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 LEGEND
주제 아구아스(José Águas)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황금의 머리, 벤피카 유러피언컵 2연패의 주장
에우제비우 이전 벤피카 최고의 공격수 주제 아구아스. 앙골라 루비투의 타이피스트에서 리스본의 센터 포워드로, 5번의 볼라 드 프라타와 1961년 베른의 우승·득점왕·주장, 이듬해 암스테르담의 5-3과 빈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까지. 클럽·대표팀 기록과 등번호에 얽힌 사연, 우승 경력을 정리한다.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
주제 아구아스(José Pinto de Carvalho Santos Águas; 포르투갈 축구선수·감독, 1930-2000)는 에우제비우가 오기 전 SL 벤피카 최고의 공격수였다. 포르투갈령 앙골라의 자동차 판매점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하던 열아홉 살 청년은 1950년 아프리카 순회에 나선 벤피카의 눈에 들어 리스본으로 건너왔고, 13시즌 동안 공식전 384경기에서 379골을 넣었다. 머리로 넣은 골이 많아 「황금의 머리」(Cabeça de Ouro)라 불렸고, 포르투갈 1부 리그 득점왕에 다섯 번 올랐다. 1961년 베른에서 그는 주장으로 벤피카의 첫 유러피언컵을 들어 올렸고 그 대회의 득점왕이었으며, 이듬해 암스테르담에서 한 번 더 그 트로피를 들었다.
삥이FC 주제 아구아스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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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피카의 공식전 득점 순위에서 주제 아구아스보다 위에 있는 사람은 473골의 에우제비우 하나뿐이다. 1950년 벤피카에 온 그는 13시즌 동안 384경기에서 379골을 넣었고, 리그만 세어도 경기 수보다 골이 많다. 포르투갈 1부 리그 득점왕을 뜻하는 볼라 드 프라타(Bola de Prata; 은빛 공, 포르투갈 일간지 『A 볼라』가 리그 득점왕에게 주는 트로피)를 다섯 번 받았다. 1940년대의 페르난두 페이로테우와 1960년대의 에우제비우 사이, 포르투갈 축구에서 센터 포워드라는 자리를 맡은 사람이 그였다. 필자는 그를 포르투갈 축구사 올 타임 넘버 원 공격수로 꼽는다. 숫자와 우승, 그리고 큰 경기에서 낸 골이 모두 그 자리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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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무기는 머리였다. 포르투갈 언론은 그를 기술이 좋고 우아한 센터 포워드로 기억하면서도 가장 먼저 공중볼을 꼽는다. 높이 뜬 공이 어디로 떨어질지 먼저 알았고, 수비수를 떼어 내고 페널티 지역 안에서 타이밍을 맞춰 뛰어올랐다. 발이 빠른 공격수는 아니었고 동료에게 공을 뿌려 주는 유형도 아니었다. 대신 상자 안에서 자리를 지키며 끝없이 골을 넣었다. 같은 시대 헝가리의 코치시 샨도르(Kocsis Sándor; 헝가리와 FC 바르셀로나의 공격수, 1929-1979)도 황금 머리라 불렸다. 1961년 베른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두 황금 머리는 같은 그라운드에 섰고, 둘 다 골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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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의 아구아스는 주장으로 유러피언컵을 들어 올렸고, 같은 대회의 득점왕이었다. 포르투갈의 축구 기록가 후이 미겔 토바르(Rui Miguel Tovar; 포르투갈의 축구 통계 기자)는 2020년 『옵세르바도르』(Observador; 포르투갈의 온라인 일간지)에 우승과 득점왕, 주장으로 트로피를 든 일을 한 시즌에 모두 해낸 사람은 1961년의 아구아스 하나뿐이라고 적었다. 이듬해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5-3으로 꺾고 다시 주장으로 트로피를 들었다. 유러피언컵을 두 번 든 포르투갈 주장은 지금도 그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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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난 뒤 벤피카의 골은 에우제비우의 몫이 됐다. 에우제비우는 그를 두고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신사였다고 말했다. 아들 후이 아구아스는 1990-91 시즌 볼라 드 프라타를 받아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포르투갈 득점왕에 올랐고, 딸 레나 다구아는 1980년대 포르투갈 팝의 얼굴이 됐다. 필자에게 주제 아구아스는 벤피카가 유럽의 정상에 처음 올라선 순간, 그 맨 앞에서 트로피를 든 사람이다.

