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 · 유러피언컵

1956-57 유러피언컵 베스트 11: 디스테파노·코파·헨토, 그리고 버스비의 아이들

공식 선정이 없던 두 번째 유러피언컵을 44경기의 출전 명단과 등번호로 다시 읽었다. 우승팀 레알 마드리드와 준우승팀 피오렌티나, 4강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고른 삥이FC 회고 베스트 11.
유러피언컵 트로피 배경의 1956-57 시즌 유러피언컵 Best XI 문구와 트로피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레알 마드리드 CF 선수들
1956-57 시즌 유러피언컵 베스트 11. 디자인: 삥이FC.
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제2회유러피언컵

European Champion Clubs’ Cup 1956-57

공식 베스트 11이 없던 두 번째 대회

대회 기간
1956년 8월 1일-1957년 5월 30일
참가
22개 구단
경기 수
44경기 · 170골
우승
레알 마드리드 CF 스페인 1945-1977년 국기
준우승
AC 피오렌티나 이탈리아 국기
4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잉글랜드 국기 ·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유고슬라비아 국기
득점왕
데니스 바이올렛 잉글랜드 국기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9골
득점 2위
토미 테일러 잉글랜드 국기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 8골
득점 3위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스페인 1945-1977년 국기 · 레알 마드리드 · 7골
도움 순위
공식 집계 없음

득점 순위는 UEFA 경기 데이터와 RSSSF 기록이 일치하는 값이며, 4위는 6골의 알프레트 프라이슬러다. 도움은 이 시즌은 물론 이후 수십 년 동안 대회 공식 기록에 없었으므로 기록표에 넣지 않았다. 전체 순위는 1956-57 유러피언컵 득점 순위에 정리했다. [1][2]

두 번째 유러피언컵도 트로피 하나만 남기고 끝났다. 레알 마드리드는 안방 베르나베우에서 피오렌티나를 2-0으로 꺾고 2연패를 이뤘지만, 대회를 대표할 열한 명의 명단은 그해에도 누구도 발표하지 않았다. 필자가 한 시즌 전과 같은 방식으로 이 대회를 다시 연 이유다. 예선부터 8강까지는 1956-57 유러피언컵 본편, 준결승 네 경기는 4강 편, 베르나베우의 결승은 결승 하이라이트에서 이어진다.

허나 이번 시즌은 명단을 짜기 전부터 고민이 하나 더 있었다. 득점 1위부터 3위가 바이올렛, 테일러, 디스테파노인데 셋 중 두 사람이 센터 포워드였기 때문이다. 테일러와 디스테파노는 각자 소속팀에서 여덟 경기 모두 9번을 달았다. 등번호대로만 세우면 둘 중 하나는 명단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여덟 골의 공격수와 결승 선제골의 주인공 가운데 누구를 빼도 이 대회의 절반이 사라진다.

그래서 필자는 먼저 한 시즌 전의 원칙대로 UEFA가 공개한 44경기의 선발 명단에서 선수마다 어떤 번호를 달았는지 모았다. 고정 등번호가 없던 시절이라 그날의 번호가 곧 그날의 역할이었다. 그다음 RSSSF의 득점 기록과 구단 회고를 겹쳐 누가 어느 자리에서 대회의 흐름을 틀었는지 따졌고, 우승팀이라고 우대하지 않았다. 다만 한 자리에서만은 등번호보다 경기 방식을 먼저 봤다. [1][2]

열한 명을 읽는 법

전형은 당시 유럽 구단들이 쓰던 WM(WM formation; 수비 3명, 하프 2명, 인사이드 2명과 전방 3명이 W와 M 모양을 이루는 전형)을 따랐다. GK는 골키퍼, FB는 풀백, CH는 센터 하프, RH·LH는 오른쪽·왼쪽 하프, OL·IL·CF·IR·OR는 아웃사이드 레프트·인사이드 레프트·센터 포워드·인사이드 라이트·아웃사이드 라이트다. 1955-56 편과 같이 현대의 포지션으로 바꾸지 않고 당대 역할어를 그대로 둔다.

