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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C 나폴리 문장

SSC 나폴리

Società Sportiva Calcio Napoli Società per Azioni
SOCIETÀ SPORTIVA CALCIO NAPOLI · GLI AZZURRI 1926-2026

스타디오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 · 세리에 A 우승 4회 · 코파 이탈리아 6회 · UEFA컵 1회

SSC 나폴리 역대 최고의 전설 열한 명과 후보 마흔둘, 쉰세 개의 이름을 필자의 견해로 골랐다. 후보에는 2022-23시즌 세리에 A 최우수 수비수로 뽑힌 대한민국의 김민재가 있다.

신은 인간의 형상으로 나폴리에서 뛰었다

나폴리 이야기는 도시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지방의 중심에 자리한 이 도시는 한때 로마 이전의 로마였으며, 그리스의 향기와 노르만의 숨결, 스페인의 리듬과 프랑스의 멜랑콜리가 공존하는 기이할 만큼 아름다운 혼종의 땅이다. 한국 사람들이 이탈리아 여행지를 꼽을 때 나폴리를 빼놓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곳에서 축구는 하층민의 희망이며, 바다 너머로부터 무시당해 온 도시의 분노, 그리고 자존의 시위에 가깝다. 숫자가 그 분노의 까닭을 말해 준다. 세리에 A가 하나의 리그로 묶인 1929년부터 지금까지 스쿠데토(scudetto; 세리에 A 우승 팀이 이듬해 가슴에 다는 작은 방패, 곧 리그 우승)가 로마보다 남쪽으로 내려간 것은 다섯 번이다. 1970년의 칼리아리가 한 번이고 나머지 넷이 나폴리다.

구단은 1926년 8월 1일을 생일로 삼는다. 그달 25일의 총회가 나폴리라는 이름을 정했고, 1964년에 지금의 이름인 소시에타 스포르티바 칼초 나폴리가 됐다.[1] 뿌리는 더 깊어서, 1906년의 네이플스 크리켓 앤드 풋볼 클럽과 거기서 갈라져 나온 외국인들의 구단이 1922년에 합친 것이 그 앞의 일이다. 구단의 첫 상징은 날뛰는 말이었다. 첫 시즌을 꼴찌로 마치자 사람들이 그 말을 당나귀라 놀렸고, 나폴리는 그 당나귀를 지금껏 마스코트로 데리고 다닌다. 조롱을 제 것으로 삼는 버릇이 창단 첫해부터 있었다. 첫 예순 해 동안 든 큰 트로피는 코파 이탈리아 둘이 전부였다. 그 가운데 1962년의 것은 세리에 B 구단으로 든 트로피다.

구단의 집은 1959년에 문을 연 푸오리그로타의 경기장이다. 예순 해 동안 성 바오로의 이름으로 불렸고, 2020년 12월부터는 한 선수의 이름으로 불린다. 구단사 전체가 그 이름 하나로 접히는 곳이 나폴리다.

1980년대 중반,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 도시에 발을 디뎠을 때 신화는 현실이 되었고 나폴리는 영원히 달라졌다. 이후 수많은 스타들이 지나갔지만 나폴리는 언제나 고통과 영광, 광기와 순정 사이를 걸어왔다. 2004년에는 파산해 세리에 C에서 다시 시작했고, 2007년에 세리에 A로 돌아왔으며, 2023년에 서른세 해 만의 세 번째 스쿠데토를, 2025년에 네 번째를 들었다. 100주년 시즌인 2026-27시즌의 벤치에는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Massimiliano Allegri; 이탈리아 감독, 1967-)가 앉았다.

이 명단을 처음 짠 것은 2025년 초여름이다. 그 뒤 구단은 그해 12월 리야드에서 세 번째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Supercoppa italiana; 리그 우승 팀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 팀이 겨루는 대회)를 들었고, 2025-26시즌을 세리에 A 2위로 마쳤으며, 2026년 8월 1일에 창단 100주년을 맞았다. 100주년 시즌의 셔츠는 유니폼관의 26/27 홈 유니폼 편에서 따로 다뤘다.

선정 전술 일곱 개의 완장으로 짠 3-4-3

대형은 3-4-3이다. 골문에 초프를 세웠고, 스리백은 왼쪽부터 디로렌초와 페라라와 브루스콜로티다. 그 앞 한가운데에 율리아노와 데나폴리가 나란히 서고, 두 사람의 왼쪽에 마라도나가, 오른쪽에 함시크가 선다. 맨 앞줄은 왼쪽의 인시녜, 가운데의 카레카, 오른쪽의 메르턴스다.

스리백은 나폴리가 실제로 오래 입은 옷이다. 2009년부터 네 시즌을 맡은 발테르 마차리(Walter Mazzarri; 이탈리아 감독, 1961-)의 3-4-2-1에서 함시크는 원톱 바로 뒤의 두 자리 가운데 하나를 맡았고, 2024-25시즌의 안토니오 콘테(Antonio Conte; 이탈리아 감독, 1969-)는 수비를 셋으로 바꿀 때마다 디로렌초를 오른쪽 센터백으로 내렸다. 풀백과 센터백을 오가며 상대 공격수 하나를 지우던 브루스콜로티에게도 스리백의 바깥 자리는 제 옷이다. 본문은 원고와 디자인을 따라 그를 라이트백으로 적고, 대형 그림은 그를 스리백의 오른쪽에 세웠다.

수비를 넷으로 짜지 않은 데에는 명단의 사정도 있다. 풀백이라 부를 사람이 열한 명 안에 브루스콜로티 하나다. 왼쪽 풀백 뤼트 크롤(Rudolf Jozef Krol; 네덜란드 수비수, 1949-)과 조반니 프란치니(Giovanni Francini)는 후보로 내려가 있다. 그 대신 가운데가 두껍다. 율리아노가 공을 받아 방향을 정하고 데나폴리가 그 둘레를 쓸고 다닌다. 한 사람은 나폴리가 2위까지 올라간 두 시즌의 주장이고, 한 사람은 마라도나의 나폴리가 든 트로피 다섯 개에 전부 이름을 올린 선수다.

왼발의 마라도나는 왼쪽에서 안을 보고, 두 발을 다 쓰는 함시크는 오른쪽에서 벌칙 구역으로 뛰어든다. 둘이 마음대로 앞을 봐도 되는 것은 뒤에 데나폴리가 있어서다. 1980년대의 나폴리가 실제로 그렇게 굴러갔다. 앞줄의 셋은 모양이 서로 다르다. 인시녜는 왼쪽에서 접고 들어와 감고, 메르턴스는 오른쪽에서 출발해 가운데의 빈 곳으로 흘러들며, 카레카는 그 둘이 수비를 끌어낸 자리에 서 있다. 2010년대의 나폴리가 키 작은 공격수 셋으로 하던 축구에 1980년대의 9번 하나를 꽂은 꼴이다.

이 열한 명에는 유난히 주장이 많다. 구단이 가장 오래 완장을 맡긴 율리아노부터 지금의 디로렌초까지 일곱이다. 완장이 지나간 순서대로 놓으면 아래와 같다.

완장이 지나간 일곱 팔
이름태어난 곳완장을 찬 때주장으로 든 것
율리아노나폴리1966년부터 12년1976년 코파 이탈리아
브루스콜로티사사노마라도나 앞의 다섯 시즌없다. 완장을 마라도나에게 넘겼다
마라도나라누스1991년까지스쿠데토 둘, 코파 이탈리아, UEFA컵,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페라라나폴리마라도나가 떠난 뒤 1994년까지없다
함시크반스카비스트리차2014년부터 2019년까지2014년 코파 이탈리아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인시녜나폴리2019년부터 2022년까지2020년 코파 이탈리아
디로렌초카스텔누오보 디 가르파냐나2022년부터스쿠데토 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옅게 물든 세 줄이 나폴리에서 난 주장이다. 그 셋이 주장으로 든 것은 코파 이탈리아 둘이고, 네 번의 스쿠데토는 아르헨티나 사람과 토스카나 사람의 팔에서 들렸다. 이 도시는 제 아이들에게 완장을 가장 오래 맡겼고, 가장 큰 트로피는 밖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들었다. 완장을 차지 않은 넷은 초프와 데나폴리, 메르턴스와 카레카다.

일곱 사람이 완장을 찬 해를 더하면 서른 해가 훌쩍 넘는다. 100살 된 구단의 3분의 1이다. 그 긴 세월의 주장들이 한 팀에 서면 누가 완장을 차느냐는 물음이 남는데, 이 표가 답을 갖고 있다. 브루스콜로티가 이미 한 번 답했다.

기록으로 봐도 이 열한 명은 구단의 맨 위를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구단 최다 출전 다섯 명이 함시크, 브루스콜로티, 율리아노, 인시녜, 메르턴스인데 다섯이 전부 여기 있다. 구단 최다 득점 네 명도 메르턴스, 인시녜, 함시크, 마라도나의 순서로 전부 여기 있다. 오래 뛴 사람과 많이 넣은 사람이 겹치는 구단이다. 나폴리에서는 머문 사람이 기록을 가졌다.

