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 LEGEND

페르난두 페이로테우(Fernando Peyroteo)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스포르팅 역대 최다 득점자, 다섯 개의 바이올린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스포르팅 CP 공식전 334경기 544골, 경기당 1.6골이 넘는 페르난두 페이로테우. 앙골라에서 건너온 열아홉 살, 말 한마디로 지킨 스포르팅 입단, 레사전 9골과 1948년 열병 속 벤피카전 4골, 서른한 살의 고별사와 룩셈부르크의 밤까지. 클럽·대표팀 기록과 우승 경력을 정리한다.
가로 줄무늬 스포르팅 셔츠를 입은 페르난두 페이로테우가 웃으며 거대한 은빛 우승컵을 안은 흑백 채색 사진과 포르투갈 국기, 역대 최다 득점자 문구
거대한 「오 세쿨루」 우승컵을 안은 페르난두 페이로테우.
FIFA 로고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포르투갈 국기
PORTUGAL포르투갈 공화국República Portuguesa
UEFA 로고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

지구본 안에 방패가 든 포르투갈 축구 연맹 기관 로고
#FPF포르투갈 축구 연맹Federação Portuguesa de Futebol
다섯 방패가 든 십자 방패와 F.P.F. 글자의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
#POR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Seleção Nacional de Futebol | Seleção das Quinas (셀레상 다스 키나스; 다섯 방패의 대표팀)
편집자 평가

포르투갈 축구의 위대한 공격수를 꼽으면 에우제비우와 호날두가 먼저 나온다. 그러나 196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페르난두 페이로테우를 빼고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다. 스포르팅 CP 한 팀에서만 열두 시즌을 뛰며 공식전 334경기에서 544골을 넣었고, 리그 득점왕에 여섯 번 올랐다. 다섯 개의 바이올린 가운데 그는 '스트라디바리우스'로 불린 센터 포워드였다. 잉글랜드 축구사가 바비 찰턴 이전의 스탠리 매슈스를 따로 기억하듯, 필자는 포르투갈 축구사에서 페이로테우가 그 자리에 있다고 본다.

삥이FC 페르난두 페이로테우 평가

  1. 페이로테우의 기록은 숫자부터 비현실적이다. 스포르팅에서 공식전 경기당 1.6골이 넘고, 리그만 따지면 그보다 높다. 한 경기 9골, 8골, 6골을 넣은 날이 있었고 해트트릭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시대가 달라 지금 공격수와 단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같은 시대 같은 리그 안에서 그를 따라간 선수가 없었다는 점이 이 숫자의 무게를 말해 준다.

  2. 그의 무기는 쉽고 강하면서 정확한 슈팅이었다. 여기에 머리를 쓰는 능력, 골문 앞에서 자리를 잡는 감각, 상대 수비가 감당하기 어려운 체력이 더해졌다. 소년 시절 마른 몸을 키우려 체조와 수영, 조정과 농구까지 했던 시간이 그 몸을 만들었다. 필자는 페이로테우를 기교파 공격수라기보다 완성된 신체로 골을 찍어 내는 공격수로 본다. 다섯 바이올린의 섬세한 동료들이 공을 다듬어 주면, 마지막 음을 내는 사람이 그였다.

  3. 페이로테우의 경력에서 눈에 띄는 또 하나는 약속을 대하는 태도다. 스포르팅과 계약서를 쓰기도 전에 FC 포르투가 더 많은 돈을 내밀었지만, 이미 말로 약속했다며 거절했다. 은퇴할 무렵에는 보르도의 큰 제안도 만나지 않았다. 돈 때문에 사업 빚을 지고 서른한 살에 은퇴한 선수가 끝까지 지킨 것은 스포르팅이라는 이름이었다.