아래 전술판은 서로 다른 네 구단의 선수를 한 화면에 세운 회고적 배열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사람이 기록지와 다른 자리에 서 있다. 알프레도 디스테파노는 여덟 경기 모두 9번을 달았지만, 필자는 그를 오른쪽 하프에 세웠다. 이 선수는 센터 포워드라는 이름표를 달고도 수비 진영까지 내려와 공을 받고, 거기서부터 공격을 다시 짜 올라가던 선수였다. 그를 하프 라인에 두면 여덟 골의 토미 테일러가 센터 포워드 자리를 지킬 수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기록을 옮긴 것이 아니라 필자가 판을 짠 것이니, 그 점은 분명히 적어 둔다. [1][6]

파코 헨토OL파코 헨토레알 · 8경기 1골
데니스 바이올렛IL데니스 바이올렛맨유 · 6경기 9골
토미 테일러CF토미 테일러맨유 · 8경기 8골
레몽 코파IR레몽 코파레알 · 8경기 2골
줄리뉴OR줄리뉴피오렌티나 · 7경기 1골
던컨 에드워즈LH던컨 에드워즈맨유 · 7경기
알프레도 디스테파노RH알프레도 디스테파노레알 · 8경기 7골
로저 번FB로저 번맨유 · 8경기 · 주장
마르키토스CH마르키토스레알 · 6경기
아르디코 마그니니FB아르디코 마그니니피오렌티나 · 5경기
블라디미르 베아라GK블라디미르 베아라츠르베나 즈베즈다 · 5경기
블라디미르 베아라
GK · 골키퍼블라디미르 베아라Vladimir Beara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문장 · 5경기 · 무실점 2회

아르디코 마그니니
FB · 풀백아르디코 마그니니Ardico Magnini

AC 피오렌티나 AC 피오렌티나 문장 · 5경기 · 무실점 2회

마르키토스
CH · 센터 하프마르키토스Marcos Alonso Imaz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마드리드 CF 문장 · 6경기 · 무실점 3회

로저 번
FB · 풀백로저 번Roger William Byrne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문장 · 8경기 · 주장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RH · 라이트 하프알프레도 디스테파노Alfredo Di Stéfano Laulhé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마드리드 CF 문장 · 8경기 7골 · 등번호 9번

던컨 에드워즈
LH · 레프트 하프던컨 에드워즈Duncan Edwards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문장 · 7경기

줄리뉴
OR · 아웃사이드 라이트줄리뉴Júlio Botelho

AC 피오렌티나 AC 피오렌티나 문장 · 7경기 1골

레몽 코파
IR · 인사이드 라이트레몽 코파Raymond Kopaszewski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마드리드 CF 문장 · 8경기 2골

토미 테일러
CF · 센터 포워드토미 테일러Thomas Taylor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문장 · 8경기 8골

데니스 바이올렛
IL · 인사이드 레프트데니스 바이올렛Dennis Sydney Viollet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문장 · 6경기 9골 · 득점왕

파코 헨토
OL · 아웃사이드 레프트파코 헨토Francisco Gento López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마드리드 CF 문장 · 8경기 1골

골문과 최후방

골문은 블라디미르 베아라(Vladimir Beara; 유고슬라비아 골키퍼, 1928-2014)에게 맡겼다. 결승은커녕 4강에서 멈춘 팀의 골키퍼를 우승팀 알론소보다 앞에 둔 데는 이유가 있다. 츠르베나 즈베즈다의 첫 유러피언컵 경기는 네덜란드 챔피언의 안방 원정이었고, 베아라는 그 경기에서 세 골을 내주고도 팀의 4-3 승리를 지켰다. 이후 네 경기에서 내준 골은 세 골뿐이다. 특히 4월 18일 피렌체의 4강 2차전이 인상적이다. 베오그라드의 1차전을 0-1로 내준 츠르베나 즈베즈다는 이날 골문에 베아라를 다시 세웠고, 결승을 눈앞에 둔 피오렌티나 공격진은 90분 동안 한 골도 넣지 못했다. 팀은 합계 0-1로 탈락했지만 그 한 골은 베아라가 서지 않은 경기에서 나온 골이었다. [1][3]

