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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라치오 문장

SS 라치오

Società Sportiva Lazio Società per Azioni
SOCIETÀ SPORTIVA LAZIO · LE AQUILE 1900-2026

스타디오 올림피코 · 세리에 A 우승 2회 · 코파 이탈리아 7회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회

SS 라치오 역대 최고의 전설 열한 명과 후보 마흔다섯, 쉰여섯 개의 이름을 필자의 견해로 골랐다.

독수리는 침묵하지 않는다

웅장한 제국의 기억을 상징하는 AS 로마, 이들에게 저항하는 더욱 먼저 창설된 구단이 있다면 푸른 창공을 찢고 날아오른 독수리, SS 라치오이다. 같은 도시의 붉고 노란 쪽은 AS 로마 역대 베스트 11에서 먼저 다뤘다.

1900년 1월 9일 창단. 그날 로마 리베르타 광장의 벤치에 아홉 청년이 앉아 있었다. 앞장선 사람은 베르살리에리 부대의 부사관 루이지 비자렐리(Luigi Bigiarelli; 이탈리아 육상 선수·라치오 창립자, 1875-1908)이고, 곁에 그의 동생과 친구 일곱이 있었다. 처음 이름은 소시에타 포디스티카 라치오, 곧 라치오 달리기 협회다. 소속이 있는 팀만 나갈 수 있던 달리기 대회에 나가려고 만든 모임이었다.[1] 축구는 이듬해에 들어왔다. 군인 출신 청년이 앞장서 라티움 지방의 자긍심을 품고 만든 팀. 흰색과 하늘색은 올림픽이 태어난 그리스의 색에서 따왔다고 전하고, 로마 군단의 독수리는 1905년에 처음 문장에 올랐다. 축구 밖의 종목까지 아우른 종합 스포츠 구단이라는 뿌리는 지금도 그대로여서, 라치오의 이름 아래 예순이 넘는 종목이 굴러간다.

저항이라는 말에는 날짜가 있다. 1927년 로마의 구단들을 하나로 합쳐 북부와 겨룰 큰 구단을 만들자는 정치의 결정이 내려왔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AS 로마다. 라치오는 그 합병에 들어가지 않았다. 부회장이던 장군 조르조 바카로(Giorgio Vaccaro; 이탈리아 장군·체육 행정가, 1892-1983)가 구단의 이름과 역사를 지켜 냈고, 라치오는 수도의 첫 구단이라는 말을 지금껏 제 것으로 쓴다.

라치오는 정치적 갈등과 도시의 그림자, 무관의 시절을 가로지르는 유랑과 저항 속에서도 침묵하지 않고, 현세까지 달려왔다. 그들의 역사는 한순간에 쓰이지 않았다. 첫 트로피인 1958년의 코파 이탈리아까지 쉰여덟 해가 걸렸다. 첫 스쿠데토(scudetto; 세리에 A 우승 팀이 이듬해 가슴에 다는 작은 방패, 곧 리그 우승)는 1974년이다. 세리에 B에서 올라온 지 두 해 만에 톰마소 마에스트렐리(Tommaso Maestrelli; 이탈리아 감독, 1922-1976)의 팀이 해냈다.

1980년대는 ’강등과 생존’의 그림자였다. 승부 조작 사건에 두 번 휘말렸고, 1986-87시즌에는 승점 9점을 깎인 채 세리에 B를 시작했다. 마지막 경기의 한 골과 나폴리에서 치른 플레이오프의 한 골로 세리에 C를 면했다. 라치오 사람들은 그 시즌을 ’마이너스 9’라 부르며 우승한 해만큼 아낀다.

1990년대에는 ’세계 최강의 팀’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1992년 금융인 세르조 크라뇨티(Sergio Cragnotti; 이탈리아 금융인·라치오 회장, 1940-)가 구단을 샀고, 1998년부터 세 해 동안 트로피 일곱 개가 들어왔다. 1999년 8월 모나코의 UEFA 슈퍼컵에서는 유럽 챔피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0으로 이겼다. 알렉스 퍼거슨(Alex Ferguson; 스코틀랜드 축구 감독, 1941-)은 훗날 지도자 인생의 가장 큰 아쉬움으로 그 경기를 꼽으며, 그때는 그 라치오가 세계에서 가장 강한 팀이었다고 말했다.[1] 2000년 5월 14일, 창단 100주년의 해에 두 번째 스쿠데토가 왔고 나흘 뒤에 코파 이탈리아가 따라왔다.

2000년대 이후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2002년 크라뇨티의 회사가 쓰러지며 별들이 팔려 나갔고, 2004년 7월 클라우디오 로티토(Claudio Lotito; 이탈리아 기업인·라치오 회장, 1957-)가 파산 직전의 구단을 넘겨받았다. 그 뒤로 코파 이탈리아 셋과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Supercoppa italiana; 리그 우승 팀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 팀이 겨루는 대회) 셋이 더 왔다. 2020년대에는 기꺼이 세리에 A 왕좌의 자리까지 넘보는 지경까지 왔다. 2022-23시즌의 2위가 그 증거다.

이 명단을 처음 짠 것은 2025년 초여름이다. 그 뒤 라치오는 2025-26시즌 세리에 A를 9위로 마쳤고, 2026년 5월 13일 안방 올림피코에서 열린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 인테르에 0-2로 졌다. 6월 23일에는 젠나로 가투소(Gennaro Gattuso; 이탈리아 미드필더·감독, 1978-)가 새 감독으로 왔다. 이 글의 10번째 선수 임모빌레는 그해 8월에 선수 생활을 마쳤다. 올 시즌의 하늘색 셔츠는 유니폼관의 26/27 홈 유니폼 편에서, 두 구단이 나눠 쓰는 경기장은 축행의 올림피코 편에서 따로 다뤘다.

시뇨리의 자유, 네스타의 품격, 임모빌레의 불꽃, 네드베트의 분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아퀼레(le Aquile; 독수리들. 라치오의 선수와 팬을 부르는 말)들의 뜨거운 목소리.

선정 전술 득점왕 셋을 앞에 세운 4-3-3

대형은 4-3-3이다. 골문에 마르케자니를 세웠고, 포백은 왼쪽부터 파발리, 미하일로비치, 네스타, 네그로다. 그 앞 한가운데에 밀린코비치사비치가 서고 왼쪽에 네드베트, 오른쪽에 디아미코가 선다. 맨 앞줄은 왼쪽의 임모빌레, 가운데에서 한 걸음 내려선 시뇨리, 오른쪽의 피올라다.

4-3-3은 라치오가 가장 요란하게 입었던 옷이다. 1994년 여름 크라뇨티는 구경할 맛이 나는 축구를 원했고, 포자에서 즈데네크 제만(Zdeněk Zeman; 체코 출신 감독, 1947-)을 데려왔다. 제만은 이름값 높은 선수를 청하지 않고 제 4-3-3에 맞는 선수만 골랐다. 그 시즌 라치오는 피오렌티나에 8골, 포자에 7골을 넣으며 리그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었고 2위를 했다. 그 대형의 한가운데가 시뇨리였다. 열한 명을 놓고 보면 제만의 흔적이 더 넓다. 마르케자니, 파발리, 네그로, 네스타, 네드베트, 시뇨리가 라치오에서 그의 선수였고, 임모빌레는 2011-12시즌 페스카라에서 그의 공격수로 세리에 B 득점왕이 됐다. 열한 명 가운데 일곱이다. 그 감독이 라치오에서 든 트로피는 없다.

뒤의 다섯은 한 팀에서 통째로 가져왔다. 마르케자니와 네그로, 네스타, 미하일로비치, 파발리는 모두 2000년 스쿠데토의 선수단에 있었다. 스벤예란 에릭손(Sven-Göran Eriksson; 스웨덴 축구 감독, 1948-2024)의 포백은 가운데의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일을 했다. 네스타가 빠른 발로 뒤 공간을 지우면 미하일로비치는 그 옆에서 왼발로 공을 멀리 뿌렸다. 이 수비진에서는 가장 긴 패스가 센터백의 발에서 나온다. 양옆의 파발리와 네그로는 열두 해씩 같은 자리를 지킨 사람들이고, 구단에서 트로피를 가장 많이 든 선수이기도 하다. 둘 다 여덟 개다.

가운데 셋은 모양이 다 다르다. 네드베트는 에릭손의 팀에서 그랬듯 왼쪽에서 출발해 안으로 파고들며 양발로 때린다. 192cm의 밀린코비치사비치는 골키퍼가 길게 찬 공을 가슴으로 받아 놓는 자리이자 벌칙 구역에 가장 늦게 들어가는 머리다. 오른쪽의 디아미코는 마에스트렐리의 팀에서 11번을 달고 공격수 곁을 돌던 사람이라, 앞줄의 시뇨리가 내려오면 그 자리로 올라선다. 뛰는 사람과 받아 내는 사람과 푸는 사람이 하나씩이다.

