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 LEGEND

자우마 산투스(Djalma Santos)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공수 완벽 풀백의 정석, 카푸 이전 브라질 라이트백의 기준

네 번의 월드컵, 두 번의 우승, 단 한 경기로 대회 최고의 라이트백. 24년 동안 한 번도 퇴장당하지 않은 브라질의 자우마 산투스. 1954년 베른의 페널티킥, 1958년 스톡홀름 결승, 1963년 웸블리 세계 선발까지. 클럽·국대 기록과 역대 등번호, 우승과 개인 수상을 정리한다.
노란 상의에 파란 깃의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정면을 바라보는 자우마 산투스와 브라질 국기, 레전드 문구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자우마 산투스.
FIFA 로고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BRAZIL브라질 연방 공화국República Federativa do Brasil
CONMEBOL 엠블럼

남미축구연맹Confederación Sudamericana de Fútbol (스페인어)Confederação Sul-Americana de Futebol (포르투갈어)

별 다섯 개가 달린 브라질 축구 연맹 CBF 문장
#CBF브라질 축구 연맹Confederação Brasileira de Futebol
별 다섯 개와 BRASIL 글자가 들어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
#BRA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Seleção Brasileira de Futebol | A Seleção (셀레상; 대표팀)
편집자 평가

자우마 산투스는 공수 완벽 풀백의 정석이다. 1954년부터 1966년까지 네 번의 월드컵에 모두 선발로 나섰고, 1958년과 1962년 두 번 세계 정상에 섰으며, 세 대회에서 대회 최고의 라이트백으로 꼽혔다. 1958년에는 결승 단 한 경기만 뛰고도 그 이름을 얻었다. 포르투게자와 파우메이라스에서 각각 400경기 넘게 뛰는 동안 상대 팀 최고의 윙어를 막는 일이 그의 몫이었는데, 24년의 선수 생활 동안 한 번도 퇴장당하지 않았다. 셀레상의 왼쪽에 니우통 산투스가 있었다면 오른쪽에는 그가 있었다. 1963년 웸블리에서 FIFA가 세계 선발을 꾸렸을 때 그 열한 명 가운데 유일한 브라질 선수도 그였다. 오른쪽 풀백의 역사에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와 카푸가 섰던 자리의 기준을 처음 세운 사람이 자우마 산투스다.

삥이FC 자우마 산투스 평가

  1. 1954년, 1958년, 1962년, 1966년에 열린 네 번의 FIFA 월드컵에서 자우마 산투스는 두 번의 우승과 함께 세 대회에서 대회 최고의 라이트백으로 꼽혔다. 당대의 라이트백 가운데 그와 견줄 선수는 없었고, 셀레상에서는 왼쪽의 니우통 산투스와 호흡을 맞췄다. 오늘날 그는 까마득한 후배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Carlos Alberto Torres; 1970년 브라질 월드컵 우승 주장·오른쪽 풀백, 1944-2016), 카푸와 함께 역대 라이트백 TOP 3의 최고 레벨로 평가된다.

  2. 자우마 산투스의 장점은 수비력에 있다. 현대 축구 팬들도 2023-24 시즌 레알 마드리드가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들 때, UEFA 유로 2024에서 스페인이 우승할 때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수비되는 풀백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 자리에 다니 카르바할(Daniel Carvajal Ramos; 레알 마드리드와 스페인의 오른쪽 풀백, 1992-)이 있었다. 자우마 산투스는 그 분야의 최정점에 선 사람이다. 인테르의 타르치시오 부르니치(Tarcisio Burgnich; 인테르와 이탈리아의 수비수, 1939-2021), 주세페 베르고미(Giuseppe Bergomi; 인테르와 이탈리아의 수비수, 1963-), 하비에르 사네티(Javier Adelmar Zanetti; 인테르와 아르헨티나의 측면 수비수, 1973-), 묀헨글라트바흐의 베르티 포크츠(Hans-Hubert Vogts;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서독의 오른쪽 풀백, 1946-), 유벤투스의 릴리앙 튀람(Lilian Thuram; 유벤투스와 프랑스의 수비수, 1972-), 바이언 뮌헨의 필리프 람(Philipp Lahm; 바이언 뮌헨과 독일의 측면 수비수, 1983-)과 함께 공수 완벽의 라이트백으로 꼽히며, 수비력만큼 공격에서도 수준급의 능력을 여럿 보여 줬다.

