 후에도 손가락질이 아닌 박수로 동료를 끌어올렸다. 팬과 동료는 롭슨이 경기장에 있으면 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실제로는 그가 다쳐서 빠질 때마다 우승 경쟁이 무너졌다.

중원에서의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경기의 흐름을 바꾸었고, 경기의 리듬을 지배했던 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노비 스타일스, 바비 찰턴, 폴 인스, 폴 스콜스, 브루누 페르난드스 정도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가 보여준 건 테크닉보다, 슈팅보다, 전술보다 책임감이라는 숭고한 단어였다.

리그 대신 FA컵이 그의 무대였다. 1983년 결승 재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고, 세 번째 골이 될 페널티킥은 원래 키커에게 양보했다. 1985년과 1990년에도 주장으로 그 컵을 들었다. FA컵을 세 번 들어 올린 맨 유나이티드 주장은 그뿐이다. 1984년 3월에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8강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두 골을 넣어 1차전 0-2를 뒤집었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관중이 광고판을 넘어 들어와 그를 어깨에 태우고 터널까지 갔다.

프리미어 리그 우승 2회, FA컵 우승 3회, FA 채리티 실드 우승 2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1회.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는 90경기 가운데 65경기를 주장으로 뛰었다. 그보다 많이 완장을 찬 잉글랜드 선수는 빌리 라이트와 바비 무어, 해리 케인 셋뿐이다.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장기간 주장.

리그 우승은 서른여섯에 왔다. 1993년 5월, 26년 만의 우승 트로피를 그는 스티브 브루스와 함께 들었다. 한 해 더 우승하고 461경기 99골을 남긴 채 떠났다. 100번째 골을 넣는다면 어떤 골이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그는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넣는 결승골이라고 답했다.

위의 성공 사례들을 캐치한다면, 21세기 현대를 살고 있는 맨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여전히 브라이언 롭슨을 외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6. 폴 스콜스 - 중앙 미드필더

폴 스콜스 중앙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잔불처럼 오래 타오르던 자.

말재주는 없었고, 현란한 셀레브레이션은 더욱 없었고, 때문에 이슈는 늘 스콜스를 향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이 그의 발에 닿는 순간, 경기는 스콜스를 중심으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폴 스콜스(Paul Aaron Scholes; 잉글랜드 미드필더, 197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가장 조용했던 전설.

그는 찬사를 원하지 않았고, 박수를 위해 뛰지 않았다. 다만, 축구를 이해하는 지능이 너무 높았고, 때문에 브라이언 롭슨, 로이 킨과 같은 반열에서 호출될 정도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1993년 유스 팀에서 올라온 이 붉은 머리의 사내는 2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퍼거슨 왕조의 모든 순간에 존재했다. 천식을 앓는 작은 소년이었다. 유스 팀의 재목들을 꼽던 퍼거슨은 저 아이가 안 된다면 우리는 다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1군 첫 경기인 1994년 9월 21일 리그컵 포트 베일전에서 두 골을 넣었다. 그때 그는 공격수였다.

0.1초의 여백도 허용하지 않는 슈팅, 0.1mm의 간격도 틀리지 않는 패스.

그 시절 지네딘 지단이나 차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아 피를로 등이 스콜스가 볼을 차는 구질을 논하던 것이 예상이 가는 숫자적 장치가 바로 0.1의 미학이라고 생각한다.

에릭 칸토나가 떠난 자리를 그가 물려받으리라 본 사람이 많았지만 퍼거슨은 그를 한 줄 뒤로 내렸다. 거기서 그는 경기를 지휘하는 미드필더가 됐다. 트레블의 해 FA컵 결승에서 골을 넣었고, 캄 노우의 결승은 경고 누적으로 관중석에서 봤다. 아홉 해 뒤에 빚을 받았다. 2008년 4월 29일 UEFA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2차전, 바르셀로나를 떨어뜨린 유일한 골이 그의 중거리 슛이다.

맨유 통산 718경기 155골. 프리미어 리그 11회 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2회(1999, 2008). 그보다 많이 뛴 맨 유나이티드 선수는 긱스와 찰턴뿐이다.

그는 은퇴도 두 번 했다. 2011년 은퇴하고 기념 경기까지 치렀다가, 2012년 1월 8일 맨체스터 시티와의 FA컵 경기에 교체로 돌아와 리그를 한 번 더 우승했다. 718번째이자 마지막 경기는 퍼거슨의 마지막 경기였다.[8]

우리 스콜시(Scholesy; 스콜스의 애칭)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은 그가 축구의 완전한 천재였다는 말이다.

알렉스 퍼거슨이 폴 스콜스를 두고

그가 은퇴한 이후, 팬들은 드디어 그의 말을 언론을 통해서 듣겠군이라며 되뇌었지만, 실은 경기를 통해 말하던 사내가 필드 밖으로 나왔을 뿐이었다.

