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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 FC 문장

유벤투스 FC

Juventus Football Club Società per Azioni
JUVENTUS FOOTBALL CLUB · LA VECCHIA SIGNORA 1897-2026

알리안츠 스타디움 · 세리에 A 우승 36회 · 코파 이탈리아 15회 ·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 리그 2회

유벤투스 FC 역대 최고의 전설 열한 명과 2군 열다섯, 3군 서른아홉, 예순다섯 개의 이름을 필자의 견해로 골랐다.

이탈리아의 여자친구

안드레아 피를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이 3군 이하로 거론되는 팀. 다른 클럽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위계(位階).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팀은 단 한 번도 이탈리아 축구의 심장에서 밀려난 적이 없었다. “이탈리아의 여자친구(La Fidanzata d’Italia)“라는 팀의 애칭은 사랑의 말이면서 팀의 위대함을 방증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탈리아 공화국 전국의 시선은 늘 ’토리노’라는 대도시를 향해 뻗어 있고, 전 세계인들의 시선은 토리노 속 슈퍼스타들의 화려한 발재간에 SNS 좋아요를 연사한다.

사랑과 증오, 숭배와 저항, 무릎 꿇은 상대와 우승의 황홀함까지. 그 모든 복합적인 감정은 비안코네리(Bianconeri; 흰색과 검은색, 곧 유벤투스 사람들)라는 단어에 녹아 있으며, 레알 마드리드, FC 바이에른 뮌헨과 더불어 유럽에서 절대 권력과 권능을 지닌 팀이기도 하다.

그 권력이 어디서 왔는지는 한 줄로 답할 수 없다. 이 구단에는 서로 다른 것이 여러 겹으로 포개져 있다.

처음은 벤치와 학생들이다. 1897년 11월 1일, 토리노 한복판의 큰길 코르소 레 움베르토의 벤치에 고등학생 몇이 모여 앉았다. 마시모 다첼리오 고전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었고 가장 나이 많은 이가 열일곱을 넘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을 라틴어로 ’젊음’이라 지었다. 첫 셔츠는 분홍색이었고, 흰색과 검은색 줄무늬는 1903년 잉글랜드 노팅엄에서 건너왔다.[1] 1905년에 첫 우승을 했다. 그때의 회장인 스위스 사람 알프레트 디크(Alfred Dick; 스위스 기업인, 1865-1909)는 라커 룸의 다툼 끝에 구단을 나가 좋은 외국 선수들을 데리고 토리노 FC를 세웠다. 같은 도시의 맞수가 이 구단의 갈비뼈에서 나왔다.

둘째 겹은 가문이다. 1923년 7월 24일 회원 총회가 박수로 새 회장을 뽑았다. 피아트를 세운 사람의 아들 에도아르도 아녤리(Edoardo Agnelli; 이탈리아 기업인·유벤투스 회장, 1892-1935)다.[1] 그날부터 지금까지 구단의 주인은 한 집안이다. 아들 잔니 아녤리(Gianni Agnelli; 피아트 회장·유벤투스 구단주, 1921-2003)가 1947년에, 그 동생 움베르토 아녤리(Umberto Agnelli; 이탈리아 기업인·유벤투스 회장, 1934-2004)가 1955년에 회장이 됐고, 2010년에는 움베르토의 아들 안드레아 아녤리(Andrea Agnelli; 이탈리아 기업인·유벤투스 회장, 1975-)가 그 자리에 앉았다. 자동차 회사의 구단이라는 말로는 모자란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공장을 가진 집안이 한 세기 동안 한 번도 손을 떼지 않은 구단이다.

셋째 겹은 나라다. 1930년부터 1935년까지 유벤투스는 스쿠데토(scudetto; 세리에 A 우승 팀이 이듬해 가슴에 다는 작은 방패, 곧 리그 우승)를 다섯 번 내리 들었고, 1934년 이탈리아의 첫 월드컵 우승에 선수들을 내줬다. 같은 무렵 남부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토리노의 공장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고향의 구단을 가슴에 둔 채 새 도시에서 이기는 팀을 하나 더 골랐다. 제 고장 사람만 응원하던 이탈리아 축구에서 응원이 지역의 담을 넘은 첫 구단이 유벤투스다. 여자친구라는 애칭이 그 사정을 말한다. 본가가 따로 있어도 마음을 주는 상대를 그렇게 부른다.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응원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구단이다.

애칭은 하나가 더 있다. 늙은 귀부인(La Vecchia Signora)이다. 젊음이라는 이름을 단 구단을 사람들은 늙었다고 부른다. 이름과 별명이 서로 반대를 가리키는 것부터가 이 구단답다.

그래서 넷째 겹이 생긴다. 토리노 안에서 유벤투스는 온전히 토리노의 구단이 아니다. 토박이의 구단은 토리노 FC라는 말이 이 도시에 오래 있었다. 유벤투스의 관중석에는 공장의 주인과, 그 공장의 조립 라인에 서려고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이 함께 앉았다. 계급의 맨 위와 맨 아래가 같은 줄무늬를 입었다.

다섯째 겹은 미움이다. 가장 많이 사랑받는 구단은 가장 많이 미움받는 구단이기도 하다. 2006년 여름 심판 배정을 둘러싼 통화 기록에서 시작한 사건으로 유벤투스는 세리에 B로 내려갔고, 승점 9점이 깎였으며, 앞선 두 시즌의 스쿠데토를 빼앗겼다. 공식 기록의 스쿠데토는 서른여섯 번이다. 구단은 자기 구단사에서 2020년의 우승을 서른여덟 번째라고 적는다.[1] 그 두 개의 차이를 두고 이탈리아의 절반은 지금도 다른 절반과 다툰다.

여섯째 겹은 유럽이다. UEFA가 연 세 개의 클럽 대회를 가장 먼저 다 든 구단이 유벤투스이고, 그 이야기는 축세의 UEFA 플라크 편에서 따로 다뤘다. 그 마지막 조각인 1985년의 유러피언컵은 브뤼셀 헤이젤에서 서른아홉 명이 숨진 밤에 왔다. 구단은 그 우승을 기쁨을 주지 않은 우승이라고 적는다.[1]

이 겹들은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귀족의 구단이면서 이주 노동자의 구단이고, 나라의 구단이면서 제 도시에서는 반쪽의 구단이며, 유럽을 다 가져 본 구단이면서 유럽에서 가장 많이 운 구단이다. 필자는 그 어긋남까지가 유벤투스라고 본다. 그래서 아래의 열한 명도 한 가지 잣대로 읽지 않는다.

경기장 둘레에는 구단이 뽑은 이름을 별에 새긴 명예의 거리가 있다. 그 길은 축행의 토리노 편에 적었다. 구단은 최근 명예의 전당도 따로 만들었는데, 처음 뽑은 쉰 명에 이 글의 열한 명이 모두 들어 있다.[2]

이 명단을 처음 짠 것은 2025년 6월이다. 그 뒤 2025-26시즌에 구단은 10월에 감독 이고르 투도르(Igor Tudor; 크로아티아 수비수·감독, 1978-)를 내보내고 루차노 스팔레티(Luciano Spalletti; 이탈리아 감독, 1959-)를 앉혔으며, 리그를 6위로 마쳤다. 올 시즌의 줄무늬는 유니폼관의 26/27 홈 유니폼 편에 있다.

선정 전술 세 시대를 한 장에 겹친 4-4-2

대형은 4-4-2다. 골문에 부폰을 세웠고, 포백은 왼쪽부터 카브리니, 키엘리니, 시레아, 젠틸레다. 가운데에 플라티니와 타르델리가 나란히 서고, 왼쪽 끝에 네드베트, 오른쪽 끝에 보니페르티가 선다. 앞줄은 찰스와, 그 곁에서 한 걸음 내려선 델피에로다.

이 열한 명 안에는 실제로 한 팀이던 사람들이 세 묶음으로 들어 있다.

가장 큰 묶음은 조반니 트라파토니(Giovanni Trapattoni; 이탈리아 감독, 1939-)의 유벤투스다. 젠틸레와 시레아와 카브리니, 타르델리, 그리고 1982년에 온 플라티니. 다섯이 두 시즌을 꼬박 함께 뛰었고, 이 글의 대형에서도 그때 서던 자리에 그대로 선다. 그 팀의 수비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조나 미스타(zona mista; 대인 방어와 지역 방어를 섞은 수비. 이탈리아식 축구라고도 부른다)라 부르던 방식이었다. 오른쪽의 젠틸레가 상대의 가장 위험한 사람 하나를 맡아 지우고, 맨 뒤의 시레아가 리베로(libero; 맡을 사람 없이 수비 뒤를 쓸고 공격의 첫 패스를 내는 자리)로 남아 뒤를 쓸며, 그 덕에 왼쪽의 카브리니는 풀백이면서 마음 놓고 올라갔다. 한쪽은 잠그고 한쪽은 여는 비대칭이다. 타르델리가 그 사이의 온 운동장을 뛰어 메웠고, 플라티니가 그 위에서 50m짜리 패스를 뿌렸다.

키엘리니는 그 수비에 21세기가 보탠 한 사람이다. 시레아 곁에는 원래 사람을 잡는 센터백이 섰다. 원고가 시레아를 두고 이탈리아의 스리백 전통 속 기둥이라 적은 것도 그 구조를 말한다. 사람을 잡는 일이라면 키엘리니만 한 이가 없다.

둘째 묶음은 1957년에 만들어졌다. 그해 봄 찰스가 왔을 때 구단의 임원들은 이미 보니페르티와 찰스를 한 쌍으로 그리고 있었다. 토리노의 석간은 그 구상을 이렇게 받아 적었다. 이제 보니페르티가 지휘를 맡고 찰스가 뚫는 사람이 된다.[3] 득점왕 출신의 공격수가 서른을 앞두고 한 줄 내려가 공을 나눠 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 글이 보니페르티를 오른쪽 미드필더에, 찰스를 맨 앞에 둔 까닭이 그 한 줄에 있다.

셋째 묶음은 2001년 여름에 한꺼번에 왔다. 구단은 지단을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로 레알 마드리드에 팔았고, 그 돈으로 부폰과 네드베트와 튀람을 샀다.[1] 한 사람을 판 값으로 골문과 왼쪽 날개와 수비를 바꾼 장사다. 델피에로는 그들을 맞은 주장이었다. 부폰, 네드베트, 델피에로는 그 뒤 여덟 시즌을 함께 뛰었고, 그 가운데 한 시즌은 세리에 B였다.

