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 · 코파 아메리카

1957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오마르 시보리

리마에서 아르헨티나의 통산 열한 번째 우승을 이끈 스물한 살 오마르 시보리. 카라수시아스 공격진, 5경기 3골, 브라질전 3-0과 대회 직후 이탈리아로 떠난 세 공격수를 당시 사진과 경기 기록으로 돌아본다.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오마르 시보리와 1957 코파 아메리카 MVP 표지
오마르 시보리. 촬영자와 촬영 시점은 확인되지 않았다. 표지 디자인: 삥이FC.
1957년 남미축구선수권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 대표팀
1957년 대회의 아르헨티나 대표팀
1917년 제작 이후 그대로인 코파 아메리카 트로피의 은잔
코파 아메리카 트로피

제25회남미축구선수권대회

Campeonato Sudamericano 1957

이해 대회의 당대 원문 명칭은 확인하지 못해 공식 약칭만 적었다.

대회 기록

개최국
페루 페루 국기
대회 기간
1957년 3월 7일-4월 6일
참가국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 브라질 브라질 국기 · 페루 페루 국기 ·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 콜롬비아 콜롬비아 국기 · 칠레 칠레 국기 · 에콰도르 에콰도르 국기
방식
7개국 단일 리그전 · 승리 2점, 무승부 1점
경기장
리마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전체 기록
21경기 · 101골

최종 순위

순위 국가 승점 성적 득실
1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통산 열한 번째 우승 10 5승 1패 25득점 6실점
2 브라질 브라질 국기 통산 일곱 번째 준우승 8 4승 2패 23득점 9실점
3 페루 페루 국기 통산 다섯 번째 3위 8 4승 2패 12득점 9실점
4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통산 네 번째 4위 8 4승 2패 15득점 12실점
5 콜롬비아 콜롬비아 국기 4 2승 4패 10득점 25실점
6 칠레 칠레 국기 3 1승 1무 4패 9득점 17실점
7 에콰도르 에콰도르 국기 1 1무 5패 7득점 23실점

개인 기록

대회 대표 선수오마르 시보리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 5경기 3골
공동 득점왕마스키오 · 암브로이스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 각 9골
득점 3위안토니오 안젤릴로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기 · 8골

시보리의 다섯 경기

날짜 상대 아르헨티나 기준 결과 득점
3월 17일 에콰도르 에콰도르 국기 3-0 승 1골 (14분)
3월 20일 우루과이 우루과이 국기 4-0 승 0골
3월 28일 칠레 칠레 국기 6-2 승 1골 (7분)
4월 3일 브라질 브라질 국기 3-0 승 0골
4월 6일 페루 페루 국기 1-2 패 1골 (50분)

여담

일곱 나라, 스물한 경기, 백한 골

1957년 대회는 페루 리마(Lima; 페루의 수도)의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한 곳에서 한 달 동안 열렸다. 볼리비아와 파라과이가 개막 전에 빠지면서 일곱 나라가 서로 한 번씩 만나는 단일 리그가 됐다. 그렇게 치른 스물한 경기에서 백한 골이 나왔다. 한 경기에 4.8골꼴이다.[1]

골이 많았다고 해서 순위표가 한쪽으로 기운 것은 아니었다. 콜롬비아는 우루과이를 1-0으로 이겼고, 개최국 페루는 마지막 날 우승팀 아르헨티나를 2-1로 잡았다. 브라질은 콜롬비아를 9-0으로 무너뜨렸는데, 이 경기에서 에바리스투(Evaristo de Macedo Filho; 브라질 축구선수, 1933-) 혼자 다섯 골을 넣었다. 브라질·페루·우루과이가 나란히 승점 8에 멈춘 사이, 승점 10의 아르헨티나만 한 발 앞에 있었다.[1][3]