기실 베아라는 이 대회 전부터 유럽이 아는 이름이었다. 1946년부터 하이두크 스플리트의 골문을 지키다 1955년 츠르베나 즈베즈다로 옮겼고,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은메달의 주전이었다. 우아한 몸놀림과 단단한 캐칭을 함께 갖춰 ‘강철 손을 가진 발레리노’로 불렸는데, 1963년 레프 야신이 역대 최고의 골키퍼는 자신이 아니라 베아라라고 말했다는 일화까지 따라붙는다. 1년 뒤인 1958년 2월, 뮌헨으로 떠나기 전 맨유가 치른 마지막 경기에서 반대편 골문을 지킨 사람도 그였다. [4]

그 앞의 중앙에는 마르키토스(Marcos Alonso Imaz; 스페인 수비수, 1933-2012)가 선다. 레알의 3번이다. 결승 명단도 오른쪽 풀백 토레스, 가운데 마르키토스, 왼쪽 풀백 레스메스 순서로 적혀 있다. 1년 전 파리 결승에서 자기 진영부터 달려 나가 3-3 동점골을 넣은 그 선수인데, 이번 대회에서는 골 대신 무실점으로 흔적을 남겼다. 라피트와의 16강 재경기, 니스와의 8강 1차전, 그리고 피오렌티나와의 결승까지 그가 선 여섯 경기 가운데 세 경기에서 레알은 한 골도 내주지 않았다. 산탄데르 출신인 그의 이름은 지금도 낯설지 않은데, 아들 마르코스 알론소 페냐가 바르셀로나에서, 손자 마르코스 알론소 멘도사가 첼시와 스페인 대표팀에서 뛰었기 때문이다. [1][5]

왼쪽 풀백은 로저 번(Roger William Byrne; 잉글랜드 풀백, 1929-1958)이다. 맨유가 치른 여덟 경기에 모두 3번으로 나선 주장이다. 오른발잡이면서 왼쪽 수비를 맡았고, 풀백은 뒤에 서 있는 자리라는 통념과 달리 앞으로 치고 올라가 공격에 가담하는 선수였다. 대표팀에서도 1954년 4월 데뷔전부터 1957년 11월까지 잉글랜드의 서른세 경기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필자가 그를 명단에 넣은 건 기록 한 줄 때문이 아니다. 처음 유럽에 나선 젊은 버스비의 아이들이 4강까지 가는 동안, 그 뒷문과 라커룸을 한 사람이 함께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2월 뮌헨 공항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아내는 첫아이를 가진 상태였다. [1][7]

오른쪽 풀백은 준우승팀 몫이다. 아르디코 마그니니(Ardico Magnini; 이탈리아 수비수, 1928-2020)는 주장 세르지오 체르바토와 함께 풀비오 베르나르디니 감독의 피오렌티나 수비를 짝지어 지킨 2번이다. 그가 선 다섯 경기에서 피오렌티나가 내준 골은 네 골에 불과하고, 무실점으로 막은 두 경기가 바로 츠르베나 즈베즈다와의 4강 두 경기였다. 결승에서는 헨토를 막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허나 결승의 명암도 그에게서 갈렸다. 69분 마테오스를 뒤따라가 넣은 태클이 페널티킥 판정으로 이어졌고, 그 킥에서 레알의 첫 골이 나왔다. 판정을 둘러싼 논란은 결승 하이라이트에 따로 적었지만, 대회 전체를 놓고 보면 준우승팀 수비가 결승까지 버틴 시간의 대부분에 그의 이름이 있다. [1][8]

두 하프

왼쪽 하프는 던컨 에드워즈(Duncan Edwards; 잉글랜드 하프백, 1936-1958)다. 맨유의 일곱 경기에서 6번을 달았고, 도르트문트 원정에서는 10번을 달고 인사이드 레프트로 뛰었다. 레프트 하프가 본래 자리였지만 센터 하프와 센터 포워드까지 소화하던, 말 그대로 만능 선수였다. 필자는 당시 맨유의 실력적 리더를 에드워즈로 본다. 같은 팀의 바비 찰턴이 그 옆에서 늘 열등감을 느꼈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이 대회에서 골은 없었지만, 그 한 해 그는 리그 우승과 FA컵 결승을 거쳐 연말 발롱도르 투표에서 공동 3위에 올랐다. 스물한 살이었다. [1][9]