7. 바비 찰턴 경 - 공격형 미드필더

바비 찰턴 경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746경기 245골은 구단 기록으로 758경기 249골이다. 기타 경력의 기술이사는 구단 이사다.

맨유, 잉글랜드, 전 세계 축구사 가장 압도적인 축구선수.

스탠리 매슈스, 톰 피니, 지미 그리브스, 바비 무어, 고든 뱅크스 그리고 영국 축구사가 가장 마지막으로 인정하는 바비 찰턴.

어떤 이들은 축구를 단지 공놀이 그리고 프로스포츠로 인식하지만 세계인들의 서사 속 축구는 감정에 가깝다.

그리고 그 감정을 문명으로 바꾼 사내가 있었다면 그는 곧 바비 찰턴을 뜻한다.

바비 찰턴 경. 그는 선수였고, 생존자(1958년)였으며, 다리로 시를 쓴 전사였고, 영국이라는 축구 종주국의 윤리적 지주이자 상징적 심장이었다.

1937년, 애슈링턴에서 태어난 이 소년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스 팀을 거쳐 1956년, 퍼스트 팀에 데뷔한다. 그의 재능은 분명했지만, 그를 신화로 만든 건 재능이 아니라, 재난이었다.

애슈링턴의 사내아이는 학교를 마치면 대개 탄광으로 내려갔다. 그는 달랐다. 외할아버지 태너 밀번의 집안에서 프로 선수가 다섯이나 나왔고, 형 잭도 리즈 유나이티드의 센터백이 되어 1966년 월드컵을 동생과 함께 들었다. 열여덟 개 구단이 소년을 원했다. 1953년 2월 그를 보고 돌아온 맨 유나이티드의 수석 스카우트 조 암스트롱은 이 아이는 세계를 제패할 것이라며 싱글거렸다고 한다. 버스비는 그가 외할아버지에게서 공을 세게, 멀리 때리는 재주를 물려받았다고 적었다. 그것 하나만이 아니라 자질이 워낙 많아 다 합치면 천재가 됐다고도 했다.[2]

1958년 2월 6일, 수많은 생명이 하늘을 향해 날아가던 날, 바비 찰턴이 존경하던 자이며, 잉글랜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드필더 중 한 명인 던컨 에드워즈 역시 세상과 안녕을 말했다. 에드워즈는 사고 뒤 열닷새를 버티다 스물한 살로 눈을 감았다.

맷 버스비는 사경을 헤맸고, 선수들은 침묵했다.

바비 찰턴은 비극 속 생존했고, 남겨진 자로서 무너진 클럽의 정신을 짊어지기로 선택한다. 그는 좌석에 묶인 채 잔해 밖에서 발견됐고 몸은 거의 다치지 않았다. 다친 것은 다른 쪽이었다. 본인은 그 참사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몸 밖에서 지켜보는 것 같았다고, 끼어들 수도 빠져나올 수도 없는 끔찍한 꿈 같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떠난 친구들 이야기를 좀처럼 입에 올리지 못했고, 그 힘을 전부 축구에 쏟았다고 구단은 적는다. 버스비의 말로는 이 소년이 하룻밤 사이에 어른이 됐고, 폐허 위에 팀을 다시 지을 주춧돌이 됐다.

두 달 뒤인 1958년 4월 19일, 그는 글래스고의 햄던 파크에서 잉글랜드 대표로 처음 뛰어 골을 넣었다. 관중석에는 스코틀랜드를 응원하러 온 열여섯 살의 알렉스 퍼거슨이 있었다. 퍼거슨이 평생 기억한 것은 골 다음의 장면이다. 스코틀랜드 골키퍼가 골문에서 40야드를 달려 나와 골을 넣은 상대를 축하했다. 좋은 골이어서이기도 했지만, 그가 무엇을 겪고 그 자리에 섰는지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15년간, 무너진 유나이티드를 일으켜 세웠고, 영국 축구 절멸의 순간에서 축구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을 다시 일깨웠다.

밤의 웸블리에서 등번호 5번 선수와 젊은 선수에게 안겨 있는 맷 버스비 감독
1968년 5월 29일 웸블리. 유러피언컵을 우승한 뒤 선수들에게 안긴 맷 버스비 감독. 사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클럽 통산 758경기 249골. 대표팀 통산 106경기 49골.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과 대회 베스트 11. 1968년 유러피언컵 결승의 두 골. 그리고 발롱도르(1966).

그는 중앙 내지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지만 실제로 펠레나 에우제비우, 베켄바워 위에 서던 때만큼 경기의 온도를 지배했던 선수였고, 국가의 자존심을 지켜낸 이중적 사명자였다.