1. 디노 초프 - 골키퍼

디노 초프 골키퍼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나폴리에서의 세리에 A 기록은 143경기 110실점이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골키퍼 순위 4위.

레프 야신, 고든 뱅크스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골키퍼이며, 잔루이지 부폰과 마누엘 노이어가 언젠가는 넘어야 될 신이다. 디노 초프(Dino Zoff; 이탈리아 골키퍼, 1942-)는 축구가 아직 거칠고 원시적이던 시절, 그라운드 위에서 질서의 얼굴이 되었다.

SSC 나폴리에 당도하기 전에는 무명이었고, SSC 나폴리를 떠난 뒤엔 신이 된 골키퍼이다. 전 세계 축구 베스트 11을 좋아하는 대한민국 축구 팬들에게도 디노 초프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만큼이나 얼굴을 자주 내미는 전설의 슈퍼스타일 것이다.

프리울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우디네세와 만토바를 거쳤고, 스물다섯이던 1967년에 나폴리로 왔다. 첫 경기는 그해 9월 24일의 아탈란타전이다. 그날부터 1972년 3월 12일의 인테르전까지 그는 나폴리의 세리에 A 경기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나폴리에서 뛴 리그 143경기가 전부 한 줄로 이어져 있다. 그 143경기에 내준 골은 110골로, 한 경기에 한 골이 안 된다. 첫 시즌인 1967-68시즌에 나폴리는 2위를 했는데, 마라도나가 오기 전까지 구단이 가 본 가장 높은 자리다.

이탈리아 대표로 처음 선 날도 나폴리에 있다. 1968년 4월 20일 산 파올로(Stadio San Paolo; 2020년까지 쓴 나폴리 홈구장의 이름)에서 열린 불가리아전이다. 그해 여름 그는 뒤에 나올 율리아노와 함께 나폴리 선수로 UEFA 유로 1968을 들었다. 두 해 뒤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엔리코 알베르토시(Enrico Albertosi; 이탈리아 골키퍼, 1939-)에게 자리를 내주고 벤치에서 준우승을 봤다. 유럽 챔피언의 골키퍼가 다음 월드컵의 후보였다. 그가 나폴리에서 보낸 다섯 시즌은 그런 오르내림 속에 있었고, 그동안에도 일요일의 골문은 한 번도 비우지 않았다.

1972년 그는 서른의 나이로 유벤투스에 갔다. 다른 자리라면 내리막을 걱정할 나이에 골키퍼로서의 본편이 시작됐고, 거기서 열한 해를 더 뛰었다. 그 뒤의 일은 누구나 안다. 그가 떠난 1972년 여름은 브루스콜로티가 나폴리에 온 여름이기도 하다. 이 글의 골키퍼와 오른쪽 수비수는 한 철 차이로 엇갈렸다. 마흔이던 1982년에 주장으로 FIFA 월드컵을 들었고, 마흔하나에 유러피언컵 결승에 섰다. 이탈리아 대표 112경기는 오랫동안 그 나라의 최다 출전 기록이었다. UEFA 유로와 FIFA 월드컵을 모두 우승한 이탈리아 선수는 지금도 그 한 사람이다. 세리에 A의 무실점 기록은 훗날 부폰이 넘었으나, 국가대표 경기 1,142분 무실점은 여태 세계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탈리아는 2000년에 그에게 공로훈장 대장군장(Grande Ufficiale dell’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을 줬다. 축구 선수치고는 꽤나 높은 훈장이다.

디노 초프는 다이빙으로 공을 막지 않았다. 시간을 멈추듯이, 위치를 예치하듯이 공이 향하기 전에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손은 단단했지만 거칠지 않았고, 그의 시선은 냉정했지만 불안함은 전혀 없었다. 높은 공이든 낮은 공이든 나와서 처리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고, 몸을 던지는 선방은 꼭 필요할 때만 했다. 옷도 눈에 띄지 않는 색만 골라 입었는데, 골대 사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공격수에게 알려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화려한 장면이 적은 골키퍼가 가장 오래, 가장 높이 갔다. 선방이 적었다는 것은 막을 일을 미리 줄였다는 말이다.

그는 모든 골키퍼들이 흉내 내려 했던 완성형의 원형이었으며, 21세기에 들어서야 잔루이지 부폰과 마누엘 노이어만이 겨우 그를 흉내 낼 뿐이었다. 나폴리가 그를 데리고 있던 다섯 시즌에 든 트로피는 없다.

2. 치로 페라라 - 센터백

치로 페라라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나폴리에서의 세리에 A 기록은 247경기 12골이다.

나폴리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센터백.

치로 페라라(Ciro Ferrara; 이탈리아 수비수, 1967-)는 나폴리에서 태어나 나폴리를 지켜 낸 사내였다. 1980년대 마라도나 시대의 나폴리를 뒤에서 지탱한 핵심이 그였고, 열 명이 한 사람을 보고 뛰던 팀에서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붙들었던 거대한 중심축이었다.

열다섯에 구단 유소년에 들어왔고, 열여덟이던 1985년 5월 5일 산 파올로의 유벤투스전에서 세리에 A에 처음 섰다. 마라도나가 나폴리에 온 첫 시즌의 일이다. 두 해 뒤에는 스무 살의 주전으로 구단의 첫 스쿠데토를 들었다. 그 수비진에서 그가 가장 어렸고, 곁에는 서른다섯의 브루스콜로티가 있었다. 이 글의 스리백 가운데 둘이 그해 한 팀에서 뛰었다.

그는 격한 몸싸움을 피하지 않는 파이터형 수비수였고, 가벼운 도발에는 흔들리지도 않는 강인한 멘털을 지닌 선수였으며, 결정적으로 수비수에게 가장 필요한 신뢰와 존재감을 동시에 소유했던 파멸자에 가까웠다. 거칠되 더럽지 않았다. 180cm의 키로 공중에서 지지 않았고, 몸을 날려 걷어 내는 동작이 좋았으며, 공격수에게 붙는 스토퍼와 뒤를 쓸어 담는 리베로와 풀백을 다 해냈다. 감독이 수비의 모양을 바꿔도 그는 자리만 옮기면 됐다. 그가 일요일마다 맡은 상대는 마르코 판바스턴과 루디 푈러, 위르겐 클린스만 같은 그 시대 세리에 A의 9번들이다. 세계의 좋은 공격수가 전부 이탈리아에 모여 있던 열 해를 그는 한 구단의 수비수로 통과했다.

그는 마라도나와 함께 뛰면서도 빛을 잃지 않았고, 외려 조용한 리더십으로 나폴리 팬들의 절대적 신뢰를 얻었다. 1986-87시즌 SSC 나폴리 역사상 첫 번째 세리에 A 우승이 결정되던 그 순간, 마라도나와 더불어 진짜 나폴리 출신 레전드로 우뚝 서 있던 존재다. 그의 존재는 곧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의 상징이었다.

수비수인 그가 구단의 가장 큰 밤에 골을 넣었다. 1989년 UEFA컵 결승 2차전, 슈투트가르트 원정에서 나폴리의 두 번째 골이 그의 것이다. 경기는 3-3으로 끝났고 나폴리는 구단의 첫 유럽 트로피를 들었다. 스물두 살의 센터백이 결승에서 골을 넣은 그 팀에는 뒤에 나올 데나폴리와 마라도나와 카레카가 함께 있었다. 이 글의 열한 명 가운데 넷이 그 밤 슈투트가르트의 잔디에 섰다.

나폴리 유소년 출신으로서 로컬 히어로 계보의 원형을 상징하는 치로 페라라는 1986-87시즌부터 1989-90시즌까지 4년 연속으로 팀을 세리에 A 1위와 2위에 올려놓았다. 마라도나가 떠난 뒤에는 그의 완장을 물려받았다. 스물넷의 주장이었다. 그가 완장을 찬 세 시즌은 구단이 좋은 선수를 하나씩 팔아 빚을 메우던 때와 겹친다. 팀은 해마다 약해졌고 그는 남은 사람들을 데리고 버텼다. 나폴리에서 열 시즌 동안 세리에 A 247경기를 뛰었고, 이탈리아 대표로는 1990년 자국 월드컵을 포함해 49경기에 나섰다. 구단의 살림이 기울던 1994년, 유벤투스가 94억 리라를 치르고 그를 데려갔다. 거기서 스쿠데토를 다섯 번 더 들었으니 북부가 남부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가던 오랜 순서가 그에게도 되풀이된 것이다. 2020년 그는 디에고를 곁에서 본 사람으로서 책 한 권을 썼고, 머리말은 마라도나가 썼다. 나폴리에서 난 센터백의 계보는 그의 뒤로 칸나바로 형제에게 이어진다. 두 사람 다 이 글의 추가 명단에 있고, 형 파비오는 페라라가 주장이던 팀에서 1군에 올라왔다.

3. 조반니 디로렌초 - 센터백

조반니 디로렌초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디자인의 별명 바티골은 다른 선수의 것이 남은 것이어서 쓰지 않았다. 출전과 득점은 2025년 봄까지의 숫자다.

모든 시대는 주장을 갈망한다. 디로렌초는 그 갈망에 응답한 사람이다.