네 줄로 세운 까닭도 그 세 팀에 있다. 트라파토니의 팀도 리피의 팀도 종이에 적으면 넷, 넷, 둘이었다. 다만 좌우가 같지 않다. 왼쪽은 여는 쪽이다. 카브리니가 바깥으로 올라가고 네드베트가 안으로 파고들어 때린다. 오른쪽은 잠그고 푸는 쪽이다. 젠틸레가 뒤에서 한 사람을 지우고, 그 앞의 보니페르티는 날개처럼 달리기보다 안으로 들어와 플라티니와 공을 나눈다. 지휘하는 사람이 둘인 가운데를 타르델리 혼자 뛰어 받친다. 1980년대의 유벤투스가 실제로 그 한 사람의 폐에 기대어 굴러갔다.

뒤의 다섯은 모두 이탈리아 사람이고, 다섯 모두 아주리(Azzurri; 푸른 셔츠, 곧 이탈리아 대표팀)의 셔츠를 입고 큰 대회를 들었다. 시레아와 카브리니와 젠틸레가 1982년에, 부폰이 2006년에 세계 챔피언이 됐고 키엘리니가 2021년에 유럽 챔피언이 됐다. 앞의 여섯은 반반이다. 타르델리와 보니페르티와 델피에로가 이탈리아 사람이고, 플라티니와 네드베트와 찰스가 프랑스와 체코와 웨일스에서 왔다. 이탈리아 사람이 문을 잠그고 바깥에서 온 사람이 수를 놓는 그림은 이 구단이 한 세기 동안 되풀이해 온 살림법이다. 수비를 솜씨로 치는 나라에서 가장 좋은 수비수를 모으고, 그 위에 나라 밖에서 가장 좋은 한두 사람을 얹었다.

세 묶음을 한 장에 겹치면 약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겹쳐도 자리가 없는 사람이 남는다. 부폰이 서면 디노 초프(Dino Zoff)가 앉는다. 플라티니가 서면 지네딘 지단(Zinédine Zidane)과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가 앉는다. 찰스가 서면 그의 짝이던 오마르 시보리(Omar Sívori)가 앉는다. 발롱도르를 받은 사람 셋과 월드컵을 든 주장이 2군이다. 원고가 첫 줄에 위계라는 낱말을 쓴 것은 과장이 아니다.

구단이 스스로 세운 문턱과 견줘 봐도 그렇다. 명예의 전당에 들려면 다섯 가운데 하나를 채워야 한다. 350경기를 뛰었거나, 트로피를 열다섯 개 들었거나, 완장을 일흔 경기 넘게 찼거나, 100골을 넣었거나, 유벤투스의 선수로 발롱도르를 받았거나.[2] 그 문턱을 넘은 사람이 처음부터 쉰 명이었다. 필자의 열한 명은 그 쉰 명 안에서 다시 골랐는데, 고른 잣대는 숫자가 아니었다. 스쿠데토를 다섯 번 내리 든 1930년대의 팀에서는 콤비와 몬티와 오르시가 2군으로 갔고, 아홉 번을 내리 든 2010년대의 팀에서는 피를로와 보누치와 호날두가 3군으로 갔다. 가장 많이 든 두 팀이 이 명단에서는 뒷줄이다.

1. 잔루이지 부폰 - 골키퍼

잔루이지 부폰 골키퍼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유벤투스에서 뛴 해는 2001년부터 2018년까지, 다시 2019년부터 2021년까지다. 코파 이탈리아는 2020-21시즌까지 다섯 번 들었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골키퍼 순위 3위.

전 세계 골키퍼 중 레프 야신과 통틀어 신(神)으로 군림하던 선배 디노 초프를 넘어, 21세기에서는 마누엘 노이어와 함께 2대장으로 분류되는 골키퍼.

파르마, 유벤투스, 파리 생제르맹 그리고 조국 이탈리아를 모두 수호한 21세기 골키퍼의 아이콘으로서 잔루이지 부폰(Gianluigi Buffon; 이탈리아 골키퍼, 1978-)은 2000년대 초반부터 남다른 깜냥을 보여 왔다. 토스카나의 카라라에서 운동선수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고, 열일곱에 파르마의 골문에 처음 섰다. 1995년 11월 AC 밀란을 상대로 한 그 첫 경기를 0-0으로 막았다. 미드필더를 하다가 열두 살에 골문으로 간 아이였다. 그래서 그는 발을 쓰는 데 겁이 없었고, 수비 뒤로 넘어온 공을 벌칙 구역 밖까지 나가 처리했다.

2001년, 유벤투스는 골키퍼에게 매겨진 세계 최고의 이적료를 부수며 잔루이지 부폰을 영입했고, 모두가 “과한 이적료다.“라고 비판했으나 부폰은 경기를 나서고, 시즌을 거듭하며 “헛소리”라고 외려 반박하는 듯하였다. 그 값은 지단을 판 돈에서 나왔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선수를 내보낸 구단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골키퍼를 들였으니, 이 구단이 무엇을 먼저 사는지가 그 여름에 드러났다. 그 기록은 열일곱 해 동안 깨지지 않았다.

첫 시즌에 스쿠데토를 들었고 두 번째 시즌에는 유럽의 끝까지 갔다. 2003년 5월 14일 레알 마드리드와의 준결승 2차전, 유벤투스가 앞서 가던 가장 아슬아슬한 대목에서 루이스 피구(Luís Figo; 포르투갈 미드필더, 1972-)의 페널티킥을 그가 막았다. 이튿날 토리노의 신문은 부폰이 승부를 갈랐다고 적었다.[8] 맨체스터의 결승에서는 승부차기에서 두 개를 막고도 졌다.

그의 선방은 크고 요란하지 않았다. 키 192cm의 몸으로 골문의 한가운데에 서서 공격수가 찰 곳을 먼저 줄였고, 그래도 오는 공에는 손이 늦지 않았다. 수비 뒤에서 내지르는 목소리도 그의 무기였다. 그 목소리가 가장 크게 쓰인 날이 2015년 가을이다. 열 경기를 치르고 12위까지 떨어진 팀이 사수올로에서 또 지자, 주장 부폰과 파트리스 에브라(Patrice Evra; 프랑스 수비수, 1981-)가 라커 룸에서 입을 열었다. 구단은 그 말을 이렇게 줄여 적는다. 이토록 이름 높은 셔츠를 입는 일의 의무와 책임을 일깨운 말이었다고.[1] 그 뒤 스물여섯 경기에서 스물다섯 번을 이겨 다섯 번째 연속 우승을 했다. 그 시즌에 그는 974분 동안 골을 내주지 않았다. 세리에 A가 지금껏 가진 가장 긴 무실점이다.

클럽 통산 685경기에 나서며 무수한 선방과 PK 방어를 선보였고, 특히 2011-12시즌에는 21경기 무실점 기록을 내세우며 유벤투스 철벽 라인의 핵심이 되기도 했었다. 그 시즌 유벤투스는 리그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다.

그 사이에 2006년이 있다. 그해 7월 베를린에서 그는 세계 챔피언이 됐고, 그 대회에서 내준 골은 자책골 하나와 페널티킥 하나뿐이었다. 두 달 뒤 그는 세리에 B의 골문에 서 있었다. 첫 경기는 9월 9일 아드리아 해변의 도시 리미니였다. 관중석이 1만 석도 안 되는 경기장에서 세계 챔피언 셋이 선 유벤투스가 1-1로 비겼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골키퍼가 스물여덟의 나이에 2부 리그를 택한 것이다. 구단사는 그해의 재출발을 떠받친 이름으로 델피에로, 부폰, 카모라네시, 트레제게, 네드베트를 적는다.[1] 권력이 가장 낮아진 해에 남은 사람들이다.

세 차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각각 AC 밀란과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에게 무너졌으나 패배한 경기에서마저도 상대 팀 팬들은 부폰에게 경외의 박수를 보내는 등 개인의 위상과 커리어는 이미 초월한 수준이었다. 열 번의 스쿠데토를 들고도 그 한 개가 없다. 이탈리아 대표로는 176경기에 나서 그 나라의 최다 출전 기록을 세웠다. 그 앞의 기록을 가졌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2군의 초프다. 그는 2018년에 떠났다가 한 해 만에 돌아왔고, 2021년에 다시 떠나 처음의 파르마로 갔으며, 2023년 8월 마흔다섯에 장갑을 벗었다.

2. 가에타노 시레아 - 센터백

가에타노 시레아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유벤투스에서의 출전은 554경기로도 전한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센터백 순위 7위.

AC 밀란의 프랑코 바레시, 인테르의 주세페 베르고미에 대항하는 유벤투스의 수비 아이콘.

수비수가 할 수 있는 ’우아한 플레이’를 모두 갖춘 선수가 있었다면 그는 곧 가에타노 시레아(Gaetano Scirea; 이탈리아 수비수, 1953-1989)일 것이다. “강인함을 품은 지성, 고결함을 몸에 두른 예술.” 이 문장은 시레아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표현인데, 그는 유벤투스 유니폼을 입고 550경기에 나서며 세리에 A, 코파 이탈리아, 유러피언컵,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UEFA컵을 제패한 전 세계 최초의 팀의 리더이기도 하였다.

밀라노 변두리 체르누스코 술 나빌리오에서 시칠리아 출신 아버지를 둔 노동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쪽에서 북쪽 공장으로 올라온 집안의 아이였다. 아탈란타에서 미드필더로 시작했다가 맨 뒤로 내려갔고, 스물하나이던 1974년에 유벤투스로 왔다. 그 뒤 열네 시즌 동안 그는 한 자리에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스리백 시스템 전통 속에서 수비의 기둥이며, 빌드업의 시작점이었는데, “리베로”라는 개념을 전 세계에 다시금 각인시킨 장본인이며, 위대한 인테르(La Grande Inter)의 주장이었던 아르만도 피키를 아득하게 넘어선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하였었다. 피키의 리베로가 맨 뒤에 남아 걷어 내는 사람이었다면 시레아의 리베로는 공을 가지고 올라가는 사람이었다. 1982년 7월 11일 마드리드의 월드컵 결승에서 이탈리아의 두 번째 골이 들어가기 직전, 서독의 벌칙 구역 안에서 공을 주고받던 사람이 이 최후방 수비수다.