  3. 미드필더와 수비 진영을 모두 소화한 그는 기복 없는 경기력으로 10년 넘게 세계 최고의 라이트백 자리를 지켰다. 브라질 안에서 자우마 산투스의 위상은 한국 팬들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그를 기리는 브라질 언론의 문장에는 역대 최고의 라이트백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다.

  4. 스피드, 체력, 대인 마크, 태클, 공중볼 다툼에서 그는 대부분 이겼다. 파우메이라스는 그가 어깨를 맞대는 몸싸움과 태클에서 거의 뚫리지 않았고, 공을 함부로 걷어 차지 않았다고 기록한다. 스로인마저 무기였다. 그가 던진 공은 상대 페널티 지역으로 날아가는 크로스였다. 포르투게자와 파우메이라스에서 각각 400경기 넘게 뛴 꾸준함은 그 모든 능력이 한 시즌의 반짝임이 아니었다는 증거다.

  5. 그리고 그는 그 모든 것을 깨끗하게 했다. 각 팀 최고의 공격수를 맡는 수비수였는데도 24년 동안 한 번도 퇴장당하지 않았다. 브라질 축구 박물관은 그를 두고 대인 마크에 지칠 줄 몰랐지만 반칙에 기대지 않았다고 썼다.

흰 바탕에 초록 깃, CBD 문장이 달린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자우마 산투스의 컬러 상반신
아르헨티나 『엘 그라피코』 1959년 3월 19일 자 표지의 자우마 산투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온 세계 챔피언 브라질의 오른쪽이다.

자우마 산투스 프로필

브라질 연방 공화국República Federativa do Brasil
본명
Dejalma dos Santos
등록명
자우마 산투스(Djalma Santos)
출생
1929년 2월 27일
출생지
브라질 상파울루 봉헤치루
사망
2013년 7월 23일 · 향년 84세
사망지
브라질 미나스제라이스주 우베라바
신장
173cm
대표 국적
브라질
포지션
라이트백 · 센터백
주요 등번호
2번 · 4번
선수 경력
1948-1971년
대표팀
1952-1968년 · 98경기 3골
퇴장
선수 생활 내내 0회
주발
오른발

1948년, 신발 공장의 손과 포르투게자의 문

자우마 산투스는 1929년 2월 27일 상파울루의 봉헤치루(Bom Retiro; 상파울루 도심 북쪽의 이민자 동네)에서 태어났다. 출생증명서의 이름은 데자우마 두스 산투스(Dejalma dos Santos)였다. 세 살에 북쪽의 파라다잉글레자로 옮겨 갔고,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으며 아버지와는 연락이 없었다. 학교는 4학년까지 다녔다. 어린 그가 꿈꾼 것은 공군이었다. 10대에 일하던 신발 공장에서 기계에 손을 다쳤고, 손가락이 굽은 그 손으로는 공군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남은 길은 공이었다. 이피랑가, 상파울루 FC, 코메르시아우의 입단 테스트에서 차례로 떨어진 그는 동네 아마추어 구단 인테르나시오나우 지 파라다잉글레자에서 뛰었다. 그 팀의 골키퍼가 그를 포르투게자(Associação Portuguesa de Desportos; 상파울루의 포르투갈 이민자 공동체가 세운 축구단)에 데려갔고, 열일곱의 그는 테스트를 통과했다. 원래 중앙 수비수였지만 볼란치로 뽑혔고, 1948년 산투스전에서 1군에 데뷔했다. 그날 구단이 그의 모자를 경품으로 걸어 모은 돈이 공장 월급의 두 배였다. 그는 훗날 이렇게 기억했다. 공장에서는 30을 벌었는데 60을 줬다(Ganhava trinta, me deram sessenta).

