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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F 피오렌티나 문장

ACF 피오렌티나

Associazione Calcio Firenze Fiorentina Società a responsabilità limitata
ASSOCIAZIONE CALCIO FIRENZE FIORENTINA · LA VIOLA 1926-2026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랑키 · 세리에 A 우승 2회 · 코파 이탈리아 6회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회

ACF 피오렌티나 역대 최고의 전설 열한 명과 후보 서른, 마흔한 개의 이름을 필자의 견해로 골랐다.

축구는 예술이 될 수 있는가

축구는 예술이 될 수 있는가.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도시가 하나 있다.

이탈리아 중부, 르네상스의 숨결이 남아 있는 도시 피렌체(Firenze). 그곳에는 다빈치의 설계도와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단테의 시가 잠들어 있고, 보라색 유니폼을 입은 예술가들이 있었다.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랑키(Stadio Artemio Franchi)가 그들의 캔버스였으며, 그들의 이름이 ACF 피오렌티나다.

늘 위대한 팀은 못 됐다. 우승도 적었고, 재정은 불안했으며, 가끔은 강등당하기도 했다. 허나 전 세계 축구 역사에서 “가장 우아했던 순간”을 떠올릴 때, 사람들은 종종 피렌체를 기억했다.

구단은 1926년 8월 29일에 태어났다. 피렌체의 두 구단 팔레스트라 진나스티카 피오렌티나 리베르타스와 클룹 스포르티보 피렌체가 하나로 합친 날이다. 첫 셔츠는 합친 두 구단의 색을 따라 붉은색과 흰색을 나눈 것이었고, 보라색은 1929년 9월 22일 AS 로마와의 친선 경기에서 처음 입었다. 빨래를 잘못해 물이 들었다는 전설이 전하지만 구단의 설명은 다르다. 당시 회장이 헝가리의 우이페슈트를 닮은 옷을 입히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그 뒤로 이탈리아는 이 구단을 색의 이름 그대로 비올라(Viola)라 부른다. 문장 한가운데 놓인 붉은 백합은 피렌체시의 상징에서 왔다. 1931년 9월 13일에는 건축가 피에르 루이지 네르비가 설계한 새 경기장이 문을 열었고, 뒷날 아르테미오 프랑키라는 이름을 얻는 그 경기장이 지금까지 구단의 집이다.[1]

진열장은 넓지 않다. 세리에 A 우승, 곧 스쿠데토(scudetto)가 둘이고 코파 이탈리아가 여섯,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이 하나다. 2위는 그보다 많다. 1956-57시즌부터 네 시즌을 내리 2위로 마쳤고, 1957년 5월 30일에는 이탈리아 구단으로는 처음 유러피언컵 결승에 올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레알 마드리드에 0-2로 졌다. 1982년에는 마지막 날 승점 1점이 모자랐다. 1993년에는 55년 만에 2부로 떨어졌고, 2002년 8월 1일에는 빚을 감당하지 못해 리그에서 제명된 뒤 플로렌티아 비올라(Florentia Viola)라는 이름으로 4부에서 다시 시작했다.[1]

잔카를로 안토뇨니. “피렌체의 심장”이라 불린 그는 승리보다 충성심을 선택했고, 마치 도시 그 자체처럼 한결같았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피렌체의 신(神)“으로 불렸던 그는 스쿠데토를 한 번도 안겨주지 못했지만, 그의 눈물은 수많은 팬들에게 영원한 승리보다 깊은 감동이었다.

이 팀은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랑받은 팀”이었다. 하여 이번 명단은 숫자와 기록에 앞서 ’남긴 울림’의 크기를 보고 골랐다.

이 글의 초고는 2025년 5월 25일에 썼다. 그 뒤의 한 해 반은 피렌체에 유난히 길었다. 2025년 여름 라파엘레 팔라디노(Raffaele Palladino; 이탈리아 감독, 1984-) 감독이 물러나고 스테파노 피올리(Stefano Pioli; 이탈리아 감독, 1965-)가 돌아왔는데, 팀은 리그 첫 열 경기를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채 최하위로 내려앉았다. 구단 역사에서 가장 나쁜 출발이었다. 피올리는 11월 4일에 해임됐고 사흘 뒤 파올로 바놀리가 지휘봉을 받았다. 2026년 1월 16일에는 2019년부터 구단을 이끌던 회장 로코 코미소(Rocco Commisso; 이탈리아 태생의 미국 기업인, 1949-2026)가 일흔여섯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들 주세페가 그 자리를 이었다. 팀은 후반기에만 승점 29를 모아 15위로 살아남았다.[2]

그리고 2026년 8월 29일, 구단은 100살이 됐다. 낮에는 훈련장 비올라 파크에 옛 선수 삼백여 명이 모였고 저녁에는 프랑키에서 리그 경기가 열렸다. 바티스투타와 후이 코스타, 톨도(Francesco Toldo)와 토니가 관중석에서 지켜본 그 경기를 팀은 프로시노네에 0-3으로 내줬다.[2]

열한 명을 부르기에 앞서 세 사람을 먼저 세운다.

안토뇨니·후이 코스타·바티스투타: 10번, 10번, 9번

맨 앞에 세우는 이름이 셋이다. 등번호로 적으면 10번과 10번과 9번. 세 사람이 피렌체에서 든 스쿠데토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이 도시가 심장이라, 마에스트로라, 신이라 부른 선수는 이 셋에서 나왔다.

10잔카를로 안토뇨니1972-1987

429경기 72골

남았다. 열다섯 해 동안 다른 셔츠를 입지 않았다.
10후이 코스타1994-2001

276경기 50골

팔려 갔다. 구단의 빚을 메우는 값이 그였다.
9가브리엘 바티스투타1991-2000

333경기 207골

떠났다. 2부까지 따라 내려갔다 온 뒤였다.

안토뇨니는 남은 사람이다. 1972년 열여덟에 와서 1987년까지 열다섯 해를 있었다. 떠날 길은 두 번 열렸다. 1977년 유벤투스와의 이적은 성사 직전에 깨졌는데, 피오렌티나의 회장이 집을 날려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은 탓이었다. 납의 시대(anni di piombo)라 불리던 때의 일이다. 1980년에는 AS 로마가 나섰다. 감독 닐스 리드홀름(Nils Liedholm; 스웨덴 미드필더, 1922-2007)이 그를 원했고, 회장 디노 비올라는 그를 집으로 불러 스페인 광장의 펜트하우스까지 내걸었으며, 로마 사람인 아내 리타도 가자는 쪽이었다. 그는 가지 않았다. 일흔 살이 된 2024년 봄 그는 4부 리그에서 뛰던 자신을 불러 준 구단과, 첫날부터 자신을 귀하게 대해 준 팬들에게 갚을 빚이 있었노라고 말했다.[3]

피렌체가 주는 애정이 내가 들지 못한 트로피를 갚아 준다.

L'affetto di Firenze mi ripaga dei trofei che non ho vinto.

잔카를로 안토뇨니가 일흔 살 생일에 자신의 열다섯 해를 두고

후이 코스타는 팔려 가며 운 사람이다. 2001년 6월 구단은 빚을 메우려고 그와 골키퍼 프란체스코 톨도를 묶어 1,400억 리라에 파르마로 넘기기로 합의했다. 두 사람은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리하여 그는 850억 리라에 AC 밀란으로, 톨도는 인테르로 갔고 구단이 받은 돈은 같았다. 7월 13일, 경기도 없는 프랑키에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같은 리그의 다른 구단으로 떠나는 선수를 배웅하러 온 이들이었다. 그는 눈이 부은 채 경기장을 돌며 손을 흔들었고 관중석도 같이 울었다. 스물아홉 살이었고, 피렌체의 일곱 해는 그가 한 구단에서 보낸 가장 긴 시간이었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도 구단은 버티지 못해 이듬해 여름 파산했다.[4]

바티스투타는 두 번 울었다. 한 번은 2000년 5월 14일, 시즌 마지막 날 프랑키의 베네치아전이다. 경기가 시작될 때 구단의 세리에 A 통산 득점은 쿠르트 함린이 151골, 그가 149골이었다. 그는 그날 세 골을 넣었고 마지막 골은 끝나기 8분 전에 나왔다. 그는 쿠르바 피에솔레(Curva Fiesole; 프랑키의 북쪽 골대 뒤 응원석) 앞 골문 안으로 달려들어 그물에 몸을 던지고는 잔디에 누워 울었다. 보라색 셔츠를 입고 넣은 마지막 골이었고, 그해 여름 그는 AS 로마로 갔다. 또 한 번은 11월 26일 로마의 올림피코다. 옛 팀을 상대로 끝나기 7분 전에 발리슛으로 톨도를 뚫었고, 동료들이 둘러싸고 끌어안는 가운데 그는 다시 울었다. 그 골이 결승골이었다.[5]

셋은 한 줄로 이어진다. 안토뇨니가 1987년에 10번을 벗었고 1991년에 바티스투타가 왔다. 1994년에는 구단 임원이 된 안토뇨니가 리스본에서 후이 코스타를 데려왔다. 그 뒤 여섯 시즌 동안 10번이 찔러 주고 9번이 넣었는데, 바티스투타가 그 여섯 시즌에 세리에 A에서 넣은 골만 123골이다.