  4. 그의 이야기는 영광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대표팀 감독으로서는 단 두 경기 만에 물러났고, 노년에는 다리를 잃었다. 그래도 스포르팅은 2018년 그에게 회원번호 9번을 영구히 남겼다. 그가 늘 입던 등번호였다. 필자는 이 9번이 포르투갈 축구가 페이로테우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페르난두 페이로테우 프로필

포르투갈 국기PORTUGAL포르투갈 공화국República Portuguesa
본명
Fernando Baptista de Seixas Peyroteo de Vasconcelos
등록명
페르난두 페이로테우(Fernando Peyroteo)
출생
1918년 3월 10일
출생지
포르투갈령 앙골라 움파타
사망
1978년 11월 28일 · 향년 60세
사망지
포르투갈 리스본
포지션
센터 포워드
별명
스트라디바리우스
선수 경력
1937-1949년 (스포르팅 원클럽맨)
대표팀
1938-1949년 · 20경기 14골

앙골라의 체조 소년

페이로테우는 1918년 3월 10일 당시 포르투갈령이던 앙골라 남부의 움파타(Humpata; 앙골라 우일라주의 고원 도시)에서 태어났다. 포르투갈에서는 낯선 성은 할아버지 한 분이 스페인 카스티야 출신이라 생긴 것이다. 형들이 모사메드스 스포르팅 클럽에서 뛰었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스포르팅을 응원했다.

어린 페이로테우는 체격은 컸지만 몸이 단련되지 않아 살집이 있었다. 체육 교사의 권유로 체조를 시작해 2년 만에 제법 실력 있는 체조 선수가 됐고, 수영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조정과 농구도 했다. 그러나 가장 좋아한 것은 축구였다. 열네 살이던 1932년 모사메드스 아틀레티쿠 클럽(Atlético Clube de Moçâmedes)의 예비 팀에서 인사이드 포워드로 뛰기 시작했다. 1934년 중등학교에 진학하려고 사 다 반데이라(Sá da Bandeira; 지금의 앙골라 루방구)로 옮긴 뒤 센터 포워드가 됐고, 1936년부터는 루안다 스포르팅에서 한 시즌 16경기 23골을 넣으며 우승했다.

말 한마디로 지킨 스포르팅 입단

1937년 6월 26일, 열아홉 살의 페이로테우는 요양차 본국으로 돌아가는 어머니와 함께 리스본에 도착했다. 스포르팅에서 뛰던 앙골라 출신 친구 아니발 파시엔시아(Aníbal Paciência; 앙골라 출신의 스포르팅 선수)가 그를 구단에 소개했다. 구단 사람들은 이미 앙골라에서 온 득점왕의 소문을 알고 있었다. 페이로테우는 그 자리에서 스포르팅에서 뛰겠다고 약속했다. 계약서도 쓰지 않았고 돈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여름 동안 리스본 근교 신트라에 머물던 그에게 FC 포르투의 사람이 찾아와 큰돈을 제시했다. 페이로테우는 이미 스포르팅과 계약했다며 거절했다. 사실은 아직 서명 전이었지만, 그에게는 말로 한 약속이 계약서와 다르지 않았다.

8월의 첫 훈련에서 그는 다리가 떨렸다고 회고했다. 그런데도 전설적인 골키퍼 주앙 아제베두(João Azevedo; 스포르팅과 포르투갈 대표팀의 골키퍼)를 상대로 세 골을 넣었다. 헝가리 출신 감독 서보 요제프(Szabó József; 스포르팅을 이끈 헝가리 출신 감독)는 다른 선수들이 일주일에 두 번 훈련할 때 그를 네 번씩 따로 가르쳤고, 구단에 서둘러 계약하라고 말했다. 9월 12일 벤피카와의 대회 경기에서 데뷔해 두 골을 넣었고, 스포르팅은 5-3으로 이겼다. 첫 시즌 그는 공식전 30경기에서 57골을 넣었다.

다섯 개의 바이올린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초록과 흰색 가로 줄무늬 스포르팅 셔츠를 입은 선수 다섯 명이 잔디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나란히 앉은 흑백 사진
스포르팅 CP의 '다섯 개의 바이올린'. 가운데 공을 쥔 장신의 센터 포워드가 페이로테우다.

페이로테우는 스포르팅에서 두 세대의 공격진을 이끌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아돌푸 모랑, 피레자, 마누엘 소에이루, 주앙 크루스와 함께 뛰었고, 1946년부터는 제주스 코헤이아, 마누엘 바스케스, 주제 트라바수스, 알바누와 함께 ’다섯 개의 바이올린’을 이뤘다. 다섯 명의 패스와 움직임이 현악 합주처럼 맞아떨어진다는 이 이름에서, 페이로테우의 별명은 최고의 바이올린을 뜻하는 ’스트라디바리우스’였다.