자리는 세월을 따라 바뀌었다. 처음에는 골잡이였고, 뮌헨 바로 다음 시즌에 스물아홉 골을 넣었다. 그다음에는 왼쪽 날개였고, 서른을 바라보면서 한가운데로 들어와 경기 전체를 쥐었다. 바비 무어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왼쪽 윙어가 될 수도 있었는데 미드필드의 불멸을 택했다고 썼다. 어느 자리에서든 무기는 같았다. 경기장을 길게 가르는 패스, 그리고 어느 발로든 먼 거리에서 터지는 슛이다. 버스비의 오른팔이던 코치 지미 머피는 발레 무용수처럼 우아하게 움직이는데 축구화에는 다이너마이트가 든 선수라고 했다. 그렇게 뛰면서 열일곱 해 동안 한 번도 퇴장당하지 않았다.

1966년 월드컵이 그 축구의 표본이다. 조별 리그 멕시코전에서 자기 진영부터 공을 몰고 올라가 먼 거리에서 꽂았고, 준결승 포르투갈전 2-1에서는 두 골을 다 넣었다. 정작 결승에서는 조용했다. 앨프 램지 감독이 그에게 서독의 스무 살 프란츠 베켄바워를 맡겼고, 서독도 베켄바워에게 그를 맡겼다. 그날 경기장에서 가장 뛰어난 두 선수가 서로를 지웠다. 베켄바워는 훗날 1966년에 잉글랜드가 이긴 것은 바비 찰턴이 자기보다 조금 나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두 해 뒤 웸블리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넣은 첫 골은 머리로 넣은 것이다. 본인 말로는 수비를 끌어내려고 미끼로 뛰어들었는데, 크로스가 워낙 좋아 스치듯 돌려놓았더니 구석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마지막 리그 경기는 1973년 4월 28일 스탬퍼드 브리지의 첼시전, 758번째 경기다. 원정 경기인데도 시작 한 시간 전에 관중석이 꽉 차 문이 닫혔고 수천 명이 밖에 남았다. 무어는 그날을 두고 이렇게 썼다. 남미의 가장 깊은 먼지투성이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아는 영어 두 마디는 바비 찰턴이었다고.

유럽은 물론, 먼 땅 대한민국에서도 바비 찰턴을 단순히 레전드라고 칭하는 축구 팬은 없다. 그보다 더한 단어 Sir이라 불렀다. 기사 작위는 1994년에 받았다.

이사가 된 뒤에는 다음 세대를 알아보는 눈으로 구단에 남았다. 퍼거슨이 꼭 봐야 할 아이가 있다며 그를 입단 테스트장에 데려간 날, 50야드 밖에서 찰턴은 곧바로 저 아이구나 했다. 라이언 윌슨, 훗날의 긱스다. 1989년 퍼거슨의 자리가 흔들릴 때 해임 이야기가 나오지도 못하게 막은 사람도 그였다. 2008년 모스크바에서는 트로피를 받으러 올라가려는 주장 퍼디낸드를 붙잡고 이 컵을 들었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퍼디낸드는 그 자리에서 울었다고 했다.

2016년 올드 트래퍼드의 남쪽 스탠드는 바비 찰턴 경 스탠드가 됐고, 2023년 10월 21일 그는 여든여섯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 행렬은 올드 트래퍼드와 세 사람의 동상 앞을 지나 맨체스터 대성당으로 갔다.

8. 라이언 긱스 - 레프트 윙

라이언 긱스 레프트 윙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인터컨티넨탈컵 준우승 (1999 시즌)은 우승의 오기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99년 도쿄에서 파우메이라스를 1-0으로 이겼다.

963번의 유나이티드.

소년으로 왔다가 역사가 된 라이언 긱스(Ryan Joseph Giggs; 웨일스 윙어·미드필더, 197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단순한 클럽이 아니라 전설이라 불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에 그가 존재한다.

1991년, 17세의 소년이 1군에 데뷔했을 때 그는 그렇게 빛나던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적하지 않은 채 묵묵히 시즌을 소화했고, 매번 남으며, 오히려 성장했다.

1990년대 초중반, 폭풍 같은 드리블과 측면 돌파로 올드 트래퍼드를 뒤흔든 젊은 마법사였고, 2000년대에는 중앙으로 침투하며 공간을 요리하는 베테랑 창조자로서 군림했다.

출전
963경기1991-2014, 구단 최다
리그 우승
13번프리미어 리그 선수 최다
연속 득점
21시즌프리미어 리그 출범부터
유럽 정상
2번1999년, 2008년

맨유 통산 963경기. 프리미어 리그가 생긴 1992-93시즌부터 스물한 시즌을 내리 골을 넣었다.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다 우승. PFA 올해의 선수, BBC 올해의 스포츠 인물상 등.[9]

그의 위대함의 보조 장치인 나열할 만한 커리어가 많지만 그 정도는 꽤 심심하지 않은가? 누구나 아는데 말이다.

