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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로마
Associazione Sportiva Roma Società a responsabilità limitata스타디오 올림피코 · 세리에 A 우승 3회 · 코파 이탈리아 9회 · UEFA 컨퍼런스 리그 1회
AS 로마 역대 최고의 전설 열한 명과 후보 서른여섯, 마흔일곱 개의 이름을 필자의 견해로 골랐다.
울며 태어나, 로마에서 불타다
고대 제국의 심장이자 세계 문명의 기원인 로마는 이름만으로도 찬란하다. 검투사들의 숨결이 남은 콜로세움과 폐허 위에 피어난 포룸의 돌바닥을 천천히 걸을 때마다 이 도시의 과거는 늘 현재처럼 살아 숨 쉰다. 그런 로마에 하나의 클럽이 태어났다. 1927년 6월 7일 밤, 이 도시의 세 구단이 북부의 팀들을 이길 큰 팀 하나를 만들자며 합쳤다. 초대 회장 이탈로 포스키(Italo Foschi; 이탈리아 체육 행정가)가 새 구단에 준 것은 카피톨리노의 암늑대와 도시의 두 색, 노랑과 빨강이었다.[1] 잘로로시(Giallorossi; 노랗고 붉은 사람들)라는 이름이 거기서 왔다. 1929년부터 1940년까지의 집은 노동자 동네 테스타초의 경기장 캄포 테스타초였고, 첫 스쿠데토(scudetto; 세리에 A 우승 팀이 이듬해 가슴에 다는 작은 방패, 곧 리그 우승)는 그곳을 떠난 지 두 해 뒤에 왔다.
유벤투스나 AC 밀란처럼 수많은 우승을 쌓지는 못했다. 구단이 스스로 적는 스쿠데토는 셋이다. 1942년의 첫 우승은 북부 밖의 구단이 든 첫 스쿠데토였고, 두 번째는 마흔한 해 뒤인 1983년에, 세 번째는 2001년에 왔다. 코파 이탈리아가 아홉 번,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Supercoppa italiana; 리그 우승 팀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 팀이 겨루는 대회)가 두 번이며, 유럽에서는 1961년의 인터시티스 페어스컵과 2022년의 UEFA 컨퍼런스 리그를 들었다. 강등은 1951년의 한 번뿐이다. 유벤투스와 밀란과 인테르가 합쳐 일흔 번 넘게 스쿠데토를 드는 동안 로마는 세 번을 들었다. 그래서 이 도시에서는 우승 하나가 한 세대의 기억이 된다. 1942년을 본 사람과 1983년을 본 사람과 2001년을 본 사람이 서로 다른 세대이고, 저마다 자기 세대의 열한 명을 외운다.
그 누구보다 진한 사랑과 고통, 신화에 가까운 충성으로 채워진 클럽이 AS 로마다. 이 클럽은 우승을 자랑하기보다 기억을 품는다.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존재하며, 트로피보다 얼굴과 이야기로 전해진다. 열한 명을 고르는 동안 필자의 손에 남은 것도 우승 기록보다 그들이 이 도시에 온 날과 떠난 날이었다.
이 명단을 처음 짠 것은 2025년 봄이다. 그해 여름 구단은 아탈란타를 아홉 시즌 동안 바꿔 놓은 잔 피에로 가스페리니(Gian Piero Gasperini; 이탈리아 감독, 1958-)를 벤치에 앉혔고, 그의 첫 시즌인 2025-26시즌을 세리에 A 3위로 마쳤다. 로마가 UEFA 챔피언스 리그에 돌아가는 것은 2018-19시즌 이후 처음이다.
선정 전술 두 번의 우승과 세 사람의 주장으로 짠 4-3-3
대형은 4-3-3이다. 골문에 탄크레디를 세웠고, 포백은 왼쪽부터 캉델라와 아우다이르와 로시와 카푸다. 중원의 바닥에 데로시가 서고 그 왼쪽 앞에 파우캉이, 오른쪽 앞에 잔니니가 선다. 맨 앞줄은 왼쪽에서 안으로 드는 토티, 가운데의 프루초, 오른쪽의 콘티다.
이 대형은 로마가 실제로 입어 본 옷이다. 1997년 여름 벤치에 앉은 즈데네크 제만(Zdeněk Zeman; 체코 출신 감독, 1947-)의 4-3-3에서 스무 살 남짓의 토티는 앞줄의 왼쪽에 섰고, 그해에 온 카푸와 캉델라가 양쪽 풀백으로 터치라인을 오르내렸다. 토티와 두 풀백의 자리는 그 두 해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공격형 미드필더가 둘이라는 점은 짚고 넘어간다. 디자인은 잔니니와 토티를 모두 공격형 미드필더로 적는데, 대형에서는 잔니니가 중원의 오른쪽으로 내려오고 토티가 앞줄로 올라간다. 잔니니는 수비 앞에서 경기를 푸는 자리에서도 뛴 선수이고, 토티는 제만의 왼쪽 공격수와 훗날 스팔레티의 9번을 다 해 본 선수다. 둘 다 실제로 서 본 자리이니 10번 둘을 한 팀에 넣느라 누구를 억지로 옮기지 않아도 된다.
열한 명 가운데 여덟이 구단의 두 스쿠데토에서 왔다. 탄크레디와 파우캉, 콘티와 프루초 넷은 닐스 리드홀름(Nils Liedholm; 스웨덴 출신 감독, 1922-2007)이 이끈 1982-83시즌의 팀이다. AC 밀란 편에서 열한 명의 한 사람이던 그 리드홀름으로, 로마가 든 트로피 가운데 넷이 그의 벤치에서 나왔다. 아우다이르와 캉델라, 카푸와 토티 넷은 파비오 카펠로(Fabio Capello; 이탈리아 감독, 1946-)의 2000-01시즌에 있었다. 두 우승 사이의 열여덟 해를 잇는 사람이 잔니니다. 1983년의 팀에서 그는 파우캉의 그늘에서 배우던 막내였고, 2001년의 주장 토티는 그를 우상으로 꼽는다.
남은 셋에게는 스쿠데토가 없다. 로시와 잔니니와 데로시다. 공교롭게도 셋 다 주장이었다. 로시는 열다섯 해를 뛰며 코파 이탈리아 두 번과 페어스컵을 들었고, 잔니니는 아홉 해 동안 완장을 차고 코파 이탈리아를 세 번 들었으며, 데로시는 열여덟 해를 있고도 리그 2위만 아홉 번 했다. 우승이 드문 구단에서 가장 오래 남은 사람들이 가장 적게 들었다. 로마의 완장은 로시의 팔을 지나 훗날 잔니니에게, 아우다이르를 거쳐 토티에게, 다시 데로시에게 내려왔고 그 다섯이 모두 이 열한 명 안에 있다.
로마에는 떠나는 선수에게 스타디오 올림피코(Stadio Olimpico)에서 작별 경기를 열어 주는 전통이 있다. 구단은 지난 서른 해 동안 그 영예가 프란체스코 로카(Francesco Rocca)와 브루노 콘티, 주세페 잔니니, 아우다이르, 뱅상 캉델라에게 주어졌다고 적는다.[2] 이 열한 명이 로마를 떠난 날을 순서대로 놓으면 아래와 같다.
| 이름 | 로마에서 | 떠난 날의 일 |
|---|---|---|
| 로시 | 1955-1969 | 새 감독 에레라에게 밀려 시즌 중에 자리를 잃었다. 선수 생활 내내 받은 경고가 마지막 경기의 한 장이었다 |
| 파우캉 | 1980-1985 | 크게 다쳐 뉴욕에서 수술을 받은 해에 떠났다 |
| 프루초 | 1978-1988 | 이듬해 피오렌티나에서 넣은 단 한 골이 로마전이었고, 그 경기가 선수 생활의 마지막이었다 |
| 탄크레디 | 1977-1990 | 이듬해 토리노 선수로 돌아온 그를 쿠르바 수드가 현수막 두 장으로 맞았다 |
| 콘티 | 1973-1991 | 1991년 5월 23일의 작별 경기에 8만 명이 넘게 왔다. 전날 같은 경기장에서 열린 UEFA컵 결승보다 많았다 |
| 잔니니 | 1981-1996 | 2000년 5월 17일의 작별 경기에 10번의 후계자 토티가 함께 섰다 |
| 카푸 | 1997-2003 | 주장으로 월드컵을 든 이듬해 밀란으로 갔다 |
| 아우다이르 | 1990-2003 | 로마와 브라질 대표팀이 맞붙은 '아우다이르 데이'에 전반은 브라질, 후반은 로마 선수로 뛰었다 |
| 캉델라 | 1997-2005 | 떠난 지 네 해 뒤인 2009년 6월 5일 올림피코가 작별 경기를 열어 줬다 |
| 토티 | 1993-2017 | 2017년 5월 28일 제노아전. 세리에 A 첫 경기로부터 8,827일째였다 |
| 데로시 | 2001-2019 | 2019년 5월 26일 파르마전. 교체돼 나가며 완장을 알레산드로 플로렌치에게 넘겼다 |
열한 명 가운데 여섯이 올림피코에서 작별 인사를 받았다. 받지 못한 다섯에게도 이야기는 남았다. 로시는 열다섯 해 동안 한 번도 징계를 받지 않은 수비수였고, 탄크레디는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와서도 볼보이 운동복에 달린 로마의 문장에 입을 맞췄으며, 프루초는 마지막 골을 하필 로마의 골문에 넣고 축구를 그만뒀다. 스쿠데토가 셋뿐인 구단이 한 세대에 다섯 번의 작별 경기를 열었다. 이 클럽이 기억을 품는다는 말은 이 표에서 숫자가 된다.
