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 · LEGEND

대니 블랜치플라워(Danny Blanchflower)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토트넘 부대장, 1961년 더블의 주장

벨파스트의 맏이에서 공군 항법사로, 반즐리와 애스턴 빌라를 거쳐 토트넘의 주장으로. 1958 스웨덴 월드컵 북아일랜드의 8강, 1960-61 시즌 더블과 영광에 관한 말, 벤피카전 페널티킥과 로테르담의 밤까지. 등번호 하나에 담긴 하프백의 자리와 클럽·국대 기록, 우승과 개인 수상을 정리한다.
닭 문장이 달린 흰 토트넘 유니폼을 입고 FA컵을 두 손으로 높이 든 대니 블랜치플라워의 흑백 사진과 얼스터 기, 토트넘 부대장 문구
FA컵을 들어 올린 토트넘 홋스퍼의 주장 대니 블랜치플라워.
FIFA 로고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영국 국기
UNITED KINGDOM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흰 바탕에 붉은 십자, 가운데 왕관을 얹은 육각 별과 붉은 손이 그려진 얼스터 기
NORTHERN IRELAND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
UEFA 로고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

파란 십자와 노란 테, 세 잎 클로버가 그려진 아일랜드 축구 협회 문장
#IFA아일랜드 축구 협회Irish Football Association
파란 십자와 노란 테, 세 잎 클로버가 그려진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
#NIR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Northern Ireland national football team
편집자 평가

1882년에 세워진 토트넘 홋스퍼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 둘을 꼽으라면 첫 자리는 지미 그리브스, 둘째 자리는 대니 블랜치플라워다. 넓은 시야와 리더십으로 경기를 조립한 라이트 하프였고, 1960-61 시즌 20세기 잉글랜드의 첫 리그·FA컵 더블과 1963년 영국 구단의 첫 유럽 대회 우승을 주장으로 들었다.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17명뿐인 북아일랜드를 이끌고 8강에 갔다. 필자는 블랜치플라워를 토트넘이 어떤 축구를 하는 구단인지를 말과 경기로 정한 사람으로 본다.

대니 블랜치플라워 플레이공을 받아 경기를 조립하는 라이트 하프1 / 8

런던 거리를 메운 팬들 앞, 발코니에서 FA컵을 들어 올린다.

삥이FC 대니 블랜치플라워 평가

  1. 토트넘 홋스퍼는 1882년 9월 5일에 세워졌다. 그 긴 역사에서 대장을 꼽으라면 그 공격수, 지미 그리브스(Jimmy Greaves; 토트넘과 잉글랜드의 공격수, 1940-2021)다. 그다음 부대장 자리에 필자는 그 황금 세대의 주장 블랜치플라워를 둔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토트넘 역대 베스트 11에도 나란히 있다.

  2. 블랜치플라워는 1950-60년대 정상급 미드필더 가운데 한 명이었다. 넓은 시야와 리더십으로 토트넘의 경기를 승리 쪽으로 조립했고, 그가 만든 기회를 그리브스와 클리프 존스, 바비 스미스가 마무리했다. 여담으로 첼시 유스 출신의 그리브스는 우승할 수 있는 팀에서 뛰고 싶어 1961년 AC 밀란으로 갔다가 세리에 A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그해 12월 토트넘으로 돌아와 구단 최고의 공격수가 됐다. 그리브스가 합류했을 때 블랜치플라워의 토트넘은 이미 더블을 든 팀이었다.

  3. 1960-70년대는 손흥민 세대와 함께 토트넘의 가장 빛나는 시절로 꼽힌다.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한 번, FA컵 우승 세 번, 풋볼 리그컵 우승 두 번, 유러피언 컵위너스컵과 UEFA컵 우승이 한 번씩이다. 그 가운데 1950년대 끝부터 1960년대 초까지, 블랜치플라워는 주장으로서 토트넘에 가장 큰 가치를 남겼다.