앞줄 셋을 고른 기준은 하나다. 구단에서 골을 가장 많이 넣은 세 사람이다. 임모빌레가 207골, 피올라가 159골, 시뇨리가 127골이고, 구단 득점 순위 1위와 2위와 3위가 그대로 한 줄에 선다.[2] 셋의 골을 더하면 493골이다. 라치오는 세리에 A 득점왕, 이탈리아 말로 카포칸노니에레(capocannoniere; 세리에 A 시즌 득점 1위)를 열한 번 냈다. 그 열한 번을 시즌순으로 놓으면 아래와 같다.

라치오가 낸 카포칸노니에레 열한 번
시즌이름골그해 라치오
1936-37피올라212위
1942-43피올라219위
1973-74키날리아24우승
1978-79조르다노198위
1992-93시뇨리265위
1993-94시뇨리234위
1995-96시뇨리243위
2000-01크레스포263위
2017-18임모빌레295위
2019-20임모빌레364위
2021-22임모빌레275위

옅게 물든 여덟 줄이 이 글의 앞줄 셋이다. 물들지 않은 세 줄의 키날리아(Giorgio Chinaglia)와 조르다노(Bruno Giordano)와 크레스포(Hernán Crespo)는 후보 명단에 있다. 맨 오른쪽 칸을 따라 내려가면 이 구단의 사정이 보인다. 득점왕이 나온 열한 시즌 가운데 스쿠데토까지 간 해는 키날리아의 1973-74시즌 한 번이다. 나머지 열 번의 득점왕은 2위부터 9위 사이 어딘가에서 나왔다. 라치오는 리그에서 가장 잘 넣는 사람을 자주 가졌고, 그 골을 우승으로 바꾼 적은 드물었다.

그래서 이 앞줄에는 기묘한 사실이 하나 붙는다. 구단에서 골을 가장 많이 넣은 세 사람이 스쿠데토를 한 번도 들지 못했다. 피올라는 선수 생활 전체를 통틀어 리그 우승이 없고, 시뇨리는 라치오에서 트로피 하나 없이 떠났으며, 임모빌레가 든 것은 컵 셋이다. 스쿠데토는 뒤에 선 사람들의 것이다. 포백과 골키퍼와 네드베트, 여섯이 2000년의 방패를 달았고 디아미코가 1974년의 방패를 달았다. 앞에서 넣고 뒤에서 들었다. 이 명단은 라치오 126년의 생김새를 그대로 닮았다.

1. 루카 마르케자니 - 골키퍼

루카 마르케자니 골키퍼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디자인에 적은 구단 최다 출전 9위는 그 뒤 후배들이 넘어서며 달라졌다. 골키퍼로는 지금도 339경기가 구단 최다 출전이다. 리그 기록은 243경기다.

SS 라치오의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기를 지킨 전설적인 골키퍼.

라치오라는 클럽이 ’폭풍 같은 전방과 기적 같은 중원’으로 쓰이던 1990년대에 최후방을 지켜주던 골키퍼가 루카 마르케자니(Luca Marchegiani; 이탈리아 골키퍼, 1966-)다. 그는 세리에 A에서 최고 수준의 반사 신경을 지니고 있었고, 수많은 슈퍼세이브를 통해 팀의 자국 리그 우승과 유럽 대항전 우승, 끝내 슈퍼컵까지 선사한 인물이었다.

아드리아해의 항구 안코나에서 태어나 토리노에서 이름을 알렸고, 스물일곱이던 1993년 여름 130억 리라에 라치오로 왔다. 그때 라치오의 감독이 디노 초프(Dino Zoff; 이탈리아 골키퍼·감독, 1942-)였다. 마르케자니가 본보기로 삼던 골키퍼가 그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날부터 일곱 시즌 동안 라치오의 골문은 그의 것이었다. 감독이 초프에서 제만으로, 제만에서 에릭손으로 바뀌는 동안에도 골문의 주인은 바뀌지 않았다.

막는 방식도 초프를 닮았다. 몸을 크게 쓰는 골키퍼는 아니었다. 서 있는 자리가 정확했고, 높이 뜬 공을 나와서 잡아내는 데는 당대의 이탈리아에서 첫손에 꼽혔다. 화려하게 몸을 던지기보다 던질 일을 줄이는 쪽이어서 사람들은 그를 백작이라 불렀다. 흙이 묻지 않는 골키퍼에게 어울리는 별명이다. 수비 뒤의 넓은 공간을 나와서 지우는 일도 일찍부터 했다. 지역 방어로 수비선을 올리던 제만의 팀에서 그 버릇은 꼭 필요한 것이 됐다.

PK 앞에서도 흔들림 없었고, 공중볼에서도 신의 타이밍을 가졌던 골키퍼. 1994년 봄의 더비가 그 증거로 남아 있다. 시뇨리가 넣어 앞선 경기에서 AS 로마의 주장 주세페 잔니니(Giuseppe Giannini; 이탈리아 미드필더, 1964-)가 페널티킥을 찼고, 마르케자니가 그것을 막았다.[1] 1997-98시즌에는 745분 동안 골을 내주지 않았다. 지금도 구단 기록이다.

트로피가 쏟아지던 시절에 그는 늘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1998년 8월 토리노에서 유벤투스를 꺾고 구단의 첫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들 때는 다친 네스타 대신 완장을 차고 트로피를 받았다. 이듬해 버밍엄의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과 모나코의 UEFA 슈퍼컵에서도 골문에 섰다. 라치오가 1999-2000시즌 세리에 A에서 우승을 차지하던 순간 모두가 알레산드로 네스타와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Juan Sebastián Verón)을 외칠 때, 그 우승의 진짜 시작은 마르케자니의 잊히지 않은 선방들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쿠데토를 든 여름에 구단은 안젤로 페루치(Angelo Peruzzi)를 샀다. 서른넷의 마르케자니는 그 뒤 세 시즌을 뒤에서 받쳤고, 2003년에 키에보로 떠났다. 이탈리아 대표로는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준우승했다. 노르웨이전에서 잔루카 팔리우카(Gianluca Pagliuca; 이탈리아 골키퍼, 1966-)가 퇴장당하자 급히 장갑을 끼고 들어가 그 경기를 지켰고, 이어진 두 경기도 그가 막았다. 큰 무대의 주전이 된 적은 길지 않았다. 필자가 그를 무명의 영웅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라치오의 가장 좋은 시절을 맨 뒤에서 본 사람인데 그 시절을 말할 때 가장 늦게 불린다.

2. 알레산드로 네스타 - 센터백

알레산드로 네스타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199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의 센터백들 중 가장 완벽했고, 가장 유명한 센터백.

알레산드로 네스타(Alessandro Nesta; 이탈리아 수비수, 1976-)는 라치오라는 클럽의 혼이며, 품격이고, 정체성에 가까운 인물이다. 20세기와 21세기에 걸친 수비계의 슈퍼스타이기도 하다.

로마 남동쪽 치네치타에서 태어났다. 재능을 먼저 알아본 쪽은 AS 로마였다고 한다. 로마의 스카우트가 집으로 찾아왔으나 라치오 팬이던 아버지가 돌려보냈다. 아홉 살이던 1985년에 라치오 유소년에 들어갔고, 거기서는 미드필더와 공격수로도 뛰었다.[2] 등번호 13번은 아무도 고르지 않아 맨 끝 순서이던 그에게 돌아온 번호였다고 한다. 그는 그 번호를 끝까지 달았다.

10대 시절부터 라치오의 푸른 유니폼을 입고 자라난 그는 데르비 델라 카피탈레(Derby della Capitale; 수도 더비. SS 라치오와 AS 로마의 맞대결)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고, 서포터들의 눈빛을 이해했으며, 올림피코의 하늘빛이 무슨 색이었는지까지 이해하던 인물이었다.

1994년 3월 13일 우디네세 원정에서 초프가 그를 처음 내보냈다. 열여덟 번째 생일을 엿새 앞둔 날이다. 풀백으로 시작한 그를 제만이 가운데로 옮겼고, 에릭손의 포백에서 그 자리가 굳었다. 1998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 2차전에서는 AC 밀란을 상대로 우승을 정하는 골을 넣었다. 그해 여름 프랑스 월드컵에서 무릎을 크게 다쳤으나 겨울에 돌아왔고, 그 시즌부터 완장을 찼다. 1999년 5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이 주장으로 든 첫 트로피다. 스물셋이었다.

그의 슬라이딩 태클에는 상대가 의도를 바꾸게 만드는 예측의 기술이 담겨 있었고, 그의 움직임에는 일대일 대인 방어를 넘어 공간을 디자인하는 건축가의 그것이 담겨 있었다. 풀백에서 온 사람답게 빨랐다. 공격수와 나란히 달리다가 발을 뻗으면 몸보다 발이 먼저 공에 닿았다. 그래서 그의 태클은 유난히 깨끗했다. 넘어진 쪽은 대개 공격수였는데 반칙은 불리지 않았다. 볼 컨트롤, 탈압박, 빌드업 가담, 전술 인지 능력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으며, 그가 없던 라치오는 후방을 넘어 팀 전체의 설계도를 잃어버린 듯한 모습을 2000년대에 보이기도 했었다.