이 구단의 기록표에는 이상하리만치 한 끗 차이가 많다.

기록앞선 쪽뒤선 쪽차이
구단 공식전 통산 득점함린 208골바티스투타 207골1골
구단 세리에 A 통산 득점바티스투타 152골함린 151골1골
1981-82시즌 세리에 A유벤투스 승점 46피오렌티나 승점 451점

함린은 이 글의 열 번째 자리에 있다. 셋째 줄의 1981-82시즌에 주장 완장을 찬 이가 안토뇨니였고, 벤치에 앉은 감독이 이 글의 여섯 번째 자리에 선 데시스티였다.

남은 사람과 팔려 간 사람과 떠난 사람을 이 도시는 가르지 않는다. 100번째 생일을 맞은 2026-27시즌에 구단은 한 해 동안 10번을 비워 안토뇨니에게 바쳤고, 팔려 간 10번과 떠난 9번은 그날 프랑키의 관중석에 앉아 있었다.[2]

보랏빛 신전.스쿠데토 하나 없이 피렌체의 신이 된 10번과 10번과 9번.

선정 전술: 두 번의 스쿠데토가 선 4-3-3

대형은 4-3-3이다. 골문에 알베르토시가 서고 그 앞의 넷은 왼쪽부터 체르바토, 페란테, 파사레야, 마니니다. 가운데 줄 맨 밑에 데시스티가 서며 그 앞 두 자리를 후이 코스타와 안토뇨니가 나눠 가진다. 맨 앞은 왼쪽에 줄리뉴, 가운데에 바티스투타, 오른쪽에 함린이다.

줄리뉴와 함린은 둘 다 오른쪽 날개였다. 함린부터가 1958년 줄리뉴가 떠난 자리를 메우러 온 선수다. 둘을 한 팀에 세우느라 줄리뉴가 왼쪽으로 건너갔다. 두 발을 다 쓰던 선수이니 그 자리가 낯설지는 않을 터다.

가운데 줄의 셋은 모두 피렌체의 10번이었다. 안토뇨니와 후이 코스타는 말할 것도 없고, 맨 밑의 데시스티도 두 번째 스쿠데토를 들던 해에 10번을 입었다.

열한 명은 네 시대에서 왔다.

1948-1960
체르바토 · 마니니 · 줄리뉴1955-56시즌 스쿠데토, 1957년 유러피언컵 결승
1958-1974
알베르토시 · 함린 · 페란테 · 데시스티1961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968-69시즌 스쿠데토
1972-1987
안토뇨니 · 파사레야1975년 코파 이탈리아, 1981-82시즌 2위
1991-2001
바티스투타 · 후이 코스타코파 이탈리아 두 번, 1996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Supercoppa italiana; 리그 우승 팀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 팀이 겨루는 대회)

완장으로 세어도 같은 이름들이 나온다. 1957년 마드리드의 결승에서는 체르바토가, 두 번째 스쿠데토에서는 데시스티가 주장이었다. 안토뇨니는 1976년부터 열한 해 동안 완장을 찼고, 1990년대의 주장 바티스투타가 떠나자 후이 코스타가 받았다. 첫 스쿠데토의 주장 로세타(Francesco Rosetta)는 서브 명단에 있다.

두 번의 스쿠데토는 열세 해를 사이에 두고도 닮았다. 두 팀 모두 한 시즌에 딱 한 번 졌다.

1955-56시즌1968-69시즌
감독풀비오 베르나르디니브루노 페사올라
성적34경기 20승 13무 1패30경기 16승 13무 1패
득점과 실점59골, 20실점38골, 18실점
2위와의 승점 차12점4점
우승을 정한 날1956년 5월 6일, 다섯 경기를 남기고1969년 5월 11일, 한 경기를 남기고
한 번의 패배마지막 날 제노아 원정 1-35라운드 홈 볼로냐전 1-3
이 글의 열한 명체르바토, 마니니, 줄리뉴페란테, 데시스티

1955-56시즌의 팀은 개막 뒤 서른세 경기를 지지 않다가 마지막 날에야 처음 졌다. 1968-69시즌의 팀은 원정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고, 우승을 확정한 곳이 유벤투스의 안방 토리노였다. 한편 알베르토시와 함린은 두 우승 사이의 열 해를 거의 꼬박 채우고도 스쿠데토를 받지 못했다. 함린은 1967년에, 알베르토시는 1968년에 팔려 갔고 팀은 1969년에 우승했다.[1]

1. 엔리코 알베르토시 - 골키퍼

엔리코 알베르토시 골키퍼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세리에 A 준우승 두 번은 1958-59시즌과 1959-60시즌이다. 1960-61시즌의 팀은 7위였다.

레프 야신과 비견되던 자.

이탈리아 골키퍼 역사에서 가장 ’기술적 완성도’가 높았던 인물 중 한 명이 엔리코 알베르토시(Enrico Albertosi; 이탈리아 골키퍼, 1939-)다. 동료들은 그를 리키(Ricky)라 불렀다.

토스카나 북쪽 끝의 폰트레몰리에서 태어나 스페치아에서 골문을 배웠다. 1958년 열여덟에 피오렌티나에 합류한 그는 공의 방향을 미리 읽어내는 독보적인 판단력,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밸런스 감각, 경기장 전체를 조율하는 리더십까지 갖춘 ’전술적 골키퍼’의 원형이었다.

처음 다섯 시즌은 기다림이었다. 골문에는 첫 스쿠데토의 골키퍼 줄리아노 사르티(Giuliano Sarti)가 버티고 있었고, 1959년 1월 18일 0-0으로 끝난 경기에서 세리에 A에 데뷔한 그가 그 다섯 시즌에 얻은 리그 경기는 서른 번에 그친다. 허나 컵 대회의 골문은 그의 것이었다. 피오렌티나가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 나간 사정부터 공교롭다. 1959-60시즌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졌는데, 리그와 컵을 함께 든 유벤투스가 출전을 사양하는 바람에 준우승팀에게 자리가 돌아왔다. 1961년 5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첫 대회의 결승에서 그는 두 경기를 다 뛰었다. 글래스고 원정에서 레인저스를 2-0으로, 피렌체에서 2-1로 이겼다. 이탈리아 구단이 유럽 대항전에서 든 첫 트로피로 꼽힌다. 그 결승을 치른 지 스무 날이 못 된 6월 15일에는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구단의 후보 골키퍼가 이탈리아 대표팀의 골문에 선 날이었고, 경기장은 공교롭게도 피렌체였다. 이탈리아가 아르헨티나를 4-1로 이겼다.

1960-61 시즌과 1965-66 시즌에 걸쳐 코파 이탈리아를 우승했고, 1960-61 시즌과 1961-62 시즌에는 2년 연속으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에 올랐으니 가히 1960년대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였다.

1963년 사르티가 인테르로 떠난 뒤로 다섯 시즌은 온전히 그의 골문이었다. 피렌체에서 남긴 것은 공식전 240경기이고 그 가운데 리그가 185경기, 그 185경기에서 내준 골이 153골이다. 성격은 불같고 숨기는 것이 없었다고 이탈리아의 기록은 적는다. 월드컵에는 네 번 나갔다.

소련의 레프 야신과 비교되는 시대의 대표 골키퍼였으며,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FIFA 월드컵 결승전까지 진출했던 그는 언제나 보랏빛 피렌체에 깊숙하게 새겨져 있다.

1968년 여름 그는 칼리아리로 팔려 갔다. 이듬해 봄 피오렌티나는 프랑코 수페르키(Franco Superchi)를 골문에 세우고 두 번째 스쿠데토를 들었다. 열 해를 지킨 골키퍼가 한 해 차이로 놓친 트로피다. 2018년 11월 구단 박물관은 그를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6]

2. 우고 페란테 - 센터백

우고 페란테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별명 줄 「폭격기 곤살로(Bomber Gonzalo)」와 246경기 25골은 페란테의 것이 못 된다.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뛴 아르헨티나 수비수 곤살로 로드리게스의 줄이 넘어온 것으로 읽었다. 페란테의 세리에 A 기록은 179경기 6골이다.

피렌체의 단단한 방패.

우고 페란테(Ugo Ferrante; 이탈리아 수비수, 1945-2004)는 기품과 품격을 지닌 리베로(libero)였다.

그는 파워풀하지 않았으나, 위협적인 공간을 먼저 제거하는 영리함, 수비수로서의 위치 감각, 그리고 깔끔한 대인마크를 통해 상대 공격수를 묶어두는 마법 같은 수비를 선보였다.

피에몬테의 베르첼리 사람이다. 고향 구단 프로 베르첼리의 유소년에서 자랐고 1963년 열여덟에 피렌체로 왔다. 1964년 5월 31일에 세리에 A 첫 경기를 치렀으며, 1966년에는 한 해에 트로피를 셋 들었다. 청소년 대회인 비아레조컵과 코파 이탈리아, 미트로파컵이다. 이탈리아의 기록은 그를 오랫동안 보라색 수비의 축이었다고 적는다. 그의 경력에는 눈에 띄는 숫자가 하나 더 있다. 선수 생활을 통틀어 출전 정지를 한 번도 받지 않았다는 기록이다. 맨 뒤에서 마지막 태클을 맡는 리베로가 그랬다.