1998-99시즌 FA컵 준결승전에서 아스널을 상대로 터뜨린 솔로 골과 같은 장면들을 계속 상기해 내야 한다. 1999년 4월 14일 빌라 파크의 재경기였다. 베컴의 골로 앞서다 동점을 내줬고, 로이 킨이 퇴장당해 열 명이 됐고, 슈마이켈이 마지막 순간의 페널티킥을 막아 연장으로 갔다. 그리고 연장 후반, 하프라인 뒤에서 상대의 잘못 준 공을 가로챈 긱스가 혼자 달렸다. 수비수 넷을 지나쳐 페널티 지역 왼쪽에서 골문 지붕으로 차 넣었다. 그 전까지 아스널은 열두 시간 가까이 한 골도 내주지 않은 팀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존재가 품고 있던 정체성의 폭발과 같은 상징성.

찰턴의 출전 기록을 넘은 날도 그다웠다. 2008년 5월 21일 모스크바의 결승에 교체로 들어가 759번째 경기를 채웠고, 승부차기에서 맨 유나이티드의 마지막 킥을 넣었다. 마흔 살이던 2014년 봄에는 선수 겸 임시 감독으로 팀을 맡았고, 그 네 경기를 끝으로 축구화를 벗었다.

물 흐르듯, 바람 같았고, 경기장 위의 질서를 써 내려가는 듯한 플레이는 현재까지 맨 유나이티드의 살아있는 텍스트로서 남아있기도 하다.

9. 조지 베스트 - 라이트 윙

조지 베스트 라이트 윙 상세 정보 디자인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라이트 윙.

드리블러였지만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었고, 스타였지만 단순한 우상이 아니었던 사내. 영국 최초의 슈퍼스타.

누군가는 신(神)이라 불렀다. 그러나 누군가는 파멸이라 불렀다.

1963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온 한 소년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셔츠를 입었을 때, 그가 가린샤의 어깨를 위협할 수준이 되었을 줄 누가 예상했으랴. 조지 베스트(George Best; 북아일랜드 윙어, 1946-2005)의 데뷔전은 1963년 9월 14일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전이고, 그는 열일곱 살이었다. 향수병을 못 이겨 벨파스트로 달아났다가 돌아온 소년이었다.

빠르고, 날카롭고, 예측 불가능했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단순히 찬사를 보내는 게 아니고, 필자가 잘 보이려고 억지로 쓰는 구절은 단 한 문장도 없다. 정말로 슈퍼스타였다. 서독의 귄터 네처처럼.

빽빽한 관중석 바로 앞 터치라인에서 공을 옆구리에 낀 채 몸을 숙이고 달려 나가는 붉은 셔츠의 조지 베스트
관중석 코앞의 터치라인에 선 조지 베스트. 사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디자인의 별명은 1966년 3월 9일 리스본에서 생겼다. 유러피언컵 8강 2차전, 유럽 대회 홈 경기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던 벤피카를 맨 유나이티드가 5-1로 눌렀고, 열아홉 살의 베스트가 초반에 두 골을 넣었다. 긴 머리의 그를 포르투갈 신문은 다섯 번째 비틀이라 불렀다. 돌아오는 공항에서 솜브레로를 쓰고 찍힌 사진의 제목이 엘 비틀이었다.

1967-68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이었던 SL 벤피카와의 결전 속에서 조지 베스트의 모든 하이라이트를 엿볼 수 있다. 1-1로 들어간 연장 초반, 골키퍼까지 돌아 빈 골문에 밀어 넣은 골이 그의 것이다. 결국 그해에 발롱도르까지 수상했다. 그리고 전 세계는 그의 외모, 실력, 스타성에 반했고, 조지 베스트의 유명세는 영국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라이트 윙어였으나 좌우 윙 모두를 수행했고, 그가 드리블을 시작할 때 관중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1970년 2월 FA컵 노샘프턴 타운 원정에서는 진창 위에서 혼자 여섯 골을 넣었다. 통산 470경기 179골이다.

하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빨리 탔고, 그 누구보다도 빨리 타버렸다.

술, 파티, 유명세,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외로움.

그의 인생은 기술보다도 강한 감정의 쓰나미였고, 그가 남긴 말 한마디는 오늘날까지도 축구의 아이러니를 상징하는 경전이 되었다.

나는 술, 여자, 스포츠카에 돈을 많이 썼다. 나머지는 그냥 낭비했다.

The rest I just squandered.

조지 베스트가 자기 자신을 두고

그는 스스로 파멸을 선택했다. 불꽃으로 태어나 불꽃으로 살아간 인간. 맨 유나이티드에서의 마지막 경기는 1974년 1월 1일이고, 그때 그는 스물일곱이었다. 2005년 11월 25일 쉰아홉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향 벨파스트의 공항에는 지금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10]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모든 평론가들이 하나같이 외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던 7번.

10. 웨인 루니 - 세컨드 스트라이커

웨인 루니 세컨드 스트라이커 상세 정보 디자인

악동같던 천재.

그가 단순히 최다 득점자이기 때문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대 베스트 11에서 여러 매체를 통해 호출될까?