다섯 바이올린이 함께한 세 시즌 동안 스포르팅은 리그 3연패를 이뤘고, 1947-48 시즌에는 포르투갈컵까지 차지했다. 기교가 뛰어난 두 인사이드 바스케스와 트라바수스가 공을 다듬고, 좌우 날개가 측면을 열면, 마지막에 골문을 여는 사람이 페이로테우였다.

레사전 9골, 그리고 벤피카

골대 앞에서 공중으로 몸을 날리는 줄무늬 셔츠의 공격수와 막아서는 골키퍼, 공이 골문 위로 떠 있는 흑백 사진
골문 앞에서 몸을 날리는 페이로테우. 강하고 정확한 슈팅에 머리를 쓰는 능력까지 갖춘 센터 포워드였다.

1942년 2월 22일, 페이로테우는 레사 FC(Leça Futebol Clube)와의 리그 경기에서 혼자 9골을 넣었다. 스포르팅은 15-0으로 이겼다. 포르투갈 선수가 리그 한 경기에서 넣은 최다 득점 기록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보아비스타를 상대로는 8골을 넣었고, 한 경기 6골도 여러 번이었다. 1944년 6월 10일 리스본 국립경기장(Estádio Nacional; 1944년 문을 연 포르투갈 국립경기장) 개장 경기에서는 이 경기장의 첫 골을 넣었다. 스포르팅은 벤피카를 3-2로 꺾고 타사 임페리우(Taça Império; 국립경기장 개장을 기념한 대회, 오늘날 수페르타사의 첫 대회로 친다)를 차지했다.

줄무늬 셔츠의 스포르팅 선수가 공을 몰고 어두운 셔츠의 상대 선수 두 명 사이를 파고드는 흑백 경기 사진
상대 수비 사이로 파고드는 페이로테우. 리스본 더비에서만 60골 넘게 넣었다.

벤피카는 그가 가장 좋아한 상대였다. 리스본 더비에서 60골 넘게 넣었다. 그 가운데서도 1948년 4월 24일은 특별하다. 우승하려면 벤피카 원정에서 세 골 차 이상으로 이겨야 했고, 페이로테우는 전날 밤 열에 시달렸다. 그는 경기에 나서 혼자 네 골을 넣었고, 스포르팅은 4-1로 이겨 우승을 차지했다. 이 우승으로 스포르팅은 거대한 은빛 트로피 「타사 오 세쿨루(Taça O Século; 리스본 일간지 『오 세쿨루』가 리그 우승 팀에 준 트로피)」의 첫 주인이 됐다. 이 글의 대표 사진에서 그가 안고 있는 우승컵이다.

거친 더비에서 그는 한 번 퇴장을 당하기도 했다. 그를 막지 못한 벤피카 수비수가 반칙을 거듭하다 어머니를 모욕하자 주먹을 날린 것이다. 평소 깨끗하기로 이름난 선수였던 만큼 오래 회자된 장면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한 대표팀 20경기

페이로테우는 스포르팅에서의 첫 시즌인 1938년 4월 24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과의 친선 경기에서 대표로 데뷔했다. 포르투갈이 독일 원정에서 비긴 이 경기는 골키퍼 아제베두가 ’프랑크푸르트의 고양이’라는 별명을 얻은 날로 기억된다. 공격수가 빛날 날은 아니었지만, 페이로테우는 이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49년까지 대표팀에서 20경기 14골을 넣었다. 국제 경기가 드물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대표팀 경기가 끊긴 시절이라 경기 수는 많지 않다. 당시 포르투갈은 유럽의 강호들과 겨룰 만한 팀이 아니었기에, 그의 득점력이 큰 무대에서 시험받을 기회도 적었다.

서른한 살의 고별사

줄무늬 셔츠의 공격수가 오른발을 높이 들어 슈팅하고 어두운 셔츠의 수비수들이 막아서는 흑백 경기 사진
슈팅하는 페이로테우. 열두 시즌 내내 스포르팅의 팀 내 최다 득점자였다.