그는 1cm도 무리하지 않는 수비의 대명사였고, 그렇기에 경고조차 필요 없는 수비수였으며, 인터셉트는 미술관에 걸어도 될 전술의 브러시였다. 실제로 그는 프로 선수로 뛴 열여섯 해 동안 한 번도 퇴장당하지 않았다. 상대의 발이 공에 닿기 전에 먼저 가 있었으니 몸을 부딪칠 일이 적었다. 목소리가 작았고 말수가 적었으며, 그런 사람이 1980년대 중반 유벤투스의 완장을 찼다. 헤이젤의 밤에 확성기로 관중에게 안내문을 읽은 것도 주장인 그였다. 경기는 치른다, 침착하라, 도발에 응하지 말라, 우리는 여러분을 위해 뛴다. 그 조용한 목소리가 그 밤에 가장 멀리 간 목소리였다.

맨 뒤의 수비수가 유벤투스에서 넣은 골이 서른 골을 넘는다. 올라갈 때를 고르는 눈이 그만큼 정확했다. 대표팀과 구단에서 그는 열 해 가까이 초프와 한방을 썼다. 말이 없기로는 둘이 같았다. 마드리드에서 세계 챔피언이 된 밤, 다른 선수들이 거리로 나갔을 때 두 사람은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한 잔을 나눴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탈리아는 그가 떠난 뒤 본보기가 될 선수 생활을 한 이에게 주는 상을 만들어 그의 이름을 붙였다.

1988년에 그는 축구화를 벗고, 감독이 된 옛 동료 초프의 곁에서 코치가 됐다. 그 이듬해의 일은 토리노의 석간 1면에 남아 있다. 1989년 9월 4일 자의 머리기사 제목은 「시레아가 죽었다(È morto Scirea)」였다. 기사는 이렇게 전한다. 그는 UEFA컵에서 만날 폴란드 구단 구르니크를 살피러 갔다. 전날 낮 12시 50분, 카토비체에서 바르샤바로 가는 길에서 그가 탄 차가 승합차와 정면으로 부딪혀 불이 났다. 차는 폴란드에서 만든 125P였다. 서른여섯이었다.[6] 그 차는 피아트의 설계를 받아 폴란드에서 찍어 내던 차다. 피아트 집안의 구단을 위해 일하러 간 사람이 그 차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기사 곁에는 사진이 한 장 실렸다. 마드리드에서 카브리니와 젠틸레 사이에 선 그가 월드컵에 입을 맞추는 사진이다. 이 글의 포백 가운데 셋이 그 한 장에 있다. 유벤투스는 홈구장의 남쪽 관중석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3. 조르조 키엘리니 - 센터백

조르조 키엘리니 센터백 상세 정보 디자인

부폰, 바르찰리, 보누치와 ‘BBBC’ 라인을 결성하여 이탈리아 최강을 넘어 유럽에서 최강의 수비 라인을 결성하던 리더.

유벤투스에서만 561경기에 나서며, 세리에 A 9회 우승, 코파 이탈리아 5회 우승은 물론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2회에 걸쳐 경험한 조르조 키엘리니(Giorgio Chiellini; 이탈리아 수비수, 1984-). 그는 끝내 UEFA 유로 2020에서 라이벌 잉글랜드를 꺾어 내고, 앙리 들로네 트로피(Coupe Henri Delaunay; UEFA 유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기도 하였었다. 웸블리에서 그 트로피를 받아 든 주장이 그였다.

피사에서 태어나 리보르노에서 자랐고, 2005년 스물을 갓 넘겨 유벤투스의 왼쪽 풀백으로 왔다. 이듬해 구단이 세리에 B로 내려갔을 때 그는 스물둘이었다. 떠날 이름값도 아직 없던 그 젊은 풀백을 2부 리그의 한 시즌과 그 이듬해가 센터백으로 바꿔 놓았다. 유벤투스의 가장 낮은 해가 이 구단의 다음 10년을 지킬 수비수를 만든 것이다.

레프트백과 센터백을 동시에 겸할 수 있었던 키엘리니이기에 스리백과 포백 시스템에서 모두 A급 이상의 기량을 선보이기도 하였으며, 그 기량이 데뷔 초부터 은퇴하던 시기까지 이어졌으니 가히 ’월드클래스’라는 수식어는 사치가 아닌 수준. 2011년에 온 안토니오 콘테(Antonio Conte)가 수비를 셋으로 세우자 그 왼쪽이 그의 자리가 됐다. 오른쪽의 안드레아 바르찰리(Andrea Barzagli), 가운데의 레오나르도 보누치(Leonardo Bonucci), 그 뒤의 부폰. 네 사람의 머리글자가 그대로 수비의 이름이 됐다.

그의 수비는 시레아와 정반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시레아가 닿지 않고 빼앗았다면 키엘리니는 온몸으로 부딪쳐 막았다. 코뼈가 여러 번 부러졌고, 머리에 붕대를 감고 뛴 경기가 한둘이 아니다. 별명이 킹콩인 까닭이다. 공격수를 잡는 일을 즐거워하는 수비수였고 그 즐거움을 감추지 않았다. 이탈리아 말에는 이기려고 부리는 꾀를 가리키는 낱말 말리치아(malizia; 경기에서 부리는 약삭빠른 꾀)가 있다. 2014년 월드컵에서 우루과이 공격수에게 어깨를 물린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그 선수의 그런 꾀를 높이 산다고 적었다. 물린 사람이 문 사람을 알아본 것이다. UEFA 유로 2020 준결승의 승부차기 직전에는 동전 던지기를 하면서 상대 주장을 끌어안고 웃었다. 그 웃음에 말려든 쪽이 졌다. 이탈리아가 오래 길러 온 ’사람 잡는 수비수’의 계보에서 그는 지금까지의 마지막 이름이다. 그런 두 사람이 한 수비선에 서면 한 사람은 쓸고 한 사람은 잡는다. 이 글의 가운데 수비는 그렇게 짜였다.

2012년부터 2020년까지 유벤투스가 스쿠데토를 아홉 번 내리 드는 동안 아홉 번을 모두 든 선수는 그 하나다. 2018년부터는 완장을 찼다. 유럽의 결승과는 끝내 인연이 없었다. 2015년 베를린의 결승은 다리를 다쳐 뛰지 못했고, 2017년 카디프에서는 뛰고 졌다.

참고로 경영학 석사를 지닌 수재라고 한다. 토리노 대학교에서 2010년에 경제·상학 학사를, 2017년에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석사 논문의 주제가 유벤투스라는 구단의 사업 모델이었다. 제 구단을 논문으로 쓴 주장이다. 202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한 시즌 반을 더 뛰고 은퇴했으며, 2024년에 구단의 임원으로 돌아왔다. 줄무늬를 입던 사람이 넥타이를 매고 같은 건물로 출근하는 일은 이 구단에서 낯설지 않다.

4. 안토니오 카브리니 - 레프트백

안토니오 카브리니 레프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유벤투스에서의 기록은 442경기 52골로도 전한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레프트백 순위 9위.

크레모나에서 나고 베르가모에서 핀 꽃, 이탈리아 전역에서 부르던 “아름다운 안토니오”.

축구사 이래 가장 처음으로 ’완성형 레프트백’을 보인 선구자였으며, 대선배 자친토 파케티나 브라질의 니우통 산투스에 비하면 부족할 수 있어도 기량만큼은 밀리지 않던 사내가 안토니오 카브리니(Antonio Cabrini; 이탈리아 수비수, 1957-)였다.

롬바르디아의 크레모나에서 태어나 그 들판에서 자랐고, 고향 구단과 아탈란타를 거쳐 열여덟이던 1976년에 유벤투스로 왔다. 트라파토니가 부임한 바로 그 여름이다. 스무 살에 나간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그는 대회의 신인상을 받았다.

별명은 시칠리아의 소설가 비탈리아노 브란카티(Vitaliano Brancati; 이탈리아 소설가, 1907-1954)의 소설 제목에서 왔다. 잘생긴 사내를 부르는 이탈리아의 오랜 말이다. 구단으로 오는 팬레터가 자루로 쌓였다. 구단의 애칭이 이탈리아의 여자친구인데, 그 구단의 왼쪽 풀백은 한때 이탈리아의 남자친구라 불렸다.

카브리니는 좌측 라인을 우아하게 휘감는 선율이었고, 수비와 공격 사이를 넘나드는 아르페지오였다. 그의 크로스는 회화, 그의 오버래핑은 시적 장치, 그의 태클은 문장 부호였다. 특히 미셸 플라티니와의 조합은 ’왼쪽에서 시작되는 교향곡’이라 할 만했다.

그 오버래핑은 재능이면서 구조였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런 풀백을 테르치노 플루이디피칸테(terzino fluidificante; 공격에 가담해 흐름을 푸는 풀백)라 불렀다. 오른쪽이 사람을 잡고 맨 뒤가 쓸어 주는 수비에서 왼쪽 풀백 하나에게만 올라갈 자유가 주어졌고, 그 자리의 선배가 파케티, 후배가 카브리니다. 수비수가 골을 넣는 일이 드물던 때에 그는 유벤투스에서 쉰 골 넘게 넣었다. 이탈리아 대표 73경기에서 넣은 9골은 지금도 그 나라 수비수 가운데 가장 많다. 그 아홉 골 가운데 하나가 1982년 6월 29일 바르셀로나에서 나왔다. 세계 챔피언 아르헨티나를 2-1로 이긴 경기의 두 번째 골이다. 첫 골은 타르델리가 넣었다. 젠틸레가 마라도나를 지우던 바로 그 오후에, 골은 유벤투스의 왼쪽 풀백과 8번이 넣은 것이다.

이탈리아가 ’전술의 나라’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 이유가 있다면 카브리니에 대한 설명 페이지는 1페이지 이상을 차지해도 괜찮지 않을지 싶다.

1982년 월드컵 결승에서 그는 0-0이던 전반에 페널티킥을 골문 밖으로 찼다. 월드컵 결승에서 페널티킥을 놓친 첫 선수다. 그날 이탈리아는 3-1로 이겼고, 그 실축은 우승한 나라의 웃음 섞인 기억으로 남았다. 놓친 사람이 그 미남이라 더 그랬다. 세 해 뒤 도쿄에서 유벤투스가 세계 챔피언이 됐을 때 트로피를 높이 든 사람 가운데 그가 있었다.[5] 그는 시레아와 함께 UEFA의 클럽 대회를 전부 든 첫 선수다. 1989년에 볼로냐로 떠났다. 시레아가 은퇴한 뒤의 마지막 시즌에는 그가 완장을 찼다. 훗날에는 이탈리아 여자 대표팀을 다섯 해 맡았고, 추리 소설도 한 권 냈다.

