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 LEGEND

제주스 코헤이아(Jesus Correia)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축구와 롤러하키를 함께 정복한 다섯 개의 바이올린 오른쪽 날개

스포르팅 '다섯 개의 바이올린'의 오른쪽 윙어이자 롤러하키 세계 챔피언 제주스 코헤이아. 링크장에서 서보 감독의 눈에 띈 발견, 1945년 포르투갈컵 결승골, 마드리드에서 넣은 여섯 골, 스물여덟에 내린 선택까지. 클럽·대표팀 기록과 우승 경력을 정리한다.
가로 줄무늬 스포르팅 셔츠를 입고 웃는 제주스 코헤이아의 사진과 포르투갈 국기, 다섯 개의 바이올린 문구
스포르팅 CP의 가로 줄무늬 셔츠를 입은 제주스 코헤이아.
FIFA 로고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포르투갈 국기
PORTUGAL포르투갈 공화국República Portuguesa
UEFA 로고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

지구본 안에 방패가 든 포르투갈 축구 연맹 기관 로고
#FPF포르투갈 축구 연맹Federação Portuguesa de Futebol
다섯 방패가 든 십자 방패와 F.P.F. 글자의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
#POR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Seleção Nacional de Futebol | Seleção das Quinas (셀레상 다스 키나스; 다섯 방패의 대표팀)
편집자 평가

제주스 코헤이아는 주말에는 스포르팅의 오른쪽 날개로 축구를 하고, 주중에는 고향 클럽에서 롤러하키를 했다. 두 종목 모두 포르투갈 대표로 뛰었고, 롤러하키로는 세계 정상에 여러 번 올랐다. 축구에서는 '다섯 개의 바이올린'의 오른쪽 끝을 맡아 스포르팅의 리그 우승 일곱 번을 함께했다. 빠른 발과 결정력을 함께 갖춘 그를 두고 포르투갈 사람들은 '두 사랑의 사나이'라 불렀다. 필자는 한 사람이 두 종목의 정상에 동시에 서 있던 이 이야기를 1940년대 포르투갈 스포츠에서 가장 특별한 장면으로 꼽는다.

삥이FC 제주스 코헤이아 평가

  1. 다섯 개의 바이올린을 오른쪽부터 읽으면 첫 번째가 코헤이아다. 오른쪽 날개로 측면을 열고, 기회가 오면 직접 골문 안으로 파고들었다. 원래 센터 포워드로 축구를 시작한 선수라 문전에서의 마무리가 날카로웠다. 스포르팅에서 공식전 208경기 159골이라는 기록은 윙어의 숫자로 보기 어렵다.

  2. 그의 무기는 속도였다. 롤러하키 링크에서 다진 순발력과 균형 감각이 잔디 위에서도 통했다. 필자는 코헤이아의 플레이를 측면 돌파와 결정력을 함께 가진 현대 윙어의 원형으로 본다. 그 시대의 오른쪽 날개가 대개 크로스를 올려 주는 사람이었다면, 코헤이아는 크로스를 받는 쪽에도 자주 서 있었다.

  3. 1948년 9월 마드리드에서 아틀레티코를 상대로 넣은 여섯 골은 그의 경력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그날 페이로테우는 골을 양보하고 도움을 주는 쪽으로 물러섰다. 다섯 바이올린이 한 사람을 위해 연주를 바꿀 수 있었다는 것이 이 공격진의 진짜 힘이었다.

  4. 스물여덟에 축구를 그만두고 롤러하키를 고른 결정은 지금 보면 아깝다. 그러나 필자는 그 선택에서 오히려 이 선수의 크기를 본다. 두 종목 어디에서도 정상에 설 수 있었기에 고를 수 있었던 길이다.

제주스 코헤이아 프로필

포르투갈 국기PORTUGAL포르투갈 공화국República Portuguesa
본명
António Jesus Correia
등록명
제주스 코헤이아(Jesus Correia)
출생
1924년 4월 3일
출생지
포르투갈 파수 드 아르쿠스
사망
2003년 11월 30일 · 향년 79세
대표 국적
포르투갈
포지션
오른쪽 윙어 · 센터 포워드
별명
네카스 · 두 사랑의 사나이
선수 경력
1943-1956년
대표팀
1947-1952년 · 13경기 3골

링크장에서 발견된 공격수

코헤이아는 1924년 4월 3일 리스본 서쪽 해안의 파수 드 아르쿠스(Paço de Arcos; 리스본 근교 오에이라스의 해안 마을)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에 동네 클럽에서 축구를 시작했고, 좋아하던 벨레넨스(Clube de Futebol Os Belenenses; 리스본의 구단)를 찾아갔지만 열다섯 살이라 공식 경기에 나설 수 없었다. 우상이던 아우구스투 실바(Augusto Silva; 벨레넨스와 포르투갈 대표팀의 하프백)는 1년 뒤에 다시 오라고 했다.