그리고 오른쪽 하프에 알프레도 디스테파노(Alfredo Di Stéfano Laulhé; 아르헨티나 출신 스페인 센터 포워드, 1926-2014)를 세웠다. 앞서 밝혔듯 기록지의 자리는 여덟 경기 모두 9번이다. 그런데도 필자가 그를 하프 라인에 둔 건 이 선수가 실제로 경기장에서 한 일이 그 번호 하나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공이 오지 않으면 스스로 내려와 받았고, 받은 공을 들고 다시 전방까지 올라가 마무리까지 했다. 레알 공식 기록이 그의 공격·수비 참여와 전방위적인 영향력을 함께 강조하는 이유다. [6]

숫자도 그 자리를 뒷받침한다. 라피트와의 16강 1차전에서 두 골을 넣었고, 빈 원정에서 1-3으로 진 경기의 한 골이 합계를 5-5로 맞춰 레알을 재경기로 보냈다. 니스 원정에서는 두 골로 3-2 역전승을 만들었고, 맨유와의 4강 1차전에서 두 번째 골, 결승에서 페널티킥 선제골을 넣었다. 레알이 치른 네 라운드에서 모두 골을 넣은 선수는 그 하나뿐이다. 한 해 뒤 두 번째 발롱도르 투표에서 72점을 받은 이유는 1957년 발롱도르 편에 정리해 두었다. [1][2]

다섯 공격

오른쪽 끝은 줄리뉴(Júlio Botelho; 브라질 오른쪽 윙어, 1929-2003)다. 피오렌티나의 일곱 경기 모두 7번이었고, 그라스호퍼 원정의 선제골로 8강 2-2 무승부를 이끌었다. 한 골뿐인 기록이 초라해 보일 수 있지만, 일곱 경기에서 여덟 골밖에 넣지 못한 피오렌티나에서 드리블로 측면을 여는 그는 팀이 가진 가장 분명한 공격 수단이었다. 결승에서도 경기 초반 레알을 먼저 위협한 쪽은 7번 줄리뉴였다. 1954년 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로 뛴 뒤 피렌체로 건너왔고, 1996년에는 피오렌티나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혔다. [1][10]

그 안쪽 인사이드 라이트는 레몽 코파(Raymond Kopaszewski; 프랑스 공격수, 1931-2017)의 몫이다. 랭스에서 레알로 옮긴 첫 시즌, 그는 여덟 경기에서 7번을 네 번, 8번을 세 번, 10번을 한 번 달았다. 오른쪽 끝과 안쪽을 오간 셈인데, 줄리뉴가 오른쪽 끝을 맡는 이 명단에서는 8번 자리에 세웠다. 첫 골은 라피트와의 16강 재경기에서 나왔고, 레알 유니폼을 입고 넣은 첫 유러피언컵 골이었다. 두 번째 골은 올드 트래퍼드의 4강 2차전 선제골이었다. 헨토가 빛나던 왼쪽에 공격이 쏠리던 팀에서 오른쪽을 맡느라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다고 본인도 회고했지만, 그해 연말 발롱도르에서 두 해 연속 3위에 올랐다. [1][11]

한가운데는 토미 테일러(Thomas Taylor; 잉글랜드 센터 포워드, 1932-1958)다. 맨유의 여덟 경기에 모두 9번으로 나서 여덟 골을 넣었다. 브뤼셀 원정에서 한 골, 메인 로드의 10-0 경기에서 세 골, 빌바오와의 8강 두 경기에서 한 골씩, 그리고 레알과의 4강 두 경기에서도 한 골씩. 특히 4강의 두 골은 모두 맨유가 레알을 쫓아가는 골이었다. 베르나베우에서 0-2로 뒤진 뒤 한 골 차로 따라붙었고, 올드 트래퍼드에서는 합계 1-5가 된 뒤 추격의 첫 골을 넣었다. 디스테파노를 하프로 내린 결정은 결국 이 선수를 명단에 남기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테일러도 이듬해 2월 뮌헨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1][2]