특히 1968-69 시즌 세리에 A 우승은 페란테 없이는 상상조차 어려웠던 시즌일 것이다. 해당 시즌 ACF 피오렌티나는 30경기 16승 13무 1패의 성적표를 유지하면서 단 18실점만을 기록했는데 이 공은 대부분 우고 페란테의 몫이었다.

그 서른 경기를 그는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우승을 정한 1969년 5월 11일 토리노 원정도 무실점이었다. 키아루지(Luciano Chiarugi)와 마라스키가 한 골씩 넣어 2-0으로 이겼다. 서른 경기를 다 뛴 선수는 팀에 넷뿐이었으니 골키퍼 수페르키와 주장 데시스티, 공격수 마리오 마라스키(Mario Maraschi; 이탈리아 공격수, 1939-2020), 그리고 페란테다. 이듬해에는 챔피언 자격으로 유러피언컵에 나가 스웨덴의 외스테르와 소련의 디나모 키예프를 넘고 8강에서 셀틱에 막혔다.

전방으로 찔러주는 정확한 롱패스와 빌드업 시의 침착함까지 갖춘 그는 당대 ’현대적인 수비수’의 초석을 놓은 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명단에 들었으나 같은 자리의 피에르루이지 체라에게 밀려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대표팀 경기는 통틀어 세 번이다. 1971-72시즌 AS 로마 원정에서 상대 선수와 부딪쳐 크게 다쳤고, 쉬는 사이 대표팀으로 돌아갈 길도 닫혔다. 그 시즌 리그 출전은 여덟 번에 그쳤고 여름에 비첸차로 옮겼다. 비첸차에서 네 시즌을 더 뛰었으며, 장화를 벗은 뒤에는 고향 언저리에서 아마추어와 유소년을 가르쳤다. 2004년 11월 29일 고향 베르첼리에서 쉰아홉으로 세상을 떠났다. 2017년에는 첫 스쿠데토의 주장 로세타와 나란히 구단 박물관의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6]

3. 다니엘 파사레야 - 센터백

다니엘 파사레야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전 세계 역대 센터백 순위 권능의 영역, TOP 7 중 하나.

전 세계 역대 수비수 순위에서 프란츠 베켄바워(독일), 프랑코 바레시와 가에타노 시레아(이상 이탈리아), 바비 무어(잉글랜드), 호세 나사시(우루과이), 엘리아스 피게로아(칠레)와 함께 20세기부터 21세기에 걸쳐 권능의 영역 중 한 명이라 평가되는 이가 다니엘 파사레야(Daniel Alberto Passarella; 아르헨티나 수비수·감독, 1953-)다.

아르헨티나의 작은 거인 다니엘 파사레야는 CA 리버 플레이트와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을 세계 최강에 올려놓았고, 유럽 대륙의 ACF 피오렌티나에서도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에서 높은 라운드를 이끄는 위대한 활약을 보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주의 차카부코에서 태어나 1974년부터 여덟 해를 리버 플레이트에서 뛰었다. 수비수가 그 여덟 해에 리그 226경기에서 넣은 골이 91골이다. 1978년 자기 나라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트로피를 받았다. 별명이 셋이다. 위대한 주장(El Gran Capitán), 카이저(El Kaiser), 그리고 두목(El Caudillo).

팀 전체를 지휘하는 통치자로서 경기의 리듬을 조율하며, 전설의 중심에서 역사와 기세를 재단하는 지도자로서 그라운드 위에서 군림하던 수비수였다.

그는 “공격하는 센터백”의 원형으로서 프로 리그 451경기에서 134골을 때려 넣었을 만큼 엄청난 파괴력을 과시하던 수비수였다. 뒷날 로날트 쿠만이 넘어서기까지 수비수의 득점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숫자였다. 이는 곧 ’공격적 수비’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대에 스스로 개념이 된 인물임을 증명한다.

이탈리아의 기록은 그를 기술과 우아함, 절도 있는 태클을 한 몸에 지닌 수비수로 적는다. 공을 빼앗은 자리에서 곧장 공격을 다시 여는 데 능했다. 키는 173cm다. 그 키로 공중볼을 따냈다. 뛰어오르는 높이와 때를 재는 감각이 남달랐고, 왼발로는 프리킥과 페널티킥을 도맡았다.

1982년, 보란 듯이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에 입성한 다니엘 파사레야는 이탈리아 축구의 수비 중심주의 속에서 기술적 세련미, 지도력, 골 결정력까지 겸비한 유일무이한 존재로 활약했다. 스물아홉의 나이였고, 직전 시즌을 승점 1점 차 2위로 마친 팀이었다. 주장은 안토뇨니였다.

네 시즌 동안 139경기에서 35골을 넣었다. 리그로만 세면 109경기 26골이다. 1983-84시즌에 팀은 3위를 했다. 마지막 시즌인 1985-86시즌에는 리그에서만 열한 골을 넣었는데, 수비수가 세리에 A 한 시즌에 넣은 골로는 그때까지 가장 많았다. 그해 3월에는 극성팬들이 알도 아그로피(Aldo Agroppi; 이탈리아 미드필더·감독, 1944-2025) 감독에게 달려들자 그가 앞을 막아섰다.

그는 4시즌 동안 수많은 경기에서 센터백이 경기를 뒤흔들 수 있다는 진실을 몸소 증명하며 피렌체에서의 경력을 1986년에 마쳤다. 다음 행선지는 인테르였다.

수비수이되 지휘관이며, 전사이되 철학자였고, ‘존재감’ 하나로 경기장을 점유한 이름.

4. 세르조 체르바토 - 레프트백

세르조 체르바토 레프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별명 줄 「작은 새(L'Uccellino)」는 10번 함린 디자인과 같은 줄이다. 그 별명으로 불린 선수는 함린이다. 체르바토의 생일은 자료에 따라 3월 22일과 10월 22일로 갈린다.

공격하는 풀백의 시초.

수비수인데.. 상대 골문 앞에서 자주 등장하던 수비수..;;

세르조 체르바토(Sergio Cervato; 이탈리아 수비수, 1929-2005)는 ’풀백’이라는 포지션에 전혀 새로운 정의를 부여한 인물이다.

이탈리아 축구 역사에서 처음으로 득점 본능을 품은 레프트백, 처음으로 공격의 흐름을 전개한 수비수로서, 1960년대에 세계 축구를 지배할 인테르의 자친토 파케티에게는 스타일적 선배격 존재이기도 하다. 파케티는 전 세계 축구사 레프트백 계보에서 역대 TOP 3로 평가되는 이름이다.

파도바 근교 카르미냐노 디 브렌타의 농가에서 자랐다. 어릴 적 농기구에 오른손 엄지를 잃었다. 마을 팀에서 공을 차던 1946년, 그의 슛을 눈여겨본 이웃 구단의 감독이 아버지를 찾아가 아들을 농사일에서 놓아 달라고 오래 졸랐다. 열일곱에 레프트백으로 뛰기 시작한 그는 1948년 프로 구단을 찾아 이탈리아를 돌았고, 엄지 없는 손 때문에 입단 시험에서 한 번 떨어졌다. 그를 받아 준 구단이 피오렌티나였다.

1950년대, 보랏빛 혁명을 이끈 수비수. 1948년 피오렌티나에 입단한 체르바토는 이탈리아 축구가 아직도 철저한 수비와 마초적 수비진 중심에 머물러 있던 시기에, 유일하게 다른 시야를 가진 풀백이었다.

그의 플레이를 오버래핑이라는 말 하나로 정의하기엔 심심하다. 프리킥과 페널티킥을 도맡았고, 중거리 슈팅의 명수였으며, 경기장 전체를 조율하는 시야가 있었다.

숫자가 그 말을 받친다. 피렌체에서 보낸 열한 시즌에 세리에 A 316경기를 뛰어 31골을 넣었고, 공식전으로는 334경기다. 페널티킥으로 넣은 열아홉 골은 지금도 구단 역사에서 가장 많다. 페널티킥은 좀처럼 놓치는 법이 없었고, 프리킥은 잔디를 스치듯 낮게 깔아 찼다. 세리에 A 통산 45골은 수비수로는 파케티의 59골 다음이다. 그의 뒤를 이었다는 바로 그 파케티만이 그를 넘었다.

이 3박자를 고루 갖췄던 세르조 체르바토는 1955-56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견인했고, 이듬해에는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해 알프레도 디스테파노와 파코 헨토가 이끌던 레알 마드리드를 침몰 직전까지 몰아치기도 했다.

그 대회의 일곱 경기를 그는 모두 뛰었다. 결승에서는 주장 완장을 찼고, 팀은 69분에 페널티킥을 내주기까지 0-0으로 버텼다. 대표팀에는 1951년 포르투갈 원정 4-1 승리로 데뷔했고, 스물여덟 경기에 나가 네 골을 넣었으며 그 가운데 여섯 경기는 주장이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도 다녀왔다.

1959년 유벤투스로 떠났으나 은퇴 뒤에는 피렌체로 돌아와 구단의 유소년을 가르치고 선수를 찾으러 다녔다. 2005년 10월 9일 피렌체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단 박물관은 2015년 12월 그를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6]

5. 아르디코 마니니 - 라이트백

아르디코 마니니 라이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팬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내.