그 1년 사이 롤러하키(hóquei em patins;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하는 하키)가 그의 삶에 들어왔다. 1937년 창단한 파수 드 아르쿠스 하키 클럽에서 금세 중심 선수가 됐고, 클럽은 1942년 전국 챔피언에 올랐다. 그래도 축구를 잊지 못해 마을의 다른 클럽에서 축구를 하자, 하키 클럽은 하키만 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하게 했다.

그를 축구로 다시 데려온 사람은 스포르팅 감독 서보 요제프(Szabó József; 스포르팅을 이끈 헝가리 출신 감독)였다. 파수 드 아르쿠스 근처에 살던 서보가 하키 링크에서 그를 보고 ’이상적인 운동선수’라고 점찍었다고 전한다. 이스토릴도 영입전에 끼어들었지만, 그가 일하던 식료품 도매 조합의 상사가 스포르팅 간부였던 덕에 행선지는 스포르팅이 됐다. 하키 클럽은 총회까지 열어서야 두 종목을 함께 하도록 허락했다. 1943년, 계약금은 12콘투였다.

주말엔 스포르팅, 주중엔 하키

이후 코헤이아의 일주일은 둘로 나뉘었다. 주말에는 스포르팅에서 축구를, 주중에는 파수 드 아르쿠스에서 롤러하키를 했다. 두 대표팀이 동시에 그를 부를 때가 가장 곤란했고, 해외 하키 원정 때문에 스포르팅 경기를 놓치면 비행기를 타고 혼자 서둘러 돌아오기도 했다.

붉은 유니폼과 초록 유니폼을 입은 롤러하키 선수들이 스틱을 들고 정장 차림 남성과 함께 두 줄로 선 채색 단체 사진
롤러하키 포르투갈 대표팀과 함께한 제주스 코헤이아. 그는 축구와 롤러하키 두 종목에서 모두 국가대표로 뛰었다.

롤러하키에서 그는 포르투갈 대표로 세계 정상에 여러 차례 올랐다. 자료에 따라 세계선수권 우승을 여섯 번, 혹은 유럽·세계 선수권 우승을 다섯 번으로 센다. 축구에서는 첫 시즌 스포르팅의 리그 우승을 함께했고, 이듬해부터 스포르팅의 전설적인 오른쪽 날개 아돌푸 모랑(Adolfo Mourão; 1930-40년대 스포르팅의 윙어)의 자리를 물려받아 주전이 됐다. 원래 센터 포워드였던 그는 오른쪽 날개로 자리를 옮겼고, 필요할 때마다 다시 중앙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영광의 날은 1945년 포르투갈컵 결승이었다. 부상으로 치료를 거듭하며 나선 이 경기에서 그는 경기 종료 몇 분 전 결승골을 넣었고, 스포르팅은 올랴넨스(Sporting Clube Olhanense; 알가르브 지방의 구단)를 1-0으로 꺾었다.

마드리드의 여섯 골

초록과 흰색 가로 줄무늬 스포르팅 셔츠를 입은 선수 다섯 명이 잔디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나란히 앉은 흑백 사진
스포르팅 CP의 '다섯 개의 바이올린'. 오른쪽 날개 코헤이아, 바스케스, 페이로테우, 트라바수스, 왼쪽 날개 알바누가 1946년부터 세 시즌 동안 함께 공격진을 이뤘다.

1946년 다섯 개의 바이올린이 완성되면서 코헤이아는 그 오른쪽 끝에 섰다. 바로 안쪽의 마누엘 바스케스와 센터 포워드 페르난두 페이로테우가 공을 주고받으면, 코헤이아가 측면에서 속도를 붙여 골문으로 들어갔다. 1946-47 시즌 그는 리그 28골을 넣으며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1948년 9월 5일, 스포르팅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초청을 받아 개보수를 마친 메트로폴리타노 경기장(Estadio Metropolitano; 당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홈구장)의 기념 경기에 나섰다. 시즌 첫 경기라 양 팀 모두 몸이 덜 풀린 상태였지만, 다섯 바이올린은 그날 코헤이아를 위해 연주했다. 9분 만에 페이로테우의 패스를 받아 골키퍼까지 제치고 첫 골을 넣었고, 20분과 32분에도 페이로테우와 주고받은 끝에 골을 보탰다. 34분에는 알바누의 패스로 네 번째 골을 넣었고, 후반 시작 4분 만에 다섯 번째, 후반 중반에는 바스케스가 수비를 모두 제치고 내준 공으로 여섯 번째 골을 넣었다. 스포르팅은 6-3으로 이겼고, 마드리드 관중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평소 골을 도맡던 페이로테우가 그날만큼은 도움을 주는 쪽으로 물러섰다.