  4. 1961-62 시즌 유러피언컵에서 토트넘은 에우제비우의 SL 벤피카에 4강에서 막혔다. 리스본 원정을 1-3으로 지고 돌아온 2차전에서 토트넘은 2-1로 이겼고, 그날의 결승골이 블랜치플라워의 페널티킥이었다. 합계로는 졌지만, 그 시즌 유럽 챔피언을 상대로 끝까지 버틴 경기였다.

  5. 블랜치플라워는 1958년과 1961년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로 뽑혔고,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여러 해 표를 받았다. 북아일랜드 대표팀에서는 주장으로 1958 스웨덴 월드컵 8강을 이끌었다. 지금도 많은 팬이 그를 토트넘 역사의 부대장으로 대한다.

큰 착각은 축구가 처음부터 끝까지 이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축구는 영광에 관한 것이고, 멋을 부려 화려하게 해내는 것이며, 나가서 상대를 모두 꺾는 것이다. 상대가 지루해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The great fallacy is that the game is first and last about winning. It is nothing of the kind. The game is about glory, it is about doing things in style and with a flourish, about going out and beating the lot, not waiting for them to die of boredom.

- 대니 블랜치플라워, 자신의 축구관을 두고. 토트넘 홋스퍼가 지금도 구단의 말로 내건다

대니 블랜치플라워 프로필

얼스터 기NORTHERN IRELAND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
본명
Robert Dennis Blanchflower
등록명
대니 블랜치플라워(Danny Blanchflower)
출생
1926년 2월 10일
출생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블룸필드
사망
1993년 12월 9일 · 향년 67세
사망지
잉글랜드 서리
신장
175cm
대표 국적
북아일랜드
포지션
라이트 하프
주요 등번호
4번
선수 경력
1945-1964년
대표팀
1949-1962년 · 56경기 2골

벨파스트의 맏이, 공군의 항법사

블랜치플라워는 1926년 2월 10일 벨파스트 동쪽 블룸필드에서 다섯 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 존은 할랜드 앤드 울프 조선소에서 일했고, 어머니 셀리나는 밧줄 공장에 다니며 공장 여자 축구팀에서 뛰었다. 장학금을 받아 벨파스트 기술 학교에 들어갔지만 일찍 그만두고 갤러허 담배 공장의 견습 전기공이 됐다.

1943년 그는 나이를 속이고 영국 공군에 지원했다. 장학생으로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 대학교에서 수학과 물리를 한 해 공부했고, 캐나다 매니토바에서 항법사 훈련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벨파스트로 돌아온 그는 1945년 12월 29일 글렌토런(Glentoran Football Club; 벨파스트 동쪽의 구단) 소속으로 벨파스트 셀틱전에 데뷔했다. 글렌토런에서 세 시즌 126경기 7골을 넣었고, 아이리시컵 결승에 두 번 올라 두 번 다 졌다.

반즐리의 공, 빌라의 신문

1949년 4월 잉글랜드 2부 리그의 반즐리가 6,500파운드에 그를 데려갔다. 스물세 살이었다. 반즐리에서 그는 벌써 감독 앵거스 시드와 부딪쳤다. 훈련에서 공을 쓰자고 했기 때문이다. 공 없이 뛰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주중에 공을 안 보면 토요일에 공을 더 원하게 될 거다.

We think if you don't see it during the week you might want it more on Saturday.

- 앵거스 시드 반즐리 감독

주중에 공을 안 보면 토요일에 공을 못 알아볼지도 모릅니다.

If we don't see it during the week we might not recognise it on Saturday.

- 대니 블랜치플라워의 대답

그해 10월 1일 그는 벨파스트 윈저 파크에서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아일랜드 축구 협회 대표팀에 데뷔했다. 결과는 2-8이었다. 1951년 3월 애스턴 빌라가 1만 5,000파운드에 그를 샀다. 빌라에서 그는 리그 148경기를 포함해 155경기 10골을 넣었고, 신문에 축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과 불편해하는 사람이 함께 늘었다. 우승을 원한 그는 이적을 요청했고, 빌라는 당시 최고액인 4만 파운드를 불렀다.