아르디코 마니니(Ardico Magnini; 이탈리아 수비수, 1928-2020)는 인격적으로도 존경받았고, 1950년대 피오렌티나에서 가장 사랑받던 남자 중 한 명이었다. 실력과 인품이 모두 빛났던 시대의 풀백이다.

1950년대 피렌체에서 안정감, 충직함, 그리고 품격의 대명사가 있었다면 바로 아르디코 마니니다.

피렌체에서 북서쪽으로 30km 남짓 떨어진 피스토이아 사람이다. 고향 구단 피스토이에세에서는 공격 쪽의 인사이드 포워드(inside forward; 센터 포워드 양옆에서 한 줄 내려와 뛰던 안쪽 공격수. 오늘날의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깝다)로 뛰며 2부 리그 78경기에서 열세 골을 넣었다. 1950년에 피오렌티나로 와서 1951년 1월 21일 나폴리를 2-0으로 이긴 홈 경기에서 세리에 A에 데뷔했고, 그해 6월 17일 우디네세전에서 첫 골을 넣었다. 그를 풀백으로 돌린 이는 루이지 페레로(Luigi Ferrero; 이탈리아 감독, 1904-1984) 감독이다. 1952-53시즌의 일이었고 그 뒤로 오른쪽 수비가 평생의 자리가 됐다.

그는 현대 축구 선수들이 그러한 것처럼 공격적으로 올라서는 풀백은 아니었다. 허나 그가 맡은 오른쪽 측면은 항상 침착했고, 예리했으며, 도무지 실패가 없었다. 때문에 피오렌티나는 리그와 유럽 대항전에서 고공행진했다.

수비란 무엇인가를 손수 알려준 자다. 1:1 수비에서는 타이트하게 압박했고, 인터셉트 능력이 탁월했으며, 필요할 땐 마지막까지 몸을 던지는 투혼이 있었다.

수비수라면 무엇을 해야 되는지 최초로 정의한 선수 중 한 명이며, ’기술’보다는 ’기개’에 가까웠고, 그 안에서 팬들은 진정한 수비의 미덕을 배웠다.

왼쪽의 체르바토가 올라가면 오른쪽의 그가 남았다. 풀비오 베르나르디니(Fulvio Bernardini; 이탈리아 감독, 1905-1984) 감독의 수비는 그 짝으로 굴러갔고, 1955-56시즌 팀은 서른네 경기에서 스무 골만 내줬다. 이듬해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그가 맡은 상대가 레알 마드리드의 왼쪽 날개 파코 헨토다. 이 사이트가 따로 고른 1956-57시즌 유러피언컵 베스트 11의 오른쪽 풀백 자리에도 그의 이름이 있다. 세리에 A에서 225경기를 뛰었고, 대표팀에는 1953년 4월 26일 프라하의 체코슬로바키아전으로 데뷔해 네 해 동안 스무 경기에 나갔으며 1954년 월드컵에 체르바토와 함께 다녀왔다.

1956년, 스쿠데토를 획득하던 당시 그는 피오렌티나 수비진의 리더였고, 경기장 밖에서는 언제나 차분하고 품위 있는 선수로 존경받았다. 팬들은 그의 리더십과 겸손함을 ’피렌체의 정신’으로 여겼고, 이는 지금까지 유효한 정신이기도 하다.

1958년 제노아로 옮겼고 1961년 프라토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고향 피스토이에세의 감독을 잠시 맡은 뒤로는 피렌체로 돌아와 살았다. 처음에는 식당을 했고, 그 뒤로는 아내 안나와 함께 시내 한복판에서 바(bar)를 열어 2010년까지 손수 지켰다. 스쿠데토의 오른쪽 풀백은 그렇게 반세기를 피렌체 사람들 곁에서 장사하며 살았다. 2020년 7월 3일 그 도시에서 아흔하나로 세상을 떠났다.

6. 잔카를로 데시스티 - 수비형 미드필더

잔카를로 데시스티 수비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이탈리아 미드필더의 기준.

잔카를로 데시스티(Giancarlo De Sisti; 이탈리아 미드필더·감독, 1943-)는 AS 로마와 ACF 피오렌티나 두 구단의 명예의 전당에 나란히 이름을 올린 미드필더다. 별명은 피키오(Picchio), 로마 말로 팽이다.

로마에서 태어나 AS 로마 유소년에서 자랐고 열일곱이던 1961년 2월 12일 세리에 A에 데뷔했다. 세리에 A 첫 골은 1962년 3월 11일에 넣었는데, 상대가 공교롭게도 피오렌티나였다. 1965년 여름 로마는 돈이 궁했다. 구단은 스물두 살의 그를 2억 5,000만 리라에 피오렌티나로 넘겼다. 그 뒤로 아홉 시즌 동안 그는 한 번도 주전에서 밀리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수비력을 갖췄던 잔카를로 데시스티는 좁은 공간에서 순간적으로 균형을 되찾는 볼 키핑 능력이 매우 우수했으며, 단 한 번의 패스로 경기 전체의 템포를 뒤바꾸는 능력은 가히 유럽에서 손꼽힐 정도였다.

이탈리아의 축구 기자 카를로 펠리체 키에사(Carlo Felice Chiesa; 이탈리아 체육 기자, 1954-)는 그를 군더더기 없이 실속만 남긴 레지스타(regista; 경기를 연출하는 미드필더)라고 적었다. 짧고 정확한 패스를 즐겼고 좀처럼 침착함을 잃지 않았으며, 필요할 때는 길게 찔러 수비 뒤를 열었다. 한 시즌에 패스를 한 번 틀린다는 말이 따라다녔다. 등번호는 10번이었다. 첫 스쿠데토의 10번이 미겔 몬투오리였고 두 번째 스쿠데토의 10번이 그였다. 그 번호를 뒷날 안토뇨니가 입는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팀은 흔들리지 않았고, 동료들은 더 과감해질 수 있었다. 때문에 그가 머물던 기간 중 ACF 피오렌티나는 세리에 A, 코파 이탈리아, 미트로파컵 등 굵직한 트로피들을 연이어 들어 올렸다.

1968-69시즌 두 번째 스쿠데토의 주장이 그다. 리그 서른 경기를 다 뛰었고 두 골을 넣었는데, 그 하나가 피렌체에서 유벤투스를 2-1로 잡은 경기에서 나왔다. 피렌체에서 남긴 리그 기록은 256경기 28골이다.

또한 대표팀에서도 UEFA 유로 1968 우승과 1970 FIFA 월드컵 준우승에 기여하며 이탈리아 대표팀 중원의 황금기를 설계한 주역이기도 하다. 1968년에는 로마에서 다시 열린 결승 재경기에 나갔고, 1970년 멕시코에서는 서독을 4-3으로 이긴 준결승과 결승까지 이탈리아의 모든 경기를 뛰었다. 대표팀 기록은 스물아홉 경기 네 골이고, 세리에 A에서는 스무 해 가까운 선수 생활을 통틀어 478경기 50골을 남겼다.

1974년, 그를 자기 전술에 꼭 맞는 선수로 본 리드홀름 감독이 그를 로마로 다시 불렀다. 그는 1981년 1월에 감독이 되어 피렌체로 돌아왔다. 강등권에 있던 팀을 그 시즌 5위로 올려놓았고, 이듬해에는 마지막 날까지 유벤투스와 스쿠데토를 다퉜다. 이 글의 앞에서 적은 승점 1점 차 2위가 그의 팀이다. 선수로 한 번 들어 본 트로피를 감독으로는 한 걸음 앞에서 놓쳤다.

7. 잔카를로 안토뇨니 - 공격형 미드필더

잔카를로 안토뇨니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생일 1943년 3월 13일은 6번 데시스티의 생일이 넘어온 것이다. 안토뇨니는 1954년 4월 1일에 태어났다.

피오렌티나 그 자체.

그는 별을 바라보며, 그 사이에서 공을 부드럽게 굴렸다.

한 도시가 영원히 사랑한 남자, 승리를 주지 못했어도 결코 떠나지 않았던 영웅이 잔카를로 안토뇨니(Giancarlo Antognoni; 이탈리아 미드필더, 1954-)다.

움브리아의 마르샤노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AC 밀란을 응원했고 본보기는 잔니 리베라(Giovanni Rivera; 이탈리아 미드필더, 1943-)였다. 아버지가 페루자에서 하던 바가 밀란 팬클럽의 모임터였다고 한다. 4부 리그의 아스티에서 뛰던 그를 피오렌티나가 4억 3,500만 리라에 데려왔다.

1972년 18살의 나이로 피오렌티나에 입단한 그는 무려 15년 동안 단 한 번도 팀을 떠나지 않았다. 스쿠데토는 없었지만, 수많은 클럽들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탈리아에서 끝까지 보랏빛 유니폼 하나로만 살아갔다.