그 설계도가 사라진 날은 2002년 8월 31일이다. 이적 시장 마지막 날, 무너지는 구단의 살림을 메우려고 스물여섯의 주장이 AC 밀란으로 팔렸다. 그가 원한 이별은 아니었다. 라치오에서 남긴 것은 261경기 3골, 스쿠데토 하나와 코파 이탈리아 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둘, 유러피언 컵위너스컵과 UEFA 슈퍼컵이다.

세리에 A는 2000년부터 네 해 내리 그를 최우수 수비수로 뽑았고, 앞의 세 번은 라치오의 선수로 받았다. 2000년 발롱도르에서는 5위였다. 알레산드로 네스타는 세리에 A 우승을 시작으로 코파 이탈리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UEFA 슈퍼컵을 모두 지배했고, 더 나아가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는 UEFA 유로와 FIFA 월드컵에서 모두 월드클래스 수준의 기량을 선보이니, 21세기 센터백 중에서 네스타의 권능을 좇을 수비수가 별로 없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다. 밀란에서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두 번 들었고 2006년에는 세계 챔피언이 됐다. 그 모든 것의 처음이 하늘색 13번이었다.

3.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 센터백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생일은 1969년 2월 20일이고 태어난 곳은 지금의 크로아티아 땅 부코바르다. 라치오에서 든 코파 이탈리아는 1999-2000시즌과 2003-04시즌의 것이다. 세리에 A에서 한 경기에 프리킥으로 세 골을 넣은 선수는 그와 뒤에 나올 시뇨리 둘이다.

죽음의 왼발을 지녔던 수비수로 전 세계에서 프리킥을 가장 잘 차던 축구 선수.

시니샤 미하일로비치(Синиша Михајловић; 세르비아 수비수·감독, 1969-2022)는 경기장의 양 끝을 책임졌던, 천재성과 전사 정신이 공존한 선수였다.

도나우강 가의 부코바르에서 세르비아 사람 아버지와 크로아티아 사람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이웃 마을 보로보의 구단에서 공을 찼다. 디자인의 별명 ’보로보 출신 폭격기’가 거기서 왔다. 스물둘에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유러피언컵을 들었고, 그 뒤에 고향이 전쟁터가 됐다. 이탈리아에 처음 닿은 곳은 공교롭게도 AS 로마다. 1992년부터 두 시즌을 왼쪽 미드필더로 뛰었는데 신통치 않았다. 삼프도리아로 옮긴 뒤 에릭손이 그를 수비 한가운데로 내렸고, 거기서 세계에서 손꼽히는 센터백이 나왔다. 1998년 에릭손을 따라 약 220억 리라에 라치오로 왔다.

주 포지션은 센터백이었지만 볼 배급, 빌드업,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리킥에 있어서는 세리에 A는 물론 전 세계에서 그를 따라갈 자가 도저히 존재치 못했었다. 라치오에 합류한 그는 곧바로 에릭손 감독 전술의 중심이 되었으며,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공격을 설계하고, 직접 마무리할 수 있는 사내였다.

그의 왼발은 마치 폭격기에서 발사된 유도 미사일 같았고, 스탠딩 프리킥뿐 아니라 움직이는 상황에서도 정확도는 예술 그 자체였다. 도움닫기가 짧았다. 두세 걸음이면 발이 나왔으니 골키퍼는 준비할 틈이 없었다. 젊어서는 힘으로 찼고 이탈리아에 와서 정확함을 얹었으며, 감아 차는 공과 뚝 떨어지는 공과 낮게 깔리는 공을 같은 자세에서 골라 찼다. 연습할 때는 벽을 규정보다 가까이 세워 놓고 넘겼다고 한다.

1998년 12월 13일, 라치오가 삼프도리아를 5-2로 이긴 날 그는 프리킥으로만 세 골을 넣었다. 상대는 반년 전까지 제 팀이던 구단이다. 세리에 A에서 그가 프리킥으로 넣은 골은 28골로, 안드레아 피를로와 나란히 지금도 가장 많다. 구단사에 남은 첫 골도 그의 프리킥이다. 1999년 9월 레버쿠젠 원정, 라치오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넣은 첫 골이다.[2] 그 대회의 첼시 원정에서는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2-1을 만드는 골을 넣었다.

여섯 시즌 193경기에 33골. 센터백의 기록으로는 믿기 어려운 수다. 그동안 스쿠데토와 코파 이탈리아 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둘,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UEFA 슈퍼컵을 들었다. 1999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올해의 선수로 뽑혔다. 성질이 불같아 징계도 여러 번 받았다. 필자가 전사 정신이라 적은 것에는 그 그늘까지 들어 있다.

감독이 된 뒤에도 그는 싸웠다. 2019년 여름 볼로냐의 감독이던 그는 백혈병에 걸린 사실을 스스로 밝혔고,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벤치로 돌아왔다. 2022년 12월 16일 로마에서 쉰셋에 세상을 떠났다.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은 그해 그를 추모 부문에 올렸다. 로마의 두 구단에서 모두 뛴 사람인데 전설이라는 말은 하늘색 쪽에 남았다.

4. 주세페 파발리 - 레프트백

주세페 파발리 레프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1990년대 전 세계 최고의 레프트백 중 한 명.

401경기에 나서며 SS 라치오 역대 최다 출전 기록 2위에 이름을 마킹하고 있는 주세페 파발리(Giuseppe Favalli; 이탈리아 수비수, 1972-). 그는 12년 동안 라치오를 향해 ’충성의 아이콘’으로 남았고, ’견고함의 본질’로서 그라운드에 나서던 사내였다.

롬바르디아의 작은 도시 오르치누오비에서 태어나 크레모네세에서 컸다. 1992년 여름, 스무 살에 50억 리라로 라치오에 왔다. 크라뇨티가 회장이 되고 맞은 첫 여름이고, 시뇨리가 온 여름이기도 하다. 그해 그는 이탈리아 21세 이하 대표로 유럽 챔피언이 됐고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네 경기를 모두 뛰었다. 크라뇨티의 라치오가 시작한 날부터 끝난 날까지를 다 본 선수가 그다.

필자가 그에게 붙인 말은 ’항상 그 자리에 서던 자’다. 초프, 제만, 에릭손, 로베르토 만치니(Roberto Mancini; 이탈리아 공격수·감독, 1964-). 감독이 넷 바뀌는 동안 그는 한 번도 주전에서 밀리지 않았다. 축구가 서로 닮지 않은 네 사람이 왼쪽 수비만큼은 같은 이름을 적었다.

공격 포인트는 많지 않았다. 그는 그런 역할을 원한다기보다는 매 경기, 최전선의 문지기처럼 자기 위치를 벗어나지 않으며, 라인을 세웠고, 태클을 성공시켰으며, 그라운드의 숨결 자체를 읽어내는 신묘한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401경기에 6골이다. 왼쪽 풀백이면서 센터백으로도 설 수 있었고, 선수 생활의 끝에는 실제로 가운데에서 뛰었다. 풀백이 올라가 크로스를 올리는 것으로 값이 매겨지던 시절에 그는 제 뒤가 비지 않게 하는 쪽을 택했다. 앞에 네드베트가 뛰어다닐 수 있었던 것은 그 뒤에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든 트로피는 여덟 개다. 스쿠데토 하나, 코파 이탈리아 셋,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둘, 유러피언 컵위너스컵과 UEFA 슈퍼컵. 구단에서 이보다 많이 든 선수는 없다. 세리에 A 우승은 물론 코파 이탈리아와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을 차지한 이후 21세기에 들어서는 라치오의 주장직을 수행하기도 하였었는데, 이는 전방의 마르셀로 살라스(Marcelo Salas), 에르난 크레스포, 주세페 시뇨리, 파벨 네드베트,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디에고 시메오네(Diego Simeone) 등의 화려한 스타들을 받쳐주는 견고한 믿음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였다. 완장은 2002년 네스타가 팔려 간 날 그에게 왔다. 별들이 하나씩 떠나던 두 시즌을 그가 주장으로 버텼고, 그 두 번째 시즌에 코파 이탈리아가 하나 더 왔다.

2004년 여름, 로티토가 구단을 넘겨받던 그 여름에 그는 인테르로 떠났다. 두 해 뒤에는 AC 밀란으로 옮겨 2007년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들었고 서른여덟까지 뛰었다. 라치오에 남긴 401경기는 2021년 4월 3일 슈테판 라두(Ștefan Radu)가 넘을 때까지 열일곱 해 동안 구단 최다 출전 기록이었다.[2]

5. 파올로 네그로 - 라이트백

파올로 네그로 라이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디자인의 378경기는 다른 집계로는 376경기다. 어느 쪽으로 세어도 구단 최다 출전 4위다.