화이트 하트 레인의 주장

토트넘의 아서 로 감독은 소문을 다 듣고도 그를 원했다. 1954년 12월 블랜치플라워는 3만 파운드에 토트넘으로 왔고, 12월 11일 맨체스터 시티 원정 0-0으로 데뷔했다. 첫 시즌이 끝나기 전에 그는 앨프 램지(Alf Ramsey; 토트넘의 풀백, 훗날 1966 월드컵 우승 잉글랜드 감독, 1920-1999)에게서 주장 완장을 넘겨받았다.

흰 유니폼과 남색 바지를 입은 토트넘 홋스퍼 선수단이 세 줄로 앉고 선 컬러 단체 사진
1960년의 토트넘 홋스퍼 선수단. 앞줄 가운데에 주장 블랜치플라워와 빌 니컬슨 감독이 앉았다.

블랜치플라워의 자리는 4번 라이트 하프였다. 늘 공을 달라고 했고, 받으면 일을 단순하게 했다. 옆 사람에게 짧게 주거나, 반대편 윙어의 걸음 앞에 길게 떨구거나, 수비 사이를 갈랐다. 몸을 던지는 태클보다 길목을 미리 끊는 수비였고, 올라갔다가 뒤를 비우는 일도 잦았다. 아일랜드 축구 협회는 그를 그 세대에서 전술을 가장 잘 읽는 선수 가운데 한 명으로 꼽는다.

주장으로서의 그는 경기 중에도 감독의 구상을 바꿨다. 1955-56 시즌 지미 앤더슨 감독은 경기 중 마음대로 전술을 바꿨다는 이유로 그에게서 완장을 거뒀다가 다음 시즌 돌려줬다. 1958년 빌 니컬슨(Bill Nicholson; 1958-1974년 토트넘 감독, 1919-2004)이 감독이 된 뒤로 블랜치플라워는 감독의 생각을 경기장에 옮기는 사람이었고, 니컬슨은 그 판단을 온전히 믿었다.

1958년 스웨덴, 17명의 8강

1954년 11월 북아일랜드의 피터 도허티 감독은 블랜치플라워를 대표팀 주장으로 세웠다. 그는 주장으로 북아일랜드의 45경기를 뛰었다. 1958 스웨덴 월드컵 예선에서 북아일랜드는 이탈리아를 2-1로 꺾고 처음 본선에 올랐다.

본선 명단은 17명뿐이었다. 조별리그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1-0으로 이기고, 아르헨티나에 1-3으로 지고, 서독과 2-2로 비겼다. 체코슬로바키아와의 플레이오프 재경기는 연장 끝에 2-1이었다. 8강에서 프랑스에 0-4로 졌지만, 블랜치플라워는 다섯 경기를 모두 주장으로 뛰었고 대회 올스타 팀에 이름을 올렸다. 그해 봄 그는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를 처음 받았다.

그 대회 넉 달 전 1958년 2월 6일, 일곱 살 아래의 동생 재키 블랜치플라워(Jackie Blanchflower;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하프백, 1933-1998)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로 뮌헨의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재키는 살아남았지만 다시는 선수로 뛰지 못했다. 같은 비행기에서 다친 던컨 에드워즈의 이야기는 던컨 에드워즈 편에 있다. 재키가 대표팀에서 뛴 12경기에는 모두 형 대니가 함께 서 있었다.

붉은 유니폼에 흰 깃을 세운 젊은 재키 블랜치플라워의 컬러 인쇄 사진
1957년의 재키 블랜치플라워. 대니의 일곱 살 아래 동생이다.

1960-61 시즌, 20세기의 첫 더블

1960-61 시즌 블랜치플라워가 주장인 토트넘은 개막 11경기를 내리 이겼다. 리그에서 115골을 넣었고, 블랜치플라워도 여섯 골을 보탰다. 그 가운데 넷이 페널티킥이었다. 2위와 승점 8점 차로 리그를 우승했고, 5월 6일 웸블리의 FA컵 결승에서 레스터 시티를 2-0으로 꺾었다. 리그와 FA컵을 한 시즌에 든 팀은 1897년의 애스턴 빌라 뒤로 처음이었다. 그는 그해 두 번째로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가 됐다.