데뷔전은 1972년 10월 15일 베로나 원정이다. 닐스 리드홀름 감독이 8번을 입혀 내보냈고 팀은 2-1로 이겼다. 이튿날 토리노의 일간지 『투토스포르트』(Tuttosport)에 블라디미로 카미니티(Vladimiro Caminiti; 이탈리아 체육 기자, 1932-1993) 기자가 쓴 한 줄이 평생의 별명이 됐다. 별을 보며 공을 차는 소년(un ragazzo che gioca guardando le stelle)이 데뷔했다는 문장이었다. 그는 공을 발에 붙인 채 고개를 들고 달렸다.[3]

별빛을 품은 자. 그의 패스는 부드러웠고, 그의 드리블은 고요했으며, 그의 시야는 언제나 타인의 움직임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는 ’감각’의 축구를 했고, ’이해’의 축구를 했고, ’존재’로 경기를 이끌었다. 이런 모습은 21세기에서 리오넬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서 발견해 볼 수 있는 포인트들이다.

50m, 60m짜리 패스가 공격수의 발 앞에 떨어졌다. 1975년 6월 28일에는 로마에서 AC 밀란을 3-2로 누르고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으며 그해 앵글로-이탈리아 리그컵도 가져왔다. 그리고 1976년에 주장 완장을 받았다.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그를 처음 내보낸 감독은 피오렌티나의 첫 스쿠데토를 이끈 풀비오 베르나르디니다. 구단이 리그를 다툴 만한 팀을 꾸리기 전까지, 피렌체 사람들은 그 금발의 10번 하나를 보려고 경기장을 채웠다.[3]

그의 경력은 두 번 끊길 뻔했다. 1981년 11월 22일 제노아전에서 상대 골키퍼와 부딪쳐 두개골이 깨졌고 심장이 멎었다. 제노아의 팀 닥터와 피오렌티나의 마사지사가 그 자리에서 그를 살려 냈다. 넉 달 뒤 그는 돌아왔다.

1981-82 시즌, 피오렌티나는 유벤투스와 치열한 리그 우승 경쟁을 벌였지만 승점 1점 차이로 스쿠데토를 놓쳤다.

두 팀은 승점이 같은 채로 마지막 날을 맞았다. 피오렌티나는 칼리아리 원정에서 골 하나를 인정받지 못하고 0-0으로 비겼으며, 유벤투스는 카탄차로 원정에서 페널티킥으로 이겼다. 그 여름 스페인 월드컵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우승 멤버가 됐다. 브라질전에서 넣은 골은 오프사이드 판정으로 지워졌고, 폴란드와의 준결승에서 다쳐 결승은 기자석에서 지켜봤다. 지워진 그 골이 자기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이 됐을 것이라고, 준결승의 부상과 1982년의 스쿠데토가 평생에 둘뿐인 한이라고 그는 일흔 살에 말했다.[3]

이탈리아 국가대표로 1982 FIFA 월드컵에서 최종 우승을 차지했지만, 결승전에서는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던 안토뇨니. 그러나 그 누구도 그를 빼고 ’우승의 주역’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는 1984년 2월 12일 삼프도리아전이다. 정강이뼈와 종아리뼈가 함께 부러졌고 돌아오기까지 두 해 가까이 걸렸다. 마지막 경기는 1987년 5월 17일 아탈란타를 1-0으로 이긴 홈 경기다. 429번째 경기였고 등에는 10번이 있었으며, 그 곁에서 11번을 달고 뛴 스무 살이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다. 10번은 바조에게 넘어갔다.[3]

공식전 429경기와 세리에 A 341경기는 지금도 구단의 최다 기록이며 72골은 역대 4위다. 대표팀에서는 73경기를 뛰었다. 뒷날 구단 임원이 된 그가 리스본에서 데려온 선수가 이 글의 여덟 번째 자리에 있다.

피렌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순결한 별빛으로 남아있는 잔카를로 안토뇨니.

쿠르바 피에솔레에는 지금도 그의 얼굴을 그린 큰 깃발이 걸린다. 구단과의 사이는 그만큼 매끄럽지 못했다. 2026년 여름 구단이 10번을 비우며 100번째 생일잔치에 그를 청했을 때, 그는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2]

8. 후이 코스타 - 공격형 미드필더

후이 코스타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세리에 B 우승(1993-94시즌)은 그가 오기 한 해 전의 일이다. 그는 팀이 세리에 A로 돌아온 1994년 여름에 왔다. 별명 줄의 Fiorenz는 Firenze다.

진짜 축구 뭣같이 하네.

필자가 1990년대 이탈리아 축구를 보았을 때, 가장 미친 새끼가 한 명 있었다면…

호나우두, 베르흐캄프, 프란체스코 토티, 지네딘 지단, 로베르토 바조 등 수많은 선수들이 많았으나 후이 코스타는 독보적이었다.

“진짜 아름다움의 결정체”.

후이 코스타(Rui Manuel César Costa; 포르투갈 미드필더, 1972-). 그는 피오렌티나의 미드필더였고, 동시에 피렌체가 만든 또 하나의 시인이었다.

리스본 근교에서 태어나 벤피카 유소년에서 컸고, 1991년에는 포르투갈의 20세 이하 월드컵 우승을 정한 승부차기의 마지막 키커였다. 1994년 여름 벤피카는 돈이 급했다. 요한 크라위프(Hendrik Johannes Cruijff; 네덜란드 축구 선수·감독, 1947-2016)의 FC 바르셀로나로 가는 이야기가 거의 끝나 있었는데, 110억 리라를 내민 피오렌티나가 그를 채 갔다. 스물두 살이었다.

마에스트로(Il Maestro)라는 별명은 정말 그의 플레이가 지휘자처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 같아서 붙은 별명인데,

그의 터치는 악보처럼 정밀했고, 그의 시야는 음악처럼 넓었으며, 그의 패스는 연주처럼 흐물거렸다.

바티스투타에게 주어진 수많은 어시스트가 있었고, 전방 침투 없이도 위협을 조율하는 템포 메이킹이 있었으며, 경기 전체의 ’호흡’을 만들어내는 드리블이 있었다.

21세기의 메수트 외질이 에덴 아자르와 같은 드리블 실력을 갖췄다면 이는 곧 ‘후이 코스타’ 느낌이 될 듯싶다.

이탈리아의 기록은 그를 역대 최고의 트레콰르티스타(trequartista; 공격수 바로 뒤에서 뛰는 10번)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동료가 골을 넣기 가장 좋은 순간을 골라 공을 넣어 주는 눈이 있었다.

일곱 시즌 동안 276경기에서 50골을 넣었고 리그 기록은 215경기 38골이다. 1996년 코파 이탈리아를 드는 길에 두 골을 넣었으며 그해 여름에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들었고, 1998-99시즌에는 리그에서 열 골을 넣으며 팀을 3위에 올렸다. 그 3위로 얻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팀은 아스널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겼고, 그는 열네 경기에 나가 두 골을 넣었다. 2000년 여름 바티스투타가 떠나자 완장이 그에게 왔고, 2001년 6월 그는 주장으로 코파 이탈리아를 들어 올렸다. 그 컵이 지금까지 구단의 마지막 트로피다. 마지막으로 컵을 든 주장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지 않다고, 구단 임원들을 만날 때마다 이 짐을 좀 덜어 달라고 말한다고 그는 100주년을 맞아 털어놓았다.[4]

팀이 세리에 B에서 갓 올라온 1994년부터, 축구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1990년대 세리에 A에서 무수한 강팀들을 상대할 때마다 팀을 위한 헌신을 말했던 후이 코스타가 AC 밀란으로 떠나야 되는 상황이 왔을 땐 본인이 펑펑 울었다.

보라색 셔츠를 입고 나란히 걷는 후이 코스타와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후이 코스타와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컵을 든 지 한 달이 못 되어 그는 팔렸다. 새 계약서에 막 서명하고 포르투갈의 집으로 간 지 이틀 만에 전화가 왔다고 한다. 구단이 무너지고 있으니 너를 팔아야겠다는 전화였다. 2001년 7월 13일 프랑키의 밤은 이 글의 앞에 적었다. 2026년 8월 29일, 그는 구단의 100번째 생일에 그 경기장으로 돌아와 앉았다.[4]

9. 줄리뉴 - 레프트 윙

줄리뉴 레프트 윙 상세 정보 디자인

악마가 축구를 한 순간.

필자가 1956-57 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을 보았을 때 유독 눈에 띄는 존재가 있었는데 훗날 알고 보니 그게 이 선수였다.

브라질 매체에서 그를 소개하길 <악마적이고 숭고한 기술을 갖춘 공격수>라고 설명하던 게 여전히 필자의 뇌리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브라질 칼럼이었고 어려운 문장의 연속이었으나 그 구절만큼은 신성했고, 선명했다.