5. 클라우디오 젠틸레 - 라이트백

클라우디오 젠틸레 라이트백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유벤투스에서의 출전은 417경기로도 전한다. 디자인에 적은 별명은 본인이 몹시 싫어한 것이다. 까닭은 아래에 적었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라이트백 순위 10위.

이탈리아가 사랑했고, 세계는 두려워했으며, 공격수들은 “경계”가 아닌 “공포”라는 단어를 택했다.

그는 상대 공격수의 드리블을 저지했다기보다 ’공격 전의 상실’을 불러왔고, 슛을 저지했다기보다 ’욕망’을 차단했다. 이 정도로 언급했으면 클라우디오 젠틸레(Claudio Gentile; 이탈리아 수비수, 1953-)가 당대 공격수들에게 얼마나 절망적인 존재였을지 체감될 터.

그는 이탈리아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1953년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시칠리아 출신 아버지 아래 났다. 리비아는 이탈리아가 서른 해 넘게 식민지로 쥐었던 땅이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남아 살았다. 여덟 살에 가족과 함께 본토로 건너와 코모 호숫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 리비아에서 무아마르 카다피(معمر القذافي; 리비아의 통치자, 1942-2011)가 권력을 잡았고, 남아 있던 이탈리아 사람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그의 친척들도 거기 있었다. 동료들은 태어난 곳을 따서 그를 카다피라 불렀다. 그는 그 별명을 견디지 못했다. 그 사람이 이탈리아 사람들과 제 친척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불리고 싶어 한 이름은 성을 줄인 젠토였다. 필자의 디자인에도 그 별명이 적혀 있다. 고쳐 적는 대신 여기에 그 사정을 남긴다.

1973년에 바레세에서 유벤투스로 왔고, 열한 시즌 동안 오른쪽과 가운데에서 상대의 가장 좋은 선수를 맡았다.

1982 FIFA 월드컵, 디에고 마라도나(Diego Armando Maradona; 아르헨티나 공격수, 1960-2020)는 “형벌 같은 맨 마킹”을 받았으며, 전 세계는 이탈리아의 우승보다 젠틸레가 마라도나를 스물세 번 넘게 쓰러뜨렸다는 이야기에 경악했다. 그 숫자는 사람마다 다르게 세지만 그날의 기사는 남아 있다. 6월 29일 바르셀로나, 이탈리아가 세계 챔피언 아르헨티나를 2-1로 이긴 이튿날 토리노의 신문은 제목을 「젠틸레가 마라도나라는 별을 껐다」로 뽑고, 본문에 마라도나가 젠틸레에게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Maradona martellato da Gentile senza pietà)고 적었다.[4] 같은 면에 진 쪽 감독의 말이 실렸다.

이탈리아는 운이 좋았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리가 하는 '축구 아닌 축구'에 말려들었다.

L'Italia ha avuto «suerte», e noi siamo caduti nel «non gioco» praticato dagli azzurri.

아르헨티나 감독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 1982년 6월 29일 바르셀로나에서 이탈리아에 진 뒤. 그는 심판이 마라도나를 충분히 지켜 주지 않았다고도 했다. 『라 스탐파』 1982년 6월 30일 자

세사르 루이스 메노티(César Luis Menotti; 아르헨티나 감독, 1938-2024)가 축구가 아니라고 부른 그것을 이탈리아는 축구의 절반이라 여겼다. 한 사람을 경기에서 지워 열 명과 열 명의 싸움으로 바꾸는 일이다. 엿새 뒤 브라질전에서 젠틸레는 지쿠(Arthur Antunes Coimbra; 브라질 미드필더, 1953-)를 맡았고, 지쿠는 셔츠가 찢어진 채 경기를 마쳤다.

웃긴 게, 이 사실이 마라도나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장치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 위대한 젠틸레가 스물세 번이나 태클을 날렸고, 집요하게 맨 마킹했다는 사실 자체가 마라도나는 그만큼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신화와 어긋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세계에서 가장 거칠다는 말을 들은 이 수비수가 선수 생활을 통틀어 퇴장당한 것은 단 한 번이고, 그것도 경고 두 장이 쌓여서였다. 그는 선을 넘는 수비수가 아니었다. 선이 어디인지를 누구보다 정확히 아는 수비수였다.

아무튼 축구사 이래 가장 집요하고, 가장 전진적이며, 가장 전략적인 선수가 존재했다면 그는 바로 클라우디오 젠틸레였다.

6. 마르코 타르델리 - 중앙 미드필더

마르코 타르델리 중앙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생일은 1954년 9월 24일이다. 위 디자인의 출생일은 젠틸레의 것이다. 유벤투스에서의 기록은 379경기 52골로도 전한다.

필자가 그에게 붙인 말은 “나는 이탈리아다”이다.

유벤투스 통산 376경기에 나서 미드필더치고는 우수한 스탯인 51골을 쌓았던 마르코 타르델리(Marco Tardelli; 이탈리아 미드필더, 1954-)는 1980년대 황금 세대 출신답게 유러피언컵,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UEFA컵을 모두 제패한 선수였다. UEFA가 연 세 대회를 모두 든 첫 선수 가운데 한 사람이다.

토스카나 산골 가르파냐나의 넉넉지 않은 집에서 태어났다. 피사와 코모를 거쳐 스무 살이던 1975년에 유벤투스로 왔는데, 그를 먼저 점찍은 쪽은 인테르였다. 다 된 줄 알던 계약을 보니페르티가 마지막에 가로챘다고 전한다. 좋은 젊은 선수가 나오면 유벤투스가 가장 늦게 움직이고도 가장 먼저 서명을 받던 시절이다.

유벤투스 화양연화(花樣年華)를 직접 이끈 장본인으로서 중원을 가르던 사내였고, 또 질주할 때 그 스피드가 빠르고 체력이 우수하여 팬들은 그를 마라토너처럼 생각하고는 했었다고 한다. 별명 스키초는 튀어 나가듯 뛰는 그 모양에서 왔다. 대표팀 감독 엔초 베아르초트(Enzo Bearzot; 이탈리아 감독, 1927-2010)는 그를 코요테라 불렀다고 한다. 경기 전날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숙소를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낮의 그 질주는 밤의 그 불안과 한 몸이었다.

타르델리는 가장 이탈리아스러웠던 미드필더였는데 강력한 태클은 기본이요 기술적으로 능숙하고 우아하여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 자주 기용됨은 물론 중앙, 공격, 측면까지 모두 소화하니 가히 올라운더이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풀백이었다. 사람을 잡는 법을 먼저 배운 선수가 가운데로 올라왔으니, 그는 상대의 10번을 지우다가 공을 빼앗는 순간 그대로 벌칙 구역까지 뛰어 들어갔다. 트라파토니의 팀에서 한쪽을 잠그고 한쪽을 여는 수비가 굴러가려면 그 사이의 빈 땅을 혼자 메울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 사람이 그다.

구단의 첫 유럽 트로피에 그의 골이 있다. 1977년 UEFA컵 결승 1차전, 아틀레틱 클루브를 1-0으로 이긴 골이다. 그때의 유벤투스는 열한 명이 전부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그리고 1982년 7월 11일 마드리드. 월드컵 결승 후반 24분, 벌칙 구역 끝에서 넘어지며 왼발로 찬 공이 서독의 골문에 들어갔다. 그는 두 주먹을 쥐고 고개를 흔들며 무어라 외치면서 달렸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 장면을 ’타르델리의 절규’라 부른다. 테러와 납치로 얼룩진 10년을 막 지나온 나라가 그 몇 초를 제 얼굴로 삼았다. 그날의 선발에 유벤투스 선수가 여섯이었다. 초프, 젠틸레, 카브리니, 시레아, 타르델리, 로시. 구단은 그 대표팀이 트라파토니의 팀을 많이도 닮았다고 적는다.[1] 나라의 얼굴이 된 장면의 주인이 유벤투스의 8번이었다. 이탈리아의 여자친구라는 말이 가장 글자 그대로였던 여름이다.

1985년 유러피언컵을 든 여름에 그는 인테르로 떠났다. 열 해 전에 가지 않았던 그 구단이다. 은퇴한 뒤에는 이탈리아 21세 이하 대표팀을 맡아 2000년 유럽 챔피언으로 만들었다. 그 뒤 같은 자리를 물려받은 사람이 젠틸레다. 마드리드의 두 사람이 다음 세대의 아주리를 차례로 길렀다.

7. 미셸 플라티니 - 공격형 미드필더

미셸 플라티니 공격형 미드필더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유벤투스에서의 기록은 224경기 104골로도 전한다. 유럽 축구 연맹 회장으로 일한 해는 2007년부터 2015년까지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공격형 미드필더 순위 3위.

설명조차 사치스러운 프랑스 축구의 왕.

축구가 내려준 천부의 필연, ’레블뢰’의 상징을 넘어, 유벤투스 역사상 가장 정제된 축구의 형태.

세리에 A 우승 2회, 코파 이탈리아 우승 1회, 유러피언컵 우승 1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1회, 인터콘티넨털컵 우승 1회, 발롱도르 3연패, 유벤투스 통산 224경기 104골, 프랑스 축구사 3대장 중 한 명. 이 모든 장치들은 미셸 플라티니(Michel François Platini; 프랑스 미드필더, 1955-)를 설명할 때 블로그나 유튜브, 혹은 위키 등에서 설명되는 성과들이다.

그는 AS 낭시에서 데뷔하고, AS 생테티엔을 거쳐 유벤투스까지 당도하던 모든 시즌에서 발롱도르 순위권에 올랐으며, 프랑스에서는 이미 10대 시절부터 슈퍼스타였고, 대놓고 “올해의 프랑스인” 수상을 아낌없이 받아 왔던 미드필더였다.

그의 패스는 호흡의 맥락을 가진 문장과 같았고, 그의 슈팅은 침묵으로 도배된 마침표였다.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은 그의 플레이를 설명하기엔 너무 조악했다. 구단도 그를 비슷하게 적는다. 움직임이 우아하고, 고개를 들고 뛰며, 50m짜리 패스를 동료의 발 앞에 리모컨으로 조종하듯 떨구고, 골을 넣는다. 많이.[1] 10번을 단 미드필더가 세 시즌 내리 세리에 A 득점왕이었다. 세계에서 수비가 가장 촘촘하다던 리그에서다. 발롱도르도 1983년부터 세 해를 내리 받았다. 세 번을 잇달아 받은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그 사이의 여름인 1984년에는 프랑스의 주장으로 제 나라에서 열린 UEFA 유로를 들었고 다섯 경기에 아홉 골을 넣었다. 그 아홉 골도 유벤투스의 선수로 넣은 것이다.