라이트백은 우연히 찾아왔다. 포르투게자가 미드필더 브랑당지뉴(Brandãozinho; 포르투게자와 브라질의 미드필더)를 데려오자 구단 사람 하나가 그에게 물었다. 풀백을 해 보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자우마 산투스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포르투게자는 그와 함께 1952년과 1955년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Torneio Rio-São Paulo; 히우지자네이루와 상파울루 두 주의 강호가 겨룬 대회)를 들었다. 그는 이 구단에서 11년을 뛰는 동안 주 선수권은 한 번도 들지 못했다고 훗날 담담하게 말했다.

1952년 산티아고에서 시작된 셀레상의 오른쪽

1952년 4월 10일 칠레 산티아고, 파나메리카 챔피언십(Campeonato Panamericano de Fútbol; 아메리카 대륙 대표팀 대회) 페루전에서 자우마 산투스는 처음 셀레상 유니폼을 입었다. 경기는 0-0이었지만 그는 그 대회 네 경기를 모두 뛰었고, 브라질은 정상에 올랐다. 이듬해 리마의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는 일곱 경기를 뛰며 준우승했다. 그때부터 1968년까지 16년 동안 브라질의 오른쪽 풀백은 그의 자리였다.

경기장에서 어깨동무를 한 채 웃는 세 선수의 세피아 사진, 왼쪽과 오른쪽은 브라질 유니폼, 가운데는 어두운 칠레 유니폼
1954년 3월 칠레 잡지 『에스타디오』에 실린 사진. 왼쪽부터 자우마 산투스, 칠레의 라미로 코르테스, 지지. 그해 월드컵 남미 예선 무렵이다.

1954년 6월 27일 베른, 아무도 차려 하지 않은 페널티킥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자우마 산투스는 2번을 달았다. 반대편 3번은 니우통 산투스였다. 브라질은 멕시코를 5-0으로 이기고 유고슬라비아와 1-1로 비긴 뒤 8강에서 헝가리를 만났다. 6월 27일 베른, 경기 시작 7분 만에 헝가리가 두 골을 넣었다. 전반 18분 브라질이 페널티킥을 얻었다.

공 앞에 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훗날 그는 FIFA와의 인터뷰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돌아봤다. 지지(Waldyr Pereira, Didi; 플루미넨시·보타포구와 브라질의 미드필더, 1928-2001)가 물러섰고, 줄리뉴(Júlio Botelho; 포르투게자·피오렌티나와 브라질의 오른쪽 윙어, 1929-2003)가 물러섰다. 벤치에서 가라, 자우마 하는 외침이 들렸다. 그가 찼고, 공은 들어갔다. A매치 첫 골이었다.

그걸 놓쳤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욕을 먹고 있을 것이다.

If I'd missed it, I'd still be getting blamed today.

- 자우마 산투스, 1954년 헝가리전 페널티킥을 돌아보며. FIFA 인터뷰

그는 1950년 결승의 골키퍼 바르보자(Moacyr Barbosa Nascimento; 바스쿠 다가마와 브라질의 골키퍼, 1921-2000)보다 더한 희생양이 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브라질은 그 경기를 2-4로 졌고, 경기는 니우통 산투스와 헝가리의 보지크 요제프(Bozsik József; 부다페스트 혼베드와 헝가리의 라이트 하프, 1925-1978), 브라질의 움베르투 토지(Humberto Barbosa Tozzi; 파우메이라스와 브라질의 센터 포워드, 1934-1980)가 퇴장당한 베른의 전투로 남았다. 그 난장판 속에서도 자우마 산투스의 이름은 퇴장 명단에 없었다. 이 대회의 이야기는 1954 FIFA 월드컵 베스트 11에 있다. 삥이FC는 그 대회의 풀백으로 그를 골랐다.