스타빌레의 다섯 공격수, 카라수시아스

아르헨티나 벤치에는 기예르모 스타빌레(Guillermo Stábile; 아르헨티나 축구선수·감독, 1905-1966)가 앉아 있었다. 1930년 월드컵 득점왕이던 그 스타빌레다. 그리고 그가 세운 앞줄 다섯 명, 오레스테 코르바타(Omar Oreste Corbatta;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1936-1991), 움베르토 마스키오(Humberto Dionisio Maschio; 아르헨티나·이탈리아 축구선수, 1933-), 안토니오 안젤릴로(Antonio Valentín Angelillo; 아르헨티나·이탈리아 축구선수, 1937-2018), 시보리, 오스발도 크루스(Osvaldo Héctor Cruz; 아르헨티나 축구선수)는 카라수시아스(Carasucias; 얼굴에 흙 묻은 아이들이라는 뜻의 별명)로 불렸다. 대부분 20대 초반의 젊은 선수들이었고, 그 나이답게 겁 없이 공을 다뤘다는 데서 붙은 이름으로 전해진다.[3][6]

1957년 리마 대회에서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어깨동무한 공격수 다섯 명
리마 대회의 카라수시아스. 왼쪽부터 코르바타, 마스키오, 안젤릴로, 시보리, 크루스. 사진: 《엘 그라피코》 1957년, 위키미디어 공용.

숫자로 보면 이 다섯 명은 거의 팀 전체였다. 아르헨티나의 25골 가운데 마스키오가 9골, 안젤릴로가 8골, 시보리가 3골, 코르바타와 크루스가 2골씩 넣었다. 나머지 한 골은 우루과이전 80분에 교체로 들어가 83분에 골을 넣은 호세 산필리포(José Francisco Sanfilippo;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1935-)의 몫이었다. 여섯 경기 내내 수비와 하프 라인은 거의 바뀌지 않았고, 대회의 이야기는 결국 앞줄 다섯 명에게서 나왔다.[1]

시보리의 세 골이 놓인 자리

첫 경기 콜롬비아전 8-2에서 시보리 자리에는 산필리포가 섰다. 시보리는 3월 17일 에콰도르전에서 처음 선발로 나와 14분에 골을 넣었고, 이날 78분에 교체됐다. 사흘 뒤 우루과이전 4-0에서는 골 없이 80분까지 뛰었다.[1]

칠레전은 스코어만 보면 6-2 대승이지만 전반은 그렇지 않았다. 시보리가 7분에 먼저 넣었는데, 칠레가 14분과 28분에 따라붙어 전반이 2-2로 끝났다. 후반에야 안젤릴로와 마스키오가 두 골씩 보태며 경기가 벌어졌다. 그러니까 시보리의 골은 6-2라는 최종 스코어보다 2-2로 끝난 전반 쪽에 속한다.[1]

하늘색과 흰색 줄무늬의 아르헨티나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웃는 시보리를 표지에 실은 엘 그라피코
대회 한 해 전인 1956년 2월 24일 《엘 그라피코》 제1905호 표지. 표지 문구는 그를 “Conscripto e internacional”, 징집병이자 국가대표로 소개한다. 사진: 위키미디어 공용.

4월 3일 브라질전은 사실상의 결승이었다. 아르헨티나는 23분 안젤릴로의 골로 앞섰고, 87분 마스키오와 90분 크루스가 3-0을 만들었다. 이 승리로 승점 10이 되면서 남은 상대 누구도 따라올 수 없게 됐고, 우승은 한 경기를 남기고 확정됐다. 시보리는 이날 골이 없었다. 마지막 페루전에서 50분 동점골을 넣었지만 아르헨티나는 81분에 결승골을 내주고 1-2로 졌다. 우승팀의 유일한 패배가 이미 우승이 정해진 뒤에 나온 셈이다.[1]

리마 대회가 끝난 뒤

대회가 끝나자 카라수시아스의 세 명이 곧바로 이탈리아로 떠났다. 마스키오는 볼로냐, 안젤릴로는 인테르, 시보리는 유벤투스로 갔다. 시보리의 이적료는 아르헨티나 쪽 기록으로 1,000만 페소였고, 리베르 플라테(Club Atlético River Plate;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축구 구단)는 이 돈으로 모누멘탈 경기장의 마지막 스탠드를 완성했다. 이 이적은 당시 아르헨티나 최고액이었다.[6][7]

그런데 그 대가는 대표팀이 치렀다. 당시 아르헨티나축구협회는 해외로 떠난 세 선수를 1958년 월드컵 명단에 넣지 않았다. 리마에서 남미를 정복한 앞줄은 한 해 뒤 스웨덴에 함께 가지 못했다.[3]