전 세계에 통계로서 선수 줄 세우기를 시도하는 매체는 없다. 블로그, SNS라면 모를까.

폭발과 헌신, 날것과 전략, 맨 유나이티드라는 정체성의 또 다른 축.

2004년, 18세의 나이에 에버턴에서 맨체스터 트래퍼드로 향하며,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작렬시킨 그날, 팬들은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직감했다. 웨인 루니(Wayne Mark Rooney; 잉글랜드 공격수, 1985-)의 데뷔전은 2004년 9월 28일 페네르바흐체전이다. 6-2로 이겼고 그는 세 골에 도움 하나를 보탰다. 이적 시장 마지막 날에 온 그의 몸값은 2,000만 파운드에 옵션이 붙은, 10대 선수로는 유례없는 돈이었다.[11]

그는 9번의 본능을 지녔고, 10번의 시야를 가졌으며, 8번의 투쟁심으로 경기를 지배했다.

때문에 그는 2020년대의 해리 케인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꽤나 다른 모습으로 팬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이타적인 전진형 미드필더, 저돌적인 세컨드 스트라이커, 때로는 전방의 마무리 킬러.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필요로 하는 모든 역할을 스스로 감당했고, 때문에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그를 대부분의 매치에서 선발 명단에 마킹했다. 2008년 모스크바의 시즌에는 호날두를 위해 왼쪽 측면까지 내려가 뛰었고, 그해 겨울 FIFA 클럽 월드컵 결승에서는 결승골을 넣고 대회 최우수 선수가 됐다.

559경기 253골(구단 최다 득점). 프리미어 리그부터 UEFA 챔피언스 리그까지 올 타이틀 수집. 2009-10시즌 PFA 올해의 선수.

그리고 그의 인생 골. 맨체스터 더비에서 맨시티를 상대로 기록한 오버헤드킥. 2011년 2월 12일, 1-1이던 78분에 나니의 크로스가 등 뒤로 날아오자 몸을 눕혀 찼다. 그 한 장면은 유나이티드 팬들의 기억 속에 순간이 아닌 정체성으로 새겨져 있다. 프리미어 리그는 출범 스무 해를 맞아 이 골을 역대 최고의 골로 뽑았다.

찰턴의 기록 249골을 넘은 골도 그림이었다. 2017년 1월 21일 스토크 시티 원정, 0-1로 지고 있던 후반 추가시간에 왼쪽 먼 거리의 프리킥을 골문 반대편 구석에 꽂았다. 250번째 골이었다. 잉글랜드 대표팀의 최다 득점 기록도 그보다 한 해 반 먼저 찰턴에게서 가져왔다. 그해 여름 그는 에버턴으로 돌아갔다. 2026년 봄 캐링턴 훈련장에서 감독이 된 옛 동료 캐릭을 마주 앉아 인터뷰한 사람도 그다.

11. 데니스 로 - 센터 포워드

데니스 로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숫자를 넘어선 공격수.

데니스 로(Denis Law; 스코틀랜드 공격수, 1940-2025).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골을 통해 세상을 압도하던 시절, 그 황금기의 가장 중심에는 가녀린 체형의 스코틀랜드 스트라이커가 서 있었다.

애버딘의 어부 집 아들이었다. 일곱 남매가 카펫도 난방도 없는 집에서 자랐고, 제 신발을 처음 가진 것이 열네 살이었다. 심한 사시 때문에 어려서부터 안경을 썼다. 1955년 허더즈필드 타운의 감독은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온 그를 보고 저렇게 축구 선수 같지 않은 아이는 처음 본다고 했다. 약하고, 왜소하고, 안경까지 썼다고. 공을 차는 것을 보고 나서야 말이 바뀌었다.

버스비는 일찍부터 그를 원했다. 1957년 유스 경기에서 그를 보고 몇 주 만에 1만 파운드를 불렀다가 거절당했다. 1958년 스코틀랜드 대표팀을 잠깐 맡았을 때 열여덟 살의 그를 처음 대표로 뽑은 사람도 버스비다. 로는 그 뒤 맨체스터 시티를 거쳐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갔다. 이탈리아 리그 선발과 잉글랜드 리그 선발의 친선전이 끝난 뒤 버스비가 이탈리아는 어떠냐고 묻자 그는 싫다고, 저를 사 가시면 안 되느냐고 답했다.

1962년, 맷 버스비 경이 그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마지막 퍼즐이 된 그는 곧바로 팀을 공격의 예술로 이끄는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 암스테르담과 로잔과 토리노를 오간 몇 달의 협상 끝에 치른 값은 11만 5천 파운드, 영국 최고 이적료였다. 데뷔전에서 7분 만에 골을 넣었고, 첫 시즌 FA컵 결승의 선제골로 뮌헨 이후 구단의 첫 트로피를 열었다.[12]

그는 놀라운 승부욕과 재능으로 유나이티드에 숨을 불어넣었다. 옛 유나이티드의 마법이 단숨에 되살아난 것 같았다.