경기장에서 공을 발밑에 두고 선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의 자우마 산투스 전신 세피아 사진
1954년 6월 칠레 잡지 『에스타디오』의 자우마 산투스. 스위스 월드컵 개막 직전이다.

1958년 6월 29일 스톡홀름, 단 한 경기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 자우마 산투스는 벤치에 있었다. 서른이 다 된 그 대신 상파울루 FC의 지 소르지(Newton De Sordi; 상파울루 FC와 브라질의 오른쪽 풀백, 1931-2013)가 첫 다섯 경기를 모두 뛰었다. 결승을 앞두고 지 소르지가 빠졌다. 다쳤다는 기록과 지나치게 긴장한 그를 의료진이 뺐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어느 쪽이든 결승의 오른쪽 풀백은 그 대회에서 한 번도 뛰지 않은 자우마 산투스였다.

6월 29일 스톡홀름 로순다 경기장, 상대는 개최국 스웨덴이었다. 경기 감각이 식은 채 들어간 그에게 맡겨진 일은 스웨덴의 가장 위험한 공격수를 막는 것이었다. 브라질 라디오 해설자 오두바우두 코지(Oduvaldo Cozzi; 브라질의 라디오 축구 해설자)는 그를 숱한 싸움을 겪은 늙은 늑대(velho lobo de outras batalhas)라고 불렀다. 브라질은 5-2로 이겼다.

경기장에서 손을 들어 올린 자우마 산투스 옆에서 열일곱 살의 펠레가 울고 골키퍼 질마르가 그를 감싸는 흑백 사진
1958년 6월 29일 결승이 끝난 뒤의 로순다. 왼쪽부터 자우마 산투스, 울음을 터뜨린 열일곱 살의 펠레, 골키퍼 질마르. 뒤에 지지가 서 있다.

그 한 경기로 그는 대회 최고의 라이트백으로 꼽혔다. 브라질 축구 박물관의 표현을 빌리면 필요한 것은 결승 한 경기뿐이었다. 그는 그 승리를 평생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했다.

스웨덴을 꺾은 이 승리가 내 경력에서 가장 아름다운 승리다.

Cette victoire contre la Suède est la plus belle de ma carrière.

- 자우마 산투스, 1958년 결승을 돌아보며. 2010년 FIFA 인터뷰 프랑스어판
경기장에서 줄리메컵을 앞에 두고 두 줄로 서고 앉은 브라질 선수단과 감독의 흑백 단체 사진
1958년 6월 29일 스톡홀름, 줄리메컵과 함께한 브라질 선수단. 뒷줄 왼쪽 끝의 페올라 감독 바로 옆이 자우마 산투스다.

그해의 열한 명에 한 경기만 뛴 그를 넣은 것은 삥이FC의 선택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1958 FIFA 월드컵 베스트 11에 있다.

1959년, 파우메이라스의 2번

1959년 서른의 자우마 산투스는 11년을 뛴 포르투게자를 떠나 파우메이라스(Sociedade Esportiva Palmeiras; 상파울루의 이탈리아 이민자 공동체가 세운 축구단)로 옮겼다. 이적을 앞두고 그 구단은 흑인 선수를 받지 않는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그는 그 말을 웃어넘겼다. 5월 30일 코메르시아우전 6-1 승리가 데뷔전이었다.

그해 파우메이라스는 펠레의 산투스와 주 선수권 결정전을 거듭 치른 끝에 1960년 1월 우승했다. 오른쪽에는 같은 포르투게자 출신의 윙어 줄리뉴가 있었다. 둘이 만든 오른쪽은 1960년대 파우메이라스의 무기가 됐다.

경기장에서 두 줄로 서고 앉은 어두운 유니폼의 파우메이라스 선수들 흑백 단체 사진
1960년 1월 7일 산투스와의 주 선수권 결정전에 앞선 파우메이라스. 뒷줄 맨 왼쪽이 자우마 산투스다.