줄리뉴(Júlio Botelho; 브라질 오른쪽 윙어, 1929-2003)는 펠레와 가린샤의 어깨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브라질 윙어였으며, 호나우지뉴와 비슷한 반열에서 평가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상파울루의 식료품점 집 아들이다. 마르고 길쭉한 몸에 클라크 게이블 같은 콧수염을 길렀다. 포르투게자에서 191경기 101골을 남겼고 히우-상파울루 대회를 두 번 우승했다. 세 해 동안 경고 한 번 받지 않아 상을 탄 선수이기도 하다. 1951년에 이미 인테르가 그를 데려가려 한 적이 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이 진 8강전에서 헝가리를 상대로 걸작이라 불린 골을 넣었다. 그를 눈여겨본 이가 풀비오 베르나르디니 감독이다. 날개라는 자리가 닿을 수 있는 끝이 줄리뉴이고 그 너머는 없다는 것이 베르나르디니의 평이었다. 1955년 피오렌티나가 5,500달러를 치렀다. 구단 역사의 첫 브라질 선수다.[6]

오는 길은 순탄치 못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외국인 선수의 등록을 묶어 두고 있었고, 구단은 그의 족보에서 루카 출신의 조상 보텔리를 찾아내 이탈리아계로 등록했다. 뒷날 그 조상이 신부(神父)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구단이 법정에 서는 소동으로 번졌다.

줄리뉴는 브라질 공격수 중에서도 가장 ’이탈리아적’이었다. 움직임은 정제되어 있었고, 동시에 미친 듯한 자유로움으로 가득했다.

절대 멈추지 않는 측면 돌파가 있었고, 왼발과 오른발을 가리지 않는 드리블이 있었으며, 예측 불가능한 컷인이 있었다. 그리고 ’공포의 크로스’로 유럽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든 자다.

장기는 몸으로 거는 속임 동작이었다. 상대의 몸에 닿지도 않고 균형을 무너뜨렸고, 끝줄까지 내려가 오른발로 낮고 빠른 공을 문전에 깔았다. 그 공을 받아 넣던 이가 주세페 비르질리(Giuseppe Virgili)다. 1955-56시즌 비르질리는 스물한 골을 넣었고 팀은 한 번만 지고 우승했다.

그가 공을 잡는 순간, 관중석은 늘 “와아아아~“하는 숨소리를 흘렸고, 그의 돌파는 상대 수비를 ’분해’하는 수준이었을 정도로 매우 파괴적이었고, 정말 무서웠다.

이탈리아 대표팀이 그를 불렀으나 그는 사양했다. 1958년 월드컵에는 나가지 않았다. 나라 밖에서 뛰는 자신이 국내 선수의 자리를 빼앗을 수 없다며 사양했다는 이야기와, 비센테 페올라(Vicente Feola;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09-1975) 감독이 애초에 나라 밖 선수를 부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한다. 브라질 대표로는 31경기에서 13골을 넣었다. 두 번째 시즌이 끝나자 그는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남은 어머니 곁으로 돌아갔는데, 베르나르디니의 설득으로 한 시즌을 더 뛰었고, 1958년에 끝내 향수를 이기지 못하고 파우메이라스로 떠났다.

1955년부터 ’58년까지 겨우 세 시즌을 뛰었으나 그 안에서 줄리뉴는 세리에 A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 중 한 명이라고 평가되고 있고, 1956-57 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 수비진을 집요하게 찢어내던 선수이기도 하다. 피렌체에 남긴 숫자는 98경기 23골이다. 세리에 A가 89경기 22골이고 유러피언컵이 일곱 경기 한 골이다.

브라질로 돌아간 그는 집의 방 하나를 보라색으로 칠했다. 눈을 감으면서는 자신이 뛴 구단들의 깃발과 함께 보라색 깃발을 관 위에 덮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 2003년 1월 11일 상파울루에서 세상을 떠났고, 구단은 2013년 그를 명예의 전당에 올렸고, 2014년 7월 31일에는 그의 이름을 건 트로피를 놓고 파우메이라스와 맞붙었다.

10. 쿠르트 함린 - 라이트 윙

쿠르트 함린 라이트 윙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세리에 A 준우승 네 번은 두 번이다. 그는 1958년 여름에 왔고, 그가 뛴 시즌의 2위는 1958-59시즌과 1959-60시즌이다.

스웨덴 왕국의 G.O.A.T.

역사적으로 스웨덴에는 유능한 선수들이 많았다.

모든 팬들이 인정하는 ‘그레-노-리’ 삼총사라고 대변되는 군나르 노르달(Nils Gunnar Nordahl; 스웨덴 공격수, 1921-1995), 군나르 그렌, 닐스 리드홀름을 필두로 아탈란타의 글렌 스트룀베리(Glenn Peter Strömberg; 스웨덴 미드필더, 1960-), 페예노르트의 유러피언컵 우승을 이끈 오베 킨드발(Bengt Ove Kindvall; 스웨덴 축구 선수·공격수, 1943-2025), 그리고 21세기 아스널의 무패 우승을 이끈 프레디 융베리나 세리에 A의 레전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도 있다.

이중 대장이라면.. 군나르 노르달과 함께 쿠르트 함린(Kurt Roland Hamrin; 스웨덴 공격수, 1934-2024)이 아닐지?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AIK에서 리그 63경기 54골을 넣었고, 그 시절에는 일간지 다겐스 뉘헤테르(Dagens Nyheter)의 인쇄 제판공으로 일했다. 1956년 유벤투스가 그를 데려갔다. 이듬해 유벤투스가 존 찰스(John Charles; 웨일스 공격수, 1931-2004)와 오마르 시보리(Enrique Omar Sívori; 아르헨티나·이탈리아 축구선수, 1935-2005)를 사들이자, 외국인을 구단마다 둘만 등록할 수 있던 규정 탓에 그가 파도바로 밀려났다. 유벤투스의 주장 잠피에로 보니페르티(Giampiero Boniperti; 이탈리아 축구 선수·공격수, 1928-2021)가 자기 자리와 겹친다며 그쪽을 밀었다는 말도 돌았다. 거기서 그를 아낀 네레오 로코 감독은 족제비(Faina)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고, 그는 서른 경기에서 스무 골을 넣어 작은 구단을 3위에 올려놓았다. 파도바의 역사에서 가장 높은 순위다. 1958년 여름에는 자기 나라에서 열린 월드컵의 결승까지 뛰었다.

1958년, 그는 이미 세리에 A에서 능력을 입증한 선수였다.

피오렌티나에 입단하고 나서야 그의 전설은 시작되는데, 1958년부터 ’67년까지 208골을 터뜨리며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에 올랐고, 코파 이탈리아는 물론 유러피언 컵위너스컵까지 양대 대회에서 득점왕에 오르며 우승 트로피를 견인한 공격수가 쿠르트 함린이었다.

그는 줄리뉴가 떠난 오른쪽 날개 자리에 왔다. 별명 작은 새(Uccellino)는 피렌체의 일간지 『라 나치오네』(La Nazione)의 기자 베페 페골로티(Beppe Pegolotti; 이탈리아 기자)가 붙였다. 「날아가는 작은 새」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나온 이름이고, 가볍고 빨라서 경기장을 날아다닌다는 뜻이다. 2005년 『라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La Gazzetta dello Sport; 밀라노에서 내는 이탈리아 스포츠 일간지)는 그를 우아하면서 치명적인 오른쪽 날개로 돌아보며, 좁은 드리블로 늘 수비수의 가랑이 사이나 튕겨 나오는 공을 노린 기회주의자였다고 적었다.

작은 키, 홀쭉한 체형을 지녔음에도 누구보다 강인했던 하체 파워로, 그리고 수비수 4~5명 정도는 쉽게 제치고 골을 넣는 집요한 발 놀림으로 그는 이탈리아 무대는 물론 유럽 무대에서도 빛을 내었다.

두 발을 똑같이 썼다. 피렌체에서 든 트로피는 다섯으로, 코파 이탈리아 둘과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알프스컵, 미트로파컵이다. 1960-61시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서는 여섯 골로 대회의 첫 득점왕이 됐고 피렌체에서 열린 결승 2차전의 마지막 골도 그가 넣었다. 1964년 2월 2일에는 아탈란타 원정에서 혼자 다섯 골을 넣어 7-1 승리를 만들었다. 세리에 A 원정 경기에서 한 선수가 넣은 골로는 지금도 가장 많다. 그 사이 1963년에는 인테르의 자이르와 맞바꾸는 이야기가 나왔다가 없던 일이 됐다.

그의 골에는 예술과 결과가 함께 있었다. 윙어였음에도 폭발적인 득점력은 21세기 현재에도 희귀한 유형 중 하나로 거론되기에, 여전히 그의 플레이를 그리워하는 이가 많다.

아홉 시즌 362경기 208골. 세리에 A에서만 151골이고, 이 숫자는 2000년 바티스투타가 넘어설 때까지 30년이 넘도록 구단 최다였다. 1967년 서른둘의 그는 AC 밀란으로 떠났고, 밀란에서 리그와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유러피언컵을 차례로 들었다. 피오렌티나가 두 번째 스쿠데토를 든 것은 그가 떠나고 두 해 뒤다.

은퇴한 뒤에도 그는 피렌체를 떠나지 않았다. 이탈리아 대표팀 훈련장이 있는 코베르차노에 살며 토스카나의 어린 선수들을 보러 다녔다. 2024년 2월 4일 피렌체에서 여든아홉으로 세상을 떠났다. 1958년 월드컵 결승을 뛴 스물두 명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다.[6]

그의 등번호 7번은 지금까지도 전설로 속삭여진다.

11.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센터 포워드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331경기 203골은 구단 기록으로 333경기 207골이다. 역대 최다 득점 2위라는 줄은 그대로 맞다. 1위 함린과는 한 골 차이다.

