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 · 코파 아메리카
1959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 펠레
월드컵 우승 9개월 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온 열여덟 살 펠레. 6경기 8골로 득점왕에 오르고도 승점 1이 모자라 준우승에 그친 대회를, 우루과이전 난투와 마지막 날 아르헨티나전까지 당시 잡지와 경기 기록으로 돌아본다.


제26회남미축구선수권대회
Campeonato Sudamericano de Fútbol 1959
칠레 잡지 《에스타디오》 1959년 4월 30일자 사진 설명이 우승팀을 ‘Campeón Sudamericano de Fútbol de 1959’라 적은 표기를 따랐다.
대회 기록
- 개최국
- 아르헨티나
- 대회 기간
- 1959년 3월 7일-4월 4일
- 참가국
- 아르헨티나
· 브라질
· 파라과이
· 페루
· 칠레
· 우루과이
· 볼리비아
- 방식
- 7개국 단일 리그전 · 승리 2점, 무승부 1점
- 경기장
- 부에노스아이레스 에스타디오 모누멘탈
- 전체 기록
- 21경기 · 86골
최종 순위
| 순위 | 국가 | 승점 | 성적 | 득실 |
|---|---|---|---|---|
| 1 | 아르헨티나 |
11 | 5승 1무 | 19득점 5실점 |
| 2 | 브라질 |
10 | 4승 2무 | 17득점 7실점 |
| 3 | 파라과이 |
6 | 3승 3패 | 12득점 12실점 |
| 4 | 페루 |
5 | 1승 3무 2패 | 10득점 11실점 |
| 5 | 칠레 |
5 | 2승 1무 3패 | 9득점 14실점 |
| 6 | 우루과이 |
4 | 2승 4패 | 15득점 14실점 |
| 7 | 볼리비아 |
1 | 1무 5패 | 4득점 23실점 |
개인 기록
펠레의 6경기
| 날짜 | 상대 | 브라질 기준 결과 | 득점 |
|---|---|---|---|
| 3월 10일 | 페루 |
2-2 무 | 1골 (48분) |
| 3월 15일 | 칠레 |
3-0 승 | 2골 (43분, 45분) |
| 3월 21일 | 볼리비아 |
4-2 승 | 1골 (16분) |
| 3월 26일 | 우루과이 |
3-1 승 | 0골 |
| 3월 29일 | 파라과이 |
4-1 승 | 3골 (25분, 60분, 63분) |
| 4월 4일 | 아르헨티나 |
1-1 무 | 1골 (58분) |
여담
한 경기장에서 치른 21경기
1959년 대회는 3월 7일부터 4월 4일까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에스타디오 모누멘탈(Estadio Monumental; 리베르 플라테의 홈구장) 한 곳에서 열렸다. 콜롬비아와 에콰도르가 빠지면서 일곱 나라가 서로 한 번씩 만나는 단일 리그가 됐고, 21경기에서 86골이 나왔다. 결승전이 따로 없는 방식이라 우승은 승점으로 갈렸다.[1]
개최국 아르헨티나에게 이 대회는 설욕의 자리였다. 두 해 전 리마에서 남미를 휩쓴 앞줄을 이탈리아로 떠나보낸 채 나선 1958년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는 서독에 1-3, 체코슬로바키아에 1-6으로 지고 조별 리그에서 물러났다.[9] 벤치도 바뀌어 있었다. 빅토리오 스피네토(Victorio Luis Spinetto; 아르헨티나 축구선수·감독, 1911-1990)를 앞세운 세 사람의 지도진이 팀을 맡았고, 주축은 라싱 클루브 선수들이었다.[1][3]
세계 챔피언이 거의 그대로 왔다
브라질은 손님 대접을 받을 팀이 아니었다. 비센치 페올라(Vicente Feola;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09-1975) 감독이 데려온 22명 가운데에는 아홉 달 전 솔나의 결승에 선발로 나선 11명 중 바바를 뺀 10명이 모두 들어 있었다. 질마르와 벨리니, 두 산투스, 지지와 가린샤와 자갈루, 그리고 펠레다.[1]

그런 팀이 첫 경기에서 발이 걸렸다. 3월 10일 페루전에서 브라질은 지지의 24분 골과 펠레의 48분 골로 2-0까지 앞섰는데, 페루의 왼쪽 윙어 후안 세미나리오(Juan Roberto Seminario Rodríguez; 페루 축구선수, 1936-)에게 59분과 77분에 연달아 실점해 2-2로 비겼다. 이날 놓친 승점 1은 대회가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브라질은 그 뒤 네 경기를 내리 이기고도 마지막 날을 승점 1 뒤진 채 맞아야 했다.[1]