그는 토리노가 허락한 프랑스인, 이탈리아의 연인, 그리고 한 시대를 끝내고 스스로 전설을 거둬 간 왕(Le Roi)이었다. 토리노가 허락했다는 말에는 핏줄의 사정이 있다. 그의 할아버지는 피에몬테의 시골에서 프랑스 로렌의 광산 마을로 일하러 건너간 이탈리아 사람이다. 남쪽 사람들이 토리노의 공장으로 올라오던 것과 같은 까닭으로, 한 세대 먼저, 국경 너머로 간 것이다. 그 손자가 1982년 여름 프랑스의 10번이 되어 할아버지의 땅으로 돌아왔다. 계약이 끝나 가던 선수라 값은 헐했다. 잔니 아녤리는 빵 한 조각 값에 사 왔더니 그가 그 위에 푸아그라를 얹었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야기가 하나 더 전한다. 하프 타임에 담배를 피우는 그를 보고 구단주가 놀라자 그가 답했다는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중요한 건 보니니가 안 피우는 겁니다. 뛰는 건 그 친구니까요. 그의 뒤에서 대신 뛰던 미드필더의 이름이다. 왕은 제가 뛰지 않아도 되는 까닭을 알고 있었다.

왕의 치세에는 유벤투스의 가장 어두운 밤이 들어 있다. 1985년 5월 29일 브뤼셀, 서른아홉 명이 숨진 뒤에 치른 결승에서 그가 페널티킥으로 유일한 골을 넣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8일 도쿄. 인터콘티넨털컵에서 그는 가슴으로 받은 공을 수비수 머리 위로 넘기고 떨어지기 전에 차 넣었는데 심판이 그 골을 지웠다. 그는 항의하지 않고 잔디 위에 모로 누워 턱을 괴었다. 구단은 그 골을 축구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골 가운데 하나라고 적는다.[1] 승부차기의 마지막 공도 그가 넣었다. 이튿날 토리노의 석간은 유벤투스의 트로피 진열실에 이제 빠진 것이 없다(Non manca più nulla nella sala dei trofei della Juventus)고 썼다.[5] 같은 기사에 묘한 대목이 있다. 그 자리에 이탈리아 축구 협회에서도, 리그에서도, UEFA에서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계의 끝까지 가서 다 가진 날에 정작 축구의 관청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 필자가 사랑과 증오를 한 문장에 묶어 쓴 까닭이 이런 데 있다.

그는 1987년 서른둘을 앞두고 스스로 그만뒀다. 그 뒤로 프랑스 대표팀 감독이 됐고, 2007년에는 UEFA의 회장이 됐다. 유벤투스의 10번이 유럽 축구의 맨 윗자리까지 간 것이다. 그의 시대가 끝난 이후 바조와 지네딘 지단의 1990년대, 델피에로의 2000년대, 호날두의 2010년대 모두 플라티니의 발끝에 도달한 자가 없었다.

8. 파벨 네드베트 - 레프트 윙

파벨 네드베트 레프트 윙 상세 정보 디자인

디자인 정정 그림에 적힌 한글 이름은 이 사이트의 표기로 네드베트다. 구단 부회장으로 일한 해는 2015년부터 2022년까지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레프트 윙 순위 9위.

유벤투스 축구사의 발롱도르 여덟 번, 그 여섯 수상자 중 한 명.

용맹, 헌신, 그리고 철인. 그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단어 정도는 메모장에 켜 둔 뒤 키보드를 투닥거리는 게 이치에 맞다. 머리칼은 황금빛이었지만, 그 속에는 ’쇳조각이 박힌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그라운드를 누비던 윙어가 파벨 네드베트(Pavel Nedvěd; 체코 미드필더, 1972-)다. 그가 유벤투스에 오기 전의 다섯 시즌은 SS 라치오 역대 베스트 11에 적었다. 두 구단의 열한 명에 모두 드는 사람이다.

지네딘 지단이 스페인으로 향할 때, 그 대체자로서 영입된 파벨 네드베트인데 훗날 팬들이 ’지단 대 네디’의 평가를 할 때 대다수가 후자를 선택할 만큼 그 영향력이 무지막지했던 선수였다. 지단은 유벤투스에서 발롱도르를 받고도 유럽의 결승에서 두 번 졌다. 네드베트는 그 결승에 나가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토리노는 뒤의 사람을 더 제 사람으로 친다. 재능이 덜해서 더 뛴 사람을 이 구단의 관중석은 알아본다. 공장의 도시에서 일요일을 기다린 사람들의 눈이다.

왼쪽 윙어로 분류되는 편이나 사실상 좌우, 중앙을 자유로이 넘나든 ’중원 박동기’로서 양발을 모두 자유자재로 다루며 크로스, 미들슛, 태클, 수비 가담 등 모든 면에서 완전무결한 박스 투 박스 전사였던 것이 바로 네드베트이기도 하다. 마르첼로 리피(Marcello Lipp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48-)는 첫 시즌 도중에 그를 왼쪽에서 가운데의 공격수 뒤로 옮겼고, 팀은 그때부터 달라졌다. 그 시즌의 스쿠데토는 마지막 날에 왔다. 2002년 5월 5일, 선두 인테르가 로마에서 무너지는 동안 유벤투스는 우디네에서 15분 만에 일을 끝냈다.[1] 한 해 전까지 라치오의 선수였던 그는 그날 라치오가 인테르를 꺾어 준 덕에 첫 유벤투스 우승을 들었다.

그의 유벤투스는 한 경기로 줄일 수 있다. 2003년 5월 14일 준결승 2차전, 상대는 지단이 뛰는 레알 마드리드였다. 1차전을 1-2로 진 유벤투스가 트레제게와 델피에로의 골로 앞섰고, 후반에 네드베트가 뒤에서 넘어온 긴 공을 달려가며 차 넣어 3-0을 만들었다. 이튿날 토리노의 신문은 유벤투스가 이토록 즐겁게 위대했던 적이 없다고 썼다.[8] 그리고 종료를 몇 분 앞두고 그는 가운데 선 근처에서 하지 않아도 될 태클을 했다. 경고였다. 쌓인 경고 때문에 결승에 나갈 수 없게 됐다.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울었다. 제 손으로 결승을 열고 제 발로 결승에서 빠진 것이다. 체코의 분노라는 별명이 그날은 그를 삼켰다. 맨체스터의 결승에서 유벤투스는 그 없이 승부차기 끝에 졌고, 그해 겨울 발롱도르는 그에게 왔다.

2006년 그는 서른넷을 앞두고 있었다. 세리에 B로 내려간 구단을 떠나도 누구 하나 탓하지 않았을 나이와 이름값이었다. 그는 남았고, 2부 리그의 운동장에서도 같은 속도로 뛰었다. 마지막 경기는 2009년 5월 31일이다. 완장을 차고 나선 그 경기의 상대는 공교롭게도 라치오였다.

은퇴한 뒤에는 구단의 부회장이 됐다. 2022년 11월 구단의 회계를 둘러싼 수사 속에서 이사회가 통째로 물러날 때 그도 함께 물러났다. 이 구단에서는 운동장의 영광도 사무실의 그늘도 같은 사람들이 나눠 진다.

9.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 라이트 윙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유틸리티 플레이어 상세 정보 디자인

평생을 유벤투스로 살았던 사내.

1944-46년: 유벤투스 FC 유소년 팀. 1946-61년: 유벤투스 FC 데뷔 후 은퇴. 1971-90년: 유벤투스 FC 회장. 2006-21년: 유벤투스 FC 명예 회장.

위 네 줄은 잠피에로 보니페르티(Giampiero Boniperti; 이탈리아 공격수·유벤투스 회장, 1928-2021)의 경력이며, 위 네 줄을 통해 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설명은 “더 이상 필요 없음”이라는 것이다.

피에몬테 노바라 곁의 시골 바렌고에서 태어났다. 열여덟이던 1946년 봄 이웃 마을의 작은 구단에서 유벤투스로 올 때 든 값이 6만 리라였다. 스물다섯 해 뒤 그가 회장이 되던 날 토리노의 신문은 그 값을 제목으로 뽑았다. 「6만 리라짜리 회장」.[10] 구단주 집안의 젊은 주인 잔니 아녤리가 골을 넣을 때마다 암소를 한 마리씩 주기로 했고, 농사꾼의 눈을 가진 소년이 새끼 밴 소만 골라 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토리노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구단주와 선수의 사이가 주인과 일꾼이면서 한집안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오마르 시보리, 존 찰스와 함께 1950년대 ’트리오 마지코(Trio Magico; 마법의 삼총사)’를 형성해 이탈리아 무대를 휩쓸어 버렸던 잠피에로 보니페르티는 1947-48시즌에 세리에 A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을 만큼 득점 생산 능력 역시 가공할 만큼 매서운 편이었다. 열아홉의 나이에 27골이었다.

465경기에 나서 185골을 넣는 동안 사실상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다재다능함을 보였으며, 이는 팀 동료 존 찰스나 레알 마드리드의 알프레도 디스테파노와 비슷한 유형이었다. 때문에 축구사 이래 몇 안 되는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정의된다. 맨 앞에서 시작해 오른쪽 날개로, 다시 가운데의 지휘자로 내려갔다. 그의 오른쪽을 먼저 알아본 것은 유럽이다. 1953년 10월 21일 런던 웸블리에서 유럽 선발이 잉글랜드와 4-4로 비긴 경기에 그는 오른쪽 날개로 나서 전반에만 두 골을 넣었다.[9] 찰스와 시보리가 오자 그는 넣는 일을 두 사람에게 넘기고 주는 사람이 됐다. 1961년 6월 10일 인테르를 9-1로 이긴 경기가 마지막이다. 시보리가 여섯 골을 넣은 그날, 맞은편에서 프로 첫 경기를 치른 소년이 산드로 마촐라(Alessandro Mazzola; 이탈리아 미드필더, 1942-2026)였다. 경기가 끝난 뒤 회장 움베르토 아녤리가 기자들 앞에 섰다. 보니페르티가 오늘로 선수 생활을 마치기로 했다, 몹시 아쉽다, 구단에 바친 16년과 그 가운데 주장으로 보낸 10년을 잊을 수 없다, 마음을 돌려 보겠지만 돌리지 못해도 그는 임원으로 유벤투스라는 집안에 남는다.[9] 서른둘이었다. 축구화를 용품 담당에게 건네며 다 끝났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한다. 회장이 쓴 낱말은 집안이었다.