보랏빛 신전의 중앙.

피오렌티나 팬들에게 그는 사랑이었고, 충성이었고, 신앙이었고, 무엇보다 “아름다워서 슬펐던 남자”의 이야기.

가브리엘 바티스투타(Gabriel Omar Batistuta; 아르헨티나 공격수, 1969-)는 후이 코스타와 영혼의 콤비로서 1990년대 세리에 A의 ’대장 듀오’로 활약했고, 대선배 쿠르트 함린의 권능을 좇던 자로서 수많은 득점포를 가동하던 선수였다.

피렌체를 처음 본 것은 1989년이다. 스무 살의 그는 아르헨티나의 작은 구단에 임대된 몸으로 비아레조 청소년 대회에 나와 득점왕이 됐고, 그 길에 난생처음 세리에 A 경기를 보러 이탈리아의 경기장에 들어갔다. 그 경기장이 프랑키였다. 1991년 여름, 코파 아메리카에서 여섯 골로 우승하고 온 그를 피오렌티나가 보카 주니어스에서 데려왔다. 유벤투스로 떠난 로베르토 바조의 빈자리를 메울 사람이었고, 그가 든 집도 바조가 살던 집이었다.[5]

첫 시즌은 쉽지 않았다. 풀린 날은 1992년 1월 26일이다. 프랑키에 온 유벤투스를 상대로 7분 만에 골을 넣었고, 그날부터 그는 바티골(Batigol)이 됐다. 사자왕(Il Re Leone)이라는 이름은 그 뒤에 붙었다. 그 시즌을 열세 골로 마쳤는데, 득점 순위에서 그의 위에 있던 이름이 판바스턴과 바조, 카레카였다.

피오렌티나라는 팀을, 단독으로 ’역사’로 만든 스트라이커였던 바티골은 세리에 A의 수많은 수비진을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파괴한 폭풍이었다.

피오렌티나에서 보낸 아홉 시즌 내내 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포를 가동했으며, 페널티 박스 안에서의 존재감은 당시의 그 어떤 스트라이커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1993년, 피오렌티나가 세리에 B로 강등되었을 때, 그는 떠날 수 있었던 상황이었으나 모두의 예상과는 반대로 팀에 남았으며, 2부 리그에서 더 치열하고, 더 맹렬하게 득점포를 가동하여 팀의 1부 리그 승격을 이끄는 데 가장 선봉장이 된 것이 바티골이기도 하다.

축구는 늦게 시작했다. 어릴 적에는 다른 종목을 했고, 그때 붙은 몸이 뒷날 공격수의 밑천이 됐다. 날개로 뛰던 그를 가운데 공격수로 옮긴 이는 보카 주니어스의 오스카르 타바레스(Óscar Tabárez; 우루과이 감독, 1947-) 감독이다. 발기술이 섬세한 편은 못 됐으나 머리와 발, 프리킥, 수비를 떼어 내는 움직임까지 골을 넣는 길을 고루 가졌다. 오른발로 먼 쪽 구석을 향해 힘껏 때리는 슛이 으뜸이었고, 발리와 가위차기로도 자주 넣었다.

강등이 정해진 마지막 날 팀은 포자를 6-2로 이겼고, 종료 휘슬이 울리자 그는 울었다. 그 시즌에 열여섯 골을 넣은 공격수였다. 2부에서도 열여섯 골을 넣어 한 해 만에 우승으로 올라왔다. 돌아온 1994-95시즌에는 개막전부터 열한 경기를 내리 골을 넣었다. 에치오 파스쿠티가 30여 년 동안 갖고 있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그 시즌 스물여섯 골로 득점왕이 됐다.[5]

11경기
개막부터 내리 골1994-95시즌. 파스쿠티의 열 경기를 넘었다
26골
세리에 A 득점왕1994-95시즌. 2부에서 올라온 첫해
152골
구단 세리에 A 최다2000년 5월 14일 함린의 151골을 넘었다
207골
구단 공식전 2위1위 함린과 한 골 차

트로피는 1996년에 왔다. 코파 이탈리아에서 그는 여덟 경기에 나가 여덟 골을 넣었다. 결승에서는 아탈란타를 상대로 두 경기 모두 골을 넣었고, 그해 8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는 리그 챔피언 AC 밀란의 안방에서 혼자 두 골을 넣어 2-1로 이겼다. 코파 이탈리아 우승팀이 이 대회를 든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이듬해 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준결승에서는 캄 노우의 관중을 조용하게 만든 동점골을 넣었다. 1998년 9월 26일에는 AC 밀란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하고 기관총을 쏘는 시늉을 했다. 그 무렵 그가 만들어 낸 세리머니다. 1999년 10월 27일에는 웸블리에서 아스널을 무너뜨린 골을 넣었다.[5]

피렌체의 팬들이 세운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금빛 동상
다소 충격

그의 동상은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랑키 앞에 세워졌고, 그의 이름은 기도처럼 속삭여진다.

동상은 팬들이 세웠다. 1990년대 중반 쿠르바 피에솔레의 사람들이 골 세리머니를 하는 그의 모습을 금빛으로 빚어 응원석 아래에 놓았다. 받침에는 꺾인 적 없는 전사, 싸움에서는 거칠되 마음은 곧은 사람이라는 뜻의 글귀를 새겼다. 한창 뛰고 있는 스물몇 살 선수의 동상이었다.[5]

떠날 마음은 여러 번 먹었다. 1998년에는 구단주 비토리오 체키 고리(Vittorio Cecchi Gori; 이탈리아 영화 제작자·피오렌티나 회장, 1942-)가 귀빈석에 “바티스투타는 팔지 않는다”라는 현수막을 걸게 했고, 새로 온 조반니 트라파토니(Giovanni Trapattoni; 이탈리아 감독, 1939-) 감독이 스쿠데토를 다툴 팀을 약속하며 그를 붙잡았다. 그 1998-99시즌 팀은 전반기를 1위로 돌았으나 그가 다친 뒤 3위로 마쳤다. 2000년 여름 서른한 살의 그는 로마로 갔다. 그 뒤의 일은 이 글의 앞에 적었다.[5]

333경기 207골. 세리에 A 152골은 구단 최다이고, 통산 207골은 함린에 한 골 모자란다. 피렌체시는 2016년 10월 3일 그를 명예 시민으로 올렸다. 2026년 9월 구단의 100주년을 기리는 올스타 경기에서 쉰일곱의 그는 두 골을 넣었다. 동전 던지기에서 이긴 그가 전반에 고른 골문은 쿠르바 피에솔레 쪽이었다. 그쪽이 익숙해서라고 했다.[5]

아르디코 마니니, 쿠르트 함린, 잔카를로 안토뇨니로 이어져온 피렌체 정신을 후이 코스타와 함께 전면에 새긴 자가 있다면 바로 바티골이다.

마침내, 한 경기장에 선 열한 명

ACF 피오렌티나 역대 베스트 11 표제 4-3-3 대형으로 배치한 ACF 피오렌티나 역대 베스트 11 ACF 피오렌티나 역대 베스트 11 서브 명단 15인 편집물 ACF 피오렌티나 역대 베스트 11 추가 명단 15인 편집물
표제, 열한 명의 대형, 서브 명단 15인, 추가 명단 15인. 1926년 구단의 첫 시즌을 뛴 이탈로 반디니부터 2018년의 주장 다비데 아스토리까지 마흔한 명이 한 흐름에 들어간다.

이 명단은 ACF 피오렌티나의 가장 위대했던 역대 베스트 41인의 명단이다.

알베르토시가 잡은 공은 페란테의 발에서 길게 나간다. 그 틈에 파사레야가 중앙선을 넘고, 체르바토는 왼쪽 터치라인을 타고 올라가며, 마니니는 남아서 뒤를 잠근다. 데시스티가 공을 받아 한 번에 방향을 바꾸면 안토뇨니가 고개를 든 채 받고, 후이 코스타가 그 곁에서 한 박자를 늦춘다. 줄리뉴가 어깨를 한 번 흔들고 낮게 깔아 준 공에 바티스투타가 발을 대고, 흘러나온 공은 먼 쪽 골대 앞의 함린이 주워 넣는다.

구단 역대 득점 1위와 2위와 4위, 최다 출전 1위와 4위가 이 열한 명 안에 있다. 페널티킥을 구단에서 가장 많이 넣은 수비수도 있다. 이탈리아에서 여섯, 아르헨티나에서 둘이 왔고 스웨덴과 포르투갈과 브라질에서 하나씩 왔다. 피렌체가 100년 동안 불러 모은 이름들이다.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랑받은 팀.피렌체가 100년 동안 써 내려온 마흔한 개의 이름.

이미지 밖에서 다시 읽는 후보 30인

서브 명단 열다섯과 추가 명단 열다섯을 글자로 다시 적되 포지션은 그림에 적은 대로 두었다. 다만 이름 여섯은 이탈리아어 표기 원칙을 따라 그림과 다르게 적었으니, 그림의 주세페 브리지는 브리치, 기도 그라통은 귀도 그라톤, 치아루지는 키아루지, 오르잔은 오르찬, 셀레스트 핀은 첼레스테 핀, 치아펠라는 키아펠라다. 그 가운데 핀은 초고를 쓰고 두 달 뒤인 2025년 7월 22일 피렌체에서 예순넷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브 명단 15인

  • 조반니 갈리Giovanni Galli · 골키퍼

    1977-1986년 리그 259경기. 열아홉에 데뷔해 아홉 시즌을 내리 지켰고, 1982년 2위 팀의 골키퍼였다.