주제 아구아스 프로필
- 본명
- José Pinto de Carvalho Santos Águas
- 등록명
- 주제 아구아스(José Águas)
- 출생
- 1930년 11월 9일
- 출생지
- 포르투갈령 앙골라 루안다
- 사망
- 2000년 12월 10일 · 향년 70세
- 사망지
- 포르투갈 리스본
- 대표 국적
- 포르투갈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주요 등번호
- 9번
- 선수 경력
- 1948-1964년 · 벤피카 1950-1963년
- 대표팀
- 1952-1962년 · 25경기 11골
- 감독 경력
- 아틀레티쿠 CP · CS 마리티무 · 레이숑이스 SC
- 별명
- 황금의 머리(Cabeça de Ouro)
1930년 11월 9일 루안다, 루비투의 타이피스트
아구아스는 1930년 11월 9일 당시 포르투갈령이던 앙골라의 루안다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리스본에서 앙골라로 건너온 포르투갈 사람이었고, 가족은 곧 대서양 쪽 항구 도시 루비투(Lobito; 앙골라 벵겔라주의 항구 도시)로 옮겼다. 아버지 하울 안토니우 아구아스(Raúl António Águas)는 이웃 도시 카툼벨라의 설탕 공장에서 일하던 아마추어 권투 선수였는데, 아들이 세 살 반일 때 세상을 떠났다. 몸이 가냘픈 아들을 걱정한 어머니는 처음에 집 안에서만 공을 차게 했다.
열다섯 살의 아구아스는 홀로 남은 어머니를 돕기 위해 루비투의 포드 자동차 판매점 로버트 허드슨(Robert Hudson)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하기 시작했다. 회사 팀에서 공을 차다가 지역 구단 루지타누 루비투(Lusitano do Lobito; 앙골라 루비투의 구단)의 눈에 들었고, 열여덟이 되기 전에 1군에 올랐다. 축구를 열렬히 좋아한 소년은 아니었지만 집안은 모두 벤피카를 응원했고, 그가 좋아한 선수도 벤피카의 인사이드 포워드 호제리우 피피(Rogério Pipi; 1940년대 벤피카의 공격수)였다.
1950년 벤피카의 아프리카 순회, 테드 스미스의 눈
1950년 여름 벤피카는 구단 첫 국제 대회 우승인 라틴컵(Taça Latina; 포르투갈·스페인·프랑스·이탈리아 리그 우승팀이 겨룬 대회)을 들고 모잠비크와 앙골라를 돌았다. 루비투에서 벤피카를 맞은 지역 선발팀에 아구아스가 있었다. 그는 두 골을 넣었고 선발팀은 3-1로 이겼다. 벤피카를 이끌던 잉글랜드 출신 감독 테드 스미스(Ted Smith; 1950년대 초 벤피카의 잉글랜드인 감독)는 그 자리에서 구단 이사진에게 이 청년을 데려가자고 했다. 아구아스는 판매점 일을 그만두고 리스본으로 가기로 했다.
1950년 9월 18일 월요일, 열아홉 살의 아구아스는 함께 영입된 페드루 고메스(Pedro Gomes) 등과 리스본에 내렸다. 도착한 그가 기자들에게 한 말은 짧았다. 「저는 늘 벤피카 팬이었습니다.」(Sempre fui benfiquista.)
1950년 10월 1일 캄푸 그란드, 브라가전 4골
데뷔전은 9월 하순 타파디냐(Tapadinha; 리스본 아틀레티쿠 CP의 홈구장)에서 열린 아틀레티쿠 CP전이었다. 2-2로 비긴 그 경기에서 그는 골을 넣지 못했고, 그라운드에 들어선 순간 진짜 용광로에 들어온 것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앙골라에서 하던 축구보다 훨씬 빠르고 거칠었다.
일주일 뒤인 10월 1일, 벤피카는 홈구장 캄푸 그란드(Campo Grande; 이스타디우 다 루스 이전 벤피카의 홈구장)에서 SC 브라가를 8-2로 꺾었다. 아구아스는 30분, 35분, 72분, 88분에 네 골을 넣었다. 마지막 골은 헤딩이었고, 그는 그 골을 두고 「내 커리어 최고의 골」(Foi o melhor golo da minha carreira!)이라고 말했다. 『헤코르드』(Record; 리스본의 스포츠 일간지)는 그 경기를 두고 포르투갈 축구의 하늘에 새 별이 떴는지도 모른다고 썼다. 그 시즌 벤피카는 타사 드 포르투갈(Taça de Portugal; 포르투갈 축구 협회 컵 대회)을 들었고, 아구아스는 그 대회의 득점왕이었다. 리스본에 온 첫해에 첫 트로피를 손에 넣은 것이다.