1. 프랑코 탄크레디 - 골키퍼

디자인 정정 구단이 적는 공식전 기록은 383경기 330실점이다. 디자인의 별명 로마의 심장은 다음 절의 자코모 로시가 얻은 별명이다.
심장이라 불렸던 사내.
176cm는 골키퍼치고는 상당히 작은 키다. 그런데도 프랑코 탄크레디(Franco Tancredi; 이탈리아 골키퍼, 1955-)는 장구한 잘로로시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골키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된다. 짧았지만 높았고, 작지만 거대했다.
처음에는 골키퍼도 아니었다. 아브루초의 줄리아노바에서 오른쪽 윙어로 뛰던 열네 살이 어느 여름 대회에서 빠진 골키퍼의 자리를 대신 맡았고, 그 뒤로 장갑을 벗지 않았다. 1974년 AC 밀란이 그를 데려가 엔리코 알베르토시(Enrico Albertosi; 이탈리아 골키퍼, 1939-)의 후보로 두었으나 리그 경기는 한 번도 주지 않았다. 세리에 B의 리미니에서 한 시즌을 뛴 스물두 살이 1977년 로마에 왔다.[2]
로마에서도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앞에는 1978년 월드컵 대표였던 파올로 콘티가 있었고, 탄크레디는 두 시즌 동안 세리에 A에 단 한 경기를 나섰다. 그가 이적을 요청한 해에 리드홀름이 부임했다. 감독은 그를 붙잡았고 몇 달 뒤 골문을 맡겼다. 리드홀름은 훗날 눈을 가리고도 믿을 수 있는 골키퍼였다고 그를 돌아봤다.
그 뒤는 연속의 기록이다. 세리에 A 289경기 가운데 258경기가 1980년부터 1989년까지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아홉 해 동안 로마의 리그 경기가 다른 골키퍼의 이름으로 시작한 일요일이 없었다는 말이다.
키가 작은 골키퍼는 기다릴 수가 없다. 높은 공은 남보다 한 걸음 먼저 나가야 손에 닿고, 일대일에서는 공격수가 고개를 들기 전에 발밑으로 몸을 던져야 한다. 탄크레디의 골문이 그랬다. 나올 때는 겁이 없었고 골대 사이에서는 고양이처럼 튀었다. 그가 보여 준 반사 신경과 위험을 무릅쓴 다이빙은 로마 시민들에게 진정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그 반사 신경이 가장 값지게 쓰인 곳이 승부차기다. 1980년과 1981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이 모두 토리노와의 승부차기였고 두 번 다 로마가 이겼다. 1980년의 스코어는 3-2였으니 토리노가 넣은 공은 둘뿐이다.
1982-83시즌 세리에 A를 우승하던 그해, 로베르토 프루초와 브루노 콘티, 호베르투 파우캉이라는 화려함의 이면에 탄크레디라는 높은 벽이 있었다. 그 시즌은 분명히 뒤에서 조용히 문을 잠가 온 탄크레디의 손끝에서 완성됐다. 그의 선방은 기술이기에 앞서 신념의 동작이었던 것. 이듬해에는 올림피코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리버풀과 승부차기까지 갔다가 졌다. 이탈리아 대표로는 1984년부터 열두 경기를 뛰었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명단에 들었다. 세리에 A가 기억하는 가장 고전적인 골키퍼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87년 12월 13일 산 시로의 밀란 원정은 그의 이름이 가장 무섭게 불린 날이다. 후반을 시작하러 나오던 그의 곁에서 관중석이 던진 폭죽 두 발이 터졌다. 그는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가 이틀 뒤에 퇴원했다. 비어 버린 골문에 들어가 세리에 A 첫 경기를 치른 열일곱 살이 안젤로 페루치(Angelo Peruzzi; 이탈리아 골키퍼, 1970-)였다.
1990년 토리노로 떠났다. 이듬해 그가 상대 팀 선수로 올림피코에 서자 쿠르바 수드(Curva Sud; 올림피코의 남쪽 응원석)에 현수막 두 장이 걸렸다. 프랑코는 울트라스(ultras; 조직된 열성 응원단)의 가슴에 있다는 것과 어서 오라는 인사였다. 그는 응원석 밑으로 여러 번 불려 가 인사했고 볼보이의 운동복에 달린 로마의 문장에 입을 맞췄다. 라커룸에 돌아온 그는 그날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고 했다. 그 뒤 열두 해 동안 구단의 골키퍼 코치로 일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르던 날 그는 두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1983년의 주장 아고스티노 디바르톨로메이(Agostino Di Bartolomei)와 수비수 알도 말데라(Aldo Maldera; 이탈리아 수비수, 1953-2012)다. 둘 다 세상에 없고, 그 기억이 아직 마음에 생생해서 구단에 늘 고맙다고 했다.
2. 자코모 로시 - 센터백

가장 로마인다웠던 선수. 로마의 심장(Core de Roma).
진짜 로마니스타는 골도 트로피도 아닌 피와 땀으로 기억된다. 로마가 아직 전설의 팀이 되기 전 로마를 전설로 만든 사내가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자코모 로시(Giacomo Losi; 이탈리아 수비수, 1935-2024)다. 센터백이나 주장이라는 말로는 모자란다. 로마라는 도시와 구단이 가장 어두웠던 시절 묵묵히 곁을 지켰고, 있다는 것만으로 상징이 된 인물이다.
로마 사람이 아니다. 롬바르디아의 손치노에서 태어나 1952년 크레모네세가 50만 리라에 데려간 수비수였다. 인테르가 임대로 데려가 유소년 대회 두 번에 세워 봤고 볼로냐도 협상에 들어왔는데, 로마가 스포츠 디렉터 조르조 카르피(Giorgio Carpi)를 보내 700만 리라에 계약을 끝냈다. 선수가 받은 계약금은 80만 리라, 월급은 8만 리라였다.[2] 북부에서 온 그를 로마 팬들은 처음에 낯설어했다.
그 낯섦을 지운 것은 경기마다 흘린 피였다. 그는 다친 채로 뛰었고 다친 채로 골을 넣었다. 1961년 1월 8일 올림피코의 삼프도리아전이 그 장면이다. 교체가 없던 시절이라 근육을 다친 수비수는 나갈 수가 없었고, 뛰지 못하는 선수가 가는 자리인 측면 공격으로 옮겨 섰다. 거기서 그가 골을 넣었고 로마는 3-2로 이겼다. 열다섯 해 동안 세리에 A에서 넣은 골이 둘인데 그 하나가 이것이다.
구단이 그를 설명할 때 꺼내는 이야기는 1961년 4월의 이틀이다. 25일에 볼로냐에서 이탈리아 대표로 북아일랜드전을 뛰었고, 이튿날 로마에서는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준결승 히버니언전이 있었다. 동료들을 격려하러 숙소에 들른 그에게 감독이 뛰어 달라고 했다. 그는 뛰었고, 골라인 위에서 공을 걷어 내 팀을 결승에 올렸다. 로마는 그해 버밍엄을 꺾고 구단의 첫 유럽 트로피를 들었다.
1962년 봄에는 인테르의 디렉터 이탈로 알로디(Italo Allodi; 이탈리아 축구 행정가, 1928-1999)가 대표팀 훈련장까지 찾아왔다. 얼마를 받든 세 배를 주겠으니 값을 부르라고 했다. 로시는 로마에 남았다. 유벤투스와 밀란과 인테르, 북부 세 구단의 부름에 모두 응하지 않았고 영원히 수도의 상징으로 남기를 바랐다. 로마 사람들이 그에게 붙인 이름은 사투리다. 표준 이탈리아어라면 쿠오레 디 로마였을 것을 로마 말로 코레 데 로마라 했다. 이 도시가 북부에서 온 사내를 제 식구의 말로 불렀다.
169cm의 센터백이었다. 원래는 풀백이었고 1959년 봄부터 가운데로 옮겼다. 큰 공격수를 상대하는 법은 먼저 읽고 먼저 닿는 것뿐이었다. 붙어서 따라다니는 대인 방어에서 날랬고, 몸을 날려 걷어 내는 데 능했으며, 공중에서도 한 박자 먼저 뛰어 키를 메웠다. 그렇게 열다섯 해를 뛰면서 한 번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 경고조차 선수 생활의 마지막 경기에서 받은 한 장이 전부다. 반칙으로 끊을 일을 만들지 않는 수비수였다는 말이다. 1960-61시즌부터 완장을 찼고, 감독 오론초 푸글리에세(Oronzo Pugliese; 이탈리아 감독, 1910-1990)는 그에게 주장, 당신이 우리 모두라고 했다. 그 사이 코파 이탈리아를 두 번 들었다.