2023년, SSC 나폴리가 33년 만에 세리에 A 우승컵을 다시 들어 올렸을 때 그 트로피를 처음으로 들어 올린 손은 조반니 디로렌초(Giovanni Di Lorenzo; 이탈리아 수비수, 1993-)였다. 두 해 뒤인 2025년에도 그 손이 먼저 들었다. 나폴리에서 스쿠데토를 든 주장은 마라도나와 그, 둘뿐이고 둘 다 두 번씩 들었다.

그는 골을 많이 넣는 선수도, 화려한 드리블로 팬을 매혹시키는 스타도 아니다. 하지만 그라운드에서 가장 먼저 몸을 던지고, 가장 마지막까지 등을 보이지 않는 선수이기도 하다.

오는 길이 길었다. 토스카나의 산골 카스텔누오보 디 가르파냐나에서 태어나 공격수로 시작했고, 레지나의 유소년에서 오른쪽 풀백이 됐다. 쿠네오와 마테라, 그러니까 3부 리그를 돌았고 엠폴리에서 겨우 세리에 A를 밟았다. 나폴리가 그를 데려온 2019년 여름에 그는 곧 스물여섯이 되는 선수였다. 그 나이에 큰 구단의 문을 처음 연 풀백이 세 해 뒤 완장을 찼고, 네 해 뒤 스쿠데토를 들었다. 2023년의 우승은 다섯 경기를 남기고 정해졌다. 5월 4일 우디네 원정의 1-1이 그 밤이고, 그는 한 달 뒤 마지막 홈 경기에서 트로피를 받아 들었다.

조반니 디로렌초는 측면 수비수이지만 위기의 순간은 중앙을 메웠고, 필요할 땐 전진하며 플레이메이커 역할도 수행하고는 한다. 소속 팀과 대표팀을 오가며 3백, 4백 구분 없이 모두 소화해 내는 그는 팬들에게 진짜 캡틴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증명하는 수비수이기도 하다. 루차노 스팔레티(Luciano Spalletti; 이탈리아 감독, 1959-)의 우승 팀에서 그는 터치라인을 버리고 안쪽으로 들어와 미드필더처럼 공을 돌렸고, 콘테의 우승 팀에서는 수비가 셋이 되는 날마다 오른쪽 센터백으로 내려갔다. 힘과 속도와 지구력이 고르게 좋아 어느 자리에서도 모자라는 구석이 드러나지 않는다. 공격수로 시작한 선수답게 벌칙 구역에 들어가는 때를 알아서, 수비수치고는 골과 도움이 많다. 이 글은 그 경기들을 보고 그를 스리백의 한 자리에 세웠다.

두 번의 우승 사이에 한 번 흔들렸다. 우승 이듬해 팀이 10위로 주저앉자 그는 떠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새로 온 콘테가 그를 붙잡았고, 남은 주장은 한 해 뒤 두 번째 스쿠데토를 들었다. 떠나려던 사람이 남아서 든 트로피라 첫 번째와 무게가 다르다. 그는 쉬는 법도 없다. 나폴리에 온 뒤로 세리에 A만 240경기 넘게 뛰었는데, 해마다 그가 거른 리그 경기는 손에 꼽는다. 세리에 A 올해의 팀에는 두 해를 내리 들었다.

이 명단을 짤 때 그는 나폴리에서 여섯 해쯤 뛴 선수였다. 그 짧은 세월로 베스트 11 선발진에 얼굴을 내밀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이 선수다. 지금은 여덟 번째 시즌을 뛰고 있고, 그 사이 2025년 12월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하나 더 들었다. 이탈리아 대표로는 UEFA 유로 2020의 우승 멤버다. 웸블리의 결승에서 120분을 다 뛰었다. 창단 100주년 시즌인 2026-27시즌에도 완장은 그의 팔에 있다.

4. 주세페 브루스콜로티 - 라이트백

주세페 브루스콜로티 라이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그가 든 세리에 A 우승은 1986-87시즌의 것이다. 별명의 나폴리 말 표기는 Palo 'e fierro다.

나폴리의 시작. 철기둥(Palo ’e fierro).

주세페 브루스콜로티(Giuseppe Bruscolotti; 이탈리아 수비수, 1951-)는 펜던트처럼 매달려 있는 이탈리아 남부 도시 나폴리를 지켜 낸 진짜 방패였다. 그가 가진 것은 막는 솜씨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강인함과 리더십과 근성, 그리고 충성심이라는 이름의 복합적인 미덕이었다.

살레르노 내륙의 사사노에서 태어나 소렌토에서 두 시즌을 뛰고 1972년 나폴리에 왔다. 그 뒤 열여섯 시즌을 떠나지 않았다. 단 2개의 클럽만을 거친 원클럽맨 같은 존재로, 나폴리에서만 511경기에 나섰다. 이 숫자는 오랫동안 구단 최다 출전 기록이었고 지금은 함시크 다음인 2위다. 세리에 A 387경기도 오래 구단 기록이었다.

철기둥이라는 이름은 팬들이 붙였다. 몸이 단단했고 표정이 험했으며, 맡은 공격수를 경기 내내 놓지 않았다. 회장 코라도 페를라이노(Corrado Ferlaino; 이탈리아 기업인·나폴리 회장, 1931-)는 순수한 대인 방어수로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했는데, 그런 선수가 이탈리아 대표팀에는 끝내 한 번도 불리지 않아서 나폴리에서 511경기를 뛴 수비수의 A매치가 0이다.

풀백으로 서든 센터백으로 서든 하는 일은 같았으니, 상대의 가장 위험한 공격수 옆에 서서 그 선수의 하루를 없애는 것이다. 공을 예쁘게 다루는 수비수는 아니었고 그럴 생각도 없어서, 빼앗은 공은 가장 가까운 동료에게 주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한 가지 수비만 한 선수는 아니다. 1974-75시즌 2위의 나폴리는 비니시우(Luís Vinício; 브라질 공격수·감독, 1932-) 감독이 지역 방어를 들여온 팀이었고, 리베로 뒤에 숨지 않고 줄을 맞춰 올라가던 그 수비에서도 오른쪽은 그의 자리였다. 사람을 잡는 것으로 이름난 선수가 자리를 지키는 축구에서도 주전이었다. 그가 서 있던 오른쪽 라인은 단 한 번도 함락된 적 없는 전선이었다.

511경기에 넣은 골은 열하나뿐인데 그 가운데 둘이 구단사에 남았다. 하나는 1976년 앵글로이탤리언 리그컵 결승 2차전의 골이고, 하나는 1976-77시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준결승 1차전에서 안데를레흐트를 상대로 산 파올로에서 넣은 골이다. 1975-76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 때 그는 팀의 핵심이었다.

그가 나폴리의 시작이라 불리는 것은 두 시대를 다 살았기 때문이다. 1972년에 온 스물한 살은 율리아노의 팀에서 여섯 시즌을 뛰었고, 1988년에 떠난 서른일곱은 마라도나의 팀에서 네 시즌을 뛰었다. 그 사이의 여섯 해, 나폴리가 3위까지 올라갔다가 강등권까지 내려갔던 때에도 오른쪽에는 같은 사람이 서 있었다. 좋은 시절의 선수는 많고 나쁜 시절까지 다 지킨 선수는 드물다.

마라도나 이전의 주장으로서, 마라도나에게 주장 완장을 물려준 사내로서 그는 두 세대를 연결하는 다리였다. 다섯 시즌을 찬 완장을 그는 스스로 벗어 아홉 살 어린 아르헨티나 사람의 팔에 채웠다. 구단에서 가장 오래 뛴 사람이 구단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알아보고 자리를 내준 일이다. 첫 스쿠데토는 그 뒤에 왔다. 1986-87시즌 구단의 첫 스쿠데토와 코파 이탈리아가 왔을 때 서른다섯의 그는 그 팀에 있었고, 이듬해 축구화를 벗었다. 팬들은 그를 정의로운 주장, 영원한 수비 대장이라 불렀다. 마라도나의 나폴리는 그가 열네 해 동안 지킨 자리 위에 세워졌다.

5. 안토니오 율리아노 - 중앙 미드필더

안토니오 율리아노 중앙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생일은 1942년 12월 26일로도 전한다. 은퇴 뒤의 직함은 구단이 적는 대로 단장이다.

나폴리라는 구단 자체의 역사를 설계한 자. 토톤노(Totonno).

누군가는 경기를 지배하고, 누군가는 구단을 지배한다. 그 두 가지를 수행한 축구계 몇 안 되는 전설이 있다면 바로 안토니오 율리아노(Antonio Juliano; 이탈리아 미드필더, 1942-2023)이다. 토톤노는 안토니오를 나폴리 식으로 줄여 부르는 이름이다. 이 도시는 그를 끝까지 동네 아이의 이름으로 불렀다.