  • 프란체스코 톨도Francesco Toldo · 골키퍼

    1993-2001년 리그 266경기. 코파 이탈리아 두 번과 1996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들었다.

  • 프란체스코 로세타Francesco Rosetta · 센터백

    1948-1957년 리그 245경기. 1955-56시즌 스쿠데토 팀의 주장이다.

  • 주세페 브리치Giuseppe Brizi · 센터백

    1962-1976년 389경기. 안토뇨니 다음으로 많이 뛴 사람이고 두 번째 스쿠데토를 들었다.

  • 아르만도 세가토Armando Segato · 수비형 미드필더

    1952-1960년 리그 231경기 16골. 첫 스쿠데토 팀의 하프백이다.

  • 둥가Dunga · 수비형 미드필더

    1988-1992년 리그 122경기 8골. 1990년 UEFA컵 결승을 뛰었다.

  • 귀도 그라톤Guido Gratton · 중앙 미드필더

    1953-1960년 리그 193경기 28골. 첫 스쿠데토 팀의 인사이드 포워드다.

  • 클라우디오 메를로Claudio Merlo · 중앙 미드필더

    1965-1976년 367경기. 출전 수로 구단 역대 3위이고, 안토뇨니에 앞서 완장을 찼다.

  • 안젤로 디리비오Angelo Di Livio · 중앙 미드필더

    1999-2005년 리그 169경기 8골. 파산한 구단에 남아 4부에서 1부까지 같이 올라온 주장이다.

  • 미겔 몬투오리Miguel Montuori · 공격형 미드필더

    1955-1961년 리그 162경기 72골. 통산 84골은 구단 역대 3위다. 첫 스쿠데토의 10번이다.

  •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 공격형 미드필더

    1985-1990년 리그 94경기 39골. 안토뇨니의 10번을 물려받았고 1990년 UEFA컵 결승을 뛰었다.

  • 로메오 멘티Romeo Menti · 라이트 윙

    1938-1941년 리그 75경기 43골. 1940년 구단의 첫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 루차노 키아루지Luciano Chiarugi · 라이트 윙

    1965-1972년 리그 140경기 33골. 1969년 5월 11일 토리노에서 우승을 정한 두 골 가운데 하나를 넣었다.

  • 주세페 비르질리Giuseppe Virgili · 센터 포워드

    1954-1958년 리그 101경기 55골. 첫 스쿠데토 시즌에 스물한 골을 넣었다.

  • 클라우디오 데솔라티Claudio Desolati · 센터 포워드

    1971-1981년 리그 152경기 43골. 1975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추가 명단 15인

  • 줄리아노 사르티Giuliano Sarti · 골키퍼

    1954-1963년 리그 220경기. 첫 스쿠데토와 1957년 유러피언컵 결승의 골키퍼다.

  • 프랑코 수페르키Franco Superchi · 골키퍼

    1965-1976년 리그 227경기. 1968-69시즌 서른 경기를 다 뛰며 열일곱 골만 내줬다.

  • 세바스티앵 프레Sébastien Frey · 골키퍼

    2005-2011년 리그 175경기. 프랑스에서 온 골키퍼로 여섯 시즌 골문을 맡았다.

  • 알베르토 오르찬Alberto Orzan · 센터백

    1954-1963년 리그 192경기 3골. 첫 스쿠데토와 1961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을 들었다.

  • 첼레스테 핀Celeste Pin · 센터백

    1982-1991년 리그 200경기 2골. 1990년 UEFA컵 결승을 뛰었다.

  • 다비데 아스토리Davide Astori · 센터백

    2015-2018년 리그 91경기 3골. 주장이던 2018년 3월 4일 세상을 떠났고, 구단은 13번을 비웠다.

  • 세르조 카스텔레티Sergio Castelletti · 레프트백

    1958-1966년 리그 214경기. 코파 이탈리아 두 번과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을 들었다.

  • 엔초 로보티Enzo Robotti · 라이트백

    1957-1965년 리그 231경기 2골. 마니니가 떠난 뒤의 수비를 여덟 시즌 지켰다.

  • 주세페 키아펠라Giuseppe Chiappella · 수비형 미드필더

    1949-1960년 세리에 A 329경기 5골. 안토뇨니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감독으로는 1966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 렌초 콘트라토Renzo Contratto · 수비형 미드필더

    1980-1988년 리그 222경기. 1982년 2위 팀에서 뛰었다.

  • 페루초 발카레지Ferruccio Valcareggi · 중앙 미드필더

    1940-1943년과 1947-48시즌 리그 122경기 27골. 1962년부터 두 시즌은 감독으로 돌아왔다.

  • 이탈로 반디니Italo Bandini · 라이트 윙

    1926-27시즌과 1928-1930년 리그 30경기 4골. 피렌체에서 태어나 구단의 첫 시즌을 뛰었다.

  • 엔리코 키에사Enrico Chiesa · 세컨드 스트라이커

    1999-2002년 리그 59경기 34골. 2001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 페데리코 베르나르데스키Federico Bernardeschi · 세컨드 스트라이커

    2014-2017년 리그 72경기 14골. 아홉 살에 구단 유소년에 들어온 선수다.

  • 루카 토니Luca Toni · 센터 포워드

    2005-2007년과 2012-13시즌 리그 94경기 55골. 2005-06시즌 득점왕이며 이탈리아 선수로는 처음 유러피언 골든슈를 받았다.

기록을 확인한 곳

  1. 구단이 적은 구단사 — ACF Fiorentina 「Storia - Dalle origini del calcio all’era Commisso」, 「Palmares」. 1926년 8월 29일의 합병과 두 구단, 붉은색과 흰색의 첫 셔츠, 1929년 9월 22일의 보라색과 우이페슈트, 두 번의 스쿠데토와 트로피.
  2. 2025년 여름 뒤의 피오렌티나와 100번째 생일 — ACF Fiorentina 「Scomparsa Rocco Commisso」(2026년 1월 17일), QN 2026년 8월 29일, La Sicilia 「Disastro Fiorentina nel giorno del centenario」, TuttoMercatoWeb 2026년 8월 6일. 코미소 회장의 별세, 2026년 8월 29일의 일정과 옛 선수 삼백여 명, 프로시노네전과 관중석의 옛 선수들, 10번 결번과 안토뇨니의 불참 의사.
  3. 잔카를로 안토뇨니 — Il Giornale 인터뷰(2024년 4월 3일), Goal.com에 실린 『라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인터뷰 발췌, Corriere dello Sport 「Antognoni, 10 alla fedeltà」(2025년 3월 11일). 인용문과 갚을 빚이라는 말, 1977년 유벤투스 이적이 깨진 사정과 1980년 로마의 제안, 지워진 브라질전 골과 두 가지 한, 카미니티의 문장, 긴 패스와 관중, 마지막 경기와 바조의 11번.
  4. 후이 코스타 — 90min 「Firenze non salutò Rui Costa, disse addio a un’idea di Fiorentina」(2021년 3월 29일), Viola News에 실린 100주년 인터뷰. 2001년 7월 13일 프랑키의 작별과 1만 명의 관중, 850억 리라, 새 계약과 이틀 뒤의 전화, 마지막 트로피의 짐이라는 말.
  5.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 Il Fatto Quotidiano 2020년 5월 14일, 100주년 올스타 경기 보도(2026년 9월 4일, Goal.com 인용). 2000년 5월 14일 베네치아전과 151 대 149, 11월 26일 올림피코의 결승골, 1989년 비아레조와 프랑키, 바조의 집, 유벤투스전과 두 별명, 1993년 포자전, 열한 경기 연속 골, 1996년의 두 트로피, 금빛 동상과 받침의 글귀, 체키 고리의 현수막과 트라파토니의 약속.
  6. 구단 박물관의 명예의 전당과 부고 — La Nazione 2018년 11월 27일, 2017년 11월 22일, 2015년 12월 8일, 「23 anni fa ci ha lasciato Julinho」(2026년 1월 11일), La Gazzetta dello Sport 함린 부고(2024년 2월 4일). 알베르토시·페란테·체르바토의 헌액, 첫 스쿠데토의 주장 로세타, 베르나르디니가 줄리뉴를 두고 한 말.
  7. 디자인과 다르게 적은 값 — 알베르토시의 세리에 A 준우승은 1958-59시즌과 1959-60시즌이다. 페란테 디자인의 별명과 246경기 25골은 페란테의 기록이 못 되며, 세리에 A 기록은 179경기 6골이다. 체르바토 디자인의 별명은 함린의 것이다. 안토뇨니의 생일은 1954년 4월 1일이다. 후이 코스타는 1994년 여름에 왔다. 함린이 뛴 시즌의 세리에 A 준우승은 두 번이다. 바티스투타의 기록은 333경기 207골이다. 줄리뉴는 오른쪽 날개였고 이 글의 대형에서만 왼쪽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