“사실 조용한 자가 가장 강한 것이다.“라는 말을 그라운드 위에서 실현한 선수.

1993년부터 2005년까지 12년 동안 378경기에 나서며 SS 라치오 역대 최다 출전 순위 4위에 랭크된 파올로 네그로(Paolo Negro; 이탈리아 수비수, 1972-)는 라치오의 골격을 이루는 척추처럼 존재했던 라이트백이었다.

베네토의 아르치냐노에서 태어나 브레시아와 볼로냐를 거쳤고, 1993년 여름 40억 리라에 라치오로 왔다. 마르케자니가 온 여름이다. 한 해 먼저 온 파발리가 왼쪽에, 그가 오른쪽에 섰다. 동갑인 두 풀백은 그 뒤 열한 시즌을 양옆에서 함께 보냈다.

그는 라이트백이었으나 센터백처럼 상황에 따라 3백과 4백 시스템에 모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전술 유연성과 수비 본능을 겸비한 전사였다. 몸이 단단했고, 감독이 그어 준 선을 넘지 않았으며, 머리로 따내는 공에 강했다. 뜻밖에 멀리서 차는 슛도 좋았다. 리그에서 열 시즌 내리 한 골 이상을 넣었는데 수비수로는 드문 일이다. 그 골들이 모여 24골이 됐다. 제만의 라치오가 리그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던 1994-95시즌에는 오른쪽 풀백인 그도 그 골 잔치에 끼었다.

1999-2000시즌 세리에 A 우승의 핵심 주역이었고, 라치오 황금기에 7개의 메이저 트로피를 획득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수비수였던 파올로 네그로는 특유의 대인 마크 능력과 빠른 인터셉트로 상대 에이스를 고립시키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었다. 2004년의 코파 이탈리아까지 더하면 그의 트로피도 파발리와 같은 여덟 개다. 파발리가 떠난 2004년에는 완장이 그에게 왔다.

그의 이름이 가장 크게 불린 날은 얄궂게도 진 날이다. 2000년 12월 17일의 더비, 가슴에 스쿠데토의 방패를 달고 나선 경기에서 그의 몸에 맞은 공이 제 골문으로 들어갔다. 경기는 0-1로 끝났고 그 시즌의 스쿠데토는 AS 로마로 넘어갔다. 열두 해 동안 조용히 제 일을 한 수비수에게 도시의 절반이 기억하는 장면이 하필 그것이다. 수비수의 일이 원래 그렇다. 잘 막은 300경기는 기록으로 남고 잘못 맞은 공 하나는 노래로 남는다.

그는 결코 ’유명한 스타’는 아니었고, 때문에 21세기 현재에 파올로 네그로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팬들은 많지 않지만 늘 필드 위에 있었고, 감독들이 가장 먼저 찾는 안정의 상징이었다. 이탈리아 대표로는 여덟 경기를 뛰었고 UEFA 유로 2000에서 준우승했다. 나라는 그 대회의 선수단에 공로훈장 기사장(Cavaliere dell’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을 줬다. 2005년 시에나로 떠났다. 필자는 그를 라치오 방패의 핵심이라 적었다. 방패는 눈에 띄라고 드는 물건이 아니다.

6. 세르게이 밀린코비치사비치 - 중앙 미드필더

세르게이 밀린코비치사비치 중앙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라치오에서의 기록은 341경기 69골로 적는다. 그가 뛴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은 2020-21시즌의 한 번이다.

루이스 알베르토와 세르게이 밀린코비치사비치의 파트너십은 세리에 A ’공포의 상징’이었다고 필자는 그렇게 평가한다.

세리에 A 역대 최고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듀오’를 거론할 때 루이스 알베르토(Luis Alberto)와 밀코사는 한자리를 차지해도 될 정도이다. 전술적 창의성과 물리적 우위의 융합을 상징하는 이 콤비는 라치오가 어떤 팀에도 밀리지 않는 중원 장악력을 가지게 된 이유였다.

세르게이 밀린코비치사비치(Сергеј Милинковић-Савић; 세르비아 미드필더, 1995-)는 스페인 카탈루냐의 예이다에서 태어났다. 축구 선수이던 아버지가 그곳 구단에서 뛰고 있었다.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에서 자라 벨기에 헹크를 거쳤고, 스무 살이던 2015년 8월 약 1천만 유로에 라치오로 왔다. 피오렌티나와 계약하러 피렌체까지 갔다가 서명 직전에 마음을 바꿨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한다. 그해 뉴질랜드의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세르비아가 우승했고 그는 브론즈볼을 받았다.

192cm의 키, 공중볼 경합에서의 압도적 피지컬, 미드필더로서의 득점력, 전진 패스와 스루패스, 세트피스와 후방 빌드업을 잇는 연결 고리. 이 모든 능력치들은 밀코사가 2010년대 후반부터 2020년대 초반기까지 세리에 A 베스트 미드필더로 선정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으며, 때문에 그의 발끝은 중원의 시작점이었고, 머리와 가슴은 박스 안의 맹수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

그 키로 그렇게 부드럽게 공을 다루는 선수는 흔치 않았다. 시모네 인차기(Simone Inzaghi)의 라치오는 그 점을 전술로 썼다. 뒤에서 풀기가 막히면 골키퍼가 그의 머리와 가슴을 겨냥해 길게 찼다. 그는 수비형 미드필더를 등지고 그 공을 받아 내려놓았고, 그것으로 상대의 압박 한 줄이 통째로 지워졌다. 공을 내려놓은 다음에는 벌칙 구역으로 뛰었다. 루이스 알베르토가 발로 푸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몸으로 푸는 사람이었고, 둘의 공은 맨 앞의 임모빌레에게 닿았다. 구단의 득점 기록을 새로 쓴 9번의 뒤에 이 둘이 있었다.

큰 경기의 골이 그의 몫이었다. 2019년 5월 15일 코파 이탈리아 결승, 0-0으로 끝나 가던 아탈란타전에서 종료 여덟 분을 남기고 머리로 선제골을 넣었다. 라치오는 2-0으로 이겨 일곱 번째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그해 12월 리야드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는 그가 떨궈 준 공을 루이스 알베르토가 차 넣어 유벤투스를 3-1로 이기는 길을 열었다.[3] 리그는 2018-19시즌 그를 최우수 미드필더로 뽑았다.

2023년 4월 2일에는 프리킥으로 통산 65번째 골을 넣어 고란 판데프(Горан Пандев)를 넘었다. 외국 선수로는 구단 최다 득점이고, 69골까지 늘려 놓고 떠났다. 팬들은 이름에서 딴 별명으로 그를 상사라 불렀고 그는 골을 넣으면 거수경례를 했다.

2015년부터 2023년까지 활약한 뒤 사우디 프로페셔널 리그의 알힐랄로 떠난 밀코사이지만, 그가 팀에 머물던 8년간 라치오는 명문 팀일 수 있었다. 마지막 시즌에 라치오는 세리에 A 2위를 했다. 로티토 시대의 가장 높은 자리다. 그해 7월 12일, 그는 4천만 유로를 남기고 갔다.

7. 빈첸초 디아미코 - 공격형 미드필더

빈첸초 디아미코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생일은 1954년 11월 5일이다. 338경기 51골은 모든 대회를 더한 기록이고 리그만으로는 276경기 40골이다. 라치오에서 뛴 해는 1971년부터 1980년까지, 다시 1981년부터 1986년까지다.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손꼽히는 장기 재직자.

열일곱에 라치오에서 데뷔하여 10대 시절부터 팀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던 빈첸초 디아미코(Vincenzo D’Amico; 이탈리아 미드필더, 1954-2023)는 1973-74시즌 구단이 창단 이후 최초로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할 때 큰 공을 세운 미드필더이기도 하였다.

로마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 거리인 라티나에서 태어났다. 이 열한 명 가운데 라치오 땅에서 난 사람은 로마의 네스타와 라티나의 그, 둘이다. 구단 유소년에서 컸고, 1972년 5월 세리에 B의 마지막 무렵에 왼쪽 날개로 처음 나섰다. 그해 가을 연습 경기에서 무릎 인대를 다쳐 승격 첫 시즌을 통째로 쉬었다. 돌아온 것이 1973년 10월 14일 삼프도리아전이다. 열여덟의 세리에 A 데뷔전이었고, 그 시즌의 끝에 스쿠데토가 있었다.

마에스트렐리는 경험 많은 선수를 제쳐 두고 이 막내를 주전으로 썼다. 11번을 달고 키날리아의 곁에서 공을 풀어 주는 자리였다. 구단은 그 팀을 적을 때 마리오 프루스탈루피(Mario Frustalupi; 이탈리아 미드필더, 1942-1990)가 지휘를 맡고 디아미코가 상상력을 맡았다고 쓴다.[1] 그해의 라치오는 라커 룸이 두 패로 갈려 서로 말도 섞지 않던 팀으로 유명하다. 막내는 어느 쪽에도 끼지 않았다. 감독과 주장 주세페 윌슨(Giuseppe Wilson)이 그를 감쌌다고 한다. 27경기에 나서 두 골을 넣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더비의 골이다.