황금의 머리, 5번의 볼라 드 프라타
1951-52 시즌 아구아스는 리그 26경기에 28골을 넣어 처음으로 볼라 드 프라타를 받았다. 그 무렵 리그는 스포르팅 CP의 「다섯 개의 바이올린」 시대가 저물던 때였고, 벤피카는 번번이 스포르팅에 밀려 2위에 머물렀다. 벤피카가 마침내 리그를 되찾은 것은 1954-55 시즌, 브라질 출신 감독 오투 글로리아(Otto Glória; 브라질의 감독, 1917-1986)가 구단을 프로 체제로 바꾸고 새 홈구장 이스타디우 다 루스(Estádio da Luz; 1954년 문을 연 벤피카의 홈구장)가 문을 연 해였다. 벤피카는 그 시즌 리그와 타사 드 포르투갈을 함께 들었다.
그 뒤로 볼라 드 프라타는 거의 그의 것이었다. 1955-56 시즌 28골, 1956-57 시즌 30골, 1958-59 시즌 26골, 1960-61 시즌 27골. 모두 한 시즌 26경기의 리그에서 넣은 골이다. 포르투갈 리그 득점왕을 여섯 번 한 페이로테우 다음으로 많은 기록이다. 그 사이 벤피카에는 아프리카에서 또 한 사람이 건너왔다. 1954년 모잠비크에서 온 미드필더 마리우 콜루나(Mário Esteves Coluna; 포르투갈의 미드필더, 1935-2014)다. 콜루나가 중원에서 공을 몰고 올라오고, 측면에서 크로스가 날아오면, 상자 안에서 머리를 대는 사람이 아구아스였다.
1955년 5월 22일 포르투, 잉글랜드를 처음 꺾은 2골
아구아스는 1951년 포르투갈 B 대표팀으로 나선 프랑스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3-1 승리를 이끌었다. 성인 대표팀 데뷔는 1952년 11월 23일 포르투의 안타스 경기장에서 열린 오스트리아전이었다. 1-1이었다. 이듬해 9월 27일 빈에서 열린 1954 FIFA 월드컵 예선 오스트리아 원정에서 포르투갈은 1-9로 무너졌고, 포르투갈의 단 한 골을 넣은 사람이 그였다.
1955년 5월 22일 포르투에서 포르투갈은 잉글랜드를 3-1로 꺾었다. 1947년 리스본의 0-10, 1950년의 3-5, 1951년 리버풀의 2-5 끝에 처음 거둔 잉글랜드전 승리였다. 아구아스가 두 골, 벨레넨스의 공격수 마타테우(Matateu; Sebastião Lucas da Fonseca, 벨레넨스와 포르투갈의 공격수, 1927-2000)가 한 골을 넣었다. 1956년 6월 9일 리스본에서는 헝가리 황금의 팀을 상대로 마누엘 바스케스와 한 골씩 넣어 2-2로 비겼다.

그의 시대에 포르투갈은 월드컵 본선에 한 번도 나가지 못했다. 1954년, 1958년, 1962년 예선에서 모두 떨어졌다. 1959년부터는 대표팀 주장 완장도 찼다. 1961년 10월 8일 룩셈부르크 원정에서 포르투갈이 2-4로 진 날, 그라운드에는 서른 살의 아구아스와 그날 대표팀에 처음 나선 열아홉 살의 에우제비우(Eusébio da Silva Ferreira; 모잠비크 출신 포르투갈의 공격수, 1942-2014)가 함께 있었다. 대표팀 감독은 페이로테우였다. 아구아스의 마지막 A매치는 1962년 5월 17일 리스본의 벨기에전(1-2)이었다. 10년 동안 25경기 11골, 그 가운데 이긴 경기는 다섯 번뿐이었다.