공식전 455경기, 세리에 A 386경기다. 리그 경기의 넷 가운데 셋을 주장으로 뛰었다. 구단 최다 출전 기록은 반세기 가까이 그의 것이었고, 그를 넘어선 사람은 뒤에 나올 토티와 데로시 둘뿐이다. 끝은 쓸쓸했다. 1968년 부임한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 아르헨티나 태생의 감독, 1910-1997)는 여덟 경기 만에 그를 벤치로 돌렸고, 그는 그 시즌을 끝으로 떠났다. 2012년 구단이 명예의 전당을 열 때 첫 열한 명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2024년 2월 4일 로마에서 여든여덟으로 세상을 떠났다. 로마 출신이 아닌데도 가장 로마다웠던 선수로 기억된다.
3. 아우다이르 - 센터백

디자인 정정 별명 플루토는 팬들이 디즈니 만화의 개 플루토에서 따온 것이다. 6번은 열 해 동안 비워 두었다가 2013-14시즌부터 다시 쓰인다.
영구결번이 되었던 브라질 수비수. 플루토(Pluto).
브라질에서 온 사내가 이탈리아의 수도에서 가장 상징적인 존재로 불리니, 그의 등번호 6번은 영구 결번의 대접을 받았다. 세리에 A의 거친 수비 전통 속에서도 유난히 우아하고 지적이었던 수비수가 아우다이르(Aldair Nascimento dos Santos; 브라질 수비수, 1965-)다. 몸싸움보다는 위치와 타이밍과 예측으로 상대를 제압했고, 가장 빛나는 순간에는 언제나 조용했다. 바로 그런 모습이 로마 팬들을 더욱 매료시켰다지.
그의 수비에는 넘어지는 장면이 드물다. 서서 기다리다가 공격수가 공을 한 번 길게 치는 순간에 발을 넣었다. 빼앗은 다음이 더 볼만했다. 공을 멀리 차 내지 않고 몰고 나왔으며, 오른발로 반대편 측면까지 길게 열었다. 로마의 공격이 맨 뒤의 그에게서 시작되는 날이 많았다.
원래는 공격수였다. 센터백이 된 까닭을 그는 한마디로 설명했다. 공격수로 뛰면 너무 많이 차여서였다고 한다. 1990년 5월 벤피카 선수로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AC 밀란에 진 직후 로마로 왔다. 벤피카의 감독이던 스벤예란 에릭손(Sven-Göran Eriksson; 스웨덴 축구 감독, 1948-2024)이 회장 디노 비올라(Dino Viola; 이탈리아 기업인·로마 회장, 1915-1991)에게 이 브라질 사람을 권했다.[2]
첫 시즌에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고 UEFA컵 결승까지 갔다. 그 뒤로 로마는 오래 우승하지 못했으나 그의 평판은 해마다 올라갔다. 구단은 그가 여러 해 동안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센터백이었다고 적는다. 그런데 브라질 대표팀은 그를 네 해 동안 부르지 않았다. 1994년 월드컵 직전, 오른쪽 무릎 십자인대 부상에서 막 돌아온 그가 후보로 불려 갔고, 평가전 세 번 만에 선발 명단의 첫 이름이 됐다. 그 여름 그는 세계 챔피언이 됐다. 결승 상대가 하필 이탈리아였다. 로마의 수비수가 패서디나의 땡볕 아래서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이탈리아 공격수, 1967-)를 120분 동안 막았고, 경기는 0-0으로 승부차기에 갔다.
1997년 구단 창립 일흔 해를 맞아 리드홀름에게 역대 베스트 11을 물었을 때의 답이 남아 있다. 중앙 수비 둘은 외국인으로 하겠다고 했다. 러시아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가짜 외국인 피에트로 비에르초보트(Pietro Vierchowod; 이탈리아 수비수, 1959-)와, 진짜 외국인 아우다이르였다. 로마에 온 지 일곱 해가 안 됐고 가장 빛나는 시절이 아직 남아 있던 때의 일이다.
그 시절이 2000-01시즌이다. 서른다섯의 그는 카펠로의 스리백을 오가며 21세기 첫 스쿠데토의 주역이 됐다. 우승이 걸린 파르마전을 사흘 앞두고 그는 팬들의 조바심과 기다림이 그대로 느껴진다고, 지금은 자신도 그들 가운데 한 사람 같다고 말했다. 1998년 10월 토티에게 넘겨주기 전까지 주장 완장도 그의 것이었다.
1990년부터 2003년까지 무려 열세 시즌을 로마에 바쳤다. 공식전 436경기에 스무 골, 세리에 A만 330경기다. 골 넣는 수비수이기도 했다. 1996-97시즌의 AS 로마에서는 그가 최고의 선수였다는 평가가 따르고 브라질 축구사에서는 세리에 A에서 가장 성공한 남미 수비수로 꼽힌다. 본인이 꼽는 가장 좋은 기억은 둘이다. 1993-94시즌 부상에서 돌아왔을 때 팬들이 보여 준 마음과, 도시 전체가 축제였던 스쿠데토의 밤이다. 떠나는 날 로마는 브라질 대표팀을 불러 경기를 열었고, 그는 전반을 브라질 선수로, 후반을 로마 선수로 뛰었다. 구단은 그의 6번을 열 해 동안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다. 2013년 그 번호를 다시 꺼낸 것도 본인이 권해서였고, 받은 사람이 케빈 스트로트만(Kevin Strootman)이다. 앞 절의 로시는 함께 뛰어 보고 싶은 수비수를 한 명만 고르라면 아우다이르라고 했다. 이 글에서 둘이 나란히 선다.
4. 뱅상 캉델라 - 레프트백

로마의 감정선을 따라 춤을 추던 예술가. 총사(The Musketeer).
라인을 오르내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로마의 시를 써 내려간 풀백이다. 뱅상 캉델라(Vincent Philippe Antoine Candela; 프랑스 수비수, 1973-)는 프랑스 축구사에서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월드클래스로 불리지만, AS 로마에서는 시대를 제대로 만난 레프트백으로 평가된다.
어릴 때는 럭비 선수가 될 뻔했다. 한 주에 한 번씩 스타드 툴루쟁에서 럭비를 배웠고, 방에는 미셸 플라티니(Michel François Platini; 프랑스 축구 선수·미드필더, 1955-)의 포스터를 붙여 둔 마르세유 팬이었다. 이름을 알린 곳은 주민이 7천 명 남짓인 도시의 구단 갱강이다. 거기서 1996년 UEFA 인터토토컵을 들었고, 갱강 선수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대표가 됐다.[2]
1997년 1월 로마로 오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회장 프랑코 센시(Francesco Sensi; 이탈리아 기업인·로마 회장, 1926-2008)는 훗날 캉델라가 자신이 해 본 가장 어려운 이적 협상이었다고 털어놨다. 어떻게든 데려오려 했는데, 작은 구단이 협상을 마무리하려 할 때마다 값을 올렸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건너온 풀백은 처음엔 낯설었으나 곧 올림피코의 연인이 됐다. 그가 왼쪽 측면을 오르내릴 때마다 로마 팬들의 시선은 캉델라를 향했고, 그의 크로스는 마치 서정시처럼 느껴졌다.
오른발잡이인데 왼쪽에서 뛰었다. 그래서 바깥으로 달리다가 안으로 접고 들어오는 길이 그의 것이었고, 상징은 스텝오버였다. 본인은 스텝오버를 안 할 수가 없다고, 자신에게는 그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쉬운 동작이라고 했다. 속도와 기술, 감각적인 킥을 갖춘 그는 공격할 때는 윙어처럼, 수비할 때는 강인한 전사처럼 뛰었다. 그래서 현지에서는 그를 두고 총사라는 별명을 지어 줬다. 프랑스 사람에게는 가장 영예로운 애칭 가운데 하나다.
제만의 4-3-3에서는 왼쪽 풀백이었고, 카펠로가 수비를 셋으로 바꾸자 한 줄 올라가 왼쪽 미드필더가 됐다. 뒤에 센터백 셋을 둔 그는 더 자주, 더 깊이 올라갔다. 벌칙 구역 모서리에서 드리블을 걸고 직접 때리는 풀백이었다.
2000-01시즌 스쿠데토를 일구던 그 시절, 캉델라는 맡은 역할을 해내는 데서 나아가 경기장의 온도를 조절하는 예술가에 가까웠다. 그의 오버래핑과 감각적인 연결이 토티와 몬텔라(Vincenzo Montella)와 바티스투타에게 수많은 기회를 건넸다. 찰랑이는 머릿결은 그날의 로마를 더욱 찬란하게 만들었다. 그해 8월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는 경기 시작 6분 만에 먼 거리에서 때린 공으로 선제골을 넣었다. 동료들이 훈련 때 벌칙 구역 밖에서도 망설이지 말고 쏘라고 했다는 것이 본인의 설명이다.