바비 찰턴이 데니스 로를 두고

그의 주무기는 파워풀한 헤더, 그리고 수비수를 3초 만에 제쳐버리는 순간 스피드.

가장 정점인 포인트는 상황 판단의 속도가 그라운드 위에 서던 22명의 선수 중 가장 빨랐다. 버스비도 그를 두고 축구장에서 본 가장 빠른 생각이라고 했다.

1964년 발롱도르 수상. 스코틀랜드 선수로는 지금까지도 유일하다. 404경기 237골, 해트트릭 열여덟 번. 해트트릭 수는 루니와 판니스텔로이와 베스트의 것을 다 합친 것과 같다. 왕(The King)이라는 칭호를 받은 자. 한 팔을 들고 소매 끝을 쥔 채 검지로 하늘을 가리키는 세리머니를 온 나라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따라 했다.

가장 큰 밤에는 없었다. 1968년 웸블리의 결승을 그는 무릎 수술을 받고 맨체스터의 병상에서 봤다. 이튿날 버스비가 유러피언컵을 들고 병실로 찾아왔다.

1974년, 맨시티의 유니폼을 입고 맨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넣은 골.

본능적인 골, 깨달은 비극.

흔히 그 골 하나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2부 리그 강등을 확정 지었다고들 한다. 사실은 조금 다르다. 강등은 같은 날 다른 경기장의 결과로 이미 정해졌고, 종료 9분 전에 나온 그의 백힐은 거기에 얹힌 한 골이었다. 그리고 데니스 로를 잡은 카메라의 모습에 비친 건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었다. 그는 곧바로 교체를 청했다. 그 터치가 리그에서 그의 마지막 터치다.

그 침묵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팀을 찌른 비극의 감정이었고, 그날 이후 그는 맨시티 유니폼을 벗었다. 본인은 그 주말만큼 우울했던 적이 드물다고 했다. 그해 여름 월드컵을 끝으로 은퇴했다. 2025년 1월 17일 여든넷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득 찬 관중석을 향해 걸어가는 붉은 셔츠 네 명의 뒷모습. 10번과 11번이 어깨동무를 하고 9번이 곁을 걷는다
어깨동무를 한 10번 데니스 로와 11번 조지 베스트, 그 곁의 9번 바비 찰턴. 사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해외축구 팬들은 위 셋을 두고 유나이티드 트리니티(The United Trinity)라 칭하고 있다. 세 사람이 처음 함께 선발로 나선 날은 1964년 1월 18일 웨스트 브로미치 앨비언 원정이다. 4-1로 이겼고 셋이 다 골을 넣었다. 셋 다 발롱도르를 받았다. 1964년의 로, 1966년의 찰턴, 1968년의 베스트다. 올드 트래퍼드 앞마당에는 세 사람이 나란히 선 동상이 있고, 로는 스트렛퍼드 엔드에 혼자 선 동상까지 가졌다. 올드 트래퍼드에 동상이 둘인 사람은 그뿐이다.

베스트, 로, 찰턴.발롱도르 셋이 한 팀의 앞줄에 섰다.

마침내,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대 베스트 11 표제 3-4-1-2 대형으로 배치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대 베스트 11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대 베스트 11 후보 15인 편집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대 베스트 11 추가 10인 편집물
표제, 열한 명의 대형, 후보 15인, 추가 10인. 1906년에 온 빌리 메레디스부터 지금 감독석에 앉은 마이클 캐릭까지 서른여섯 명이 한 흐름에 들어간다.

이 명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의 성공 시대에 침투한 36인의 명단이다.

슈마이켈이 팔다리를 벌려 막은 공을 퍼디낸드가 받아 스콜스에게 건넨다. 비디치가 머리부터 들이밀어 공중을 지우는 동안 반대편의 어윈은 한 번도 자리를 비우지 않는다. 롭슨이 박스에서 박스까지 뛰고, 스콜스가 반대편으로 길게 연다. 왼쪽에서는 긱스가, 오른쪽에서는 베스트가 수비를 벗긴다. 찰턴이 먼 거리에서 때리고, 로가 그 틈으로 뛰어들고, 루니가 나머지를 다 한다.

구단의 최다 출전 1위와 2위와 3위, 최다 득점 1위와 2위와 3위가 전부 이 열한 명 안에 있다. 긱스와 찰턴과 스콜스, 루니와 찰턴과 로다.

붉은 신화.레드 데빌스라는 이름 아래 영원히 불릴 서른여섯 개의 이름.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후보 25인

후보 열다섯에 열 명을 더 적었다. 로이 킨과 에릭 칸토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열한 명 밖에 있는 명단이다. 그림 속 이름을 글자로 다시 적는다. 그림의 조니 카레이는 조니 케어리, 잭 로울리는 잭 롤리, 덩컨 에드워즈는 이 사이트의 표기로 던컨 에드워즈다.[13]

  • 해리 그레그Harry Gregg · 골키퍼

    1957-1966년 247경기. 뮌헨의 잔해 속으로 되돌아가 사람들을 끌어낸 골키퍼다.