그해 2월 BBC의 인기 프로그램이 그를 주인공으로 골랐다. 유명인을 몰래 불러내 그 사람의 생애를 들려주는 방송이었다. 진행자가 빨간 책을 들고 다가오자 그는 그냥 걸어 나갔고, 그 프로그램의 초대를 거절한 첫 사람이 됐다.

나는 그렇다, 아니다를 말할 권리도 없이 대중 앞에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Basically I did not want to expose myself to the public without the right to say yes or no.

- 대니 블랜치플라워, 방송 초대를 거절한 이유를 두고

더블을 든 그해 여름 그는 캐나다로 건너가 이스턴 캐나다 프로 축구 리그의 토론토 시티에서 잠시 뛰었다. 1961년 『월드 사커』가 뽑는 올해의 세계 베스트 11에 영국과 아일랜드 선수로는 처음 이름을 올렸고, 11월 22일 웸블리의 잉글랜드전 1-1로 북아일랜드 선수 최초의 A매치 50경기를 채웠다.

벤피카의 문 앞에서, 로테르담의 밤

1961-62 시즌 토트넘은 처음 유러피언컵에 나갔다. 예선에서 구르니크 자브제에 2-4로 지고 와서 홈에서 8-1로 뒤집었고, 1라운드에서는 페예노르트를 3-1, 1-1로 넘었다.

어두운 훈련장에서 흰 상의와 짧은 바지 차림의 토트넘 선수가 공을 몰고 뒤로 동료들이 뛰는 흑백 사진
1961년 10월 31일, 페예노르트전을 앞두고 로테르담에서 훈련하는 토트넘 선수들.

8강에서 두클라 프라하를 4-1로 뒤집은 토트넘은 4강에서 디펜딩 챔피언 벤피카를 만났다. 3월 21일 리스본에서 1-3으로 졌고, 4월 5일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16분 아구아스가 먼저 골을 넣었고, 34분 바비 스미스가 따라잡은 뒤 48분 블랜치플라워가 페널티킥을 넣었다. 2-1로 이겼지만 합계 3-4로 결승에는 가지 못했다. 그 시즌 FA컵에서는 결승에 다시 올라 5월 5일 번리를 3-1로 이겼다. 세 번째 골이 블랜치플라워의 페널티킥이었다.

1962-63 시즌 토트넘은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에 올랐다. 1963년 5월 15일 로테르담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5-1로 꺾었다. 그리브스가 두 골, 테리 다이슨이 두 골, 존 화이트가 한 골을 넣었다. 영국 구단이 유럽 대회에서 우승한 첫날이다.

밤 경기장에서 흰 유니폼의 토트넘 선수들이 트로피를 든 주장을 어깨에 태우고 걸어가는 흑백 사진
1963년 5월 15일 로테르담, 컵위너스컵을 든 블랜치플라워를 동료들이 어깨에 태웠다.

우리의 가장 큰 승리였다. 선수들이 훌륭하게 뛰었다.

This was our greatest triumph. The boys played magnificently.

- 대니 블랜치플라워, 1963년 로테르담의 결승 뒤

기자가 된 주장

1962-63 시즌부터 무릎이 그를 붙잡았고 리그 출전도 크게 줄었다. 블랜치플라워는 1964년 서른여덟 살에 은퇴했다. 토트넘에서 382경기 21골이었다. 그 뒤로는 신문에 칼럼을 쓰는 기자로 오래 일했고,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북아일랜드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첫 경기는 1976년 10월 로테르담의 네덜란드전 2-2였다. 1978년 말에는 첼시를 맡았다가 아홉 달 만에 물러났다.

공항 실내에서 트렌치코트를 입고 웃는 대니 블랜치플라워와 무늬 재킷을 입은 장발의 조지 베스트가 나란히 선 흑백 사진
1976년 10월 12일 로테르담 공항에 도착한 북아일랜드 대표팀의 블랜치플라워 감독과 조지 베스트.

말년에 그는 알츠하이머와 파킨슨병을 앓았다. 1990년 토트넘은 그를 위한 기념 경기를 열었다. 1993년 12월 9일 블랜치플라워는 예순일곱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브스는 화이트 하트 레인의 불 하나가 꺼졌다고 했다. 2003년 그는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고, 2015년 동벨파스트의 어린 시절 집에는 얼스터 히스토리 서클의 파란 명판이 붙었다.