공격의 흐름이 거칠어질 때는 부드럽게 템포를 조절하고, 공격의 흐름이 지체될 때는 날카롭게 패스를 찔러 넣어 스피드를 올렸으며, 경기 자체가 밀리는 날에는 ’스스로 돌파’를 선택하여 게임의 분위기를 바꿔버리는 능력을 갖춘 미드필더이기도 하였었다. 172cm의 작은 몸에 공이 붙어 다녔다. 공격수 바로 뒤에서도, 날개에서도 뛰었다. 재능만 놓고 보면 그 세대의 이탈리아에서 손꼽혔으나 꾸준하지는 못했고, 젊은 날의 생활이 발목을 잡은 때도 있었다. 이탈리아 대표로는 끝내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1980년에 한 번 소집됐다가 벤치에서 돌아온 것이 전부다.

우승 뒤의 라치오는 빠르게 어두워졌다. 1976년 겨울에 마에스트렐리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1월에는 동료 루차노 레 체코니(Luciano Re Cecconi)가 사고로 숨졌다. 1980년에는 승부 조작 사건의 판결로 구단이 세리에 B로 내려갔다. 그해 여름 그는 토리노로 팔렸다. 한 시즌을 뛰고는 스스로 돌아가기를 청했고, 1981년 6억 리라에 세리에 B의 라치오로 돌아왔다. 세리에 A의 주전 자리를 두고 2부로 내려온 것이다.

라치오에서 338경기 51골을 남긴 빈첸초 디아미코는 ’라치오라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 전사의 품격’을 지닌 존재로서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었다. 돌아온 뒤의 다섯 시즌에 그는 완장을 찼고, 1983년에 팀을 세리에 A로 다시 올렸으며, 살림이 무너져 가는 구단에서 후배들을 끌었다. 구단은 그를 두고 스쿠데토 이후의 가장 힘든 시절을 품어 안은 사람이라 적는다.[2] 1986년, ’마이너스 9’의 시즌이 시작되기 직전에 그는 테르나나로 떠났다.

2023년 7월 1일 로마에서 예순여덟에 세상을 떠났다.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은 그해 그를 추모 부문에 올렸다. 우승한 해의 막내가 2부로 내려간 구단의 주장이 됐다. 필자가 그를 라치오라는 팀의 뿌리 깊은 혼(魂)이라 부르는 까닭이 그 한 줄에 있다.

8. 파벨 네드베트 - 공격형 미드필더

파벨 네드베트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그림에 적힌 한글 이름은 이 사이트의 표기로 네드베트다. 라치오에서의 기록은 207경기 51골로도 전한다.

체코의 분노(Furia Ceca). 이 별명은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별명이기도 하다. 단숨에 이해된다. 그는 공을 몰 때, 바람마저 등을 돌렸으니.

그라운드 위의 용광로와 같던 윙어로서 눈부신 금발의 머리카락이 휘날릴 때 그 안엔 순도 100%의 근성과 단련된 장인의 정교함이 공존했었다. 파벨 네드베트(Pavel Nedvěd; 체코 미드필더, 1972-)는 라치오의 축복이며, 발롱도르 수상자다.

독일 국경에 가까운 헤프에서 태어나 스파르타 프라하에서 이름을 알렸다. 1996년 여름 잉글랜드에서 열린 UEFA 유로에서 체코가 결승까지 올라갔고, 그 대회가 끝나자 라치오가 90억 리라에 그를 데려왔다. 그때 라치오의 감독이 프라하 태생의 제만이다. 체코 사람 감독이 체코 선수를 불렀다. 9월 7일 볼로냐전에서 데뷔해 첫 시즌에 일곱 골을 넣었고, 이듬해에는 개막 세 경기에 네 골을 넣으며 리그에서 팀 최다 득점자가 됐다.

좌우 구분 없이 정밀한 슈팅과 크로스를 날릴 수 있는 양발잡이였고, 전방 압박부터 후방 커버까지 90분 풀타임 동안 마라토너처럼 뛰는 미친 체력의 소유자였으며, 원터치 패스, 로빙 패스 등 공격 전개 능력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고, 볼을 찬다기보다 마치 화살처럼 쏘아대던 슈팅은 중거리 슈팅의 ’마법사’로서 불리도록 만드는 이유였다. 타고나기는 왼발잡이였다. 어려서 오른발을 하도 연습해 나중에는 스스로 오른발잡이처럼 느꼈다고 한다. 그의 재능은 대부분 그렇게 훈련장에서 만든 것이다. 팀 훈련이 끝난 뒤에도 혼자 남아 뛰었다는 이야기가 그가 거친 구단마다 남아 있다.

이탈리아 칼초(calcio; 축구) 역사상 가장 인상 깊은 유럽 출신의 미드필더로서 볼을 받기 전부터 공간을 읽는 능력과 패스가 오기 전부터 몸의 방향을 돌리는 선행 작업은 가히 ’아름다움’의 원형과 같았다.

라치오가 든 트로피의 고비마다 그의 골이 있다. 1998년 8월 구단의 첫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선제골을 넣었다. 1999년 5월 19일 버밍엄에서는 1-1이던 81분에 벌칙 구역 끝에서 돌아서며 찬 공으로 마요르카를 무너뜨렸다. 라치오의 첫 유럽 트로피를 정한 골이고, 그 대회가 그해로 없어졌으니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서른아홉 해 역사의 마지막 골이기도 하다.[1] 2000년 1월 9일 구단의 100번째 생일에는 볼로냐를 상대로 골을 넣어 팀을 선두에 올렸고, 봄의 더비에서는 2-1을 만드는 골로 유벤투스를 쫓는 길을 다시 열었다. 코파 이탈리아 결승 1차전의 동점골도 그의 것이다.

1999-2000시즌, 라치오가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여 그가 리그 내 최우수 선수 중 한 명으로 우뚝 섰을 때 파벨 네드베트는 중원의 군신(軍神)이라 불렸다. 이듬해에는 13골을 넣었는데, 그 여름에 돈이 급해진 구단이 그를 유벤투스에 팔았다. 다섯 시즌 동안 208경기에 51골을 남기고 간 그는 토리노에서 2003년 발롱도르를 받았다. 라치오 팬들에게 그 트로피는 자랑이면서 쓰라림이다. 제 손으로 키운 분노가 남의 집에서 금빛이 됐기 때문이다.

9. 주세페 시뇨리 - 세컨드 스트라이커

주세페 시뇨리 세컨드 스트라이커 상세 정보 디자인

길었던 무명 생활을 버티고 버텨 라치오에서 슈퍼스타가 된 그는 세 차례의 카포칸노니에레에 등극하였다.

“작은 거인, 시뇨리”. 키 171cm의 단신(短身), 그럼에도 그는 누구보다 높게 도약했고, 누구보다 강하게 찼다. 세리에 A라는 밀림의 전장(戰場)에서 주세페 시뇨리(Giuseppe Signori; 이탈리아 공격수, 1968-)는 ’속도’와 ’센스’라는 검 두 자루를 들고 무수한 거함들을 쓰러뜨렸던 공격수.

베르가모 곁의 알차노 롬바르도에서 태어났다. 인테르 유소년에 있다가 나왔고, 그 뒤로 레페와 피아첸차와 트렌토 같은 아랫 리그의 구단을 돌았다. 길이 열린 곳이 포자다. 그곳의 감독 제만이 그를 날개에서 골문 앞으로 옮겼고, 포자는 세리에 B에서 올라와 그 공격으로 이탈리아를 놀라게 했다. 1992년 여름 크라뇨티의 라치오가 80억 리라에 그를 샀다. 스물넷이었다.

첫 경기가 9월 6일 삼프도리아 원정이다. 3-3으로 비긴 그 경기에서 두 골을 넣었다. 첫 시즌 32경기에 26골로 득점왕이 됐고, 라치오는 5위로 열다섯 해 만에 유럽 대회에 나갔다. 그가 물려받은 등번호는 11번이다. 관중석은 금세 노래를 만들었다. 또 그가 넣는다, 그의 이름은 베페 시뇨리. 구단은 지금도 그 가사를 구단사에 적어 둔다.[1]

왼발의 천재, 페널티킥 마스터, 당대 으뜸의 순간 가속, 박수를 부르는 위치 선정. 이 네 가지가 그가 1992-93시즌, 1993-94시즌, 1995-96시즌 세리에 A 득점왕과 1992-93시즌, 1997-98시즌 코파 이탈리아 득점왕에 오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페널티킥은 도움닫기 없이 찼다. 공 앞에 서서 골키퍼를 보다가 그가 움직이는 반대쪽으로 밀어 넣었다. 프리킥도 그의 것이었다. 연습 때는 사람 키보다 높은 벽을 규정보다 가까이 세워 놓고 넘겼다고 한다. 세리에 A에서 한 경기에 프리킥으로만 세 골을 넣은 선수는 지금까지 둘인데, 한 사람이 그이고 다른 한 사람이 이 글의 센터백 미하일로비치다. 둘 다 왼발이고 둘 다 라치오의 선수였다.