1961년 5월 31일 베른, 주장이자 득점왕
1959년 벤피카에 온 헝가리 출신 감독 구트만 벨러(Guttmann Béla; 헝가리 출신 감독, 1899-1981)는 아구아스에게 주장 완장을 맡겼다. 1960-61 시즌 벤피카의 유러피언컵은 그의 골로 굴러갔다. 1라운드에서 하트 오브 미들로디언을 상대로 원정 한 골과 홈 두 골, 2라운드 우이페슈티 도저전 6-2 승리에서 두 골, 8강 AGF 오르후스전에서 세 골, 4강 SK 라피트 빈전에서 두 골을 넣었다. 결승에 오르기 전에 이미 10골이었다.

5월 31일 베른 방크도르프 경기장의 결승 상대는 FC 바르셀로나였다. 쿠벌러 라슬로와 코치시, 치보르 졸탄(Czibor Zoltán; 헝가리와 FC 바르셀로나의 윙어, 1929-1997), 루이스 수아레스가 있는 팀이었다. 결승 전날 밤 아구아스는 잠을 이루지 못했고, 팀 닥터가 커피와 브랜디 한 잔을 건넸다고 한다. 20분 코치시가 먼저 넣었다. 10분 뒤 아구아스가 동점골을 넣었고, 2분 뒤에는 바르셀로나 골키퍼 안토니 라마예츠(Antoni Ramallets; FC 바르셀로나의 골키퍼, 1924-2013)의 자책골로 벤피카가 앞섰다. 55분 콜루나가 세 번째 골을 넣었고, 75분 치보르의 추격골에도 스코어는 3-2로 끝났다. 주장 아구아스가 벤피카의 첫 유러피언컵을 들어 올렸다. 그 대회에서 그가 넣은 골은 모두 11골, 득점 2위보다 다섯 골이 많았다.
그 결승에 에우제비우는 없었다. 1960년 12월 모잠비크에서 온 그는 결승 다음 날인 6월 1일, 1군이 베른에 있는 동안 2군과 함께 타사 드 포르투갈 비토리아 드 세투발전에 나서 벤피카 공식전 첫 골을 넣었다. 벤피카의 골문 앞 자리가 한 사람에게서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날이었다.
1961년 9월 몬테비데오, 페냐롤과의 3경기
그해 9월 벤피카는 남아메리카 챔피언 페냐롤과 인터콘티넨털컵(Copa Intercontinental; 유럽과 남아메리카 클럽 챔피언이 겨룬 대회)을 치렀다. 9월 4일 리스본의 1차전에서 아구아스는 선발로 나섰고 벤피카는 콜루나의 골로 1-0으로 이겼다. 9월 17일 몬테비데오 2차전에는 나서지 않았고, 벤피카는 0-5로 무너졌다. 이틀 뒤 같은 곳에서 열린 재경기에 그는 에우제비우와 함께 나섰지만 벤피카는 1-2로 졌다.
1962년 5월 2일 암스테르담, 푸슈카시의 해트트릭을 넘은 5-3
1961-62 시즌 유러피언컵 1라운드 상대는 FK 아우스트리아 빈이었다. 아구아스는 빈 원정 1-1에서 한 골, 리스본의 5-1에서 두 골을 넣었다. 8강에서는 1. FC 뉘른베르크 원정에서 1-3으로 지고 돌아와 리스본에서 6-0으로 뒤집었고, 그 6골의 첫 골이 경기 시작 1분 만에 나온 그의 골이었다. 4강 토트넘 홋스퍼전 2차전에서는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골을 넣었다.

5월 2일 암스테르담 올림픽 경기장의 결승 상대는 다섯 번 우승한 레알 마드리드였다. 주심 레오 호른(Leo Horn; 네덜란드의 심판, 1916-1995) 앞에서 두 팀 주장 아구아스와 파코 헨토(Francisco Gento; 레알 마드리드의 윙어, 1933-2022)가 동전을 던졌다. 푸슈카시 페렌츠가 17분과 23분에 연달아 넣어 레알이 2-0으로 앞섰다. 2분 뒤 아구아스가 한 골을 따라붙었고, 34분 카벵(Cavém; Domiciano Barrocal Gomes Cavém, 벤피카의 윙어)이 동점을 만들었다. 푸슈카시는 38분 해트트릭을 완성했지만, 후반에 콜루나와 에우제비우가 세 골을 넣었다. 5-3. 아구아스는 다시 주장으로 트로피를 들었다. 그 대회에서 그는 여섯 골을 넣었다.