붉은 벽돌 벽에 붙은 파란 원형 명판. 대니 블랜치플라워 1926-1993, 축구 선수이자 기자가 여기 살았다는 영어 문구
동벨파스트의 블랜치플라워가 자란 집에 붙은 얼스터 히스토리 서클의 명판.

역대 클럽·국대 기록

벨파스트 시 문장글렌토런 FC1945-1949126경기 · 7골
1954년부터 쓴 반즐리 FC 문장반즐리 FC1949-195168경기 · 2골
1886-1956년 애스턴 빌라 FC 문장애스턴 빌라 FC1951-1954155경기 · 10골
1951-1967년 토트넘 홋스퍼 FC 문장토트넘 홋스퍼 FC1954-1964382경기 · 21골
1957-1965년 캐나다 국기토론토 시티19614경기
1957-1977년 북아일랜드 대표팀 문장북아일랜드 대표팀1949-196256경기 · 2골

토트넘은 구단 기록의 공식전(리그 337경기 15골, FA컵 33경기 4골, 유럽 대항전 12경기 2골)이다. 애스턴 빌라는 리그와 FA컵, 반즐리는 2부 리그 경기 수다. 글렌토런은 아이리시 리그 시절의 전 경기 기록이다. 토론토 시티는 트랜스퍼마크트에 남은 경기 수이며, 1965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더번 시티에서 잠깐 뛴 경기는 기록이 남지 않아 넣지 않았다. 대표팀은 성인 A매치 기준이며 아이리시 리그 대표 경기는 넣지 않았다. 문장은 블랜치플라워가 뛰던 시기에 각 구단과 대표팀이 쓰던 것이다. 글렌토런은 당시 문장 자료가 없어 벨파스트 시 문장을, 반즐리는 문장을 처음 쓴 1954년판을, 토론토 시티는 당시 캐나다 국기를 대신 넣었다.

역대 등번호

클럽

소속팀확인 기간등번호
애스턴 빌라 FC1951-52~1954-55 시즌4 · 5
토트넘 홋스퍼 FC1954-55~1963-64 시즌4 · 10
토론토 시티1961년4

국가대표팀

대표팀확인 대회·기간등번호
북아일랜드1958 FIFA 월드컵4
북아일랜드1950-1962년 A매치 자료4 · 7

당시 영국 구단과 대표팀은 고정 등번호 없이 그 경기의 포지션에 따라 1번부터 11번을 받았다. 라이트 하프는 4번이다. 트랜스퍼마크트의 경기별 기록에서 블랜치플라워는 번호가 남은 경기 대부분을 4번으로 뛰었고, 토트넘의 1961-62 시즌 두 경기는 10번, 빌라의 한 경기는 5번, 북아일랜드의 한 경기는 7번이었다. 글렌토런과 반즐리 시절, 빌라와 토트넘의 상당수 경기는 번호가 남지 않았다.

대표 우승·준우승 경력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Football League First Division

우승: 1960-61

FA컵FA Cup

우승 2회: 1960-61, 1961-62

FA 채리티 실드FA Charity Shield · 현재의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2회: 1961, 1962

유러피언 컵위너스컵European Cup Winners' Cup

우승: 1962-63

유러피언컵European Champion Clubs' Cup

4강: 1961-62

아이리시컵Irish Cup

준우승 2회: 1946-47, 1948-49 (글렌토런)

FIFA 월드컵FIFA World Cup

8강: 1958년

대니 블랜치플라워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 발롱도르1957년 14위 · 1958년 19위 · 1961년 17위
  • FIFA 월드컵 올스타 팀1958년
  •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 올해의 선수1957-58 · 1960-61 시즌
  • 월드 사커 올해의 세계 베스트 111961년 · 영국·아일랜드 선수 최초
  • 북아일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아일랜드 축구 협회
  • 토트넘 홋스퍼 명예의 전당 헌액토트넘 홋스퍼 FC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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