2분 사이 2골, 3분 사이 2골
펠레의 여덟 골은 고르게 흩어져 있지 않다. 3월 15일 칠레전에서 그는 전반 43분과 45분에 두 골을 넣었다. 아르헨티나 잡지 《골레스》(Goles;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나온 스포츠 주간지)는 이 경기를 표지에 실으며 그를 ‘검은 천사’라 부르고, 비긴 채 끝나는 듯하던 전반을 그가 2분 만에 승리로 바꿔 놓았다고 적었다. 사진 설명에 따르면 두 번째 골은 칠레 선수 여럿을 달리면서 따돌린 끝에 골키퍼까지 제친 골이었다.[1][6]

3월 21일 볼리비아전에서는 먼저 실점한 지 4분 만인 16분에 동점골을 넣었고, 3월 29일 파라과이전에서는 25분, 60분, 63분에 세 골을 넣었다. 이 경기도 브라질이 4분 만에 먼저 실점한 경기였다. 그러고 보면 여덟 골 가운데 넷이 끌려가거나 비기고 있을 때 나왔다. 득점표의 숫자보다 그 골들이 놓인 자리가 열여덟 살 선수의 무게를 말해 준다.[1]
3월 26일, 32분에 멈춘 경기
펠레가 유일하게 골을 넣지 못한 경기는 우루과이전이다. 이 경기를 지켜본 아르헨티나 기자 단테 판세리(Dante Panzeri; 아르헨티나 스포츠 기자, 1921-1978)는 《엘 그라피코》에 처음 30분이 아주 잘 치러진 경기였다고 적었다. 펠레가 공을 가슴으로 네 번 연달아 튀기며 시작한 경기였다고도 했다. 그러다 32분에 브라질의 아우미르(Almir Albuquerque; 브라질 공격수)가 우루과이 골키퍼와 공을 다투다 수비수 알시데스 실베이라(Alcides Silveira; 우루과이 축구선수, 1938-2011)까지 셋이 한데 부딪쳤고, 발길질이 오가기 시작했다. 말리러 들어간 펠레도 우루과이 선수들에게 걷어차였다.[4]
판세리의 기록으로는 선수 22명에 후보 선수와 마사지사, 사진기자까지 400명 가까운 사람이 그라운드에서 뒤엉켰고, 경기는 22분 동안 멈췄다. 주심은 양 팀에서 둘씩 네 명을 내보냈다. 아홉 명씩 남아 다시 시작한 경기에서 우루과이가 36분에 먼저 넣었으나, 교체로 들어온 파울루 발렌칭(Paulo Ângelo Valentim; 브라질 공격수, 1932-1984)이 62분, 80분, 89분에 세 골을 넣어 브라질이 3-1로 이겼다. 그날 한가운데서 부딪친 실베이라는 아홉 달 뒤 에콰도르에서 열린 그해 두 번째 대회의 대표 선수로 기록된다.[4][1][2]
4월 4일, 비기면 되는 팀과 이겨야 하는 팀
마지막 날 모누멘탈에는 85,000명이 들었다. 아르헨티나가 승점 10, 브라질이 승점 9였으니 개최국은 비기기만 해도 됐고 브라질은 이겨야 했다. 먼저 넣은 쪽은 아르헨티나였다. 40분, 측면에서 넘어온 크로스에 후안 호세 피수티(Juan José Pizzuti; 아르헨티나 축구선수·감독, 1927-2020)가 몸을 던져 머리를 댔고, 공은 질마르의 다리 사이로 빠져 들어갔다.[1][3]

동점골은 58분에 나왔다. 가린샤가 내준 공에 아르헨티나 수비 둘이 닿지 못했고, 펠레가 그 공을 가슴으로 받아 몰고 들어가 골을 넣었다. 판세리가 경기 중에 적은 수첩에는 이보다 앞선 25분의 장면도 남아 있다. 공중에서 가슴으로 공을 죽인 펠레가 그것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은 채 몰고 나갔다는 대목인데, 그 줄은 “가슴에 발이 달렸다”(Tiene pies en el pecho.)로 끝난다.[3]
브라질은 한 골이 더 필요했지만 스코어는 움직이지 않았다. 종료와 함께 관중석에서는 신문지에 불을 붙인 횃불 수천 개가 타올랐고, 이날 입장 수입은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경기의 최고 기록이었다. 정작 판세리의 평가는 차가웠다. 그는 아르헨티나가 적게 뛰고 많이 얻었다고 썼고, 세계 챔피언이 남미 챔피언은 되지 못한 이 결과를 축구의 수준이 돌아온 증거로 읽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날 아르헨티나가 두려워한 것은 불가능한 공을 넣어 주는 지지와 그 공을 더 불가능한 자리에서 받아 내는 펠레였다고 그는 적었다.[3]
준우승팀에서 나온 대회의 얼굴