1948-49 시즌 페이로테우는 리그 40골을 넣으며 스포르팅의 3연패를 이끌었다. 그리고 1949년, 서른한 살에 갑자기 은퇴를 결정했다. 리스본에 차린 스포츠용품점이 빚을 남기자 당시 관례대로 고별 경기를 열어 그 수익으로 빚을 갚으려 한 것으로 전한다. 이 무렵 그는 프랑스 보르도가 보낸 사람들의 큰 제안도 만나지 않았다. 9월 25일 아틀레티쿠 CP와의 대회 경기가 스포르팅에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1949년 10월 5일 고별 경기 날, 그는 스포르팅 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국가 스포츠의 대열에 선 병사였고, 병사는 어떤 임무든 어떤 상황이든 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제가 늙은 병사임을 인정합니다. 몸을 만들어 클럽과 이 종목에 쓸모 있는 선수로 남기 위한 준비를 더는 감당하지 못합니다. 경기장에 들어설 때는 뛰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공을 대여섯 번 차고 나면 설명할 수 없는 지겨움이 저를 덮칩니다.

Fui soldado nas fileiras do desporto nacional e um soldado não foge ao cumprimento do seu dever, seja qual for e em que circunstâncias for! Mas de hoje em diante, reconheço que sou um soldado velho... Não posso corresponder às exigências de preparação de um jogador de futebol que queira manter-se em forma e ser útil ao seu clube e à modalidade que pratica. Quando entro em campo, vou cheio de vontade de jogar, mas, depois de meia dúzia de pontapés na bola, apodera-se de mim um enfastiamento inexplicável.

- 페르난두 페이로테우가 1949년 10월 고별 경기 날 스포르팅 팬들에게

그가 떠난 1949-50 시즌, 스포르팅은 리그 4연패를 놓쳤다. 많은 이들이 페이로테우의 이른 은퇴를 그 이유로 꼽았다.

룩셈부르크의 밤, 그리고 영구 회원번호 9번

은퇴 뒤에도 사업은 잘 풀리지 않았다. 페이로테우는 앙골라로 돌아갔다가 다시 포르투갈로 왔고, 1961-62 시즌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두 경기가 전부였다. 1961년 10월 1962 월드컵 예선 룩셈부르크 원정에서 2-4로 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열아홉 살의 에우제비우가 처음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바로 그 경기였다. 거센 비판 속에 그는 축구계를 완전히 떠났다.

말년은 더 가혹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은퇴 선수 경기에서 다친 뒤 수술이 잘못돼, 끝내 한쪽 다리를 잘라 내야 했다. 1978년 11월 28일, 그는 리스본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예순 살이었다.

스포르팅 관중석에 걸린 PEYROTEO 635 GOALS SIMPLY THE BEST 현수막과 한 구단에서 500골을 넣은 선수들을 적은 현수막
알발라드 관중석에 걸린 현수막. 스포르팅 팬들은 지금도 페이로테우를 '최고'라 부른다.

스포르팅은 그를 잊지 않았다. 1997년 구단 공로상인 스트롬프상(Prémio Stromp; 스포르팅 CP가 해마다 시상하는 공로상)을 ‘사우다드’ 부문에서 그에게 줬고, 창단 100주년이던 2006년 그의 88번째 생일에는 기념 명판을 세웠다. 2018년 2월 3일에는 구단 총회가 만장일치로 그에게 회원번호 9번을 영구히 부여했다. 그가 늘 입던 등번호를 기리는 결정이었다.

역대 클럽·국대 기록

1930-1945년 스포르팅 CP 문장스포르팅 CP1937-1949334경기 · 544골
1935-1960년 포르투갈 대표팀 다섯 방패 문장포르투갈 대표팀1938-194920경기 · 14골

스포르팅은 리스본 선수권 등 지역 공식전을 포함한 합계다. 리그만 세면 197경기 332골이며 자료에 따라 190경기 336골로도 적는다. 다른 집계는 공식전 323경기 556골, 친선 경기를 포함하면 415경기 693골이다. 대표팀은 성인 A매치 기준이며 자료에 따라 13골 또는 15골로 센다. 앙골라에서 뛴 모사메드스 아틀레티쿠(1932-1934), 사 다 반데이라 아카데미쿠(1934-1936), 루안다 스포르팅(1936-1937)은 지역 리그 시절이라 카드에서 뺐다. 문장은 페이로테우가 뛰던 시기에 스포르팅과 대표팀이 쓰던 것이다.