1994년 제만이 라치오로 오면서 그는 다시 4-3-3의 한가운데가 됐다. 그 시즌 라치오는 2위를 했다. 그리고 1995년 6월 11일이 온다. 크라뇨티가 그를 파르마에 팔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라치오 팬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구단 사무실로 몰려갔다. 그날 저녁 구단은 이적을 거둬들였다.[2] 관중이 회장의 장부를 뒤집은 날이다. 그는 남았고, 다음 시즌에 24골로 세 번째 득점왕이 됐다. 완장도 그의 팔에 있었다.

끝은 쓸쓸했다. 1997년에 온 에릭손은 투톱을 썼고 그의 자리는 벤치가 됐다. 그해 겨울 그는 삼프도리아로 떠났다. 떠나기 전 코파 이탈리아 네 경기에서 넣은 여섯 골로 그 대회의 득점왕이 됐는데, 정작 그 코파 이탈리아를 든 것은 다섯 달 뒤의 동료들이다. 195경기 127골을 넣고 라치오에서 든 트로피가 없다. 구단의 우승이 그가 나간 문으로 들어왔다.

스물넷이 되도록 빅 클럽의 호출이 없어 무명에 가까웠던 스타가 단 한 시즌 만에, 득점왕과 국가대표팀 승선이라는 반전을 썼던 공격수 주세페 시뇨리. 그는 작은 신체와 큰 투혼을 동시에 가졌던 축구 선수로서 라치오라는 팀은 그를 중심으로 ’승리하는 법’을 배웠고, 세리에 A는 다시금 ’작은 거인의 이야기’를 품기도 하였었다.

10. 치로 임모빌레 - 센터 포워드

치로 임모빌레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그가 받은 훈장은 UEFA 유로 2020 우승 뒤의 기사장이다. 세리에 A 득점왕 네 번 가운데 라치오에서 한 것은 세 번이고, 라치오에서 뛴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은 2020-21시즌과 2023-24시즌의 두 번이다.

SS 라치오 역대 최다 득점자이며 2019-20시즌 유러피언 골든슈의 주인, 그리고 AC 밀란의 군나르 노르달(Nils Gunnar Nordahl; 스웨덴 공격수, 1921-1995)을 좇아 네 번까지 간 득점왕.

그는 ’득점’이라는 단어에 인격을 부여한 사내였다.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는 사내. 구단과 팬, 가족을 위해 매 순간 혼신(渾身)을 불살랐고, 그 결과 치로 임모빌레(Ciro Immobile; 이탈리아 공격수, 1990-)는 라치오 역사상 최다 득점자라는 자리에 올랐다.

나폴리만의 토레 안눈치아타에서 태어났다. 유벤투스 유소년을 나와 여러 구단을 빌려 다니다가 2011-12시즌 페스카라에서 제만을 만났고, 세리에 B에서 28골을 넣어 이름을 알렸다. 토리노에서 세리에 A 득점왕이 된 뒤 도르트문트와 세비야로 갔으나 두 곳에서 모두 자리를 잡지 못했다. 2016년 7월 27일, 스물여섯의 그를 라치오가 데려왔다. 한물갔다는 말을 듣던 공격수였다. 첫 골은 8월 21일 베르가모의 아탈란타전에서 나왔다.

타이밍, 방향, 결단력은 모두 ’기계 수준’이었기 때문에 폭발적인 오프 더 볼 능력을 보유할 수 있었던 스트라이커로서 양발과 머리 등 모든 신체 부위로 상대의 골 망을 타격하니 이탈리아 무대에서 치로 임모빌레는 늘 공포의 대상 중 한 명이기도 했었다. 수비 등 뒤로 뛰어드는 첫 걸음이 그의 전부였다. 공을 잡고 수비를 벗기는 유형과는 거리가 멀다. 공이 오기 전에 이미 벗겨 놓고, 오는 공은 한 번에 찼다. 인차기의 라치오는 빼앗으면 곧장 앞으로 찌르는 팀이었고, 루이스 알베르토의 패스와 밀린코비치사비치가 떨궈 주는 공이 그 첫 걸음을 겨냥했다.

2017년 8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두 골을 넣어 3-2 승리를 이끈 것이 시작이다. 그 시즌 리그에서 29골로 득점왕이 됐고 모든 대회 47경기에 41골을 넣었다. 2019년에는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특히 2019-20시즌은 세리에 A 36골을 폭발시키며 리오넬 메시와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등을 제쳐내고 유러피언 골든슈를 수상했으며, 라치오 수직 상승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던 공격수였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37경기에 36골이다. 곤살로 이과인(Gonzalo Higuaín; 아르헨티나 공격수, 1987-)이 나폴리에서 세운 세리에 A 한 시즌 최다 골과 같은 수이고, 서른여섯 번째 골은 2020년 8월 1일 바로 그 나폴리를 상대로 넣었다.[1] 그해 봄 리그가 멈추기 전까지 라치오는 선두와 승점 1점 차의 2위였다. 스쿠데토가 가장 가까이 온 시즌이었고, 그 한가운데에 그의 골이 있었다.

2021년 11월 4일 마르세유 원정에서 그는 라치오 통산 160번째 골을 넣었다. 피올라의 159골이 일흔여덟 해 만에 넘어간 날이다. 구단은 그날을 구단사에 따로 적어 두었다.[1] 그해 여름부터는 완장도 찼다. 2021-22시즌 27골로 네 번째 득점왕이 됐는데, 세리에 A 득점왕을 네 번 한 이탈리아 선수는 그가 처음이다. 2023년 11월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 페예노르트전에서 200번째 골을 채웠다.

여덟 시즌 340경기 207골. 그 가운데 세리에 A의 골이 169골이다. 2024년 7월 튀르키예의 베식타시로 떠났고, 볼로냐와 파리를 거쳐 2026년 8월 14일 서른여섯에 선수 생활을 마쳤다. 그가 라치오에서 든 것은 코파 이탈리아 하나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둘이다. 구단이 126년 동안 가진 공격수 가운데 골이 가장 많은 사람도 스쿠데토는 만지지 못했다.

11. 실비오 피올라 - 센터 포워드

실비오 피올라 센터 포워드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세리에 A 274골은 지금도 역대 1위 기록이다. 구단은 그의 라치오 리그 기록을 227경기 143골로, 모든 대회의 골을 159골로 적는다. 그의 이름을 단 경기장은 노바라와 베르첼리에 있다.

이탈리아는 물론 전 세계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격수.

한 남자가 축구를 만들고, 그가 곧 법이었다. 실비오 피올라(Silvio Gioacchino Italo Piola; 이탈리아 공격수, 1913-1996)는 ’득점’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한 선구자격 존재이다. 그는 현대 이탈리아 축구가 상상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자로서, 펠레(Edson Arantes do Nascimento; 브라질 공격수, 1940-2022)가 ’브라질 축구의 기원’이라면 피올라는 ’이탈리아 축구의 창세기’였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롬바르디아의 로비오에서 태어나 베르첼리에서 자랐고, 열여섯에 프로 베르첼리의 1군에 올랐다. 1934년 여름, 스무 살의 그가 라치오로 온 것은 당시의 큰 사건이었다. 그는 집안 사정 때문에 수도로 가기를 망설였다. 그를 설득한 사람이 앞에 나온 장군 바카로다. 1927년에 구단의 이름을 지켜 낸 사람이 일곱 해 뒤에는 이탈리아 축구 협회의 회장이 되어 구단에 가장 큰 선수를 데려왔다.[1]

이듬해 3월 24일 그는 빈에서 이탈리아 대표로 처음 뛰었다. 다친 주세페 메아차(Giuseppe Meazza; 이탈리아 공격수, 1910-1979)의 자리였는데,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두 골을 넣었다. 그 뒤로는 감독 비토리오 포초(Vittorio Pozzo; 이탈리아 축구 감독, 1886-1968)가 그를 가운데에 세우려고 메아차를 안쪽으로 옮겼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그는 다섯 골을 넣었고, 헝가리를 4-2로 이긴 결승에서 두 골을 넣었다. 그때 그는 라치오의 선수였다.

포스트 플레이, 세컨드 볼, 움직임, 원터치 플레이 등 지금의 스트라이커 전술은 당대의 실비오 피올라가 이미 개념화하던 플레이들이었는데, 중앙뿐 아니라 2선, 측면, 심지어 후방까지도 공격수가 커버해 내고 있으니 경외를 부르는 축구 실력이었다. 다리가 길어 몇 걸음에 운동장을 가로질렀고 머리 위의 공은 대개 그의 것이었다. 멀리서 차는 슛이 매서웠고, 몸을 뒤로 눕혀 차는 오버헤드킥은 그의 이름과 함께 전해 온다. 골문을 등지고 서서 공을 받는 버릇도 그의 것이다. 그렇게 서야 경기가 보이고 수비수는 제 다음 동작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 까닭이었다. 그는 수비수에게 쫓기는 공격수가 되기보다 수비수를 쫓는 공격수가 되는 쪽을 골랐다. 수비수가 공을 잡으면 달려들어 서두르게 만들고, 그 실수를 주웠다. 요즘 말로는 전방 압박이다.