1960년대, 당시 이탈리아 축구는 북부 중심의 권력이 굳건했다. 밀란, 인테르, 유벤투스가 모든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남쪽의 클럽들은 언제나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며 배경이 되길 강요받았다. 하지만 안토니오 율리아노 세대가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는 토종 나폴리 유소년 출신이었고, 열일곱 해 동안 한 번도 이 도시의 셔츠를 벗지 않았다. 서른다섯이던 1978년에야 볼로냐로 가서 한 시즌을 더 뛰고 그만뒀다. 1군에 처음 선 것은 구단이 세리에 B에 있으면서 코파 이탈리아를 든 1962년이다. 세리에 A 첫 경기는 이듬해 2월의 인테르전이었는데 나폴리는 1-5로 졌다. 그렇게 시작한 소년이 무려 12년에 걸쳐 주장 완장을 찼고, 505경기 동안 팀을 위해 헌신했으며, 1975-76시즌 코파 이탈리아를 주장으로 들었다. 구단은 그가 코파 이탈리아를 주장으로 든 첫 나폴리 사람이라고 적는다.[2]

그는 뛰어난 피지컬도 없었고, 폭발적인 인기나 상업성 명성도 없었다. 176cm의 미드필더가 가진 것은 공을 받는 자리와 내보내는 방향을 정하는 머리였다. 뒤로 내려와 받아서 앞을 정했고, 동료가 어디로 뛰어야 하는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동료를 달리게 하는 선수였다. 1967-68시즌과 1974-75시즌, 나폴리가 2위까지 올라간 두 번 모두 가운데에 그가 있었다.

두 번째 2위가 더 아팠다. 1974-75시즌의 나폴리는 루이스 비니시우 감독 아래에서 이탈리아에서 가장 앞선 축구를 한다는 말을 들었고, 봄까지 유벤투스를 바짝 쫓았다. 4월의 토리노 원정에서 승부를 가른 골은 몇 해 전까지 나폴리에서 뛰던 주제 아우타피니(José João Altafini; 브라질·이탈리아 공격수, 1938-)가 경기 끝 무렵에 넣었다. 나폴리는 승점 2점 차로 2위를 했다. 주장 율리아노가 스쿠데토에 가장 가까이 간 해다. 북부는 그런 식으로도 남부의 것을 가져갔다.

북부의 구단에 가지 않고도 대표팀에 불려 갔다. UEFA 유로 1968을 들었고, FIFA 월드컵에 세 번 나갔으며, 1970년 멕시코의 결승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뛰었다. A매치는 18경기에 그친다. 같은 자리에 잔니 리베라(Giovanni Rivera; 이탈리아 미드필더, 1943-)와 산드로 마촐라(Alessandro Mazzola; 이탈리아 미드필더, 1942-2026), 잔카를로 데시스티(Giancarlo De Sisti; 이탈리아 미드필더·감독, 1943-)가 있던 시대였고, 그 셋은 모두 북부나 중부의 큰 구단 선수였다.

은퇴 후에는 단장이 되어 다시 구단을 맡았다. 1980년에 뤼트 크롤을 데려온 사람이 그이고, 1984년 바르셀로나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를 데려온 일도 그의 임기에 이뤄졌다. 주장으로서 나폴리를 한 번 세웠고 단장으로서 한 번 더 세웠다. 그가 데려온 두 사람이 나폴리의 격을 바꿨다. 크롤은 이 구단에 세계적인 선수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였고, 마라도나는 이 구단이 우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하지만 그가 남긴 숫자 없는 유산들, 즉 도시의 존엄과 구단의 철학, 그리고 미래의 구조는 지금의 나폴리가 존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2023년 12월, 나폴리가 세 번째 스쿠데토의 방패를 가슴에 달고 뛰던 겨울에 그는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단은 그를 잊을 수 없는 주장이자 영원한 깃발이라 불렀다. 나폴리를 나폴리답게 만든 사내.

6. 페르난도 데나폴리 - 중앙 미드필더

페르난도 데나폴리 중앙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마라도나 시대, 중원의 그림자. 람보(Rambo).

페르난도 데나폴리(Fernando De Napoli; 이탈리아 미드필더, 1964-)는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의 산골, 아벨리노 근처 키우사노 디 산 도메니코에서 난 미드필더다. 성이 나폴리이고 고향이 나폴리에서 한 시간 거리이니 이 구단에 오게 돼 있던 사람이다. 1986년, 마라도나가 이미 영혼처럼 떠오르던 시절 조용히, 그리고 단단히 나폴리에 합류했다.

오기 전부터 이름은 나 있었다. 아벨리노에서 자랐고, 그곳 팬들이 긴 머리와 싸우는 태도를 보고 람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 영화가 극장에 걸리던 무렵의 일이다. 스물둘이던 1986년 여름에는 멕시코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네 경기를 모두 뛰었다. 나폴리는 그 대회가 끝나자마자 그를 샀다.

그로부터 6년 동안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가장 헌신적인 방식으로 나폴리의 전성기를 완성해 나갔다. 그가 온 첫 시즌에 스쿠데토와 코파 이탈리아가 함께 왔다. 그의 존재 덕에 나폴리는 4시즌 연속으로 세리에 A 우승권에 위치할 수 있었으며, 1988-89시즌에는 PAOK FC, FC 로코모티브 라이프치히, FC 지롱댕 드 보르도, 유벤투스 FC, FC 바이에른 뮌헨, 그리고 VfB 슈투트가르트를 차례로 꺾고 영광의 UEFA컵을 들어 올리기에 이른다.

그는 수비형 미드필더이면서 동시에 전진형 커버였고, 패스의 중계자이며 동시에 전환기의 핵심이었다. 요즘 말로는 수비 앞을 지키는 6번과 두 벌칙 구역 사이를 오가는 8번을 한 몸에 넣은 선수다. 공을 끊는 것이 본업이었고, 끊은 공을 가장 가까운 파란 셔츠에게 건네는 데서 일을 끝냈다. 그 가장 가까운 셔츠가 대개 10번이었다. 감독이 필요하다고 하면 오른쪽 측면으로 나가 한 경기를 통째로 오르내렸다. 지치는 법이 없었다. 숫자가 그것을 말해 준다. 그가 나폴리에 있던 여섯 시즌에 세리에 A는 모두 196경기가 열렸고 그는 그 가운데 176경기에 나섰다. 열 경기에 아홉 번꼴이다. 가장 많이 뛰고 가장 많이 부딪히는 자리의 선수가 여섯 해 동안 그만큼 나왔다.

페르난도 데나폴리는 압박, 태클, 전방 압축, 유기적 커버 그 모든 역할을 혼자 해낼 수 있는 육각형 미드필더의 표본이었는데, 때문에 마라도나는 공격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그래서 나폴리는 이탈리아의 황태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열 명이 한 사람을 위해 뛰는 팀은 그 한 사람 몫의 수비를 누군가 대신 해야 굴러간다. 나폴리에서는 그 누군가가 람보였다. 마라도나가 공을 잃고 걸어 돌아올 때 그 옆을 전속력으로 지나가는 8번이 늘 있었다.

대표팀에서도 같은 일을 했다. 1990년 자국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일곱 경기를 전부 뛰었고, A매치 54경기를 남겼다. 그 사이의 UEFA 유로 1988에서도 4강까지 간 팀의 주전이었다. 나폴리에서 여섯 시즌 동안 스쿠데토 둘과 코파 이탈리아, UEFA컵,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든 그는 1992년 AC 밀란으로 갔다. 밀란에서는 두 시즌 동안 리그 아홉 경기를 뛰는 데 그쳤다. 그의 축구는 나폴리의 여섯 해에 다 들어 있다. 마라도나의 나폴리가 든 트로피 다섯 개에 전부 이름이 있는 선수는 많지 않고, 그가 그 가운데 하나다.

7. 디에고 마라도나 - 공격형 미드필더

디에고 마라도나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나폴리에서의 공식 기록은 259경기 115골로 적는다. 10번은 2000년에 영구 결번이 됐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공격형 미드필더 순위 1위. 신(神). 황금빛 소년(El Pibe de Oro).

신은 존재했고,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폴리에서 뛰었다.

디에고 마라도나 vs 볼로냐 FC 1909

디에고 마라도나(Diego Armando Maradona; 아르헨티나 공격형 미드필더, 1960-2020). 그의 이름은 일개 축구 선수 따위가 아니며, 민족을 해방시킨 위인이나 영웅 따위도 아니며, 그렇다고 신이라는 단어로 퉁쳐 버릴 단순한 존재도 아니다. 만일 그런 생각이라면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정서를, 전 세계인들이 마라도나가 타계했을 때 흘렸던 눈물의 의미를 결코 알아챌 수 없다. 그건 서사이며, 신화이며, 고통과 구원의 교차점이다.

SSC 나폴리에서 마라도나가 한 일은 축구의 테두리 안에 다 담기지 않는다. 그는 도시를 구원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꿈을 주었으며, 정치와 사회, 신념과 폭력, 사랑과 증오가 뒤엉킨 남부 이탈리아에 하나의 신앙을 새긴 존재였다.

1984년 여름, 바르셀로나에서 좌절을 맛본 한 천재가 모든 사람이 미쳤다고 말하는 선택을 했다. 나폴리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때 사람들은 웃었고 몇몇은 그의 커리어가 끝났다고 했지만, 그 순간부터 신화가 시작되었다. 7월 5일 산 파올로에는 공 몇 번 튀기는 그를 보려고 수만 명이 모였다.