로마에서 공식전 289경기를 뛰었다. 세리에 A가 210경기, 유럽 대항전이 48경기다. 프랑스 대표팀에서는 1998년 월드컵과 UEFA 유로 2000을 들었으나 주로 오른쪽에 섰다. 왼쪽에는 빅상트 리자라쥐가 있었다. 세계 챔피언의 왼쪽에 이미 임자가 있던 때에 그의 전성기가 왔다. 프랑스에서 시대를 잘못 탔다는 말은 거기서 나오고, 임자가 없던 로마의 왼쪽에서는 일곱 시즌을 주전으로 뛰었다. 같은 선수를 두고 두 나라의 기억이 이렇게 갈린다.
2005년 1월 잉글랜드로 떠났다. 네 해 뒤인 2009년 6월 5일 올림피코는 그를 위해 작별 경기를 열었다. 토티는 자신의 역대 베스트 11을 말할 때 골문에 부폰, 수비에 마이콩과 사무엘, 그리고 캉델라를 넣는다. 2014년 구단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5. 카푸 - 라이트백

일개 브라질 윙백이 어떻게 로마의 영혼이 되었는가.
브라질의 피, 로마의 혼. 달리는 장군이었고 포효하는 깃발 같았다. 이탈리아가 그에게 붙인 별명은 고속 기관차(Il Pendolino)였다. 카푸(Marcos Evangelista de Morais; 브라질 수비수, 1970-)는 FIFA 월드컵 결승에 세 번 연속 나선 단 한 사람이지만, 클럽에서의 정점은 누가 뭐래도 AS 로마다.
브라질 축구사에서는 자우마 산투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와 함께 역대 1위를 두고 다툰다. 세리에 A에서는 릴리앙 튀람과, 유럽 전체의 축구사에서는 독일의 베르티 포크츠와 권능을 나누는 존재로서 역대 라이트백 계보의 다섯 손가락 안에서 평가되는 수비수다.
로마에 왔을 때 그는 이미 다 이룬 선수였다. 상파울루에서 남미와 세계를 제패했고, 1994년에는 풀백으로서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선수에 뽑혔으며, 그해 월드컵을 들었다. 스물일곱의 그런 선수가 스쿠데토가 열네 해째 없던 구단을 골랐다. 1997년 그가 도착했을 때 리드홀름은 몇 해 전 파우캉이 이 선수가 세계적인 스타가 될 거라고 장담했었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리고 로마의 전설적인 풀백 프란체스코 로카와 같은 속도로 골라인까지 공을 끌고 간다고 했다.[2] 로카는 한 구단에서만 뛰고 부상으로 일찍 멈춘 로마의 풀백이다. 그 이름에 견줬으니 로마 팬들은 어떤 선수가 왔는지 곧바로 알았다.
오른쪽에서 그는 상대를 닳게 만들었다. 90분 내내 오르내리며 반칙을 끌어내거나 그저 지치게 했다. 속도만 있는 선수도 아니었다. 구단이 꼽는 장면은 1998년 6월 낭트의 월드컵 모로코전이다. 골키퍼가 길게 찬 공을 수비수가 바운드를 기다리는 사이, 달리던 카푸가 걸음을 늦추지 않고 발등으로 살짝 넘겨 버렸다. 관중석에서 박수가 일었다.
로마에서의 가장 좋은 경기로 구단은 1999년 10월 3일 피렌체 원정을 든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Gabriel Omar Batistuta; 아르헨티나 공격수, 1969-)가 있던 피오렌티나를 3-1로 이긴 날, 그는 어느 공격수라도 자랑했을 중거리 슛 두 방을 꽂았다. 그 바티스투타가 이듬해 로마로 왔다. 우승하던 시즌의 더비에서는 라치오의 파벨 네드베트(Pavel Nedvěd; 체코 미드필더, 1972-) 머리 위로 공을 세 번 잇달아 띄워 넘겼다. 가장 적대적인 경기에서 상대의 압박을 기술로 놀릴 수 있었던 때의 카푸다. 한국에서는 그의 전성기를 AC 밀란 시절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은데, 가장 폭발적인 카푸는 로마에 있었다.
축구 역사상 공수의 균형이 가장 완벽했던 사내로서 그는 로마의 역사 자체를 다시 썼다. 그를 데려온 감독은 제만이고, 그를 완성한 감독은 카펠로다. 카펠로의 스리백에서 그는 오른쪽 전부를 혼자 맡았다. 공격할 때는 윙어였고, 공을 잃으면 가장 먼저 돌아와 있는 수비수였다. 윙어를 따로 두지 않은 그 팀이 폭을 잃지 않은 것은 오른쪽에 카푸가, 왼쪽에 캉델라가 있어서다. 이 글의 두 풀백은 2001년 우승 팀의 두 날개를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2000-01시즌 오른쪽에서 숨 가쁘게 오버래핑하며 수없이 크로스를 날리던 그의 등번호 2번은 로마의 새로운 상징이었다. 그의 스프린트는 기술이 아니라 정신이었고, 그의 크로스는 같은 정신을 나누는 공격수들에게 늘 공식과도 같았다. 그는 우승하던 시절에는 행복하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경기장에 나갔다고 돌아본다.
로마에서 여섯 시즌 동안 공식전 218경기 8골을 남겼다. 2002년 요코하마에서 월드컵 트로피를 든 브라질의 주장은 그때 로마 선수였다. 구단은 월드컵을 든 주장을 가져 본 구단이 세계에 열넷뿐이고 로마가 그 가운데 하나라고 적어 뒀다. 그 뒤로 대회가 더 열려 지금은 그 수가 조금 늘었다. 이듬해 밀란으로 떠났고, 2012년 10월 구단 명예의 전당의 첫 열한 명에 들었다.
6. 다니엘레 데로시 - 수비형 미드필더

피의 왕자. 로마의 깃발(Bandiera di Roma).
21세기의 수비형 미드필더 가운데 수비를 가장 잘한 선수를 꼽으라면 많은 사람이 다니엘레 데로시(Daniele De Rossi; 이탈리아 미드필더, 1983-)에게 표를 준다. 피지컬과 전술과 정신력이 한 몸에 있던 중원의 파이터였다. 2001년에 데뷔해 떠나던 2019년까지 오직 로마를 위해 싸웠고, 때로는 울었으며, 수없이 많은 반칙과 퇴장조차 팀을 위한 분노로만 작동했다.
로마의 바닷가 동네 오스티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알베르토 데로시는 로마 유소년 출신으로, 훗날 구단 프리마베라 팀을 오래 맡은 감독이다. 아들은 동네 팀 오스티아마레에서 공격수로 시작했고, 로마에 와서 한 줄씩 내려가 수비형 미드필더가 됐다. 토티보다 일곱 살 어려 미래의 주장, 카피탄 푸투로(Capitan Futuro)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다. 그 미래는 오래 오지 않았다. 완장은 토티가 떠난 2017년에야 왔고 그는 두 시즌을 찼다. 한 사람의 뒤에서 열여섯 해를 기다린 부주장이다.
그의 플레이는 거칠고 다혈질이었지만 그 안에 누구보다 절실한 충성이 담겨 있었다. 상대의 공을 빼앗는 데서 그치지 않고 로마의 자존심을 지키는 전사였고, 몸으로 부딪혀서라도 팀의 흐름을 바꾸는 진정한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본보기로 삼은 선수는 아일랜드의 로이 킨(Roy Keane; 아일랜드 미드필더, 1971-)이었고, 등번호 16번도 킨의 번호를 따른 것이다. 그 위에 긴 패스로 반대편을 여는 눈과 중거리 슛을 얹었다. 그래서 수비수 둘 사이로 내려가 스리백의 가운데를 맡은 시즌도 있었다. 빼앗는 사람이 그대로 첫 패스를 내는 사람이었으니 로마의 중원은 그 한 사람으로 두 가지 일을 했다.
트로피는 적다. 코파 이탈리아 두 번과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한 번이 전부이고, 세리에 A에서는 2위만 아홉 번 했다. 2007년 8월 산 시로에서 인테르를 꺾은 수페르코파의 결승골이 그의 페널티킥이었다.
대표팀에서는 달랐다. 117경기를 뛰었다. 스물둘이던 2006년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미국전에서 팔꿈치를 썼다가 퇴장당해 네 경기를 쉬었는데, 징계가 풀린 경기가 결승이었다. 토티와 교체돼 들어간 그는 승부차기의 세 번째 키커로 나서 넣었고, 토티, 시모네 페로타(Simone Perrotta)와 함께 세계 챔피언이 됐다. UEFA 유로 2012에서는 첫 두 경기를 스리백의 가운데에서 뛰며 결승까지 갔다.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도 그만큼 해냈으니 21세기 최고의 선수라는 찬사는 아깝지 않을 정도이겠다.