인사이드 레프트는 득점왕 데니스 바이올렛(Dennis Sydney Viollet; 잉글랜드 공격수, 1933-1999)이다. 맨유의 10번을 달고 여섯 경기에서 아홉 골을 넣었다. 잉글랜드 구단의 첫 유러피언컵 골이 브뤼셀에서 나온 그의 골이었고, 메인 로드의 10-0 경기에서는 혼자 네 골을 넣었다. 도르트문트와의 16강 1차전 두 골, 빌바오와의 8강 두 경기 한 골씩까지 더하면 8강까지 다섯 경기에서 아홉 골이다. 두 경기를 빠지고도 1위를 끝까지 지켰으니 경기당 득점으로는 이 대회 누구도 따라오지 못했다. 그는 뮌헨 사고에서 살아남았다. [1][2]

마지막 자리, 왼쪽 끝은 파코 헨토(Francisco Gento López; 스페인 왼쪽 윙어, 1933-2022)다. 레알의 여덟 경기에 모두 11번으로 나섰다. 골은 한 골뿐인데, 그 한 골이 결승의 두 번째 골이었다. 디스테파노의 페널티킥으로 앞선 뒤, 수비 사이를 빠져나와 사르티 앞까지 혼자 도착했고 발밑으로 몸을 던진 골키퍼 위로 공을 띄워 넘겼다. 레알은 그 골로 2연패를 사실상 확정했다. ‘칸타브리아 바다의 폭풍’이라는 별명대로 속도로 측면을 찢던 선수였고, 레알의 공격이 왼쪽으로 쏠렸다는 코파의 회고도 결국 헨토 이야기다. 그는 이후 레알에서 유러피언컵을 여섯 번 들게 되는데, 마르키토스와 같은 라싱 산탄데르 출신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1][8][12]

명단 밖에 남은 이름들

솔직히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이름은 보라 코스티치(Borivoje Kostić; 유고슬라비아 왼쪽 윙어, 1930-2011)였다. 여섯 경기 다섯 골로 츠르베나 즈베즈다가 넣은 열 골의 절반을 책임졌고, 네덜란드 원정에서는 4분 만에 선제골을 넣었다. 허나 왼쪽 끝 자리를 두고 결승의 결정골을 넣은 헨토와 저울질하니, 대회를 끝까지 치른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같은 팀의 골키퍼 베아라가 이미 명단에 들어갔다는 점도 무게를 나눴다. [2]

레알에서도 두 이름이 끝까지 남았다. 후안 알론소(Juan Adelarpe Alonso; 스페인 골키퍼, 1927-1994)는 일곱 경기에서 골문을 지켜 결승을 무실점으로 마쳤고, 주장 미겔 무뇨스(Miguel Muñoz Mozún; 스페인 하프백, 1922-1990)는 결승 뒤 두 번째 트로피를 들었다. 다만 알론소는 빈 원정과 니스 원정, 올드 트래퍼드에서 모두 두 골 이상을 내줬고, 무뇨스는 여섯 경기에 나섰지만 하프 라인에서 디스테파노를 밀어낼 만한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1]

피오렌티나의 주장 세르지오 체르바토(Sergio Cervato; 이탈리아 수비수, 1929-2005)와 레프트 하프 아르만도 세가토(Armando Segato; 이탈리아 하프백, 1930-1973)도 일곱 경기씩 뛰었다. 준우승팀 수비가 일곱 경기에서 여섯 골만 내줬다는 사실만 보면 두 사람 모두 자격이 있지만, 왼쪽 풀백과 왼쪽 하프에는 번과 에드워즈가 서 있었다. 같은 맨유의 에디 콜먼(Edward Colman; 잉글랜드 라이트 하프, 1936-1958)은 여덟 경기 모두 4번을 달았으니, 기록만 보면 디스테파노보다 이 자리에 더 어울리는 선수였다. [1]

8강 전에 멈춘 팀의 이름도 있다. 도르트문트의 알프레트 프라이슬러(Alfred Preißler; 서독 공격수, 1921-2003)는 16강에서 탈락하고도 다섯 경기에서 여섯 골을 넣었고, 아틀레틱 클루브의 호세 루이스 아르테체(José Luis Artetxe Muguire; 스페인 공격수, 1930-2016)는 포르투전 해트트릭으로 예선을 뒤집었다. 니스의 자크 푸아(Jacques Foix; 프랑스 공격수, 1930-2017)는 다섯 경기에 한 골씩 나눠 넣었다.