역대 대회 대표 선수를 정리한 RSSSF의 후대 목록은 1959년 첫 대회의 이름으로 펠레를 적는다. 동시대의 공식 MVP 투표나 시상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며, 코파 아메리카의 공식 최우수 선수상인 골든볼은 1987년 대회에 처음 생겼다. 그러니 이 글의 최우수 선수도 앞선 편들과 마찬가지로 후대 기록이 남긴 대표 선수라는 뜻이다.[2][8]
우승팀이 아닌 팀에서 대표 선수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55년의 오르마사발도 준우승팀 칠레의 선수였다. 다만 1959년은 사정이 조금 더 또렷하다. 득점 2위와 두 골 차가 나는 득점왕이었고, 지지 않은 팀의 공격을 여섯 경기 내내 이끌었으며, 우승이 걸린 마지막 경기에서 팀의 유일한 골을 넣었다. 우승컵은 아르헨티나가 들었으되 그 대회를 지켜본 아르헨티나 잡지들의 표지와 수첩에는 펠레의 이름이 남았다.
펠레에게 이 대회는 처음이자 마지막 남미축구선수권대회였다. 남미축구연맹의 기록대로 그는 1959년 한 번만 이 대회에 나왔고, 그 한 번에 여덟 골을 넣었다. 월드컵을 세 번 든 선수가 대륙 대회에서는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첫 경기에서 놓친 승점 1로 거슬러 올라간다.[5]
출처와 기록 기준
- «Southamerican Championship 1959 (1st Tournament)», Martín Tabeira, RSSSF. 경기별 명단·교체·득점 시각·퇴장·관중, 최종 순위와 득점 집계, 참가국 명단과 감독.
- «Copa America Best Players», RSSSF. 역대 대회 대표 선수 목록.
- «1959. Argentina campeón sudamericano. Por Dante Panzeri», 《엘 그라피코》. 최종전의 득점 경위와 경기 중 수첩 기록, 입장 수입, 경기 뒤 평가.
- «1959. Brasil-Uruguay, fútbol y barbarie. Por Panzeri», 《엘 그라피코》. 3월 26일 경기의 난투 경위와 중단 시간.
- «Pelé, the King Who Was the Top Scorer of the CONMEBOL Copa América», 남미축구연맹. 펠레의 유일한 대회 출전과 8골.
- «Goles 0555 pele», 위키미디어 공용. 《골레스》 제555호 표지와 사진 설명.
- «Brasil en el Sudamericano 1959 de Argentina», «Pele dispara gol vs argentina», 위키미디어 공용. 《에스타디오》 1959년 4월 16일자의 브라질 대표팀 사진과 《엘 그라피코》의 4월 4일 득점 사진.
- «Copa América awards», 위키백과 영어판. 골든볼의 1987년 도입.
- «World Cup 1958 finals», RSSSF. 1958년 월드컵 아르헨티나의 조별 리그 결과.
- 머리 그림: «Argentina en el Sudamericano 1959 de Argentina», 《에스타디오》 1959년 4월 30일자,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표지 사진: «Sánchez y Pelé», 같은 호 표지,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트로피 사진: «Copa América de Fútbol», CONMEBOL 박물관(루케) 소장 원본, Hazaña17 촬영,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대표 선수는 RSSSF의 후대 정리에 근거하며 동시대 공식 MVP 시상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순위는 승리 2점제이며, 승점 5로 같은 페루와 칠레는 RSSSF의 최종 순위를 따랐다. 대회 회차는 1956년 특별 대회를 포함해 센 순번이고, 1959년에는 12월에 에콰도르에서 특별 대회가 한 번 더 열렸다. 볼리비아전 실점의 득점자는 RSSSF 안에서도 대회 기록(알콘·가르시아)과 브라질 대표팀 기록이 달라 본문에 이름을 적지 않았다. 3월 26일 경기에서 펠레가 우루과이 선수를 걷어찼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회고에만 나오고 1959년 기사에는 없어 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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