1963년 빈, FK 아우스트리아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
암스테르담의 결승이 끝나고 구트만이 떠났다. 칠레 출신 감독 페르난도 리에라(Fernando Riera; 칠레의 감독, 1920-2010)가 온 1962-63 시즌, 서른두 살의 아구아스가 그라운드에 서는 날은 줄었다. 그래도 유러피언컵 1라운드 IFK 노르셰핑전 5-1에서는 경기 시작 1분 만에 골을 넣었고, 4강 페예노르트 원정에도 나섰다. 벤피카는 그해 리그를 들었고 유러피언컵 결승에도 올랐지만, 5월 22일 웸블리의 결승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주장 완장을 찬 콜루나 앞에서 벤피카는 AC 밀란에 1-2로 졌다.
1963년 여름 그는 벤피카를 떠나 FK 아우스트리아 빈(Fußballklub Austria Wien; 오스트리아 빈의 구단)으로 갔다. 2년 전 유러피언컵에서 그가 세 골을 넣은 바로 그 팀이었다. 그해 가을 그는 아우스트리아의 보라색 유니폼을 입고 유러피언컵 1라운드 구르니크 자브제전 홈 1-0 승리에 나섰고, 1964년 1월 남아메리카 원정의 인데펜디엔테전에서도 골을 넣었다. 리그에서는 일곱 경기에 나서 1964년 2월 29일 홈 6-3 승리에서 두 골을 넣었다. 서른셋이던 1964년 여름, 그는 축구화를 벗었다.
2000년 12월 10일 리스본, 경기장 안팎의 신사
은퇴한 그는 감독이 됐다. 1967-68 시즌 아틀레티쿠 CP를 2부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CS 마리티무와 레이숑이스 SC도 맡았다. 아들 후이 아구아스(Rui Águas; 벤피카와 FC 포르투의 공격수, 1960-)는 아버지처럼 머리로 골을 넣는 공격수가 돼 벤피카의 유니폼을 입었고, 1990-91 시즌 볼라 드 프라타를 받았다. 딸 레나 다구아(Lena d’Água; 포르투갈의 가수)는 1980년대 밴드 아틀란티다(Atlântida)를 이끌며 포르투갈 팝의 스타가 됐다.
2000년 12월 10일, 아구아스는 몇 달 동안 병과 싸우던 리스본의 포르투갈 종양학 연구소(Instituto Português de Oncologia)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흔이었다. 벤피카와 대표팀에서 그의 뒤를 이은 에우제비우는 이렇게 말했다.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신사였습니다.
Um senhor dentro e fora do campo.
- 에우제비우가 2000년 12월 주제 아구아스의 별세 소식에 『헤코르드』에
2025년 12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되던 날 『A 볼라』(A Bola; 리스본의 스포츠 일간지)는 그의 생애를 다시 실으며 제목을 「주제 아구아스 선생이 없는 25년」으로 달았다.
역대 클럽·국대 기록
SL 벤피카1950-1963공식전 384경기 · 379골벤피카는 리그·컵·유럽 대회를 더한 공식전 합계이며, 리그만 세면 281경기 290골로 적는 자료가 많다. 유러피언컵은 21경기 18골이다. 아우스트리아 빈은 리그 7경기 2골, 컵 1경기, 유러피언컵 1경기를 더한 수이고 리그 7경기만 적는 자료도 있다. 앙골라에서 뛴 루지타누 루비투(1948-1950)는 지역 리그 시절이라 카드에서 뺐다. 문장은 아구아스가 뛰던 시기의 것이다. 벤피카는 1930년부터 쓴 문장, 포르투갈 대표팀은 1960년까지 쓴 다섯 방패 문장이며, 1963-64 시즌 아우스트리아의 문장은 그 시기 자료가 없어 확인되는 가장 이른 판인 1969년의 FAK 모노그램 문장을 넣었다.
역대 등번호
클럽
| 소속팀 | 확인 기간 | 등번호 |
|---|---|---|
| SL 벤피카 | 1950-1963년 경기 자료 | 9 |
| FK 아우스트리아 빈 | 1963-64 시즌 | 자료 미등록 |
국가대표팀
| 대표팀 | 확인 기간 | 등번호 |
|---|---|---|
| 포르투갈 | 1952-1962년 A매치 | 9 · 8 |
아구아스의 시대에는 시즌 전체에 고정된 번호가 아니라 그날 선 자리에 따라 1번부터 11번을 다는 방식이었다. 2-3-5 대형에서 센터 포워드의 번호는 9번이고, 1961년 베른과 1962년 암스테르담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도 그는 공격진 한가운데의 9번 자리에 섰다. 대표팀에서도 대부분 9번이었으며, 1957년 5월 1일 벨파스트의 북아일랜드 원정처럼 인사이드 자리의 8번을 단 경기가 있다. 포르투갈은 그의 시대에 월드컵이나 유로 본선에 나가지 못해 대회 등록 번호는 남아 있지 않다.