  • 에드빈 판데르사르Edwin van der Sar · 골키퍼

    2005-2011년 266경기. 2008년 모스크바 승부차기의 마지막 킥을 막았다.

  • 스티브 브루스Steve Bruce · 센터백

    1987-1996년 414경기 51골. 1993년 우승 트로피를 롭슨과 함께 들었다.

  • 게리 팰리스터Gary Pallister · 센터백

    1989-1998년 437경기. 브루스의 짝이고 1992년 선수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다.

  • 파트리스 에브라Patrice Evra · 레프트백

    2006-2014년 379경기. 비디치와 같은 겨울에 와서 리그를 다섯 번 우승했다.

  • 조니 케어리Johnny Carey · 라이트백

    1936-1953년. 1948년 FA컵과 1952년 리그 우승의 주장이다.

  • 게리 네빌Gary Neville · 라이트백

    1992-2011년 602경기. 한 구단에서만 뛰며 리그를 여덟 번 우승했다.

  • 던컨 에드워즈Duncan Edwards · 수비형 미드필더

    1953-1958년 177경기 21골. 뮌헨 참사 열닷새 뒤 스물한 살로 눈을 감았다.

  • 노비 스타일스Nobby Stiles · 수비형 미드필더

    1960-1971년 395경기. 찰턴과 함께 월드컵과 유러피언컵을 다 들었다.

  • 로이 킨Roy Keane · 중앙 미드필더

    1993-2005년 480경기 51골. 열두 해 가운데 여덟 해를 주장으로 뛰었다.

  • 데이비드 베컴David Beckham · 라이트 윙

    1992-2003년 394경기 85골. 1999년 캄 노우의 두 골은 다 그의 코너킥에서 나왔다.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 · 라이트 윙

    2003-2009년과 2021-2022년 346경기 145골. 2008년 발롱도르를 받았다.

  • 에릭 칸토나Eric Cantona · 세컨드 스트라이커

    1992-1997년 185경기 82골. 다섯 시즌에 리그를 네 번 우승했다.

  • 마크 휴즈Mark Hughes · 센터 포워드

    두 번에 걸쳐 467경기 163골. 1991년 로테르담 결승의 두 골을 넣었다.

  • 뤼트 판니스텔로이Ruud van Nistelrooy · 센터 포워드

    2001-2006년 219경기 150골. 다섯 시즌 내내 두 경기에 한 골보다 많이 넣었다.

  • 알렉스 스테프니Alex Stepney · 골키퍼

    1966-1978년 539경기. 1968년 결승 막판 에우제비우의 일대일을 막았다.

  • 다비드 데헤아David de Gea · 골키퍼

    2011-2023년 545경기. 슈마이켈의 무실점 기록을 넘은 골키퍼다.

  • 빌 폴크스Bill Foulkes · 센터백

    1952-1970년 688경기. 뮌헨의 생존자이고 1968년 웸블리의 5번이다.

  • 토니 던Tony Dunne · 라이트백

    1960-1973년 535경기. 1968년 결승의 풀백이다.

  • 폴 인스Paul Ince · 중앙 미드필더

    1989-1995년 281경기 29골. 이 사이트 인물관에 따로 적은 사람이다.

  • 마이클 캐릭Michael Carrick · 중앙 미드필더

    2006-2018년 464경기. 2026년 1월부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이다.

  • 박지성Park Ji-sung · 윙어

    2005-2012년 205경기 27골. 리그를 네 번 우승한 한국 선수다.

  • 빌리 메레디스Billy Meredith · 윙어

    1906-1921년 335경기 36골. 구단의 첫 리그 우승과 첫 FA컵을 함께했다.

  • 잭 롤리Jack Rowley · 센터 포워드

    1937-1955년 424경기 211골. 로 다음으로 많이 넣은 공격수다.

  • 올레 군나르 솔셰르Ole Gunnar Solskjær · 센터 포워드

    1996-2007년 366경기 126골. 1999년 캄 노우의 마지막 골을 넣었다.