이기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다.

Vincere non è importante, è l'unica cosa che conta.

잠피에로 보니페르티의 말로 전한다. 유벤투스가 구단의 표어로 쓴다

필자는 예전 원고에서 이 문장을 “이기는 게 전부는 아니다”라고 옮겼는데 뜻이 정반대였다. 이기는 것 말고는 셀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가 이 말을 언제 어디서 처음 했는지는 필자가 찾아본 옛 신문에서 확인하지 못했다. 미국의 미식축구 감독들 사이에서 먼저 돌던 문장과 꼭 닮았다는 점도 적어 둔다. 분명한 것은 구단이 이 문장을 제 것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유벤투스 공식 누리집은 없는 쪽을 찾아 들어간 사람에게 이렇게 안내한다. 첫 화면으로 돌아가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다. 오류 안내문까지 그의 말투를 흉내 낸다.

유벤투스 FC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대가 있다면 그가 선수로 나서던 1950년대, 그가 회장으로 군림하던 1970-80년대일 텐데, 그가 내세웠던 이 문장은 21세기 마시밀리아노 알레그리(Massimiliano Allegri; 이탈리아 감독, 1967-) 시대, 포스트 알레그리 시대 전체에 걸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었다. 그는 1971년 7월 13일에 회장이 됐다. 구단의 열세 번째 회장이다. 뽑힌 직후의 첫마디가 이튿날 신문에 실렸다.[10]

선수로 스쿠데토를 다섯 번 들었다. 이제 회장으로 하나를 들고 싶다. 그게 틀림없이 가장 아름다울 것이다.

Ho vinto cinque scudetti come giocatore, adesso vorrei conquistarne uno come presidente. Sarebbe certamente il più bello.

잠피에로 보니페르티, 1971년 7월 13일 유벤투스 회장으로 뽑힌 직후. 『라 스탐파』 1971년 7월 14일 자

하나를 바란 사람에게 그 뒤 열아홉 해 동안 스쿠데토 아홉 번과 유럽의 모든 트로피가 들어왔다.[1] 같은 날의 신문은 옛 동료 시보리가 그를 두고 하던 빈정거림도 적어 두었다. 보니는 언제쯤 앞에 나서서 제 책임을 질 건가.[10] 선수 시절부터 그는 구단의 안쪽 사람이었고, 동료들은 그것을 알았다. 그는 선수들의 계약을 직접 쥐었다. 여름마다 한 사람씩 방으로 불러 금액 칸이 빈 계약서를 내밀었다는 이야기, 머리를 짧게 깎으라고 했다는 이야기, 더비는 전반만 보고 경기장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돈다. 구단주는 아녤리였으되 구단의 얼굴은 그였다.

그의 시대에는 제도의 사정도 겹쳐 있다. 이탈리아 축구는 1966년 월드컵에서 북한에 지고 탈락한 뒤 외국 선수를 새로 들이지 못하게 막았고, 그 문은 1980년에야 다시 열렸다. 문이 닫힌 열네 해 동안 그는 이탈리아의 젊은 재능을 가장 부지런히 모았다. 구단이 꼽는 이름이 초프, 시레아, 타르델리, 카브리니, 카우시오, 로시, 젠틸레, 푸리노, 아나스타시, 베테가다.[1] 나라가 선수 시장의 문을 잠그자 그 안에서 가장 돈이 많고 눈이 밝은 구단이 나라의 대표팀을 통째로 품게 된 것이다. 1982년의 여섯 사람은 그렇게 한 구단에 모였다. 문이 열리자 그는 플라티니를 데려왔다.

이 줄무늬를 입는 일은 책임이다. 그 책임을 인생 전체로 보여 준 남자. 레알 마드리드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있다면, 유벤투스에는 이 자가 존재한다. 2021년 6월 18일 토리노에서 아흔둘에 세상을 떠났다.

10.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 세컨드 스트라이커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세컨드 스트라이커 상세 정보 디자인

유벤투스 FC를 마치 사랑하는 여인네 다루듯이 대했던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

왕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알레산드로 델피에로(Alessandro Del Piero; 이탈리아 공격수, 1974-)는 한 시대의 끝이며, 모든 낭만의 시작이라는 평을 듣는 공격수이다. 그의 축구에는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기품, 여운, 아름다움이 묻어 있었고, 때문에 오늘날 유베 팬들이 팀의 GOAT를 논할 때 “다 필요 없고, 그냥 델피에로”라고 외치는 것이 ’무지성’이 아니라 ’지성’을 갖춘 답임을 알아낼 수 있게 된다.

베네토의 작은 마을에서 전기 기술자의 아들로 자랐고, 파도바를 거쳐 열여덟이던 1993년에 왔다. 구단은 그때의 그를 이렇게 적는다. 기술이 눈에 띄고 곧바로 뚜렷한 성깔을 보인 젊은이, 구단의 모든 기록을 새로 쓸 사람.[1]

유벤투스 소속으로 705경기에 나서며 290골을 쏘아 댄 델피에로는 당연하게도 팀 통산 역대 최다 출전 및 최다 득점자로 남아 있고, 1995년과 1996년에 걸쳐 발롱도르 4위에 오르며, 당시 팀의 세리에 A와 UEFA 챔피언스 리그 무대를 아주 높은 곳까지 끌어올리기도 하였었다. 1996년 5월 로마에서 유럽 챔피언이 됐고, 그해 11월 도쿄에서는 그의 골 하나로 세계 챔피언이 됐다. 그 앞에 선택이 하나 있었다. 1995년 여름 구단은 발롱도르를 받은 10번 바조를 AC 밀란에 보내고 스무 살의 그에게 그 번호를 줬다. 라파엘로를 내보내고 핀투리키오를 남긴 것이다.

Zona Del Piero. 벌칙 구역 왼쪽 모서리에서 안으로 접고 먼 쪽 골대로 감아 차는 예술적인 ’델피에로 존’은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의 교과서와 같았다. 환상적인 득점, 날카로운 패스, 그리고 영혼을 울리는 플레이를 수없이 선사한 그는 “치명적일 만큼 부드러운” 플레이로서 당시 관중과 TV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마치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마저 선물해 주기도 하였었다.

그를 일컬어 핀투리키오라 불렀다. 그의 별명 중 가장 유명한 별명이다. 필자는 예전 원고에 라파엘로가 제자 핀투리키오에게 붓을 물려준 것처럼이라고 적었는데 미술사로는 맞지 않는다. 핀투리키오(Pinturicchio; 움브리아의 화가 베르나르디노 디 베토의 별명, 1454년경-1513)는 라파엘로보다 서른 살쯤 위다. 별명을 붙인 사람은 잔니 아녤리다. 그는 바조를 축구의 라파엘로라 불렀고, 그 뒤를 이은 젊은이에게는 한 단 아래로 치는 화가의 이름을 줬다. 스무 살의 델피에로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1995년 9월 16일 자 토리노의 신문에 그 실랑이가 실려 있다. 델피에로가 먼저 말했다. 그 화가의 그림을 봤는데 나는 핀투리키오가 좋지 않다.[7] 구단주가 답했다.

그를 핀투리키오에 견준 것은 모욕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든 그 화가의 그림을 무척 좋아한다. 내게 그는 대단한 화가였다. 그러니 델피에로는 내 말이 그를 깎아내린 것이라 여기지 말라. 오히려 그 반대다.

Non era un'offesa accostarlo a Pinturicchio. Io ho una grande ammirazione per i quadri del pittore da me citato. Per me è stato immenso. Perciò Del Piero non creda che la mia definizione sia riduttiva. Anzi...

잔니 아녤리, 자신이 붙인 별명을 델피에로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라 스탐파』 1995년 9월 16일 자

구단주가 선수에게 화가의 이름을 내리고, 선수는 그 그림이 싫다고 신문에 말하고, 구단주가 다시 신문으로 달랜다. 다른 구단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대화다. 이 구단에서 선수는 가문이 아끼는 작품이기도 했다. 세 해 뒤 무릎을 크게 다친 그가 좀처럼 돌아오지 못하자 아녤리는 그를 고도라 불렀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의 이름이다. 별명 둘이 다 애정이면서 값을 매기는 말이었다.

그 값을 그는 2006년에 치렀다. 그해 7월 4일 도르트문트의 월드컵 준결승에서 그는 연장이 끝나기 직전 독일의 골문에 두 번째 골을 꽂았다. 세계 챔피언이 된 여름에 구단은 2부로 내려갔고, 그는 기사는 숙녀를 떠나지 않는다(Un cavaliere non lascia mai una signora)고 말하고 남았다. 숙녀는 유벤투스의 오랜 별명인 ’늙은 귀부인’이다. 그 시즌 세리에 B의 득점왕이 됐고, 이듬해에는 서른셋에 세리에 A의 득점왕이 됐다.[1] 2008년 11월 마드리드의 베르나베우에서 두 골을 넣고 물러날 때는 상대의 관중이 일어나 박수를 쳤다.

2012년 5월 13일 마지막 홈경기에서 그가 교체되어 나갈 때, 경기가 진행 중인데도 모든 팬들이 일어나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고 경기는 그 곁에서 이어졌다. 그날은 한 시대의 종언이었다. 떠나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그 시즌이 마지막이라는 것은 그 전해 가을 주주 총회에서 회장의 입으로 먼저 알려졌다. 숙녀를 떠나지 않은 기사를 숙녀의 집안이 먼저 보낸 것이다. 필자가 그를 유벤투스의 마지막 왕이라 부르는 까닭에는 그 끝도 들어 있다.

11. 존 찰스 - 센터 포워드

존 찰스 유틸리티 플레이어 상세 정보 디자인

포지션이란 게 무색할 만큼 전 포지션에 걸쳐 월드클래스였던 자. 영연방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The Gentle Giant”. 존 찰스(William John Charles; 웨일스 공격수·수비수, 1931-2004)는 축구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이중 전설이다. 공격과 수비, 두 포지션 모두에서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 선수는 그를 제외하곤 사실상 없다고 봐도 된다. 어쩌면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펠레, 리오넬 메시보다 우위에서 평가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센터백으로도 발롱도르급. 스트라이커로도 득점왕급.