파우메이라스에서 그는 9년 동안 502경기를 뛰었다. 주 선수권 1959년·1963년·1966년, 전국 대회인 타사 브라질 1960년·1967년,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자 1967년,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 1965년을 들었고, 그 가운데 네 번은 주장이었다. 1967년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자 우승 때 그는 서른여덟이었다.

1962년 칠레, 니우통 산투스와 여섯 경기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자우마 산투스는 서른셋, 니우통 산투스는 서른일곱이었다. 두 산투스는 여섯 경기를 모두 함께 선발로 뛰었다. 오른쪽의 자우마 산투스, 왼쪽의 니우통 산투스, 가운데의 마우루(Mauro Ramos de Oliveira; 산투스와 브라질의 센터백, 1962년 우승 주장, 1930-2002)와 조지무(Zózimo Alves Calazães; 방구와 브라질의 센터백, 1932-1977). 펠레가 두 번째 경기에서 다쳐 빠진 대회를 지킨 것은 이 수비진이었다. 브라질은 6월 17일 산티아고 결승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3-1로 꺾고 두 대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자우마 산투스는 다시 대회 최고의 라이트백으로 꼽혔다.

여러 줄로 서고 앉은 1962년 브라질 대표팀 선수들의 흑백 단체 사진
1962년 칠레 월드컵 브라질 대표팀. 사진가 베르네르 아베르코른이 남긴 단체 사진이다.

그 결승에는 체코 쪽에서만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브라질이 2-1로 앞서던 때, 체코 공격수 요세프 옐리네크(Josef Jelínek; 두클라 프라하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격수, 1941-)의 크로스가 자우마 산투스의 손에 맞았는데 주심이 그대로 진행했다는 것이다. 옐리네크는 50년 뒤 상파울루의 기념행사에서 자우마 산투스가 그 핸드볼을 인정했다고 체코 언론에 말했다. 한쪽의 회고라 사실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노인이 된 두 결승 상대가 웃으며 그 장면을 되짚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1963년 10월 23일 웸블리, 세계 선발의 유일한 브라질인

1963년 잉글랜드 축구 협회는 창립 100주년을 맞아 웸블리에서 잉글랜드와 FIFA 세계 선발의 경기를 열었다. 세계 선발의 골문은 레프 야신(Лев Яшин; 디나모 모스크바와 소련의 골키퍼, 1929-1990)이 지켰고, 앞줄에는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에우제비우, 파코 헨토(Francisco Gento López; 레알 마드리드와 스페인의 왼쪽 윙어, 1933-2022), 레몽 코파, 데니스 로(Denis Law;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스코틀랜드의 공격수, 1940-2025)가 섰다. 그 오른쪽 풀백이 자우마 산투스였다. 펠레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그는 열한 명 가운데 유일한 브라질 선수가 됐다.

그는 전반 45분 동안 잉글랜드의 바비 찰턴(Sir Robert Charlton;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의 공격형 미드필더, 1937-2023)을 맡았고, 후반에 칠레의 루이스 에이사기레(Luis Eyzaguirre; 칠레의 오른쪽 풀백)와 교체됐다. 잉글랜드가 2-1로 이겼다. 결승골은 교체로 들어간 수비수의 걷어 내기 실수에서 나왔다. 축구 발상지의 100번째 생일에 세계가 내세운 오른쪽 풀백, 그것이 서른넷의 자우마 산투스였다.

1965년 미네이랑, 파우메이라스가 브라질이 된 날

1965년 9월 7일 벨루오리존치의 미네이랑 경기장 개장 경기에서 브라질은 우루과이를 3-0으로 꺾었다. 그날 브라질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열한 명은 모두 파우메이라스 선수였다. 대표팀이 통째로 한 구단에 맡겨진 경기였고, 오른쪽 풀백은 당연히 자우마 산투스였다. 파우메이라스의 전설 아지미르 다기아(Ademir da Guia; 파우메이라스의 미드필더, 1942-)는 그날을 이렇게 말했다. 파우메이라스는 어느 날 브라질이었고, 그건 아무도 지울 수 없다(O Palmeiras um dia foi Brasil, e isso ninguém mais vai apagar).