그를 가장 잘 보여 주는 두 경기는 2017-18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의 바르셀로나전이다. 캄 노우의 1차전에서 그는 자책골을 넣었고 로마는 1-4로 졌다. 올림피코의 2차전에서 로마에 필요한 것은 세 골이었다. 두 번째 골이 주장이던 그의 페널티킥이었고, 로마는 3-0으로 이겨 준결승에 갔다. 가히 기적 같은 밤이었다.
토티가 로마의 황제라면 데로시는 황제를 위해 피를 흘리는 기사였다. AS 로마에서 공식전 616경기 63골. 구단 역사에서 그보다 많이 뛴 사람은 토티 하나다. 로마만을 사랑한 순애보였다.
마지막은 2019년 5월 26일 올림피코의 파르마전이다. 2001년 스쿠데토를 확정하던 날의 상대가 바로 그 파르마였고, 구단이 그 시즌 우승 명단의 맨 끝에 한 경기도 뛰지 않은 채 적어 둔 열일곱 살이 열여덟 해 뒤 같은 상대 앞에서 교체돼 나가며 완장을 플로렌치(Alessandro Florenzi)의 팔에 채웠다. 그 뒤 아르헨티나의 보카 주니어스에서 짧게 뛰고 축구화를 벗었으며, 2024년 1월에는 감독으로 돌아와 여덟 달 동안 벤치에 앉았다. 구단의 명예의 전당에는 아직 그의 자리가 없는데, 이 글의 열한 명 가운데 그런 사람은 그뿐이다.
7. 호베르투 파우캉 - 중앙 미드필더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중앙 미드필더 순위 5위. 로마의 여덟 번째 왕(L’ottavo Re di Roma).
브라질 축구사에서는 지지와 함께 역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 평가되고, 세계 축구사에서는 로타어 마테우스, 지지, 차비 에르난데스, 그리고 21세기의 루카 모드리치와 함께 거론되는 선수가 호베르투 파우캉(Paulo Roberto Falcão; 브라질 미드필더, 1953-)이다. 고대 로마의 왕은 일곱이었다. 로마 사람들은 1980년에 온 이 브라질 사람을 여덟 번째라고 불렀다. 로마에 오기 전까지 브라질 리그를 대표하는 전설이던 그는 AS 로마에 입단한 뒤 이탈리아 축구에도 삼바의 리듬을 얹은 시인이 됐다.
젊은 날 그는 심리학자가 되려 했다. 축구 선수로 성공하기가 너무 어려워 보여서였는데, 1972년 칸에서 열린 주니어 대회에 다녀온 뒤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구단은 그가 선수 생활 내내 심리학자로 남았다고 적는다. 어느 동료에게 언제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2]
그 솜씨가 가장 크게 쓰인 때가 1982-83시즌이다. 로마가 유벤투스에 지고 도시 전체가 가라앉았을 때 그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가 자신 있다는 말로 사람들을 다독였고, 다음 일요일 피사전에서 골을 넣어 그 말을 지켰다. 로마는 다시 궤도에 올랐고 마흔한 해 만의 스쿠데토를 들었다. 구단은 그 팀의 중원을 디바르톨로메이와 파우캉, 안첼로티(Carlo Ancelott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59-)와 프로하스카로 적는다. 훗날 감독으로 유럽을 여러 번 제패하는 카를로 안첼로티가 그때 그의 곁에서 뛰던 스물셋이었다.
공을 받을 때는 안정감이, 공을 찰 때는 품위가, 공간을 열 때는 지능이, 전진할 때는 카리스마가 흘렀다. 수비형이라고도 공격형이라고도 부르기 어려운 미드필더였다. 맨 뒤까지 내려가 공을 받아 방향을 정했고, 그 공이 앞에 닿을 즈음에는 벌칙 구역에 들어가 있었다. 먼저 가 있었으니 남보다 덜 뛰고도 어디에나 있었다. 로마의 한 기자는 그가 공이 세 번의 패스 뒤에 어디에 가 있을지를 늘 알았다고 했고, 다른 기자는 그를 처음 보고 발 대신 손이 둘 달렸다고 썼다. 구단 초창기의 전설 풀비오 베르나르디니(Fulvio Bernardini; 이탈리아 감독, 1905-1984)는 그가 빠르지도 화려하지도 않은데 팀에 발과 생각이 필요한 곳마다 나타난다고 적었다. 리드홀름의 말이 가장 짧다. 그라운드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사람은 파우캉이고 자신은 가끔 악보를 써 줄 뿐이라고 했다.
품격이라는 개념을 이탈리아 땅에 심어 놓은 미드필더였다. 팬들이 붙인 다른 별명이 신성한 자, 일 디비노(Il Divino)다. 로마의 중원을 문화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선수이고, 로마가 처음으로 우승에 어울리는 클럽처럼 보이던 시대가 그와 함께 왔다.
1980-81시즌 코파 이탈리아 결승의 승부차기에서 우승을 정한 킥이 그의 것이었다. 1984년 올림피코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는 반대였다. 몸이 성치 않던 그는 승부차기에 나서지 않았고 로마는 리버풀에 졌다. 그 일로 오래 비판받았다. 본인은 자신이 다섯 번째 키커였고 차례가 오기 전에 승부가 끝났다고 말해 왔다.
AS 로마 공식전 152경기 27골, 세리에 A 107경기다. 로마의 스쿠데토는 물론 빅 이어를 향한 여정에도 동참했던 사내다. 1982년 월드컵에서는 지쿠, 소크라치스, 토니뉴 세레주(Toninho Cerezo)와 함께 브라질의 중원을 이뤘고, 이탈리아에 2-3으로 진 경기에서 브라질의 두 번째 골을 넣었다. 그 세레주가 이듬해 로마로 와서 그의 곁에 다시 섰다. 1985년 크게 다쳐 뉴욕에서 수술을 받았고 그해 로마를 떠났다. 이 열한 명 가운데 로마에 가장 짧게 있었던 사람이다. 다섯 시즌뿐이었으나 프란체스코 토티에게 황제라는 수식어가 붙기 전에 이 도시는 이미 왕을 한 사람 가졌다. 그는 로마와 그 팬들에게 영원한 사랑을 느낀다고 말한다.
8. 주세페 잔니니 - 공격형 미드필더

디자인 정정 등번호는 10번이다. 1982-83시즌의 스쿠데토 때 그는 리그 경기에 나서지 않았고, 그가 든 코파 이탈리아는 세 번이다.
로마가 품은 가장 아름다운 사내. 왕자(Il Principe).
주세페 잔니니(Giuseppe Giannini; 이탈리아 미드필더, 1964-)는 로마에서 왕자라고 불린 유일한 사내다. 그는 왕좌에 앉지는 않았지만 왕좌가 지녀야 할 모든 미덕을 몸에 지녔다. 그가 공을 잡는 순간 로마는 품격이 되었고 경기장은 궁전이 되었으며, 팬들의 함성은 도시 전체를 찢을 듯했다. 토티가 왕이라면 잔니니는 왕조다. 필자에게 그는 GOAT다.
로마에서 태어나 로마의 작은 구단 알마스에서 공을 찼다. 먼저 손을 내민 쪽은 AC 밀란이었다. 입단 시험을 본 날 잔니 리베라(Giovanni Rivera; 이탈리아 미드필더, 1943-)가 지켜봤고, 경기가 끝나자 소년의 손에는 밀란의 10번 셔츠가 들려 있었다. 북쪽으로 가는 일이 다 정해진 듯하던 그때 수도에서 전화가 왔다. 트리고리아에서 한 번 뛰어 본 소년은 노랗고 붉은 셔츠를 입었고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그 옷으로 보냈다.[2]
별명은 동료 오도아크레 키에리코(Odoacre Chierico; 이탈리아 미드필더, 1959-)가 붙였다. 고개를 들고 우아하게 달리는 모습이 왕자 같다는 것이었다. 그 별명이 곧 그의 플레이다. 자리는 한 곳이 아니어서 수비 앞에서 경기를 푸는 레지스타(regista)로도, 공격수 바로 뒤의 판타지스타(fantasista)로도 뛰었는데, 어디에 서든 공이 오기 전에 고개가 먼저 들려 있었고 공은 두 발 어느 쪽으로도 나갔다.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1982년 1월 열일곱의 나이로 1군에 처음 섰고, 그 뒤 여러 해를 파우캉의 그늘에서 배웠다.
배턴이 넘어온 날은 1984년 10월 28일이다. 유벤투스 원정을 가는 비행기 안에서 파우캉이 자신은 뛸 몸이 아니니 네가 나가야 한다고 알렸다. 경기는 시작부터 꼬였다. 먼저 골을 내줬고 한 명이 퇴장당했다. 열 명이 된 로마에서 동점골을 넣은 사람이 스무 살의 잔니니였다. 왼쪽에서 키에리코가 수비 뒤로 넣어 준 공에 달려들어 그대로 때렸다. 그는 그날 자신이 무엇이 됐는지 알았을 것이다.
1987년 완장을 받아 아홉 해 동안 찼다. 열다섯 시즌을 오직 잘로로시를 위해 뛰었고, 로마라는 도시와 함께 웃고 울고 늙어 갔다. 지지받기보다 이해받기를 택한 리더였다.