웨일스 남쪽의 항구 스완지에서 태어나 잉글랜드의 리즈에서 컸다. 1957년 4월, 유벤투스는 당시 영국 선수에게 매겨진 가장 큰돈인 6만 5천 파운드를 치르고 그를 데려왔다. 그가 토리노에 내리던 날의 석간이 남아 있다. 런던에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영국 기자 셋이 있었고, 세 신문이 하루에 찍는 부수를 더하면 950만 부였다. 그 가운데 한 기자가 토리노의 기자에게 찰스를 이렇게 일러 줬다.[3]

긴 공만 넣어 주시오. 나머지는 존이 알아서 할 거요. 골 감각을 타고난 사람이오.

Dategli solo dei palloni lunghi, al resto penserà John. Ha il senso del goal innato.

찰스와 함께 런던에서 날아온 영국 기자가 토리노의 기자에게, 1957년 4월. 그는 찰스가 토미 로턴보다 호감이 가는 까닭을 로턴이 얻던 결과를 악의 없이 얻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스탐파 세라』 1957년 4월 24일 자

악의 없이. 그 한마디가 다섯 해 뒤에는 그의 이탈리아 이름이 된다. 온순한 거인(Il Gigante Buono)이다. 기자가 견준 토미 로턴(Tommy Lawton; 잉글랜드 공격수, 1919-1996)은 그 앞 시대 영국의 가장 이름난 9번이다.

1957-58시즌 세리에 A 득점왕에 오르던 존 찰스는 바다 건너에서 온 에이스로서 당대 이탈리아 팬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는데, 때문에 그는 선수 기간 중 “킹 존”으로 불렸었다. 첫 시즌에 28골이었고, 그 골로 유벤투스는 열 번째 스쿠데토를 들어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가슴에 별을 달았다.[1] 그가 온 1957년은 피아트가 500을 내놓은 해다. 이탈리아가 처음으로 자동차를 사는 나라가 되던 때에, 그 자동차를 만드는 집안이 영국에서 가장 비싼 선수를 사 왔다. 전쟁에 진 나라가 한 세대 만에 무엇을 살 수 있게 됐는지를 사람들은 운동장에서도 봤다. 그를 사 온 회장 움베르토 아녤리는 그때 스물둘이었다. 같은 여름에 아르헨티나에서 시보리도 왔다. 시보리는 상대를 놀리고 싸움을 거는 천재였고, 찰스는 그를 말릴 수 있는 한 사람이었다. 경기 중에 흥분한 시보리의 뺨을 찰스가 한 대 쳐서 가라앉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작은 사람이 불을 붙이고 큰 사람이 끄는 앞줄이었다.

수비수로 뛰다가 스트라이커로 전향한 그는 두 포지션 모두 전설적인 커리어를 갖게 되었는데, 플레이에 반칙이 없었고 심지어 경고 하나 받지 않은 채 커리어를 마무리했다는 일화는 존 찰스를 도덕적 존재로 신격화시키기에 충분했었다. 188cm에 90kg 가까운 몸이었다. 그 몸으로 부딪치면 다치는 쪽은 늘 상대였으니, 그는 부딪치지 않는 법을 익혔다. 더비에서 골문 앞까지 혼자 몰고 가다가, 저와 부딪쳐 쓰러진 수비수를 보고 공을 밖으로 차 냈다는 이야기가 토리노에 전한다. 이기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구단이 가장 사랑한 외국인이 이기는 것보다 먼저인 것이 있다고 몸으로 말한 사람이다. 이 구단의 두 얼굴이 한 앞줄에 선다.

득점 기계, 공중전의 제왕, 전술적 리더,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존재. 이로써 설명되는 존 찰스는 이탈리아식 축구의 미학과 영국식 축구의 파워를 한 몸에 품은 존재로서 이탈리아 땅을 누볐으며, 때문에 1997년, 유벤투스는 그를 향해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라는 존경을 표했다. 구단이 100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다섯 시즌 182경기 105골. 앞에서 넣다가 팀이 앞서면 맨 뒤로 내려가 지키는 날도 있었다. 그 사이인 1958년 여름에 그는 웨일스를 그 나라의 첫 월드컵 8강까지 끌고 갔다. 정작 8강 브라질전에는 앞 경기에서 걷어차인 다리 때문에 나서지 못했다. 그 경기를 1-0으로 정한 골이 열일곱 살 펠레의 월드컵 첫 골이다. 2004년 2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그해 1월 이탈리아의 방송에 나가려고 밀라노에 왔다가 쓰러진 것이 마지막 이탈리아 길이었다.

줄무늬는 누구의 것인가

유벤투스 FC 역대 베스트 11 표제 4-4-2 대형으로 배치한 유벤투스 FC 역대 베스트 11 유벤투스 FC 역대 베스트 11 2군 명단 15인 편집물 유벤투스 FC 역대 베스트 11 3군 명단 39인 편집물
표제, 열한 명의 대형, 2군 명단 15인, 3군 명단 39인. 1921년에 골문에 선 콤비부터 2018년에 온 호날두까지 예순다섯 명이 한 흐름에 들어간다.

열한 명을 다 적고 나면 처음의 겹들이 사람의 얼굴로 다시 보인다.

가문의 겹에는 보니페르티와 델피에로가 있다. 한 사람은 암소를 받던 소년에서 구단의 얼굴이 됐고, 한 사람은 화가의 이름을 받고 끝내 그 집안의 손에 보내졌다. 나라의 겹에는 1982년의 넷이 있다. 시레아, 카브리니, 젠틸레, 타르델리. 이주의 겹은 뜻밖에 넓다. 시칠리아에서 올라온 노동자의 아들 시레아, 트리폴리에서 건너온 젠틸레, 피에몬테를 떠난 할아버지의 땅으로 돌아온 플라티니. 이탈리아의 20세기를 움직인 것이 사람들의 이동이었다면, 그 이동이 닿은 곳마다 이 줄무늬가 있었다.

유럽의 겹은 기쁨과 울음이 한 사람 안에 있다. 플라티니는 헤이젤과 도쿄를 둘 다 가졌고, 네드베트는 준결승의 골과 경고를 한 경기에 가졌으며, 부폰은 결승 세 번을 다 졌다. 가장 낮은 해의 겹에는 넷이 있다. 부폰과 키엘리니와 네드베트와 델피에로가 2006년 가을 세리에 B의 운동장에 함께 있었다. 그리고 미학의 겹에서는 닿지 않고 빼앗던 시레아와 온몸으로 막던 키엘리니가, 반칙을 모르던 찰스와 지우는 일이 직업이던 젠틸레가 나란히 선다.

한 사람이 여러 겹에 걸친다. 플라티니는 이주와 가문과 유럽에 다 걸리고, 시레아는 이주와 나라와 미학에 걸리며, 델피에로는 가문과 가장 낮은 해에 걸린다. 그래서 이 열한 명에게서 유벤투스다움을 하나만 뽑아내려 하면 꼭 누군가가 빠진다. 이기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문장으로 묶으면 찰스가 남고, 충성으로 묶으면 팔려 온 사람들과 보내진 사람이 남고, 이탈리아로 묶으면 프랑스 사람과 체코 사람과 웨일스 사람이 남는다. 필자는 묶지 않기로 했다.

감독 자리는 비워 둔다. 트라파토니와 리피, 콘테와 알레그리, 그리고 그들보다 먼저 다섯 번을 내리 든 1930년대의 감독까지, 이 구단은 감독보다 오래가는 것이 따로 있는 구단이다.

처음에 적은 물음으로 돌아간다. 이 구단의 권력은 어디서 오는가. 열한 명을 다 쓰고 난 필자의 답은 처음보다 길어졌다. 공장과 가문에서 오고, 남쪽에서 올라온 사람들의 일요일에서 오고, 마드리드의 여름과 브뤼셀의 밤에서 오고, 지단을 판 돈과 2부로 따라 내려간 사람들에게서 온다.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빼도 유벤투스는 유벤투스가 아니다.

사랑과 증오, 숭배와 저항.흰색과 검은색이 129년 동안 불러 온 예순다섯 개의 이름.

2군과 3군, 쉰넷

2군 명단 열다섯과 3군 명단 서른아홉을 글자로 다시 적되 포지션은 그림에 적은 대로 두었다. 다른 구단이라면 열한 명에 들었을 이름이 여기서는 줄을 선다.

2군 명단 15인

  • 잔피에로 콤비Gianpiero Combi · 골키퍼

    1921년부터 열세 해를 유벤투스에서만 뛰었다. 1934년 이탈리아의 첫 월드컵을 주장으로 들었다.

  • 디노 초프Dino Zoff · 골키퍼

    1972년 서른에 와서 열한 시즌 동안 리그 경기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1982년 마흔에 월드컵을 주장으로 들었다.

  • 치로 페라라Ciro Ferrara · 센터백

    1994년 나폴리에서 와서 열한 시즌을 뛰었다. 1996년 유럽 챔피언이다.

  • 피에트로 라바Pietro Rava · 레프트백

    1935년부터 전쟁을 사이에 두고 유벤투스의 왼쪽을 지켰다. 1936년 올림픽과 1938년 월드컵을 들었다.

  • 안토넬로 쿠쿠레두Antonello Cuccureddu · 라이트백

    사르데냐에서 와서 1969년부터 열두 시즌을 뛰었다. 1973년 마지막 날 로마 원정의 골로 스쿠데토를 정했다.

  • 루이스 몬티Luis Monti · 수비형 미드필더

    1930년에는 아르헨티나 선수로, 1934년에는 이탈리아 선수로 월드컵 결승에 섰다. 다섯 번 내리 우승한 팀의 한가운데다.

  • 디디에 데샹Didier Deschamps · 수비형 미드필더

    1994년부터 다섯 시즌을 뛰며 1996년 유럽 챔피언이 됐다. 2006년에는 감독으로 돌아와 세리에 B의 팀을 맡았다.

  • 엣하르 다비츠Edgar Davids · 수비형 미드필더

    1997년 겨울에 와서 여섯 해 남짓 뛰었다. 보호 안경을 쓰고 온 운동장을 물던 미드필더다.

  •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 공격형 미드필더

    1990년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로 와서 다섯 시즌을 뛰었다. 1993년 발롱도르를 받았다. 아녤리가 라파엘로라 부른 사람이고, 인물관에 따로 있다.

  • 지네딘 지단Zinédine Zidane · 공격형 미드필더

    1996년부터 다섯 시즌을 뛰었다. 1998년 발롱도르를 받았고 2001년 세계 최고 이적료를 남기고 떠났다.

  • 라이문도 오르시Raimundo Orsi · 레프트 윙

    1928년 올림픽이 끝난 뒤 아르헨티나에서 건너왔다. 다섯 번 내리 우승한 팀의 왼쪽이고 1934년 월드컵 결승의 골이 그의 것이다.