그렇게 추리고 나니 레알에서 네 명, 맨유에서 네 명, 피오렌티나에서 두 명,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한 명이 남았다. 4강에 오른 네 팀이 모두 명단에 들어갔다. 두 번째 유러피언컵은 레알의 2연패로 끝났지만, 그 대회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두 사람은 첫 도전에 나선 맨유의 공격수였고, 그중 한 사람과 뒷문을 지킨 주장, 스물한 살의 하프는 이듬해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출처와 기록 기준

  1. 「European Champion Clubs’ Cup 1956/57 matches and line-ups」, UEFA 경기 데이터. 44경기의 선발 명단, 선수별 등번호와 주장 표시, 득점.
  2. 「European Champions’ Cup 1956-57 - Details」, RSSSF. 경기별 득점자와 득점자 목록.
  3. 「1956/57: Di Stéfano and Gento win it for Madrid」, UEFA. 시즌 흐름과 결승.
  4. 「Vladimir Beara」, Wikipedia. 하이두크 스플리트·츠르베나 즈베즈다 경력, 1952년 올림픽, 별명과 야신의 평.
  5. 「Marquitos」, Wikipedia. 산탄데르 출신, 1956년 결승 동점골, 아들과 손자의 선수 경력.
  6. 「Alfredo Di Stéfano Laulhé」, 레알 마드리드 CF. 공격·수비 참여와 전방위적인 영향력.
  7. 「Roger Byrne」, Wikipedia. 주장 경력, 플레이 스타일, 잉글랜드 연속 출전 기록과 뮌헨 사고.
  8. 「Ardico Magnini」, Wikipedia. 체르바토와의 수비 조합. 결승 장면은 삥이FC의 1956-57 유러피언컵 결승 하이라이트에서 영상과 함께 대조했다.
  9. 「Remembering Duncan Edwards」, ESPN. 에드워즈가 뛴 포지션과 바비 찰턴의 회고.
  10. 「Julinho」, Wikipedia. 오른쪽 윙어로서의 역할, 1954년 월드컵, 1996년 피오렌티나 역대 최고 선수 선정.
  11. 「Goals not coal for Kopa」, UEFA. 레알에서 오른쪽에 선 코파의 회고.
  12. 「Paco Gento」, Wikipedia. 라싱 산탄데르에서의 출발, 별명, 유러피언컵 여섯 차례 우승.

1956-57 시즌에는 공식 대회 베스트 11 시상이 없었다. 열한 명은 삥이FC가 2026년 선정한 회고 명단이다. 출전 경기와 무실점은 UEFA 경기 데이터의 선발 명단과 경기 결과, 득점은 UEFA와 RSSSF가 일치하는 기록을 기준으로 하며 공식 도움 통계는 없어 기록표에 넣지 않았다. 역할어는 선수가 경기마다 단 등번호와 당시 구단의 번호 체계를 따랐고, 알프레도 디스테파노의 오른쪽 하프 배치만 등번호가 아닌 필자의 판단이다. 블라디미르 베아라 사진은 네덜란드 국가기록원 Anefo 소장본(CC0, 1953), 아르디코 마그니니 사진은 1955-56 피오렌티나 단체 사진, 토미 테일러·데니스 바이올렛·로저 번 사진은 1957년 《레코르드마가시네트》의 맨유 단체 사진, 줄리뉴 사진은 1954년 《에스타디오》 게재본으로 모두 Wikimedia Commons 소장본이다. 알프레도 디스테파노·레몽 코파·던컨 에드워즈 사진은 1957년 발롱도르 편, 선수 카드의 구단 문장은 국적과 혼동되지 않도록 1956-57 유러피언컵 본편과 같은 시대의 구단 자산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