역대 등번호

클럽

소속팀확인 기간등번호
스포르팅 CP1937-38~1948-49 시즌9

국가대표팀

대표팀확인 대회·기간등번호
포르투갈1938-1949년 A매치9

2-3-5 대형의 포지션 번호로, 센터 포워드는 9번이다. 스포르팅은 2018년 그가 늘 입던 이 번호를 기려 회원번호 9번을 영구히 부여했다. 경기마다 포지션에 따라 번호를 받던 시대라 고정 등번호는 없었다.

대표 우승·준우승 경력

프리메이라 디비장Primeira Divisão · 현재의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 5회: 1940-41, 1943-44, 1946-47, 1947-48, 1948-49

타사 드 포르투갈Taça de Portugal

우승 4회: 1940-41, 1944-45, 1945-46, 1947-48

캄피오나투 드 포르투갈Campeonato de Portugal · 타사 드 포르투갈의 전신

우승: 1937-38

타사 임페리우Taça Império · 현재의 수페르타사 칸디두 드 올리베이라

우승: 1944년

리스본 선수권Campeonato de Lisboa

우승 8회: 1937-38, 1938-39, 1940-41, 1941-42, 1942-43, 1944-45, 1946-47, 1947-48

페르난두 페이로테우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 볼라 드 프라타 (프리메이라 디비장 득점왕)1937-38 시즌 · 34골 / 1939-40 시즌 · 29골 (공동) / 1940-41 시즌 · 29골 / 1945-46 시즌 · 39골 / 1946-47 시즌 · 43골 / 1948-49 시즌 · 40골
  • 스포르팅 CP 역대 최다 득점자공식전 544골
  • 포르투갈 1부 리그 역대 최다 득점자리그 332골 (자료에 따라 336골)
  • 스포르팅 CP 스트롬프상1997년 · 사우다드 부문 (구단을 빛낸 이에게 주는 스포르팅 공로상)

참고 자료

  • 위키스포르팅: Fernando Peyroteo: 앙골라 시절과 체조·수영, 파시엔시아의 소개와 FC 포르투 제안 거절, 첫 훈련과 서보 감독, 계약 조건, 두 세대 공격진과 '스트라디바리우스', 레사전 9골·보아비스타전 8골, 국립경기장 첫 골, 1948년 벤피카전 4골, 더비 퇴장 일화, 프랑크푸르트 데뷔전, 사업 빚과 은퇴, 고별사 포르투갈어 원문, 대표팀 감독 두 경기, 다리 절단, 1997년 스트롬프상과 2018년 회원번호 9번, 여러 기준의 통산 기록.
  • 포르투갈어 위키백과: Fernando Peyroteo: 출생과 사망, 데뷔전, 1948년 4월 24일 벤피카 원정과 첫 타사 오 세쿨루, 1942년 2월 22일 레사전 15-0, 2006년 명판과 2018년 회원번호 9번, 우승 목록.
  • 영어 위키백과: Fernando Peyroteo: 공식전 544골, 시즌별 출전·득점표(리그 197경기 332골), 1938년 4월 24일 프랑크푸르트 데뷔, A매치 20경기 14골, 1961년 룩셈부르크 원정과 에우제비우 데뷔.
  • 영어 위키백과: Bola de Prata (Portugal): 여섯 차례 볼라 드 프라타와 시즌별 득점.
  • 옵세르바도르: Quem eram os Cinco Violinos: 다섯 개의 바이올린의 구성과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별명.
  • 본문 사진: 골문 앞 장면은 Planète Sporting, 1942년 슈팅 장면은 Leonino, 경기 장면은 Bola na Rede, 관중석 현수막은 Sporting 1906 dos Adeptos 게재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