나폴리는 당시 단 한 번도 세리에 A에서 우승한 적이 없었다. 이탈리아 축구의 주류는 늘 북부였고, 남부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조롱받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마라도나는 그 도시의 감정을 전부 품었다. 그는 공을 차지 않았다. 도시를 움직였다. 그의 드리블은 통로였고, 그의 패스는 혁명이었고, 그의 골은 해방이었다.

165cm의 몸이 그 모든 것의 출발이다. 무게중심이 낮아서 걸려도 넘어지지 않았고, 넘어지면서도 공을 내보냈다. 왼발 하나로 드리블과 패스와 슛을 다 했는데, 수비수는 그 발이 무엇을 할지 마지막까지 알 수 없었다. 벽 바로 뒤에서 차는 프리킥이 골문 구석으로 떨어졌고, 세 명이 달라붙으면 비어 버린 동료에게 공이 갔다. 혼자 다 하는 선수로 기억되지만 실은 동료를 가장 편하게 만든 선수다.

첫 시즌의 나폴리는 8위였다. 두 번째 시즌이 끝난 여름 그는 멕시코에서 월드컵을 들고 돌아왔다. 세 번째 시즌에 그것이 왔다. 1987년 5월 10일 나폴리는 구단의 첫 스쿠데토를 들었고 그해 코파 이탈리아까지 가져갔다. 이듬해 그는 15골로 세리에 A 득점왕이 됐다. 그런데 그해의 스쿠데토는 놓쳤다. 줄곧 앞서가던 나폴리는 1988년 5월 1일 산 파올로에서 아리고 사키(Arrigo Sacchi; 이탈리아 감독, 1946-)의 AC 밀란에 2-3으로 졌고, 밀란이 우승을 가져갔다. 1989년에는 UEFA컵을 들었고, 1990년에는 그 밀란을 따돌리고 두 번째 스쿠데토를, 가을에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들었다. 일곱 시즌에 259경기 115골. 세리에 A만 세면 188경기 81골이다. 그 115골은 스물여섯 해 동안 구단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그는 스캔들과 마약, 퇴장과 격정으로 얼룩진 선수였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신적 영감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1991년 봄 도핑 검사에 걸려 출전 정지를 받았고 그 길로 이탈리아를 떠났다. 마지막 경기인 3월 24일 삼프도리아전에서도 그는 골을 넣었다. 그가 없는 나폴리는 다시 작은 도시였고, 그가 있는 나폴리는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인간적이었고, 그렇기에 신보다 더 깊이 믿을 수 있었다.

이 도시가 그를 얼마나 제 사람으로 여겼는지는 1990년 7월 3일에 드러났다. 이탈리아 월드컵 준결승 이탈리아 대 아르헨티나가 하필 산 파올로에서 열렸다. 나라의 대표팀과 도시의 신이 한 경기장에서 맞붙은 밤이고, 나폴리의 관중석은 그날 한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아르헨티나가 승부차기로 이겼다.

구단은 2000년에 10번을 영원히 비워 뒀다. 2020년 11월 25일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나폴리는 열흘이 안 돼 산 파올로의 이름을 스타디오 디에고 아르만도 마라도나로 바꿨다. 디에고. 디에고. 디에고. 그 이름은 지금도 나폴리의 벽마다 적혀 있고, 그가 걷던 거리마다 기도처럼 남아 있다.

아파트 두 동의 옆벽을 가득 채운 얼굴 벽화. 오른쪽이 수염 난 마라도나다 베수비오산을 바라보는 마라도나와 SSC Napoli Unica Fede 글자가 그려진 건물 벽화 골목 모퉁이 벽에 붙은 마라도나의 얼굴 그림 나폴리 셔츠를 입은 마라도나의 전신 벽화와 그 아래 깃발과 목도리가 쌓인 광장
마라도나를 품은 도시

참고로 AC 밀란 아리고 사키 감독의 전술, 나아가 세계 축구 전술이 주제프 과르디올라와 위르겐 클로프 세대까지 흘러오며 발전한 데에는 1980년대 마라도나의 활약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놓여 있다. 애당초 당시 세리에 A는 ‘마라도나 막기’ 프로젝트 하나로 수많은 인재들이 울고 웃었으니 말이다. 한 사람을 지역으로 가두는 법을 리그 전체가 궁리했고, 그 궁리가 압박과 간격이라는 말로 정리돼 다음 세대에 넘어갔다. 1988년 5월 산 파올로에서 나폴리를 꺾고 우승을 가져간 밀란이 그 궁리의 첫 답이었다.

8. 마레크 함시크 - 공격형 미드필더

마레크 함시크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슬로바키아 대표 기록은 그 뒤 138경기 26골로 늘었다.

토티에 가장 가까운 푸른 사령관. 마레키아로(Marekiaro).

마라도나가 남긴 영광은 너무 거대해서, 그 이후 나폴리는 줄곧 그 그림자 아래에 머물렀다. 그 어둠 속에서, 모두가 떠나가던 시절에도 단 한 사람, 푸른 17번 유니폼을 입고 묵묵히 뛰며 SSC 나폴리 축구 역사상 역대 최다 출전 기록자로 이름을 마킹한 그 이름. 마레크 함시크(Marek Hamšík; 슬로바키아 미드필더, 1987-).

구단이 세리에 A로 돌아온 2007년 여름에 브레시아에서 왔다. 스무 살이 되기 직전이었다. 2010년 3월에는 스물두 살 229일의 나이로 완장을 차고 나가 구단 역사상 가장 어린 주장이 됐는데, 그가 깬 것이 율리아노의 기록이다. 별명 마레키아로는 그의 이름에 나폴리 포실리포 언덕 아래의 바닷가 마을 마레키아로를 겹친 말장난이다. 이 도시가 슬로바키아 사람의 이름을 제 지명으로 바꿔 불렀다. 닭 볏처럼 세운 머리가 열두 해 동안 그의 표지였다.

그는 빠르지도, 강하지도 않았지만 한 번도 나폴리의 리듬을 놓친 적이 없었고, 볼을 잡고 시야를 열면 그라운드 전체가 함시크의 지도처럼 보였다. 가운데 미드필더로도 공격수 바로 뒤로도 섰는데 어디서든 하는 일은 같았다. 공을 한두 번 만지고 내준 다음, 수비수가 공을 보는 사이에 벌칙 구역으로 들어갔다. 늦게 도착하는 사람을 수비는 놓친다. 두 발을 다 썼고, 모서리에서 감아 넣는 중거리 슛이 있었다. 미드필더가 121골을 넣은 방법이 그것이다. 파벨 네드베트(Pavel Nedvěd; 체코 미드필더, 1972-)는 자기와 가장 닮은 선수로 그를 꼽았다.

감독이 여러 번 바뀌는 동안 그는 자리를 옮겨 가며 계속 뛰었다. 마차리의 스리백에서는 에딘손 카바니(Edinson Cavani) 뒤에서 에세키엘 라베시(Ezequiel Lavezzi)와 나란히 섰고, 그 셋은 2011-12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맨체스터 시티가 든 조를 빠져나와 16강 1차전에서 첼시를 3-1로 눌렀다. 마우리치오 사리(Maurizio Sarri; 이탈리아 감독, 1959-)의 4-3-3에서는 왼쪽 안쪽 미드필더로 내려와 인시녜와 짧은 패스를 주고받았다. 그 팀은 2017-18시즌 승점 91점을 쌓고도 2위를 했다. 나폴리가 스쿠데토 없이 가 본 가장 높은 숫자이고, 그 팀의 주장이 그였다.

2007년부터 2019년까지 12년 동안 세리에 A에서 가장 많은 출장을 기록한 미드필더 중 한 명이었고, 이탈리아어보다 나폴리 사투리를 더 잘 말했던 외국인 주장이기도 하였다. 2011-12시즌과 2013-14시즌에 걸쳐 코파 이탈리아 우승 2회는 물론 네 차례의 세리에 A 준우승을 선물하면서 유벤투스-로마-나폴리라는 삼대장 전성시대를 지탱한 미드필더다. 2012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는 그 시즌 리그를 한 번도 지지 않고 우승한 유벤투스를 상대로 두 번째 골을 넣었다. 유벤투스가 그해 이탈리아 안에서 진 경기는 그 한 번이다.

숫자는 몇 개만 적는다. 세리에 A 408경기에 정확히 100골을 넣었다. 슬로바키아 대표로는 138경기 26골인데, 출전과 득점 모두 그 나라의 기록이다. 520경기는 브루스콜로티의 511경기를 넘은 구단 최다 출전 기록이다. 121골은 2017년 12월에 마라도나의 115골을 넘은 숫자이고, 지금은 메르턴스와 인시녜 다음인 3위다. 2019년 2월 삼프도리아전을 끝으로 그는 중국으로 떠났다. 열두 해 동안 더 큰 구단의 부름이 없지 않았고 그는 가지 않았다. 토티에 가장 가깝다는 말은 거기서 나온다.