이듬해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서른일곱의 그는 불가리아전과 헝가리전 두 경기를 뛰었다. 브라질은 포르투갈에 지며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네 번의 월드컵 모두 선발로 나선 브라질 선수는 펠레와 그 둘뿐이다. 마지막 A매치는 1968년 6월 9일 상파울루에서 열린 우루과이전 2-0 승리였다. 16년, 98경기였다.

정장 차림의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트로피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자우마 산투스의 흑백 사진
1967년 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자 우승 뒤 상파울루 주지사 아브레우 소드레를 찾은 파우메이라스 선수단. 가운데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린 사람이 서른여덟의 자우마 산투스다. 사진: 상파울루 주 공공문서보관소, CC BY-SA 4.0.

1968년 쿠리치바, 마흔둘까지

1968년 파우메이라스를 떠난 그를 쿠리치바의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Club Athletico Paranaense; 파라나주 쿠리치바의 축구단)가 불렀다. 그를 부른 조프리 카브라우 이 시우바(Jofre Cabral e Silva;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회장) 회장은 그의 데뷔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자우마 산투스는 그 팀에 1970년 파라나주 선수권 우승을 안겼다.

1971년 1월 비라 카파네마 경기장에서 열린 그레미우전 0-0이 그의 마지막 경기였다. 경기가 끝나자 그는 축구화를 벗어 건넸고, 다음 날 그 팀의 감독이 됐다. 1948년 포르투게자에서 시작한 선수 생활은 그렇게 23년 만에 끝났다.

24년 동안 한 번도 퇴장당하지 않은 사람

자우마 산투스의 경력에서 가장 드문 기록은 우승 횟수가 아니다. 그는 선수 생활 내내 한 번도 퇴장당하지 않았다. 각 팀 최고의 윙어를 맡는 오른쪽 풀백이, 그것도 몸싸움이 거칠던 1950년대와 1960년대 남미 축구에서 그랬다. 브라질 축구는 그에게 오랫동안 퇴장 없이 뛴 선수에게 주는 벨포르트 두아르치 트로피(Troféu Belfort Duarte; 오랜 기간 퇴장 없이 뛴 선수에게 주던 브라질의 페어플레이 상)를 줬다. 그 자신은 이유를 짧게 말했다.

나는 축구장에서 한 번도 쫓겨난 적이 없다. 나는 규칙 안에서 뛰었다.

Je n'ai jamais été exclu d'un terrain de foot. Je jouais dans les règles.

- 자우마 산투스, 2010년 FIFA 인터뷰 프랑스어판

파우메이라스 역사 담당자 조타 크리스치아니니는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렇게 정리했다. 그를 남긴 것은 한 번도 퇴장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공을 함부로 걷어 차지 않고, 진 경기도 잃어버린 공도 없다는 듯 뛰었던 수비수에게 그 기록은 기술만큼 중요한 품격의 증거였다.

2013년 7월 23일 우베라바

은퇴한 자우마 산투스는 아틀레치쿠와 볼리비아의 볼리바르, 페루의 스포르트 보이스, 상루이스의 삼파이우 코헤아, 바이아의 감독을 맡았다. 약한 팀을 추켜세우는 말을 하지 못해 감독 일을 그만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 뒤 미나스제라이스주 우베라바에 자리를 잡고 20년 가까이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쳤다.

정장에 넥타이를 맨 노년의 자우마 산투스가 금빛 줄리메컵을 두 손으로 붙잡고 미소 짓는 컬러 사진
2008년 6월 26일 1958년 월드컵 우승 50주년 기념 전시에서 줄리메컵을 든 자우마 산투스. 사진: Fabio Rodrigues Pozzebom/ABr, CC BY 3.0 BR.