라치오에서의 아홉 시즌은 그 한 사람이 팀을 끌고 간 세월이다. 1936-37시즌에 21골로 첫 득점왕이 됐고 라치오는 2위를 했다. 그해 가을에는 중부 유럽의 구단들이 겨루던 미트로파컵(Mitropa Cup; 중부 유럽 구단들이 참가한 국제 클럽 대회)의 결승까지 갔다가 페렌츠바로시에 졌다. 팀이 기울던 해에도 그는 넣었다. 1942-43시즌, 전쟁 중의 리그에서 22경기에 21골을 넣어 스물아홉에 두 번째 득점왕이 됐다. 그때 그의 팔에는 주장 완장이 있었다.

라치오에서는 종교가 된 자. 그 까닭은 1941년 3월 16일의 더비 하나로 족하다. 전반에 AS 로마의 수비수와 부딪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실려 나갔다. 더 뛰지 말라는 말을 듣고 그는 얼른 꿰매 달라고 했다. 붕대를 감고 돌아와 전반이 끝나기 직전, 다투던 공을 그 이마로 받아 넣었다. 꿰맨 자리가 다시 벌어져 쓰러졌고, 의사가 또 말렸으며, 그는 후반에 한 골을 더 넣었다. 라치오 2, 로마 0. 구단은 이 날을 ’머리에 붕대를 감은 더비의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구단사에 올려 두었다.[1]

1943년 7월 로마가 폭격을 맞았고 며칠 뒤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졌다. 그는 159골을 남기고 북쪽으로 갔다. 그 뒤 토리노와 유벤투스와 노바라에서 마흔까지 뛰었다. 그가 남긴 기록은 세리에 A 274득점(역대 1위), SS 라치오 소속 159득점(역대 2위),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 소속 30득점(역대 3위)이라는 대기록으로 증명됐다. 전쟁 직후 둘로 나눠 치른 1945-46시즌의 16골까지 넣으면 290골이다. 대표팀의 30골은 34경기에서 나왔다. 인테르의 주세페 메아차와 함께 이탈리아 왕국의 트렌드를 선도하는 아이돌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실비오 피올라 대 프란체스코 토티, 로베르토 바조, 파올로 말디니. 이는 이탈리아 현지에서도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이다. ’누가 가장 위대한가?’라는 물음에 실비오 피올라는 항상 앞선 존재로서 거론되기도 하는데, 라치오 축구사 GOAT라는 타이틀은 사실상 논란의 여지도 없는 수준이기도 하다. 그가 머물렀던 구단들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를 기억한다. FC 프로 베르첼리 1892와 노바라 FC는 홈구장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이탈리아는 1993년 그에게 공로훈장 대장군장(Grande Ufficiale dell’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을 줬다.

그 많은 골을 넣고도 그는 스쿠데토를 한 번도 들지 못했다. 세리에 A에서 가장 많이 넣은 사람이 세리에 A를 우승한 적이 없다. 그 사실까지 포함해서 실비오 피올라는 라치오의 골잡이로, 그리고 그보다 넓게 이탈리아 축구의 기준점으로 현세에 기억되고 있다.

독수리는 지금도 같은 하늘을 난다

SS 라치오 역대 베스트 11 표제 4-3-3 대형으로 배치한 SS 라치오 역대 베스트 11 SS 라치오 역대 베스트 11 서브 명단 15인 편집물 SS 라치오 역대 베스트 11 추가 명단 30인 편집물
표제, 열한 명의 대형, 서브 명단 15인, 추가 명단 30인. 1931년에 브라질에서 건너온 구아리시부터 2022년에 온 골키퍼 프로베델까지 쉰여섯 명이 한 흐름에 들어간다.

열한 명을 시대로 나누면 넷이다. 전쟁 전의 피올라가 혼자 한 시대이고, 첫 스쿠데토와 그 뒤의 어둠을 다 겪은 디아미코가 또 혼자 한 시대다. 크라뇨티의 시절에서 일곱이 왔다. 마르케자니와 네스타, 미하일로비치, 파발리, 네그로, 네드베트, 시뇨리다. 로티토의 시절에서는 밀린코비치사비치와 임모빌레 둘이 왔다. 126년 가운데 열두 해 남짓한 한 시절이 열한 자리 가운데 일곱을 채웠다. 구단이 든 큰 트로피 열여섯 개 가운데 일곱 개가 그 시절의 세 해에 몰려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일곱의 끝은 서로 닮았다. 시뇨리는 1997년 겨울에, 네드베트는 2001년 여름에, 네스타는 2002년 여름의 마지막 날에 떠났다. 한 사람은 감독의 구상에서 밀렸고 두 사람은 구단의 빚 때문에 팔렸다. 그 뒤에 남아 완장을 받은 사람이 파발리와 네그로다. 가장 화려한 시절의 명단에서 가장 덜 화려한 두 사람이 마지막까지 있었다.

빈 시대도 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서는 열한 명에 든 사람이 없다. 그 시절은 후보 명단의 로바티(Roberto Lovati)와 푸치넬리(Aldo Puccinelli)와 플라미니(Enrique Flamini)가 대신 말해 준다. 1958년에 구단의 첫 트로피를 주장으로 든 골키퍼, 전쟁을 사이에 두고 열다섯 해 가까이 오른쪽을 지킨 날개,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와 구단의 1,000번째 골을 넣은 사람이다.

두 번의 스쿠데토는 후보 명단에서 더 또렷하다. 1974년의 팀에서는 주장 윌슨과 레 체코니와 키날리아가 서브에, 마르티니(Luigi Martini)와 가를라스켈리(Renzo Garlaschelli)가 추가 명단에 있다. 2000년의 팀에서는 판카로(Giuseppe Pancaro)와 시메오네와 스탄코비치(Dejan Stanković)가 서브에, 베론과 살라스와 콘세이상(Sérgio Conceição)과 시모네 인차기가 추가 명단에 있다. 열한 명 가운데 구단이 공식 누리집의 전설 명단에 올려 둔 이름은 일곱이다. 피올라, 디아미코, 네스타, 시뇨리, 마르케자니, 미하일로비치, 임모빌레.[2] 파발리와 네그로, 네드베트와 밀린코비치사비치는 거기에 없다. 필자의 명단은 구단의 명단보다 조용한 사람과 떠난 사람에게 조금 더 후하다.

표지에 세운 두 사람은 로티토 시대의 얼굴이다. 임모빌레와 밀린코비치사비치는 일곱 시즌을 함께 뛰며 코파 이탈리아 하나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둘을 같이 들었다. 한 사람은 구단에서 골을 가장 많이 넣은 사람이 됐고, 한 사람은 구단에서 골을 가장 많이 넣은 외국인이 됐다. 그 둘이 한 해 차이로 떠난 뒤 라치오는 아직 새 얼굴을 찾지 못했다.

감독 자리는 비워 둔다. 이 열한 명을 실제로 지도한 사람만 꼽아도 마에스트렐리와 초프, 제만과 에릭손, 만치니와 시모네 인차기, 마우리치오 사리(Maurizio Sarr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59-)다. 스쿠데토를 든 감독은 마에스트렐리와 에릭손 둘이고, 이 명단에 가장 많은 이름을 남긴 감독은 아무것도 들지 못한 제만이다. 그것까지가 라치오다.

독수리는 침묵하지 않는다.하늘색 셔츠가 126년 동안 불러 온 쉰여섯 개의 이름.

열한 명 뒤에 선 마흔다섯

서브 명단 열다섯과 추가 명단 서른을 글자로 다시 적되 포지션은 그림에 적은 대로 두었다. 그림의 D.마르티니는 루이지 마르티니다.

서브 명단 15인

  • 안젤로 페루치Angelo Peruzzi · 골키퍼

    2000년 스쿠데토 직후에 와서 일곱 시즌 골문을 지켰다. 2004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고 2006년 라치오 선수로 세계 챔피언이 됐다.

  • 주세페 윌슨Giuseppe Wilson · 센터백

    잉글랜드 달링턴에서 태어나 나폴리에서 자랐다. 1969년에 와서 1974년 첫 스쿠데토를 주장으로 들었다.

  • 프란체스코 아체르비Francesco Acerbi · 센터백

    2018년부터 네 시즌을 뛰었다. 2019년 코파 이탈리아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들었다.

  • 슈테판 라두Ștefan Radu · 레프트백

    2008년 1월에 와서 2023년까지 427경기를 뛰었다. 구단 최다 출전 기록이 그의 것이다.