9. 로렌초 인시녜 - 레프트 윙

로렌초 인시녜 레프트 윙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그가 나폴리에서 든 코파 이탈리아는 2013-14시즌과 2019-20시즌의 두 번이다. 2011-12시즌에는 페스카라에 임대 가 있었다.

눈물로 트로피를 들어 올린 작은 거인.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

단순히 2010년대 최고의 윙어 중 한 명이 아닌, 나폴리의 감정선을 그대로 따라 움직인 21세기 레전드 중의 레전드. 로렌초 인시녜(Lorenzo Insigne; 이탈리아 공격수, 1991-)는 나폴리 토박이다.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체구를 가진 아이가 마라도나의 유니폼을 바라보며 꿈을 꿨고, 결국 그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 위에서 도시 전체를 지휘했다.

163cm다. 구단 유소년에서 자랐으나 1군은 그를 바로 쓰지 않았고, 3부의 카베세와 포자, 2부의 페스카라로 내보냈다. 포자와 페스카라에서 그를 가르친 사람이 즈데네크 제만(Zdeněk Zeman; 체코 출신 감독, 1947-)이다. AS 로마 편에서 스무 살의 토티를 앞줄 왼쪽에 세웠던 그 감독이다. 제만의 4-3-3이 그에게 왼쪽에서 안으로 드는 길을 가르쳤다. 두 시즌에 37골을 넣고 돌아온 2012년부터 열 해 동안 그는 나폴리의 왼쪽이었다.

그는 속도보다 감각, 힘보다 공간, 기술보다 감정으로 경기를 풀어 갔다. 오른발잡이가 왼쪽에 서면 할 일은 하나로 좁혀지는데, 안으로 한 번 접고 먼 쪽 골대를 향해 감는 것이다. 수비수도 골키퍼도 다 아는 그 한 가지를 그는 열 해 동안 넣었고, 나폴리 사람들은 그 오른발 감아 차기를 티라지로라 불렀다. 그 공은 나폴리 팬들의 심장을 향한 편지였고, 한 도시의 슬픔과 희망이 공처럼 감겼던 순간이었다.

대다수의 나폴리 팬들은 함시크-카바니-라베시가 첼시의 숨통을 조이던 삼지창 시대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 시대를 조용히 뛰어넘은 트리오가 있다면 로렌초 인시녜-드리스 메르턴스-호세 마리아 카예혼(José María Callejón) 삼총사이다. 키 작은 셋이 짧은 패스로 수비를 한쪽에 모아 놓고 반대편으로 넘기는 축구였다. 왼쪽의 인시녜가 대각선으로 띄우면 오른쪽 끝에서 카예혼이 수비 뒤로 들어왔다. 같은 장면이 몇 해 동안 되풀이됐고 리그는 끝내 막는 법을 찾지 못했다. 사리의 나폴리가 유럽에서 가장 보기 좋은 축구를 한다는 말을 듣던 때다.

2014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는 혼자 두 골을 넣어 트로피를 들었다. 2019년부터 완장을 찼고, 2020년에는 주장으로 코파 이탈리아를 다시 들었다. 전염병으로 관중석이 텅 빈 로마의 밤이었다. 나폴리에서 난 아이가 주장으로 트로피를 드는 장면을 경기장에서 본 나폴리 사람은 없었다. 이듬해 여름에는 이탈리아의 10번으로 UEFA 유로 2020을 들었는데, 8강 벨기에전의 골이 바로 그 감아 차기였다.

마지막 골은 2022년 5월 15일 제노아전의 페널티킥이다. 나폴리에서의 122번째 골로, 그는 그 골로 함시크를 넘어 구단 역대 득점 2위가 됐다. 그날이 그의 마지막 홈 경기였고 그는 관중 앞에서 울었다. 나폴리에서 434경기를 뛰었고, 세리에 A만 세면 336경기 96골이며, 이탈리아 대표로는 54경기 10골을 남겼다. 스쿠데토는 끝내 없었는데, 그가 떠난 바로 다음 시즌에 그것이 왔다. 그는 잊힐 수 없고, 지워질 수는 더욱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나폴리에 대해 너무나도 진심이었고, 너무 아름답게 머물렀기 때문이다.

10. 드리스 메르턴스 - 세컨드 스트라이커

드리스 메르턴스 세컨드 스트라이커 상세 정보 디자인

역대 최다 득점자. 치로(Ciro).

SSC 나폴리 역대 최다 득점자다. 397경기 148골. 인시녜, 카예혼과 함께 매지컬 트리오를 이뤘고, 총알 탄 사나이라고 불리던 존재이며, 벨기에 축구 역사상 재능이 가장 뛰어났던 공격수다.

필자는 드리스 메르턴스(Dries Mertens; 벨기에 공격수, 1987-)가 벨기에 축구 역사상 가장 기술적으로 정제된 공격수가 아니었을까 평가한다. RSC 안데를레흐트의 폴 판힘스트(Paul Van Himst; 벨기에 공격수, 1943-) 시대부터 클뤼프 브뤼허 KV의 얀 쾰레만스(Jan Ceulemans; 벨기에 미드필더, 1957-), 첼시 FC의 에덴 아자르 세대까지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처음에는 빠르고 민첩한 교체용 윙어 정도로 평가되던 그는 시즌을 거듭할수록 레전드로, 기록으로, 그리고 영원으로 본인의 이름을 재정의했다. 어릴 때부터 작다는 말을 들었다. 안데를레흐트와 헨트의 유소년이 그 까닭으로 그를 내보냈고, 그는 네덜란드 2부 리그까지 내려가 다시 올라왔다. 위트레흐트와 PSV 에인트호번을 거쳐 나폴리에 온 것이 스물여섯이던 2013년이다. 그 뒤 세 시즌 동안 그는 인시녜와 왼쪽 자리 하나를 나눠 쓰는 선수였다. 후반에 들어와 지친 수비를 흔드는 일이 그의 몫이었고, 그 몫을 너무 잘해서 오히려 선발이 되지 못했다.

특히 2016년 마우리치오 사리 감독 아래에서 중앙 스트라이커로 전환했을 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기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골. 골. 그리고 또 골. 그해 여름 이과인(Gonzalo Higuaín)이 유벤투스로 갔고 가을에 대신 온 아르카디우시 밀리크(Arkadiusz Milik; 폴란드 공격수, 1994-)가 무릎을 다쳤다. 사리는 남은 정통 공격수 대신 팀에서 가장 작은 축에 드는 윙어를 맨 앞에 세웠다. 12월 11일 칼리아리전에서 세 골, 일주일 뒤 토리노전에서 네 골이 나왔고, 그 시즌 그는 세리에 A에서만 28골을 넣었다.

그는 파워보다 타이밍으로, 피지컬보다 머리로, 경기를 읽고, 공간을 찢으며, 세리에 A 전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센터백과 몸을 맞대면 지니까 맞대지 않았다. 수비 라인 앞으로 내려와 공을 받고, 돌아서고, 센터백이 따라 나온 자리로 다시 뛰어들었다. 골키퍼가 한 걸음 나와 있으면 넘겼고, 붙어 있으면 낮게 깔았다. 두 발 어느 쪽으로든 그랬다. 가짜 9번이라는 말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 맞아떨어진 선수가 그다. 세 시즌을 후보로 보낸 스물아홉의 윙어가 자리 하나를 옮기고 리그 최고의 골잡이가 됐다.

드리스 메르턴스, 로렌초 인시녜 바로 뒤에는 마리우 후이

2020년 2월 25일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바르셀로나전의 골이 나폴리에서의 121번째였다. 함시크와 같은 숫자다. 넉 달 뒤 코파 이탈리아 준결승에서 하나를 더 넣어 구단 역대 최다 득점자가 됐고, 며칠 뒤 그 트로피를 들었다. 기록은 148골에서 멈췄다. 벨기에 대표로는 109경기 21골을 남겼고 월드컵에 세 번 나갔다. 그 가운데 세리에 A에서 넣은 것이 113골이다. 마라도나가 나폴리에서 넣은 리그 골이 81골이니, 교체용 윙어로 불리던 선수가 신의 숫자를 서른 골 넘게 앞질렀다. 그가 든 것은 코파 이탈리아 둘과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하나다. 그도 스쿠데토를 한 해 앞두고 떠났다.

인시녜와 함께 웃으며 손을 잡던 장면, 경기 후 카메라를 향해 윙크하던 모습. 구단 최다 득점이라는 기록보다 그 웃음이 먼저 떠오른다. 그는 나폴리의 햇살이었다. 나폴리 사람들은 그를 이 도시의 흔한 남자 이름인 치로라고 불렀다. 그는 2022년에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치로 로메오라 지었고, 2025년 6월 나폴리시는 그에게 명예 시민증을 줬다. 벨기에 뢰번에서 난 사람이 그렇게 나폴리 사람이 됐다.

11. 카레카 - 센터 포워드

카레카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나폴리 최전성기 마지막 퍼즐.

1987년, 나폴리 팬들은 그해 여름을 잊지 못한다. 마라도나라는 신 옆에 또 다른 예언자, 브라질의 역대 최고의 슈퍼스타 중 한 명인 카레카(Antônio de Oliveira Filho; 브라질 공격수, 1960-)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첫 스쿠데토를 든 바로 그 여름이다.