1987-88시즌에는 열한 골로 세리에 A 득점 3위에 올랐고, 1990년 자국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의 중원을 지휘해 4강까지 갔다. 조별리그 미국전의 결승골을 그가 넣었는데 그 경기장이 올림피코였다. 준결승에서 승부차기로 지지 않았더라면 결승도 그의 안방 올림피코에서 열릴 참이었다.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도 AS 로마의 이름을 걸고 에이스로 뛰었으니, 이탈리아는 그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기사장(Cavaliere dell’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을 줬다.
우승은 그를 비켜 갔다. 코파 이탈리아는 세 번 들었으나 스쿠데토는 끝내 없었다. 1993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 2차전에서는 페널티킥으로만 세 골을 넣고도 원정 골에서 밀려 트로피를 놓쳤다. 결승에서 페널티킥 해트트릭을 한 선수는 그 대회 역사에 둘뿐이다.
로마 팬들이 그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꺼내는 골은 1994년 3월 20일 포자전의 것이다. 팀이 곤란하던 날 왼발 발리로 때린 공이 골대를 맞고 들어갔고, 그는 온몸으로 기뻐했다. 그 두 주 전 더비에서 페널티킥을 놓쳐 팀이 진 뒤였다. 본인은 골도 실축도 선수이기 전에 팬으로 겪었다고, 로마는 직업이기에 앞서 마음속의 무엇이었다고 말한다.
공식전 437경기, 세리에 A 319경기다. 1996년 오스트리아로 떠났고, 2000년 5월 17일 올림피코가 그의 작별 경기를 열었다. 그 옆에 10번을 물려받은 토티가 섰다. 토티는 잔니니가 어릴 적 우상이자 본보기였고, 만나서 함께 뛰고 한 방을 쓰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주세페 잔니니는 한국에서 토티의 정신적 스승이라는 한 줄로 알려져 있으나, 그 한 줄 안에서는 서사와 위대함이 빠진다. 그는 로마의 철학이 토티에게 건너가기 전의 가장 순수한 원형이었고, 로마를 진심으로 사랑하던 이들이 모두 존경하는 미드필더이기도 했다.
9. 프란체스코 토티 - 공격형 미드필더

디자인 정정 10번은 본인의 뜻에 따라 영구 결번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1군에서 보낸 시즌은 스물다섯이고, 유소년까지 더하면 스물여덟 해다.
황금의 소년(Er Bimbo de Oro).
프란체스코 토티(Francesco Totti; 이탈리아 공격수, 1976-). 유소년 시절부터 단 한 번도 로마를 떠난 적이 없다. 클럽이 몰락하든, 다치든, 더 큰 무대에서 우승해 보지 그러냐는 말이 백 번쯤 들려와도 대답은 늘 같았다. 남는다는 것이었다.
공을 처음 찬 곳부터 로마다웠다. 1983년, 구단이 두 번째 스쿠데토를 든 해에 그는 포르티투도에서 시작했다. 1927년에 합쳐 AS 로마가 된 세 구단 가운데 하나다. 트라스테베레의 작은 팀을 거쳐 로디자니에서 세 시즌을 뛰는 동안 AC 밀란과 라치오가 관심을 보였다. 가족이 바란 구단은 하나였다. 1989년 회장 디노 비올라가 로디자니의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선수 둘과 3억 리라에 열두 살 소년이 로마로 왔다.[2]
1991년 5월 22일 올림피코에서 UEFA컵 결승 2차전이 열리던 밤, 북쪽 응원석 밑에서 공을 줍던 볼보이가 열네 살의 그였다. 이튿날 같은 경기장에서 콘티의 작별 경기가 열렸다. 세리에 A 첫 경기는 열여섯이던 1993년 3월 28일 브레시아 원정이고, 첫 골은 이듬해 9월 4일 포자전에서 나왔다.
1997년 리드홀름은 이 선수가 앞으로 적어도 열 해 동안 로마에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될 거라고 했다. 스무 해가 될 줄은 그도 몰랐다. 그해 8월 그는 10번을 처음 달았고, 1998년 10월 아우다이르에게서 주장 완장을 넘겨받았다. 스물둘이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그는 전 세계 축구 선수 서열의 세 손가락 안에서 놀던 선수다. 세리에 A는 물론 UEFA 유로에서도 그랬다. 2000년 대회 준결승 네덜란드전의 승부차기에서 그는 골키퍼 판데르사르 앞에서 공을 숟가락으로 뜨듯 가운데로 띄워 넣었고, 결승에서는 뒤꿈치로 흘려 준 공으로 선제골의 길을 열었다.
2000-01시즌 마지막 날인 6월 17일, 우승이 걸린 파르마전의 첫 골이 그의 발에서 나왔다. 로마는 열여덟 해 만에 스쿠데토를 들었다. 두 달 뒤에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들었다.
2005년 겨울 루차노 스팔레티(Luciano Spalletti; 이탈리아 감독, 1959-)는 공격수가 모자라자 그를 맨 앞에 혼자 세웠다. 내려와서 받고 돌아서서 찔러 주는 9번, 훗날 가짜 9번이라 불리는 자리다. 로마는 그 배치로 세리에 A 11연승을 달렸다. 그 연승의 한가운데인 2006년 2월 발목이 크게 부러졌는데, 넉 달 뒤 독일 월드컵에 나가 16강 호주전의 마지막 순간에 페널티킥을 넣었고 세계 챔피언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에는 스물여섯 골로 세리에 A 득점왕과 유러피언 골든슈를 함께 받았다. 열 해 넘게 10번으로 뛴 선수가 서른에 9번이 되어 유럽에서 가장 많이 넣었다.
패스를 할 줄 아는 시인이었고 슈팅을 할 줄 아는 철학자였으며, 클럽과 도시를 하나로 여긴 유일한 존재였다. 공이 오기 전에 이미 다음 사람을 봐 뒀고, 그래서 그의 패스는 대개 한 번의 터치로 나갔다. 왼발에서 터져 나오는 로빙 스루와 오른발이 찔러 준 파넨카 PK는 기술의 천재임을 암시했고, 동시에 의지의 화신임을 증명했다. 로마에서는 그 페널티킥을 숟가락이라는 뜻의 쿠키아이오(cucchiaio)라 부른다. AS 로마를 응원하지 않는 제3자들도 토티에게는 사랑이라는 키워드쯤은 보냈다.
기록은 그가 나이 들수록 쌓였다. 2008년 2월 로시를 넘어 구단 리그 최다 출전자가 됐다. 2012년 1월 체세나전의 211번째 골로는 한 구단에서 넣은 세리에 A 최다 득점에서 군나르 노르달(Nils Gunnar Nordahl; 스웨덴 공격수, 1921-1995)을 넘었다. 2015년 1월 더비에서 두 골을 넣어 로마 더비 통산 11골이 됐고, 그날 관중석 앞에서 휴대 전화로 찍은 사진이 이 글의 표지다. 2016년 4월에는 서른아홉 살 일곱 달의 나이로 토리노전에서 교체로 들어가 두 골을 넣었다.
공식전 786경기 307골, 세리에 A 619경기 250골이다. 구단 최다 출전이자 최다 득점이다. 캡틴, 검투사, 로마의 왕이라는 수많은 별명 속에 살았지만 왕도 신도 아닌 한 로마 시민으로서 팬들과 함께했고, 그 겸손이 그를 황제로 기억되게 했다.
2017년 5월 28일 제노아전이 마지막이었다. 브레시아에서의 첫 경기로부터 8,827일이 지난 날이다. 경기가 끝난 뒤 그는 올림피코 한가운데서 마이크를 들었다. 로마 사람으로, 로마니스타로 태어난 것은 특권이었고 이 팀의 주장인 것은 영광이었다고 했다. 스물여덟 해의 사랑을 드릴 수 있어 자랑스럽다는 말이 그 인사의 끝이다.
10. 브루노 콘티 - 라이트 윙

디자인 정정 생일은 1955년 3월 13일이다. 별명 로마의 시장은 도시의 우두머리를 뜻하며 이탈리아어로는 Sindaco de Roma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라이트 윙 순위 6위. 로마의 시장(Sindaco de Roma).
브루노 콘티(Bruno Conti; 이탈리아 공격수, 1955-)는 로마라는 클럽이 아름답게 이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증명한 선수였다. 왼발잡이인데 오른쪽 윙어로 뛰었고, 그가 공을 잡으면 올림피코는 숨을 죽였다. 다음 동작이 예술이기를 바라면서였다.
로마 남쪽의 바닷가 도시 네투노에서 자랐다. 프로 구단의 입단 시험에서 여러 번 떨어졌다는 것이 지금 들으면 믿기지 않는다. 로마조차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 했다. 당시 감독 엘레니오 에레라가 재능은 알아보되 169cm의 몸으로는 프로에서 버티지 못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구단의 오랜 지도자 토니노 트레비차니가 동네 아마추어 대회에서 그를 다시 보고는 이런 선수가 로마 셔츠를 입지 않을 수는 없다며 데려왔다.[2]
그를 키운 사람도 리드홀름이다. 2군 경기에서 그를 본 감독이 1군 훈련장으로 부르면서 긴 길이 시작됐다. 제노아로 두 번 임대를 다녀왔는데, 두 번째 임대에서 한 팀으로 뛰고 군 복무까지 같이 한 동료가 로베르토 프루초였다.