2013년 7월 1일 그는 우베라바의 병원에 입원했고, 중증 폐렴 끝에 7월 23일 저녁 여든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우베라바시는 사흘 동안 애도 기간을 선포했고, 시신은 시의회 대회의실에 안치됐다. 그날 대통령 지우마 호세프(Dilma Vana Rousseff; 브라질 대통령, 1947-)는 추모문을 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막아야 했는데도 한 번도 퇴장당하지 않았다.

Nunca foi expulso, mesmo tendo de marcar os melhores jogadores da sua época.

-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2013년 7월 24일 자우마 산투스 추모문

그해 브라질은 1958년 우승의 최후방을 차례로 잃었다. 7월에 자우마 산투스가, 8월에 골키퍼 질마르(Gylmar dos Santos Neves; 코린치앙스·산투스와 브라질의 골키퍼, 1930-2013)가, 11월에 니우통 산투스가 떠났다. 히우지자네이루 마라카낭의 명예의 길에는 지금도 그의 두 발자국이 남아 있다.

잔디 위에 놓인 청동판에 두 발자국과 자우마 산투스 이름이 새겨진 동판
마라카낭 명예의 길에 남은 자우마 산투스의 발자국. 사진: Rjcastillo, CC BY-SA 4.0.

역대 클럽·국대 기록

붉은 테두리 흰 방패에 초록 십자가가 든 1943-1952년 포르투게자 문장포르투게자1948-1959434경기 · 11골
초록 원 안에 P와 PALMEIRAS 글자가 든 1959-1969년 SE 파우메이라스 문장SE 파우메이라스1959-1968502경기 · 10골
붉은색과 검은색 가로 줄무늬 방패에 CAP 글자가 든 1950-1970년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문장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1968-197132경기 · 2골
CBD 글자와 초록·노랑 십자가 든 1958-1962년 브라질 대표팀 문장브라질 대표팀1952-196898경기 · 3골

파우메이라스는 구단 공식 기록(300승 105무 97패)이며, 자료에 따라 498경기나 501경기로도 적는다. 포르투게자는 자료마다 434경기에서 510경기까지 갈리고,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의 기록은 구단 공식 자료로 확인하지 못했다. 대표팀은 RSSSF가 정리한 A매치 기준이며, 세 골은 1954년 월드컵 헝가리전 페널티킥, 1956년 터키전, 1960년 코파 호카 아르헨티나전 페널티킥이다. CBF와 파우메이라스는 비공식 경기를 더해 110경기 이상으로 적는다. 문장은 자우마 산투스가 뛰던 시기의 것이다. 포르투게자는 1952-1973년 문장 자료가 없어 바로 앞 시기(1943-1952년)의 판을 실었고, 대표팀은 당시 대표팀을 운영한 브라질 스포츠 연맹(CBD)의 1958-1962년 판이다.

역대 등번호

클럽

소속팀확인 기간등번호
포르투게자1948-1959자료 미등록
SE 파우메이라스1959-1968자료 미등록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1968-1971자료 미등록

국가대표팀

대표팀확인 대회등번호
브라질1954 FIFA 월드컵2
브라질1958 FIFA 월드컵4
브라질1962 FIFA 월드컵2
브라질1966 FIFA 월드컵2

1950-60년대 브라질 구단은 고정 등번호 없이 그날 맡은 포지션에 따라 경기마다 번호를 달았고, 시즌별 번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오른쪽 풀백은 대개 2번을 달았다. 국가대표 번호는 각 월드컵 선수 명단 기준이다.