대표 우승·준우승 경력
우승 5회: 1954-55, 1956-57, 1959-60, 1960-61, 1962-63
우승 7회: 1950-51, 1951-52, 1952-53, 1954-55, 1956-57, 1958-59, 1961-62
우승 2회: 1960-61, 1961-62 · 준우승: 1962-63
준우승: 1961년
주제 아구아스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 발롱도르1961년 10위 · 1962년 11위
- 유러피언컵 득점왕1960-61 시즌 · 11골
- 볼라 드 프라타 (프리메이라 디비장 득점왕)1951-52 시즌 · 28골 / 1955-56 시즌 · 28골 / 1956-57 시즌 · 30골 / 1958-59 시즌 · 26골 / 1960-61 시즌 · 27골
- 타사 드 포르투갈 득점왕1950-51 · 1952-53 · 1954-55 · 1957-58 시즌 (골 수 기록 미상)
참고 자료
- A 볼라: 25 anos sem o senhor José Águas(2025년 12월 10일): 본명과 출생, 루지타누 루비투(1948-1950), 1950년 9월 18일 리스본 도착과 「늘 벤피카 팬이었다」, 아틀레티쿠전 데뷔와 브라가전 네 골(득점 시각, 「최고의 골」), 플레이 스타일, 리그 득점왕 다섯 번의 골 수, 타사 드 포르투갈 득점왕 네 번, 아우스트리아 빈과 감독 경력.
- 옵세르바도르: José Águas, um nome único na Taça dos Campeões(후이 미겔 토바르, 2020년 8월 19일): 아버지와 루비투의 어린 시절, 로버트 허드슨 판매점의 타이피스트, 1950년 루비투 선발팀의 두 골과 테드 스미스, 구트만의 주장 지명, 베른 결승 전날 밤, 한 시즌에 우승·득점왕·주장을 모두 한 유일한 사람.
- 옵세르바도르: Benfica, os melhores 36 jogadores(후이 미겔 토바르, 2017년): 벤피카 1950-1963년 공식전 384경기 379골.
- 헤코르드: Até sempre, José Águas(2000년 12월 11일): 별세 장소와 경위, B 대표팀 데뷔 해트트릭과 1952년 11월 23일 성인 대표 데뷔, 대표팀 25경기의 승패, 우승 목록, 감독 경력, 에우제비우의 말.
- Portugoal: José Águas, Benfica's pre-Eusébio goal machine(2025년 11월 4일): 1950년 라틴컵 우승과 아프리카 순회, 콜루나와의 호흡, 플레이 스타일, 후이 아구아스와 레나 다구아.
- 헤코르드: Robert imita Eusébio: 1961년 6월 1일 타사 드 포르투갈 비토리아 드 세투발전, 결승 다음 날 2군과 나선 에우제비우의 공식전 첫 골.
- RSSSF: European Champions' Cup 1960-61, 1961-62, 1962-63, 1963-64: 경기별 득점자와 시각, 두 결승의 선발 명단과 주장, 1962년 결승 주심, 1960-61 득점 순위, 1963년 결승 명단, 아우스트리아 빈의 구르니크 자브제전.
- RSSSF: Intercontinental Club Cup 1961: 페냐롤과의 세 경기 결과와 명단.
- RSSSF: Portugal, International Results, Portugal, List of Topscorers: 대표팀 데뷔전과 마지막 경기, 경기별 득점, 잉글랜드전 전적, 볼라 드 프라타 다섯 번과 후이 아구아스의 1990-91 득점왕.
- RSSSF: European Footballer of the Year 1961, 1962: 발롱도르 1961년 10위, 1962년 11위.
- RSSSF: South American Trip of FK Austria 1963/64: 1964년 1월 인데펜디엔테전 골.
- 트랜스퍼마르크트: José Águas: 아우스트리아 빈의 리그·컵·유러피언컵 경기별 출전, 유러피언컵 통산, 대표팀 경기별 등번호와 주장 기록.
- 위키미디어 공용: Emblema Benfica 1930, FK Austria Wien (ancien logo): 기록 카드의 당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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