그는 드리블로 수비수를 부수지 않았다. 그저 스쳐 지나가듯 어깨를 흔들었고, 그가 공을 들고 있으면 팬들이 먼저 웃었다. 왼발잡이가 오른쪽에 서면 수비수는 안쪽부터 막는다. 콘티는 그때 바깥으로 나가 왼발 바깥쪽으로 감아 올렸고, 바깥을 막으면 안으로 접고 들어와 때리거나 찔렀다. 어느 쪽을 내줘도 공이 벌칙 구역으로 들어갔으니 풀백으로서는 고를 답이 없었다. 프루초의 머리를 찾아간 공이 그 발에서 나왔다. 베르나르디니는 1980년 12월의 한 경기를 보고 그를 안전망 없이 줄을 타는 곡예사에 견줬다. 공을 앞에 툭 쳐 놓고 상대의 몸싸움을 버티며 고개를 든 채 나아가다가 골키퍼의 키를 넘겨 동료의 골을 만들어 줬다는 묘사다. 조직과 수비의 리그라는 세리에 A의 통념을 깨뜨린 예외였다.
1982년 여름이 정점이다. 스페인 월드컵에서 이탈리아가 우승할 때 그는 오른쪽에서 경기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사람들은 그 대회의 두 스타 마라도나와 지쿠의 이름을 합쳐 그를 마라지코(MaraZico)라 불렀다. 결승 서독전에서는 페널티킥을 얻어 냈고, 세 번째 골은 그가 중앙선에서 공을 따내 오른쪽을 내달린 끝에 알토벨리에게 건넨 것이다. 펠레는 그 대회에서 세상에서 가장 센 선수가 콘티였다고 했다. 한 달 뒤 뉴욕에서 열린 세계 올스타전에는 플라티니, 베켄바워와 함께 유럽 대표로 뛰었다. 잉글랜드의 감독 보비 롭슨(Bobby Robson; 잉글랜드 감독, 1933-2009)은 어느 나라 대표팀을 맡든 브루노 콘티를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
이듬해 봄 로마에서 스쿠데토를 들었다. 1984년 유러피언컵 결승의 승부차기에서는 그의 공이 크로스바를 넘어갔다. 본인은 로마에서 좋은 날과 나쁜 날을 다 겪었다며 스쿠데토와 그 결승을 나란히 꼽는다. 코파 이탈리아는 다섯 번 들었다. 구단이 가진 아홉 번의 절반이 넘는다.
AS 로마에서 열여덟 해를 뛰며 공식전 402경기 47골, 세리에 A 304경기를 남겼다. 국가대표팀에서도 빛났지만 팬들은 언제나 그를 로마가 낳은 유일무이한 시인으로 기억한다. 1991년 5월 23일의 작별 경기에는 8만 명이 넘는 유료 관중이 왔다. 그 뒤로도 구단을 떠나지 않고 유소년을 맡았으며, 2005년에는 잠시 1군 감독석에도 앉았다. 데로시도 그가 유소년에서 본 아이다. 2006년 월드컵을 들고 돌아온 데로시는 대표팀 유니폼에 축구의 세계 챔피언이 모든 것의 세계 챔피언에게 드린다고 적어 그에게 건넸다.
11. 로베르토 프루초 - 센터 포워드

디자인 정정 별명에 든 고향의 이름은 크로체피에스키(Crocefieschi)이고, 별명은 제노아 시절에 얻은 O Rey di Crocefieschi다.
팬들이 항상 외치는 단 한 마디, 폭격기. 크로체피에스키의 왕(O Rey di Crocefieschi).
폭격기라 불린 로베르토 프루초(Roberto Pruzzo; 이탈리아 공격수, 1955-)는 세리에 A 득점왕을 세 번 했다. 그 일을 해낸 사람은 리그 역사에 여덟뿐이라고 구단은 적는다.[2] 스쿠데토 한 번과 코파 이탈리아 네 번, 유러피언컵 준우승 한 번 속에서 그는 가장 많은 골을 터뜨린 공격수로 존재했다. 득점왕을 한 세 시즌의 골은 18골과 15골과 19골이다.
제노바 뒤편의 산골 마을 크로체피에스키에서 태어났다. 열세 살 때부터 동네 술집들이 여는 7인제 대회를 돌았고, 마을마다 이 소년을 데려가려고 다퉜다. 열다섯에 제노아 유소년에 들어갔는데, 1973년에 그 유소년 팀을 맡은 감독이 루이스 수아레스(Luis Suárez Miramontes; 스페인 미드필더·감독, 1935-2023)였다. 열여덟에 이미 제노아의 주장이었다.
모두가 그가 유벤투스로 갈 줄 알았다. 유벤투스는 1976년부터 우선 협상권을 갖고 있었고 밀란도 달려들었다. 1978년 로마의 회장 가에타노 안찰로네(Gaetano Anzalone; 이탈리아 기업인·로마 회장, 1930-2018)가 1970년대의 이 구단으로서는 전례가 없던 돈을 써서 그를 데려왔다.
시작은 나빴다. 여섯 달 만에 그는 이적을 요청했다. 그사이 구단의 새 주인이 된 디노 비올라는 그를 내줄 생각이 없었고, 한 가지 수를 썼다. 제노아에 임대 가 있던 브루노 콘티를 불러들인 것이다. 둘은 제노아에서 한 시즌을 같이 뛰고 군 복무도 같이 한 사이였다. 구단은 그것이 로마와 프루초 사이의 사랑에 불을 붙였다고 적는다.
그는 예술적인 터치보다 본능적인 위치 선정으로, 골 냄새를 맡는 야수의 감각으로 넣었다. 타깃형 스트라이커라는 말로는 모자란다. 몸으로 밀어붙이고, 수비수를 끌고 다니고, 무게로 골대를 흔든 진짜 9번이었다. 공중에서 특히 강했다. 178cm면 센터 포워드로 큰 키가 못 되는데도 그랬다. 먼저 뛰어서 오래 떠 있었고, 수비수가 올라올 즈음 그는 이미 이마로 내리찍고 있었다. 벌칙 구역 밖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다가 크로스가 뜨는 순간에만 나타나는 공격수였으니, 오른쪽에 콘티를 둔 팀에 그보다 맞는 9번은 없었다. 미셸 플라티니는 그를 두고 힘이 좋고 머리가 뛰어나며 멋진 골을 넣을 줄 아는 최고의 공격수이고, 책 한 권을 쓸 만한 선수라고 했다.
AS 로마가 1982-83시즌 오랜 가뭄 끝에 리그를 우승했을 때 맨 앞에서 포효한 선수가 그였다. 구단은 그 팀을 뚫리지 않는 수비와 감탄할 만한 중원, 그리고 스트라이커 프루초와 윙어 브루노 콘티의 폭발적인 공격으로 적는다. 1984년 올림피코의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로마의 골을 넣은 사람도 그다. 리버풀의 필 닐(Phil Neal; 잉글랜드 수비수, 1951-)이 먼저 넣은 골을 두고 로마 선수들은 골키퍼가 반칙을 당했다고 항의했고, 그 골을 지운 것이 프루초의 머리였다. 1986년 2월 아벨리노전에서는 혼자 다섯 골을 넣었다.
대표팀과는 인연이 얕았다. 득점왕을 두 해 내리 하고도 1982년 월드컵 명단에 들지 못했고, 대표팀에서는 여섯 경기에 골이 없다. 그의 골은 전부 구단의 것이었다.
로마에서 열 시즌 동안 공식전 315경기 138골, 세리에 A 240경기 106골을 남겼다. 그래서 명예의 전당에 오르던 날 그는 106번의 감사를 보낸다고 썼다. 경기장에 서 있으면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로마가 역대 가장 사랑받은 로마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는 말도 남겼다. 1988년 피오렌티나로 옮겨 한 시즌을 더 뛰었는데, 거기서 넣은 골은 하나뿐이다. 1989년 6월 30일 UEFA컵 출전권이 걸린 로마와의 단판 승부에서 로베르토 바조의 크로스를 머리로 받아 넣었다. 그 골로 로마는 유럽에 나가지 못했고, 그 경기가 그의 마지막 경기였다. 로마의 전통적 9번은 프루초에게서 시작된다.
왕과 왕자와 황제가 한 팀에 서면
이 열한 명이 로마에서 보낸 해를 더하면 140년쯤 된다. 그 긴 시간에 그들이 함께 든 스쿠데토는 둘이다. 구단 최다 출전 1위와 2위와 3위가 여기 있고, 최다 득점자가 여기 있다. 후보로 내려간 이름들이 이 열한 명의 무게를 말해 준다. 첫 스쿠데토의 골잡이 아마데이(Amedeo Amadei)와 골키퍼 마제티(Guido Masetti), 1983년의 주장 디바르톨로메이, 2001년의 몬텔라와 사무엘이 모두 서브 명단과 추가 명단에 있다.