카레카는 이미 브라질 대표팀의 핵심 공격수였고, 기술, 침착함, 위치 선정, 결정력 모든 면에서 완성된 선수였다. 카레카는 본명이 아니다. 어릴 적 좋아하던 광대 카레키냐에게서 온 이름이다. 상파울루주 아라라콰라에서 태어나 열일곱에 과라니의 브라질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1982년 월드컵은 대회 직전에 다쳐 나가지 못했다. 네 해를 기다린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다섯 골을 넣어 득점 2위에 올랐고, 상파울루에서 브라질 리그를 한 번 더 우승하고 온 길이었다. 하지만 그가 나폴리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디에고와 함께 역사에 남는 팀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카레카의 움직임은 간결했고, 그의 골은 예술이었다. 그는 힘으로 밀지 않았고, 각도로 찔렀으며, 그라운드를 화폭 삼아 마라도나와 함께 나폴리의 서사시를 그려 냈다. 빠르고 힘이 있었는데 그 둘을 한꺼번에 쓰는 일은 드물었다. 수비수 어깨 뒤에 서 있다가 마라도나가 고개를 드는 순간에 한 걸음 먼저 움직였고, 공이 발에 닿을 때는 이미 골키퍼와 둘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벌칙 구역 밖에서 때릴 줄 알았다. 아래의 골이 그런 골이다. 왼발과 오른발, 가까운 쪽과 먼 쪽을 가리지 않았다. 마라도나의 패스가 가장 좋은 결말을 얻은 곳이 그의 발이다. 첫 시즌의 나폴리는 마라도나와 브루노 조르다노(Bruno Giordano; 이탈리아 공격수, 1956-)와 카레카, 세 사람의 이름 첫 글자를 딴 마지카(Ma-Gi-Ca)라는 공격진으로 불렸다. 마법이라는 뜻이다. 그 마법은 그해 스쿠데토를 놓쳤고, 이듬해 유럽에서 값을 했다.

그 결말이 가장 많았던 해가 1988-89시즌이다. UEFA컵 준결승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1차전에 한 골, 뮌헨 원정에서 두 골을 넣었다. 결승에서는 1차전의 역전골과 2차전의 골을 넣었다. 2차전 날 그는 열이 나서 뛸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던 몸이었다. 이듬해에는 두 번째 스쿠데토를 들었고, 1990년 9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는 유벤투스를 5-1로 이긴 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다.

SSC 나폴리 통산 221경기 96골. 1989-90시즌 세리에 A 우승, 1988-89시즌 UEFA컵 우승,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 60경기 29골. 1980년대 후반 유럽 최강의 공격진이 그와 함께 섰다.

마라도나가 혼자 만든 마법이라면, 카레카는 그 마법을 현실로 바꾸는 손이었다. 그는 브라질 축구 특유의 감각으로 나폴리의 공격을 아름답고 치명적인 것으로 변모시켰다.

카레카 미친 중거리 골

그가 득점할 때마다 도시는 감탄했고, 마라도나는 박수를 쳤다. 브라질 대표로는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두 골을 넣었다. 두 번의 월드컵에 일곱 골이다. 마라도나가 떠난 뒤에도 그는 두 시즌을 더 남아 젊은 잔프랑코 촐라 옆에서 뛰었고, 1993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세리에 A 164경기에 73골을 남겼다. 신이 떠난 팀에 남은 예언자였다.

두 사람이 적으로 만난 날이 한 번 있다. 1990년 6월 24일 토리노, 이탈리아 월드컵 16강 브라질 대 아르헨티나다. 마라도나가 브라질 수비 넷 사이를 뚫고 내준 공 하나가 결승골이 됐고 카레카의 브라질이 떨어졌다. 나폴리의 10번과 9번이 그 여름에는 서로의 길을 막았다.

신이 떠난 자리에 남은 사람들

SSC 나폴리 역대 베스트 11 표제 3-4-3 대형으로 배치한 SSC 나폴리 역대 베스트 11 SSC 나폴리 역대 베스트 11 서브 명단 15인 편집물 SSC 나폴리 역대 베스트 11 추가 명단 27인 편집물
표제, 열한 명의 대형, 서브 명단 15인, 추가 명단 27인. 창단 첫해의 골잡이 아틸라 살루스트로부터 2025년 우승의 스콧 맥토미니와 로멜루 루카쿠까지 쉰세 명이 한 흐름에 들어간다.

이 열한 명이 나폴리에서 보낸 해를 더하면 100년 남짓이다. 구단의 나이와 같다. 다섯 시즌의 초프와 여섯 시즌의 데나폴리와 카레카가 가장 짧고, 열여섯 시즌의 율리아노와 브루스콜로티가 가장 길다. 세 시즌에 104골을 넣은 카바니와 한 시즌에 36골을 넣은 이과인은 서브 명단에 있다. 골의 수로는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 두 사람이다.

쉰세 명을 시대순으로 세우면 창단 첫해의 살루스트로(Attila Sallustro)에서 100주년의 디로렌초까지 이어진다. 1950년대에는 옙손(Hasse Jeppson)과 페사올라(Bruno Pesaola)와 비니시우가, 1960년대에는 시보리(Omar Sívori)와 아우타피니와 초프가, 1970년대에는 사볼디(Giuseppe Savoldi)와 브루스콜로티가 있다. 10년 단위로 끊으면 빈 칸은 1940년대 하나다. 전쟁으로 리그가 멈췄고 구단이 두 번 강등된 10년이다.

이 열한 명을 시대로 나누면 셋이다. 마라도나 앞의 나폴리를 지킨 초프와 율리아노와 브루스콜로티, 마라도나와 함께 든 페라라와 데나폴리와 카레카, 그리고 마라도나가 떠난 뒤 긴 그림자 속에서 다시 일어선 함시크와 인시녜와 메르턴스와 디로렌초다. 가운데에 한 사람이 있다. 이 구단의 역사는 그 한 사람의 앞과 뒤로 읽힌다.

앞의 셋에게는 스쿠데토가 없거나 늦게 왔다. 초프는 나폴리에서 아무것도 들지 못했고, 율리아노는 코파 이탈리아 하나를 들었으며, 브루스콜로티는 서른다섯에야 스쿠데토를 만졌다. 뒤의 넷 가운데 셋도 스쿠데토 없이 떠났다. 함시크가 떠난 지 네 해, 인시녜와 메르턴스가 떠난 바로 다음 시즌에 세 번째 스쿠데토가 왔다. 구단 최다 출전자와 역대 득점 1위와 2위가 그 우승에 없다. 가장 가까웠던 해는 2017-18시즌이다. 4월의 유벤투스 원정에서 쿨리발리(Kalidou Koulibaly)의 90분 헤더로 이겨 1점 차까지 따라붙었고, 바로 다음 경기에서 무너졌다. 승점 91점으로 2위를 한 그 팀의 주장이 함시크, 왼쪽이 인시녜, 9번이 메르턴스였다. 나폴리가 걸어온 길이 고통과 영광 사이였다는 말은 이 대목에서 가장 아프다.

표지에 세운 세 사람은 열한 명에 들지 못한 후보다. 2022-23시즌의 최우수 선수 크바라츠헬리아(Khvicha Kvaratskhelia), 득점왕 오시멘(Victor Osimhen), 최우수 수비수 김민재. 세 사람은 나폴리에 길게 머물지 않았다. 김민재는 한 시즌을 뛰었다. 여덟 해를 지킨 쿨리발리가 떠난 자리에 와서 세리에 A 35경기에 나섰고, 주장 디로렌초와 라흐마니(Amir Rrahmani) 곁에서 리그에서 가장 적게 내준 수비를 세웠다. 그해 리그는 그를 최우수 수비수로 뽑았다. 그 한 시즌이 서른세 해의 기다림을 끝냈으니, 나폴리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잊을 일은 없다. 세리에 A를 우승한 한국 선수는 그가 처음이다.

감독 자리는 비워 둔다. 이 열한 명을 실제로 지도한 사람만 꼽아도 페사올라와 비니시우, 오타비오 비앙키(Ottavio Bianchi; 이탈리아 감독, 1943-)와 알베르토 비곤(Alberto Bigon; 이탈리아 감독, 1947-), 마차리와 사리, 스팔레티와 콘테다. 서브 명단의 페사올라와 추가 명단의 비니시우는 선수로 이름을 올렸는데, 두 사람 다 나폴리를 2위까지 올려놓은 감독이기도 하다. 선수로 사랑받고 감독으로 다시 온 사람이 둘이나 후보에 있다는 것도 이 구단의 버릇이다.

나폴리는 언제나 고통과 영광, 광기와 순정 사이를 걸어왔다.푸른 셔츠가 100년 동안 불러 온 쉰세 개의 이름.

열한 명 뒤에 선 마흔둘

서브 명단 열다섯과 추가 명단 스물일곱을 글자로 다시 적되 포지션은 그림에 적은 대로 두었다.

서브 명단 15인

  • 루차노 카스텔리니Luciano Castellini · 골키퍼

    1978년부터 일곱 시즌 골문을 지켰다. 몸을 던지는 모습 때문에 재규어라 불렸다.