  • 프랑코 카우시오Franco Causio · 라이트 윙

    남쪽 끝 레체에서 올라와 1970년부터 열한 시즌을 뛰었다. 콧수염과 차림새 때문에 남작이라 불렸다.

  • 오마르 시보리Omar Sívori · 센터 포워드

    1957년 찰스와 같은 여름에 왔다. 1961년 발롱도르를 받았다. 1957년 코파 아메리카의 최우수 선수다.

  • 로베르토 베테가Roberto Bettega · 센터 포워드

    토리노에서 나고 구단 유소년에서 자랐다. 1970년부터 열세 시즌을 뛰었고 훗날 구단의 부회장이 됐다.

  • 다비드 트레제게David Trezeguet · 센터 포워드

    2000년부터 열 시즌 동안 171골을 넣었다. 구단의 외국 선수 최다 득점이다. 2006년에 남은 사람이다.

3군 명단 39인

  • 루치디오 센티멘티Lucidio Sentimenti · 골키퍼

    1942년부터 일곱 해 골문을 지켰다. 페널티킥을 직접 차 넣던 골키퍼다.

  • 스테파노 타코니Stefano Tacconi · 골키퍼

    1983년 초프의 뒤를 이었다. 1985년 도쿄의 승부차기에서 두 개를 막았다.

  • 안젤로 페루치Angelo Peruzzi · 골키퍼

    1991년부터 여덟 시즌을 뛰었다. 1996년 로마의 결승 승부차기에서 두 개를 막았다.

  • 보이치에흐 슈쳉스니Wojciech Szczęsny · 골키퍼

    2017년에 와서 부폰의 뒤를 이어 일곱 시즌을 지켰다.

  • 비르지니오 로세타Virginio Rosetta · 센터백

    1923년 프로 베르첼리에서 왔다. 돈을 받고 구단을 옮긴 이탈리아의 첫 선수로 꼽힌다.

  • 움베르토 칼리가리스Umberto Caligaris · 센터백

    1928년부터 일곱 해를 뛰며 다섯 번의 스쿠데토를 모두 들었다.

  • 산드로 살바도레Sandro Salvadore · 센터백

    1962년부터 열두 시즌을 뛴 리베로이자 주장이다.

  • 레오나르도 보누치Leonardo Bonucci · 센터백

    2010년에 와서 한 시즌을 뺀 열두 시즌을 뛰었다. 수비 한가운데에서 긴 패스를 뿌렸다.

  • 안드레아 바르찰리Andrea Barzagli · 센터백

    2011년 1월에 헐값으로 와서 여덟 번의 스쿠데토를 들었다.

  • 슈테판 리히트슈타이너Stephan Lichtsteiner · 레프트백

    2011년 라치오에서 와서 일곱 시즌 동안 오른쪽을 오르내렸다. 새 경기장의 첫 공식 골이 그의 것이다.

  • 잔루카 페소토Gianluca Pessotto · 라이트백

    1995년부터 열한 시즌을 양쪽 풀백으로 뛰었다.

  • 잔루카 참브로타Gianluca Zambrotta · 라이트백

    1999년부터 일곱 시즌을 뛰었다. 날개로 와서 세계에서 손꼽는 풀백이 됐다.

  • 릴리앙 튀람Lilian Thuram · 라이트백

    2001년 부폰과 함께 파르마에서 왔다. 다섯 시즌을 뛰었다.

  • 다니 아우베스Dani Alves · 라이트백

    2016년에 와서 한 시즌을 뛰었고 그해 카디프의 결승까지 갔다.

  • 다닐루Danilo · 라이트백

    2019년부터 다섯 시즌 반을 뛰며 완장을 찼다.

  • 주세페 푸리노Giuseppe Furino · 수비형 미드필더

    팔레르모에서 태어났다. 1969년부터 열다섯 시즌을 뛰며 스쿠데토를 여덟 번 들었다.

  • 알레시오 타키나르디Alessio Tacchinardi · 수비형 미드필더

    1994년부터 열한 시즌을 뛰었다. 1996년 유럽 챔피언이다.

  • 안드레아 피를로Andrea Pirlo · 수비형 미드필더

    2011년 AC 밀란에서 이적료 없이 와서 네 시즌 내리 스쿠데토를 들었다. 2020년에는 감독으로 한 시즌을 맡았다.

  • 루이스 델솔Luis del Sol · 중앙 미드필더

    1962년 레알 마드리드에서 와서 여덟 시즌을 뛰었다. 유벤투스의 첫 스페인 선수다.

  • 파비오 카펠로Fabio Capello · 중앙 미드필더

    1970년부터 여섯 시즌을 뛰었다. 2004년에는 감독으로 돌아왔다.

  • 안토니오 콘테Antonio Conte · 중앙 미드필더

    남쪽 레체에서 와서 1991년부터 열세 시즌을 뛰며 완장을 찼다. 2011년부터는 감독으로 세 번 내리 우승했다.

  •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Claudio Marchisio · 중앙 미드필더

    토리노에서 나고 일곱 살부터 구단에서 자랐다. 세리에 B에서 1군에 올라와 일곱 번의 스쿠데토를 들었다.

  • 아르투로 비달Arturo Vidal · 중앙 미드필더

    2011년부터 네 시즌을 뛰었다. 빼앗고 넣는 일을 한 몸으로 했다.

  • 폴 포그바Paul Pogba · 중앙 미드필더

    2012년 열아홉에 이적료 없이 와서 네 시즌을 뛰고 세계 최고 이적료를 남기고 떠났다.

  • 조반니 페라리Giovanni Ferrari · 공격형 미드필더

    1930년부터 다섯 번 내리 스쿠데토를 들었다. 1934년과 1938년 두 번 세계 챔피언이 됐다.

  • 안젤로 디리비오Angelo Di Livio · 라이트 미드필더

    1993년부터 여섯 시즌을 뛰었다. 쉬지 않고 뛰어 작은 병정이라 불렸다.

  • 마우로 카모라네시Mauro Camoranesi · 라이트 미드필더

    아르헨티나에서 나서 이탈리아 대표가 됐다. 2002년부터 여덟 시즌을 뛰었고 2006년에 남은 사람이다.

  • 욘 한센John Hansen · 레프트 윙

    1948년 런던 올림픽이 끝나고 덴마크에서 왔다. 1951-52시즌 세리에 A 득점왕이다.

  • 카를 오게 프레스트Karl Aage Præst · 레프트 윙

    1949년부터 일곱 시즌을 뛴 덴마크의 왼쪽 날개다.

  • 카를 오게 한센Karl Aage Hansen · 세컨드 스트라이커

    1950년부터 세 시즌을 뛰었다. 세 덴마크 사람이 1952년 스쿠데토의 앞줄이었다.

  • 파울로 디발라Paulo Dybala · 세컨드 스트라이커

    2015년부터 일곱 시즌 동안 115골을 넣었다.

  • 펠리체 보렐Felice Borel · 센터 포워드

    열여덟에 1군에 올라 1932-33시즌과 1933-34시즌 내리 세리에 A 득점왕이 됐다.

  • 피에트로 아나스타시Pietro Anastasi · 센터 포워드

    시칠리아 카타니아에서 와서 1968년부터 여덟 시즌을 뛰었다. 남쪽에서 올라온 공장 노동자들이 제 사람으로 여긴 9번이다.

  • 주제 아우타피니José Altafini · 센터 포워드

    1972년 서른넷에 와서 네 시즌 동안 교체로 들어가 넣었다.

  • 파올로 로시Paolo Rossi · 센터 포워드

    1982년 월드컵의 득점왕이자 그해의 발롱도르다. 1985년까지 뛰었다.

  • 잔루카 비알리Gianluca Vialli · 센터 포워드

    1992년부터 네 시즌을 뛰었다. 1996년 로마에서 주장으로 유럽 챔피언의 트로피를 들었다.

  • 파브리치오 라바넬리Fabrizio Ravanelli · 센터 포워드

    1992년부터 네 시즌을 뛰었다. 1996년 결승의 골이 그의 것이다.

  • 카를로스 테베스Carlos Tevez · 센터 포워드

    2013년부터 두 시즌을 뛰며 50골을 넣었고 2015년 베를린의 결승까지 갔다.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Cristiano Ronaldo · 센터 포워드

    2018년 서른셋에 와서 세 시즌 134경기에 101골을 넣었다. 구단은 그가 오던 날 그를 세계에서 가장 강한 선수라고 적었다.

기록을 확인한 곳

  1. 구단이 적은 구단사 — Juventus 「Storia」의 여섯 장. 1897년의 창단과 줄무늬, 1923년의 아녤리, 1957년의 별, 보니페르티의 회장 취임과 그 시대, 1982년의 여섯 사람, 헤이젤과 도쿄, 2001년 여름, 2006년과 세리에 B, 2015-16시즌.
  2. 구단의 명예의 전당 — Juventus 「Hall of Fame」. 처음 뽑은 쉰 명과 뽑는 기준.
  3. 찰스가 온 날 — 『스탐파 세라』 1957년 4월 24일 자 5면 「Formerà con Boniperti un tandem di eccezione」. 영국 기자들의 말과 구단이 그린 보니페르티·찰스 조합.
  4. 젠틸레와 마라도나 — 『라 스탐파』 1982년 6월 30일 자 21면 「Gentile spegne la stella Maradona」와 같은 면의 메노티 기자 회견 기사.
  5. 도쿄의 이튿날 — 『스탐파 세라』 1985년 12월 9일 자 15면 「Juve sei proprio la più grande」.
  6. 시레아의 부고 — 『스탐파 세라』 1989년 9월 4일 자 1면 「È morto Scirea」.
  7. 핀투리키오라는 별명 — 『라 스탐파』 1995년 9월 16일 자 29면 「Agnelli: caro Del Piero non offenderti」.
  8. 레알 마드리드를 이긴 밤 — 『라 스탐파』 2003년 5월 15일 자 34면 「La Real Juventus fa un'altra magia. Gol, show, trionfo」.
  9. 보니페르티의 마지막 경기 — 『라 스탐파』 1961년 6월 11일 자 13면 「Boniperti smette di giocare」. 움베르토 아녤리의 발표와 그의 경력.
  10. 보니페르티가 회장이 된 날 — 『라 스탐파』 1971년 7월 14일 자 13면 「Il Consiglio ha eletto Boniperti」와 같은 면의 「Un presidente costato 60 mila li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