스물여덟의 선택

코헤이아는 포르투갈 축구 대표팀에서 1947년부터 13경기에 나서 3골을 넣었다. 그러나 두 대표팀이 겹칠 때면 축구 쪽이 양보하는 일이 많았다. 1951-52 시즌이 끝날 무렵 그는 롤러하키 대표팀에 뽑혀 스포르팅의 포르투갈컵과 라틴컵 경기를 놓쳤고, 스포르팅은 결국 그에게 한 종목을 고르라고 했다.

1952년, 스물여덟의 코헤이아는 롤러하키를 골랐다. 고향 클럽은 그가 집을 사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서른이 가까워지는 나이에 운동 능력을 유지하기에는 하키가 덜 힘들다고 설명했지만, 스포르팅 팬들은 믿기 어려워했다. 스포르팅에서 남긴 기록은 공식전 208경기 159골, 리그 우승 일곱 번이었다. 1955-56 시즌에는 서른한 살의 나이로 CUF에서 잠시 축구를 다시 하기도 했다.

마지막 바이올린

코헤이아는 평생 스포르팅과 가까이 지냈다. 1993년 구단 공로상인 스트롬프상(Prémio Stromp; 스포르팅 CP가 해마다 시상하는 공로상)을 ‘사우다드’ 부문에서 받았고, 스포르팅 금메달도 받았다. 2000년 6월 29일에는 포르투갈 대통령이 그에게 엔히크 왕자 훈장(Ordem do Infante D. Henrique; 포르투갈의 국가 훈장) 코멘다도르 등급을 수여했다.

2003년 8월, 새 알발라드 경기장이 문을 열던 날 그는 시축을 맡았다. 다섯 개의 바이올린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었다. 그날 경기에서 가장 빛난 선수는 열여덟 살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였다. 측면에서 빠르게 치고 들어가 골까지 넣는 오른쪽 날개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꽤 닮아 있었다. 그해 11월 30일, 코헤이아는 세상을 떠났다.

역대 클럽·국대 기록

1945-2001년 스포르팅 CP 문장스포르팅 CP1943-1952208경기 · 159골
1944-1977년 CUF 바헤이루 문장GD CUF (현 GD 파브릴)1955-19562경기 · 1골
1935-1960년 포르투갈 대표팀 다섯 방패 문장포르투갈 대표팀1947-195213경기 · 3골

스포르팅은 리스본 선수권 등 지역 공식전을 포함한 합계이며, 리그만 세면 157경기 127골이다. 자료에 따라 공식전 득점을 160골로 적기도 하며, 1952년 은퇴는 1952-53 시즌 도중이었다. CUF는 리그 기준이고, 대표팀은 성인 A매치 기준으로 자료에 따라 2골로 세기도 한다. 롤러하키 기록은 축구 카드에 넣지 않았다. 문장은 코헤이아가 뛰던 시기에 각 구단과 대표팀이 쓰던 것이다.

역대 등번호

클럽

소속팀확인 기간등번호
스포르팅 CP1943-44~1952-53 시즌7 · 9
GD CUF1955-56 시즌확인되지 않음

국가대표팀

대표팀확인 대회·기간등번호
포르투갈1947-1952년 A매치7

2-3-5 대형의 포지션 번호다. 오른쪽 윙어는 7번, 센터 포워드는 9번이며, 코헤이아는 주로 7번 자리에서 뛰고 필요할 때 9번 자리로 들어갔다. 경기마다 포지션에 따라 번호를 받던 시대라 고정 등번호는 없었다.

대표 우승·준우승 경력

프리메이라 디비장Primeira Divisão · 현재의 프리메이라 리가

우승 7회: 1943-44, 1946-47, 1947-48, 1948-49, 1950-51, 1951-52, 1952-53

타사 드 포르투갈Taça de Portugal

우승 3회: 1944-45, 1945-46, 1947-48

제주스 코헤이아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국가 수훈

포르투갈 공화국 엔히크 왕자 훈장 · 코멘다도르Comendador · ComIH · 2000년

  • 스포르팅 CP 스트롬프상1993년 · 사우다드 부문 (구단을 빛낸 이에게 주는 스포르팅 공로상)
  • 스포르팅 CP 금메달구단 공로 메달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