시보리는 이탈리아에서 더 큰 이름이 됐다. 유벤투스에서 존 찰스, 잠피에로 보니페르티와 공격진을 이루며 여덟 시즌 동안 세리에 A 우승 세 번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 세 번을 거뒀고, 1959-60 시즌 득점왕에 올랐다. 1961년에는 발롱도르를 받았다. 이탈리아 국적으로는 9경기 8골을 넣고 1962년 칠레 월드컵에도 나갔다. 거친 성격도 늘 따라다녀서, 이탈리아에서만 출장정지가 33경기에 이르렀다.[4][5]

득점왕이 아닌, 우승한 대회의 얼굴

역대 대회 대표 선수를 정리한 RSSSF의 후대 목록은 1957년 이름으로 시보리를 적는다. 다만 동시대 공식 MVP 투표나 시상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지금 코파 아메리카의 공식 최우수 선수상인 골든볼은 1987년 대회에 처음 생겼다. 그래서 이 글의 최우수 선수는 오늘날의 공식 대회상을 소급한 표현이 아니라, 후대 기록이 남긴 대표 선수라는 뜻이다.[2][10]

그렇다면 왜 9골의 마스키오도, 8골의 안젤릴로도 아니고 3골의 시보리였을까. 기록표만으로 그 판단 과정을 되짚을 수는 없다.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다. 시보리는 선발로 나선 다섯 경기 모두 우승팀 앞줄에 섰고, 흔들린 칠레전의 첫 골과 페루전의 동점골을 넣었으며, 대회가 끝나자마자 당시 아르헨티나 최고 이적료가 매겨진 선수였다. 득점 순위와 대회의 얼굴이 꼭 같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1956년의 미게스에 이어 1957년의 시보리가 한 번 더 보여준다.

출처와 기록 기준

  1. «Southamerican Championship 1957», Martín Tabeira, RSSSF. 경기별 명단·교체·득점 시각, 최종 순위와 득점 집계.
  2. «Copa America Best Players», RSSSF. 역대 대회 대표 선수 목록.
  3. «1957 South American Championship», 위키백과 영어판. 대회 개요, 카라수시아스 공격진, 세 선수의 이탈리아 이적과 1958년 월드컵 제외.
  4. «2 ottobre 1935, nasceva Omar Sivori», 유벤투스. 시보리의 이적 연도, 유벤투스 우승·득점왕·발롱도르 이력.
  5. «Sivori, Omar Enrique», 《Enciclopedia dello Sport》, 트레카니. 이탈리아 대표팀 기록, 1962년 월드컵, 출장정지 기록과 이적료.
  6. «El 'Cabezón' Sívori, un 'atorrante' que estuvo antes que Diego y 'Lío'», 데포르TV. 카라수시아스 별명의 배경, 리베르 플라테 경력과 이적료의 쓰임.
  7. «Enrique Omar Sívori: Los carasucias de Lima», 엘 문도 아마테우르. 스타빌레의 공격진 구성과 1957년 5월 유벤투스 이적.
  8. «Sívori (Selección Argentina) - El Gráfico 1905», 위키미디어 공용. 1956년 2월 24일 《엘 그라피코》 표지.
  9. «Argentina carasucias lima 1957», 위키미디어 공용. 1957년 《엘 그라피코》의 카라수시아스 사진.
  10. «Copa América awards», 위키백과 영어판. 골든볼의 1987년 도입.
  11. 머리 그림: «Argentina Copa América 1957»,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트로피 사진: «Copa América de Fútbol», CONMEBOL 박물관(루케) 소장 원본, Hazaña17 촬영,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받침을 빼고 잔만 잘라 썼다.

대표 선수는 RSSSF의 후대 정리에 근거하며 동시대 공식 MVP 시상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순위는 승리 2점제이며, 승점 8로 같은 브라질·페루·우루과이는 RSSSF의 최종 순위를 따랐다. 대회 회차는 1956년 특별대회를 포함해 센 순번이다. 시보리의 이적료는 아르헨티나 자료가 1,000만 페소, 트레카니가 1억 6,000만 리라로 적어 통화 기준이 다르며, 본문은 아르헨티나 쪽 표기를 적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