대표 우승 경력

FIFA 월드컵FIFA World Cup

우승: 1958년, 1962년

8강: 1954년

조별 리그: 1966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Campeonato Sudamericano de Fútbol · 현재의 코파 아메리카

준우승: 1953년, 1957년, 1959년(아르헨티나 대회)

4위: 1956년

파나메리카 챔피언십Campeonato Panamericano de Fútbol

우승: 1952년

코파 호카Copa Roca

우승: 1957년, 1960년, 1963년

코파 히우브랑쿠Copa Rio Branco

우승: 1968년

타사 오스바우두 크루스Taça Oswaldo Cruz

우승: 1955년, 1956년, 1962년

타사 베르나르두 오히긴스Taça Bernardo O'Higgins

우승: 1959년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Campeonato Brasileiro · 브라질 전국 선수권

우승: 1960년·1967년(타사 브라질), 1967년(토르네이우 호베르투 고메스 페드로자)

캄페오나투 파울리스타Campeonato Paulista · 상파울루 주 선수권

우승: 1959년, 1963년, 1966년

토르네이우 히우-상파울루Torneio Rio-São Paulo

우승: 1952년, 1955년(포르투게자), 1965년(파우메이라스)

캄페오나투 파라나엔시Campeonato Paranaense · 파라나주 선수권

우승: 1970년(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자우마 산투스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국가 수훈

상파울루 주 이피랑가 훈장 · 오피시아우Oficial · 2010년

  • 브라질 축구 박물관 「바로크 천사들」 전시상파울루 축구 박물관이 고른 브라질 축구의 영웅들2008년
  • RSSSF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1999년 이후 발표된 역대 선수 순위 열두 개를 모은 종합 순위34위
  • FIFA 100국제축구연맹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펠레가 선정한 125인의 축구선수2004년
  • FIFA 월드컵 대회 베스트 11대회별 언론 선정1954 · 1958 · 1962년
  • FIFA 월드컵 역대 올스타 팀1994년
  • FIFA 세계 선발잉글랜드 축구 협회 창립 100주년 기념 경기1963년
  • 월드 사커 올해의 세계 베스트 111962 · 1963 · 1965년

오늘날 자우마 산투스는 어떻게 평가받는가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FIFA가 정리한 역대 월드컵 올스타 팀의 오른쪽 풀백은 자우마 산투스였다. 레프 야신의 앞에서 바비 무어, 프란츠 베켄바워, 파울 브라이트너와 함께 수비진을 이뤘다. 월드컵 네 대회, 12경기, 두 번의 우승, 세 번의 대회 베스트. 월드컵이라는 무대만 놓고 보면 그보다 단단한 오른쪽 풀백의 이력은 찾기 어렵다.

2020년 《프랑스 풋볼》(France Football; 발롱도르를 주관하는 프랑스 축구 전문지)의 발롱도르 드림팀 투표에서 오른쪽 풀백 1위는 620점의 카푸였다. 필리프 람, 릴리앙 튀람, 베르티 포크츠가 뒤를 이었고, 자우마 산투스는 54점으로 7위였다. 같은 투표에서 카를루스 아우베르투는 39점으로 9위였다. 필자는 그 표를 존중하되, 그 투표가 텔레비전으로 본 축구의 기억에 기울어 있다고 본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오른쪽 풀백은 영상이 적은 만큼 점수를 잃었다. 영국의 축구 분석 사이트 피타고라스 인 부츠(Pythagoras in Boots; 영국의 축구 분석 블로그)는 그를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바로 아래, 튀람보다 한 단계 위에 두었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가 1970년 브라질의 상징이고 카푸가 오른쪽 풀백이라는 직업의 거의 모든 생애를 한 몸에 담았다면, 자우마 산투스는 그 둘이 서기 전에 그 자리의 기준을 세운 사람이다. 막는 것이 먼저였고, 막은 다음에는 올라갔으며, 그 모든 것을 반칙 없이 했다. 수비되는 풀백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에게 오른쪽 풀백의 첫 장은 자우마 산투스의 이름으로 시작한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트백 세 명을 꼽으라면, 삥이FC의 답에는 반드시 자우마 산투스가 들어간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