기록을 확인한 곳

  1. 구단 연혁과 우승 횟수, 2025년 이후의 일 — Manchester United 「History by Decade: 1878-1909」, 「Trophy Room」, 「Club statement: Ruben Amorim」, 「United appoint Carrick as head coach」, 「Carrick continues as United head coach」. 뉴턴 히스와 1892년 리그 가입, 1902년 개명, 2025년 5월 빌바오 결승, 2026년 1월 감독 교체, 캐릭의 열여섯 경기 11승과 2028년까지의 계약.
  2. 바비 찰턴과 뮌헨 참사 — Manchester United 「Why Sir Bobby Charlton is so revered」, 「How did Charlton's debut go?」, 「The Darkest Day」, 「Read Sir Alex's tribute to Sir Bobby in full」, 「Sir Bobby Charlton is Mr Manchester United」, 「Fifty years ago: Sir Bobby's last game for United」, 「Kings of Europe: Key men share memories of 1968」, 「Rio: Sir Bobby made me cry in Moscow」, The Guardian 부고, BBC News 2023년 11월 13일. 밀번 집안과 열여덟 구단, 암스트롱과 버스비·머피의 평, 햄던 파크의 데뷔골, 자리의 변화와 무어의 글, 1966년 월드컵과 베켄바워의 말, 1968년 첫 골의 회고, 마지막 리그 경기, 긱스의 입단 테스트와 1989년, 모스크바의 퍼디낸드, 장례. 애슈링턴과 유스컵, 데뷔전의 두 골과 다음 경기의 제외, 베오그라드의 두 골, 사망자 스물세 명, 1966년과 1968년, 758경기 249골과 잉글랜드 106경기 49골, 퇴장 없는 경력, 이사 재임과 퍼거슨 면접, 스탠드 명명, 기사 작위와 별세, 기록이 넘어간 날.
  3. 페테르 슈마이켈 — Manchester United 「Transfer Tales: Peter Schmeichel」, 「What legacy did Schmeichel leave for goalkeeping?」, 무실점 기록 기사. 호지킨슨의 스카우트와 이적료, 유로 1992, 인테르전과 베르흐캄프의 페널티킥, 1999년 결승의 주장, 398경기와 무실점 기록.
  4. 데니스 어윈 — Manchester United 「Dependable Denis, one of our great defenders」, 「Transfer Tales: Denis Irwin」, The42 2013년 10월 30일. 1990년 준결승과 이적료, 로일의 말, 퍼거슨의 평, 529경기, 리그 일곱 번, 페널티킥과 프리킥, 1999년의 징계.
  5. 리오 퍼디낸드 — Manchester United 「UTD Unscripted: We drove each other on」. 이적료와 영국 기록, 2004년의 출장 정지, 우승 목록, 2008년 결승의 주장, 455경기.
  6. 네마냐 비디치 — Manchester United 「Why Vidic was a special Christmas present」, 「UTD Unscripted: Proud to be half of a pair」. 성탄절 발표와 본인의 말, 300경기, 우승 목록, 열네 경기 연속 무실점, 올해의 선수 두 번, 주장, 인테르.
  7. 브라이언 롭슨 — Manchester United 「Seven reasons why Bryan Robson is a United icon」, 「The story of Robbo joining United」. 경기장 위의 서명과 앳킨슨의 말, 27초, FA컵 세 번, 바르셀로나전, 99골과 100번째 골 이야기, 잉글랜드 주장 65경기, 우승 목록.
  8. 폴 스콜스 — Manchester United 「A tribute to Scholesy as he turns 50」. 천식과 퍼거슨의 말, 포트 베일전, 자리 이동, 2008년 바르셀로나전, 718경기, 은퇴와 복귀.
  9. 라이언 긱스 — Manchester United 「On This Day: Giggs tears Arsenal to ribbons」. 963경기, 리그 13회, 프리미어 리그 21시즌 연속 득점, 1999년 4월 14일의 경기, 2008년 결승, 2014년 임시 감독, 우승 목록.
  10. 조지 베스트 — Manchester United 「Sixty-one years since George Best's debut」, 「Best's legacy still shines brightly」. 데뷔전, 리스본의 5-1과 별명, 1968년 결승의 골과 발롱도르, 노샘프턴전 여섯 골, 470경기 179골, 마지막 경기, 본인의 말, 별세와 공항.
  11. 웨인 루니 — Manchester United 「Top 10 goalscorers: United's Hall of Fame」, 「Inside story: Rooney's big interview with Carrick」. 이적료, 페네르바흐체전, 559경기 253골, 2008년 클럽 월드컵, 오버헤드킥, 스토크전 프리킥, 잉글랜드 득점 기록.
  12. 데니스 로와 유나이티드 트리니티 — Manchester United 「Denis Law obituary: 1940-2025」, 「The legend of the Lawman」, 「United Trinity play together for first time」, BBC Sport 부고. 애버딘의 어린 시절, 허더즈필드 감독의 첫인상, 버스비의 구애와 이적료, 데뷔전, 404경기 237골과 해트트릭 18번, 발롱도르, 1968년의 병상, 1974년의 백힐과 본인의 말, 세 사람의 첫 동반 출전, 두 개의 동상, 별세.
  13. 후보 25인 — Manchester United 2026년 1월 13일. 스물다섯 명의 재적 기간과 출전·득점, 캐릭의 464경기와 감독 선임.
  14. 디자인의 숫자는 집계 기준이 달라 구단 기록과 한두 경기씩 다른 것이 있다. 스콜스 디자인의 716경기는 구단 기록으로 718경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