로마와 그 근교에서 난 사람이 넷이다. 토티와 데로시와 잔니니, 그리고 로마 남쪽 네투노의 콘티다. 나머지 일곱은 밖에서 왔다. 롬바르디아와 리구리아와 아브루초에서, 브라질에서 셋이, 프랑스에서 하나가 왔다.
밖에서 온 사람들이 로마 사람이 되어 간 방식이 이 구단의 이야기다. 가장 로마다웠다는 로시는 크레모나 근처에서 왔고, 여덟 번째 왕은 포르투알레그리에서 왔으며, 6번을 비워 두게 만든 수비수는 바이아에서 왔다. 로마에서 난 넷은 반대로 한 번도 떠나지 않으려 했다. 그 넷이 이 구단의 10번과 16번과 7번이다.
중원의 셋을 다시 보면 로마가 이긴 방식이 보인다. 파우캉이 박자를 정하고 잔니니가 그것을 받아 적었으며 데로시가 그 뒤를 지켰다. 실제로는 한 번도 한 팀이 되지 못한 셋이다. 파우캉이 떠난 해에 잔니니가 주전이 됐고, 잔니니가 떠난 지 다섯 해 뒤에 데로시가 데뷔했다. 앞줄은 다르다. 콘티가 올리고 프루초가 머리로 넣는 골은 1980년대의 올림피코가 실제로 수없이 본 장면이다. 거기에 토티가 왼쪽에서 들어온다. 프루초가 수비수 둘을 끌고 골대 앞에 서 있으면 그 뒤가 빈다. 토티는 평생 그런 자리를 찾아 들어간 선수다. 뒤에서는 카푸와 캉델라가 2001년처럼 양쪽을 오르내리고, 아우다이르가 첫 패스를 낸다. 서로 만난 적 없는 세대들이 한 팀에 서도 각자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면 되는 대형이다.
열한 명 뒤에 선 서른여섯
서브 명단 열다섯과 추가 명단 스물하나를 글자로 다시 적되 포지션은 그림에 적은 대로 두었다. 서른여섯 가운데 스물이 구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있다.
서브 명단 15인
- 귀도 마제티Guido Masetti · 골키퍼
1942년 첫 스쿠데토의 골문을 지켰다. 구단이 그 우승의 단단한 수비를 말할 때 먼저 드는 이름이다.
- 세르조 산타리니Sergio Santarini · 센터백
1968년부터 열세 해를 뛴 리베로다. 1980년과 1981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 프란체스코 로카Francesco Rocca · 레프트백
로마 한 구단에서만 뛰고 무릎 부상으로 스물여섯에 멈췄다. 올림피코의 작별 경기를 먼저 받은 사람이다.
- 세바스티아노 넬라Sebastiano Nela · 레프트백
1981년부터 열한 해를 뛰었다. 1983년 스쿠데토의 수비수다.
- 크리스티안 파누치Christian Panucci · 라이트백
2001년부터 여덟 해를 뛰었다. 2007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 1차전에서 두 골을 넣었다.
- 아틸리오 페라리스Attilio Ferraris · 수비형 미드필더
로마 한복판 보르고 피오에서 태어난 창단 첫해의 얼굴이다. 1934년 월드컵을 들었다.
- 다미아노 토마시Damiano Tommasi · 수비형 미드필더
1996년부터 열 해를 뛰었다. 2001년 스쿠데토의 중원을 달린 사람이다.
- 에메르송Emerson · 수비형 미드필더
2000년에 와서 네 시즌을 뛰었다. 2001년 스쿠데토의 브라질 미드필더다.
- 풀비오 베르나르디니Fulvio Bernardini · 중앙 미드필더
창단 이듬해에 와서 열한 시즌 동안 팀의 길잡이였다. 훗날 파우캉과 콘티에 대한 글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 아고스티노 디바르톨로메이Agostino Di Bartolomei · 중앙 미드필더
로마에서 난 1983년 스쿠데토의 주장이다. 탄크레디가 지금도 그리워하는 친구다.
- 카를로 안첼로티Carlo Ancelotti · 중앙 미드필더
1979년부터 여덟 해를 뛰고 밀란으로 갔다. 1983년 스쿠데토와 코파 이탈리아 네 번을 들었다.
- 시모네 페로타Simone Perrotta · 공격형 미드필더
2004년부터 아홉 해를 뛰었다. 2008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골을 넣었고, 토티, 데로시와 함께 2006년 월드컵을 들었다.
- 알시데스 기지아Alcides Ghiggia · 라이트 윙
1950년 마라카낭의 결승골을 넣은 우루과이 사람이다. 1953년에 와서 여덟 해를 뛰었다.
- 아메데오 아마데이Amedeo Amadei · 센터 포워드
1942년 첫 스쿠데토에서 18골을 넣었다. 로마 근교 프라스카티에서 태어나 구단 유소년에서 자랐다.
- 빈첸초 몬텔라Vincenzo Montella · 센터 포워드
1999년부터 열 해 가까이 뛰었다. 2001년 스쿠데토의 공격수이며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결승에서도 골을 넣었다.
추가 명단 21인
- 파비오 쿠디치니Fabio Cudicini · 골키퍼
1958년부터 여덟 해를 뛰었다. 1961년 인터시티스 페어스컵과 1964년 코파 이탈리아의 골키퍼다.
- 파올로 콘티Paolo Conti · 골키퍼
1973년부터 일곱 해를 뛰었다. 1978년 월드컵 대표였고, 젊은 탄크레디가 넘어야 했던 문이다.
- 알리송 베케르Alisson Becker · 골키퍼
2016년부터 두 시즌을 뛰었다. 2018년 UEFA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까지 간 팀의 골키퍼다.
- 마리오 데미켈리Mario De Micheli · 센터백
창단 때부터 뛴 초창기의 수비수다. 구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있다.
- 왈테르 사무엘Walter Samuel · 센터백
2000년부터 네 시즌을 뛰었다. 2001년 스쿠데토의 센터백이다.
- 필리프 멕세스Philippe Mexès · 센터백
2004년부터 일곱 해를 뛰었다. 2008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의 선제골이 그의 것이다.
- 코스타스 마놀라스Kostas Manolas · 센터백
2014년부터 다섯 해를 뛰었다. 2018년 바르셀로나를 뒤집은 밤의 세 번째 골을 머리로 넣었다.
- 알레산드로 플로렌치Alessandro Florenzi · 라이트백
로마에서 나고 자란 유소년 출신이다. 2019년 데로시에게서 완장을 넘겨받았다.
- 잔카를로 데시스티Giancarlo De Sisti · 수비형 미드필더
로마에서 태어나 두 번에 걸쳐 열 해를 뛰었다. 1961년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결승 2차전에 나선 열여덟 살이었다.
- 토니뉴 세레주Toninho Cerezo · 수비형 미드필더
1983년부터 세 시즌을 뛰었다. 1986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 2차전에서 골을 넣었다.
- 조르조 카르피Giorgio Carpi · 중앙 미드필더
초창기의 미드필더다. 훗날 구단 임원이 되어 크레모나에 가서 로시를 데려왔다.
- 아르칸젤로 벤투리Arcangelo Venturi · 중앙 미드필더
1948년부터 아홉 해를 뛰었다. 구단의 유일한 2부 리그 시즌에 주장이었다.
- 케빈 스트로트만Kevin Strootman · 중앙 미드필더
2013년부터 다섯 해를 뛰었다. 아우다이르의 권유로 열 해 만에 6번을 다시 단 사람이다.
- 라자 나잉골란Radja Nainggolan · 중앙 미드필더
2014년부터 네 해 반을 뛰었다. 2018년 UEFA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까지 간 팀의 엔진이다.
- 호드리구 타데이Rodrigo Taddei · 라이트 윙
2005년부터 아홉 해를 뛰었다. 2007년 코파 이탈리아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들었다.
- 디노 다코스타Dino da Costa · 세컨드 스트라이커
1955년에 와서 두 번에 걸쳐 뛰었다. 로마 더비 통산 11골은 토티가 따라잡기까지 혼자 가진 기록이었다.
- 마르코 델베키오Marco Delvecchio · 세컨드 스트라이커
1995년부터 열 해를 뛰었다. 2001년 스쿠데토의 공격수이며 더비에 강했다.
- 파울로 디발라Paulo Dybala · 세컨드 스트라이커
2022년 유벤투스에서 왔다. 구단이 서브 명단에 올릴 만큼 사랑받은 10번이다.
- 로돌포 폴크Rodolfo Volk · 센터 포워드
1929년 라치오와의 첫 더비에서 결승골을 넣었다. 캄포 테스타초 시절의 골잡이다.
- 루디 푈러Rudi Völler · 센터 포워드
1987년부터 다섯 해를 뛰었다. 1991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 1차전에서 골을 넣었다.
- 에딘 제코Edin Džeko · 센터 포워드
2015년부터 여섯 해를 뛰었다. 2016-17시즌 세리에 A 득점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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