  • 모레노 페라리오Moreno Ferrario · 센터백

    1977년부터 열한 해를 뛰었다. 1987년 첫 스쿠데토의 센터백이다.

  • 칼리두 쿨리발리Kalidou Koulibaly · 센터백

    2014년부터 여덟 시즌을 뛰었다. 2018년 4월 유벤투스 원정의 90분 헤더가 그의 것이다.

  • 아미르 라흐마니Amir Rrahmani · 센터백

    2020년에 와서 2023년과 2025년 스쿠데토의 센터백이 됐다. 2026년 봄 나폴리에서 200경기를 채웠다.

  • 뤼트 크롤Ruud Krol · 레프트백

    유러피언컵을 세 번 든 아약스의 왼쪽 풀백이 1980년 나폴리에 와서 네 시즌 동안 리베로로 뛰었다. 데려온 사람이 단장 율리아노다.

  • 크리스티안 마조Christian Maggio · 라이트백

    2008년부터 열 해를 뛴 오른쪽 윙백이다. 2012년과 2014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 스타니슬라프 로보트카Stanislav Lobotka · 수비형 미드필더

    2020년에 왔다. 2023년과 2025년 두 번의 스쿠데토에서 중원의 바닥을 맡았다.

  • 앙드레프랑크 잠보 앙기사André-Frank Zambo Anguissa · 중앙 미드필더

    2021년에 왔다. 두 번의 스쿠데토를 로보트카 곁에서 들었다.

  • 브루노 페사올라Bruno Pesaola · 레프트 윙

    아르헨티나에서 온 왼쪽 날개로 1952년부터 여덟 해를 뛰었다. 감독으로는 1962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고 1968년 2위를 이끌었다.

  • 에세키엘 라베시Ezequiel Lavezzi · 레프트 윙

    엘 포초라 불린 아르헨티나 공격수로 2007년부터 다섯 시즌을 뛰었다. 함시크, 카바니와 함께 삼지창이라 불렸다.

  • 흐비차 크바라츠헬리아Khvicha Kvaratskhelia · 레프트 윙

    2022년에 와서 첫 시즌에 세리에 A 최우수 선수가 됐다. 나폴리 사람들은 그를 크바라도나라 불렀다. 표지의 왼쪽에 선 사람이다.

  • 카네Cané · 라이트 윙

    브라질에서 온 날개로 1962년부터 두 번에 걸쳐 열 해쯤 뛰었다.

  • 아틸라 살루스트로Attila Sallustro · 센터 포워드

    창단 첫해부터 열한 시즌을 뛴 구단의 첫 스타다.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태어났다.

  • 에딘손 카바니Edinson Cavani · 센터 포워드

    2010년부터 세 시즌 138경기에 104골을 넣었다. 2012-13시즌 세리에 A 득점왕이다.

  • 곤살로 이과인Gonzalo Higuaín · 센터 포워드

    2013년부터 세 시즌을 뛰었다. 2015-16시즌 세리에 A에서 36골을 넣었고, 그해 여름 유벤투스로 갔다.

추가 명단 27인

  • 오타비오 부가티Ottavio Bugatti · 골키퍼

    1953년부터 여덟 해 동안 나폴리의 골문을 지켰다.

  • 클라우디오 가렐라Claudio Garella · 골키퍼

    1987년 첫 스쿠데토의 골키퍼다. 손보다 발로 더 많이 막는다는 말을 들었다.

  • 모르간 데산치스Morgan De Sanctis · 골키퍼

    2009년부터 네 시즌을 뛰었다. 2012년 코파 이탈리아의 골키퍼다.

  • 알렉스 메레트Alex Meret · 골키퍼

    2018년에 왔다. 2020년 코파 이탈리아와 두 번의 스쿠데토를 들었다.

  • 알레산드로 레니카Alessandro Renica · 센터백

    마라도나 시대의 리베로다. 1989년 UEFA컵 8강 유벤투스전 연장 119분의 골이 그의 것이다.

  • 잔카를로 코라디니Giancarlo Corradini · 센터백

    1988년부터 여섯 해를 뛰었다. UEFA컵과 두 번째 스쿠데토를 들었다.

  • 파비오 칸나바로Fabio Cannavaro · 센터백

    나폴리에서 나고 구단 유소년에서 자라 1995년까지 뛰었다. 2006년 발롱도르를 받았다.

  • 파올로 칸나바로Paolo Cannavaro · 센터백

    파비오의 동생이다. 2006년부터 여덟 해를 뛰며 완장을 찼고 2012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 김민재Kim Min-jae · 센터백

    2022년 페네르바흐체에서 와서 쿨리발리가 떠난 자리를 맡았다. 한 시즌에 세 번째 스쿠데토를 들고 세리에 A 최우수 수비수로 뽑혔다. 표지의 오른쪽에 선 사람이다. 2023년 7월 18일 구단은 그가 바이에른 뮌헨으로 떠난다고 알렸다.[3]

  • 조반니 프란치니Giovanni Francini · 레프트백

    1987년부터 일곱 해를 뛰었다. UEFA컵과 두 번째 스쿠데토의 왼쪽이다.

  • 알레망Alemão · 수비형 미드필더

    1988년에 온 브라질 미드필더다. 1989년 UEFA컵 결승 2차전에서 첫 골을 넣었다.

  • 조르지뉴Jorginho · 수비형 미드필더

    2014년 1월에 와서 그해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사리 시대 패스의 출발점이다.

  • 살바토레 바니Salvatore Bagni · 중앙 미드필더

    1984년 마라도나와 같은 여름에 인테르에서 왔다. 1987년 첫 스쿠데토의 중원에서 데나폴리와 짝을 이뤘다.

  • 알랑Allan · 중앙 미드필더

    2015년부터 다섯 시즌을 뛰었다. 2020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 피오트르 지엘린스키Piotr Zieliński · 중앙 미드필더

    2016년부터 여덟 시즌을 뛰었다. 2020년 코파 이탈리아와 2023년 스쿠데토를 들었다.

  • 스콧 맥토미니Scott McTominay · 중앙 미드필더

    2024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와서 첫 시즌에 세리에 A 최우수 선수가 됐다. 네 번째 스쿠데토를 정한 날의 골이 그의 것이다.

  • 호세 카예혼José Callejón · 라이트 윙

    2013년부터 일곱 시즌을 뛰었다. 인시녜의 대각선 공을 받던 오른쪽 끝이다.

  • 마테오 폴리타노Matteo Politano · 라이트 윙

    2020년에 왔다. 두 번의 스쿠데토에서 오른쪽을 맡았다.

  • 잔프랑코 촐라Gianfranco Zola · 세컨드 스트라이커

    사르데냐에서 온 작은 10번이다. 1989년에 와서 마라도나 곁에서 배웠고, 두 번째 스쿠데토를 들고 1993년까지 뛰었다.

  • 하세 옙손Hasse Jeppson · 센터 포워드

    1952년 당시로서는 유례없는 1억 500만 리라에 온 스웨덴 공격수다.

  • 루이스 비니시우Luís Vinício · 센터 포워드

    1955년부터 다섯 시즌을 뛴 브라질 공격수다. 감독으로 1974-75시즌 2위를 이끌었다.

  • 오마르 시보리Omar Sívori · 센터 포워드

    1965년 유벤투스에서 와서 네 시즌을 뛰었다. 1957년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다.

  • 주제 아우타피니José Altafini · 센터 포워드

    시보리와 같은 여름에 AC 밀란에서 왔다. 1968년 2위 팀의 공격수다.

  • 주세페 사볼디Giuseppe Savoldi · 센터 포워드

    1975년 20억 리라에 와서 미스터 20억이라 불렸다. 1976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두 골을 넣었다.

  • 안드레아 카르네발레Andrea Carnevale · 센터 포워드

    1986년부터 네 시즌을 뛰었다. 두 번의 스쿠데토와 UEFA컵에 모두 있었다.

  • 빅터 오시멘Victor Osimhen · 센터 포워드

    2022-23시즌 26골로 세리에 A 득점왕이 됐다. 아프리카 선수로는 처음이다. 표지의 가운데에 선 사람이다.

  • 로멜루 루카쿠Romelu Lukaku · 센터 포워드

    2024년에 콘테를 따라와서 네 번째 스쿠데토의 9번이 됐다.

기록을 확인한 곳

  1. 구단이 적은 구단사와 트로피 — SSC Napoli 「La Storia」, 「La SSC Napoli apre la stagione del Centenario」(2026-07-01). 창단일과 구단 이름의 내력, 트로피의 종류와 해.
  2. 구단이 적은 율리아노 — SSC Napoli 「Il cordoglio del Napoli per la scomparsa di Antonio Juliano, indimenticabile capitano azzurro」(2023-12-13). 열일곱 해, 1962년과 1976년의 코파 이탈리아, 대표팀 경력, 단장 시절의 마라도나 영입.
  3. 구단이 알린 김민재의 이적 — SSC Napoli 「Kim ceduto al Bayern Monaco a titolo definitivo」(2023-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