  • 주세페 판카로Giuseppe Pancaro · 라이트백

    1997년부터 여섯 시즌을 뛰었다. 2000년 스쿠데토의 풀백이다.

  • 마시모 오도Massimo Oddo · 라이트백

    2002년부터 2007년 1월까지 뛰며 완장을 찼다. 2006년 라치오 선수로 세계 챔피언이 됐다.

  • 디에고 시메오네Diego Simeone · 수비형 미드필더

    1999년에 왔다. 2000년 4월 유벤투스 원정의 헤더 결승골로 스쿠데토 경쟁을 뒤집었다.

  • 루차노 레 체코니Luciano Re Cecconi · 중앙 미드필더

    금발의 천사라 불린 1974년 스쿠데토의 8번이다. 1977년 1월 스물여덟에 사고로 숨졌다.

  • 데얀 스탄코비치Dejan Stanković · 중앙 미드필더

    1998년 열아홉에 와서 다섯 시즌 반을 뛰었다. 2000년 스쿠데토의 중원에 있었다.

  • 루이스 알베르토Luis Alberto · 중앙 미드필더

    2016년부터 여덟 시즌을 뛰었다. 밀린코비치사비치의 짝이고 임모빌레에게 가는 패스의 출발점이다.

  • 세나드 룰리치Senad Lulić · 레프트 미드필더

    2013년 5월 26일 코파 이탈리아 결승, AS 로마를 상대로 71분에 결승골을 넣었다. 371경기를 뛰었고 2017년부터 완장을 찼다.

  • 디에고 푸세르Diego Fuser · 라이트 미드필더

    1992년부터 여섯 시즌을 뛰었다. 주장으로 1998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 알도 푸치넬리Aldo Puccinelli · 라이트 윙

    1940년 스무 살에 와서 전쟁을 사이에 두고 1955년까지 뛰었다. 342경기 78골을 남겼다.

  • 엔리케 플라미니Enrique Flamini · 센터 포워드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와서 1939년부터 열한 시즌을 뛰었다. 구단의 리그 1,000번째 골을 넣었다.

  • 조르조 키날리아Giorgio Chinaglia · 센터 포워드

    1969년부터 일곱 시즌 246경기에 122골을 넣었다. 24골로 득점왕이 된 1973-74시즌에 첫 스쿠데토가 왔다.

추가 명단 30인

  • 로베르토 로바티Roberto Lovati · 골키퍼

    1958년 구단의 첫 트로피인 코파 이탈리아를 주장으로 들었다. 그 뒤로 감독과 단장까지 평생을 라치오에서 보냈다.

  • 페데리코 마르케티Federico Marchetti · 골키퍼

    2011년부터 일곱 시즌을 뛰었다. 2013년 더비 결승의 골키퍼다.

  • 이반 프로베델Ivan Provedel · 골키퍼

    2022년에 와서 첫 시즌에 세리에 A 최우수 골키퍼가 됐다. 2023년 9월 UEFA 챔피언스 리그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전에서 종료 직전 머리로 동점골을 넣었다.

  • 페르난두 코투Fernando Couto · 센터백

    1998년부터 일곱 시즌을 뛴 포르투갈 수비수다. 2000년 스쿠데토를 들었다.

  • 스테판 더프레이Stefan de Vrij · 센터백

    2014년부터 네 시즌을 뛰었다. 2017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들었다.

  • 아담 마루시치Adam Marušić · 레프트백

    2017년에 와서 지금까지 뛰고 있는 몬테네그로 수비수다. 2019년의 두 트로피를 들었다.

  • 슈테판 리히트슈타이너Stephan Lichtsteiner · 라이트백

    2008년부터 세 시즌을 뛰었다. 2009년 코파 이탈리아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를 들었다.

  • 루이지 마르티니Luigi Martini · 수비형 미드필더

    미드필더로 와서 마에스트렐리 아래에서 오르내리는 풀백이 됐다. 1974년 스쿠데토의 왼쪽이다.

  • 아론 빈터르Aron Winter · 수비형 미드필더

    1992년 아약스에서 와서 네 시즌을 뛰었다. 크라뇨티의 첫 여름에 온 네덜란드 미드필더다.

  • 루카스 빌리아Lucas Biglia · 수비형 미드필더

    2013년부터 네 시즌을 뛰며 완장을 찼다.

  • 루카스 레이바Lucas Leiva · 수비형 미드필더

    2017년 리버풀에서 와서 다섯 시즌을 뛰었다. 2019년의 두 트로피에서 중원의 바닥을 맡았다.

  • 크리스티안 레데스마Cristian Ledesma · 중앙 미드필더

    2006년부터 아홉 시즌을 뛰었다. 2009년과 2013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Juan Sebastián Verón · 공격형 미드필더

    1999년에 와서 두 시즌을 뛰었다. 2000년 스쿠데토의 지휘자다.

  • 스테파노 마우리Stefano Mauri · 공격형 미드필더

    2006년부터 열 해를 뛰었다. 주장으로 2013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 펠리피 안데르송Felipe Anderson · 공격형 미드필더

    2013년부터 다섯 시즌, 2021년부터 세 시즌을 뛴 브라질 날개다.

  • 렌초 가를라스켈리Renzo Garlaschelli · 라이트 윙

    1972년부터 열 해를 뛰었다. 1974년 스쿠데토에서 키날리아 곁의 공격수였다.

  • 세르지우 콘세이상Sérgio Conceição · 라이트 윙

    1998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추가 시간에 결승골을 넣어 구단에 그 대회의 첫 우승을 안겼다.

  • 페드로Pedro · 라이트 윙

    2021년 AS 로마에서 건너와 다섯 시즌을 뛰고 2026년 여름에 떠났다.

  • 안필로지노 구아리시Anfilogino Guarisi · 센터 포워드

    1931년 브라질에서 건너온 선수들 가운데 으뜸이었다. 1934년 이탈리아 대표로 세계 챔피언이 됐다.

  • 니지뉴Niginho · 센터 포워드

    브라질 벨루오리존치의 판토니 집안에서 온 공격수로 1932년부터 세 시즌을 뛰었다. 본명은 레오니지우 판토니다.

  • 브루노 조르다노Bruno Giordano · 센터 포워드

    로마 트라스테베레에서 난 구단 유소년 출신이다. 1978-79시즌 19골로 세리에 A 득점왕이 됐다.

  • 카를하인츠 리들레Karl-Heinz Riedle · 센터 포워드

    1990년 세계 챔피언이 된 여름에 와서 세 시즌을 뛰었다.

  • 마르셀로 살라스Marcelo Salas · 센터 포워드

    1998년에 온 칠레 공격수다. 1999년 UEFA 슈퍼컵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무너뜨린 골이 그의 것이다.

  • 시모네 인차기Simone Inzaghi · 센터 포워드

    1999년부터 선수로 열 해 남짓, 2016년부터 감독으로 다섯 해를 보냈다. 감독으로 코파 이탈리아 하나와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둘을 들었다.

  • 에르난 크레스포Hernán Crespo · 센터 포워드

    2000년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로 왔다. 첫 시즌 26골로 세리에 A 득점왕이 됐고 2002년에 팔렸다.

  • 클라우디오 로페스Claudio López · 센터 포워드

    2000년에 온 아르헨티나 공격수다. 그해 9월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두 골을 넣었다.

  • 고란 판데프Горан Пандев · 센터 포워드

    2004년부터 다섯 시즌 반 동안 64골을 넣었다. 2009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 톰마소 로키Tommaso Rocchi · 센터 포워드

    2004년부터 아홉 해 동안 105골을 넣고 완장을 찼다. 2009년 베이징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의 결승골이 그의 것이다.

  • 미로슬라프 클로제Miroslav Klose · 센터 포워드

    2011년부터 다섯 시즌을 뛰었다. 2013년 5월 볼로냐전에서 혼자 다섯 골을 넣었고, 2014년 라치오 선수로 세계 챔피언이 됐다.

  • 리오넬로 만프레도니아Lionello Manfredonia · 센터백

    로마에서 난 구단 유소년 출신 수비수다. 1975년부터 열 해에 걸쳐 뛰었다.

기록을 확인한 곳

  1. 구단이 적은 구단사 — SS Lazio 「Storia del Club」. 1900년의 창단과 1927년의 합병 거부, 피올라의 영입과 1941년 더비와 159골, 1974년의 팀, 시뇨리의 노래, 1998년부터 2000년까지의 트로피와 퍼거슨의 회고, 임모빌레의 골든슈와 160번째 골, 2026년의 감독 선임.
  2. 구단이 꼽은 전설과 그 기록 — SS Lazio 「Leggende」. 열한 명 가운데 일곱 사람의 소개와 출전·득점 기록, 라두가 파발리의 기록을 넘은 날, 시뇨리의 1995년 여름.
  3. 구단이 적은 트로피 — SS Lazio 「Palmares」. 트로피의 종류와 해, 2019년 두 결승의 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