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 · 코파 아메리카
1959 코파 아메리카 에콰도르 대회 최우수 선수: 알시데스 실베이라
한 해에 2번 열린 코파 아메리카의 두 번째 대회. 3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6위에 그친 우루과이가 12월 과야킬에서 13득점 1실점으로 무패 우승했다. 페널티킥으로만 3골을 넣은 알시데스 실베이라와 아르헨티나전 5-0을 당시 기사와 경기 기록으로 돌아본다.

제27회남미축구선수권대회
특별 대회 · ExtraordinarioCampeonato Sudamericano Extraordinario 1959
우루과이축구협회 기록의 ‘Copa América Extraordinaria 1959, 27ª edición’과 실베이라가 1965년 인터뷰에서 부른 이름 ‘el Extra’를 따랐다. 트로피가 걸리지 않은 대회라 머리에 트로피를 싣지 않는다.
대회 기록
- 개최국
- 에콰도르
- 대회 기간
- 1959년 12월 5일-25일
- 참가국
- 우루과이
· 아르헨티나
· 브라질
· 에콰도르
· 파라과이
- 방식
- 5개국 단일 리그전 · 승리 2점, 무승부 1점
- 경기장
- 과야킬 에스타디오 모델로
- 전체 기록
- 10경기 · 40골
최종 순위
| 순위 | 국가 | 승점 | 성적 | 득실 |
|---|---|---|---|---|
| 1 | 우루과이 |
7 | 3승 1무 | 13득점 1실점 |
| 2 | 아르헨티나 |
5 | 2승 1무 1패 | 9득점 9실점 |
| 3 | 브라질 |
4 | 2승 2패 | 7득점 10실점 |
| 4 | 에콰도르 |
3 | 1승 1무 2패 | 5득점 9실점 |
| 5 | 파라과이 |
1 | 1무 3패 | 6득점 11실점 |
개인 기록
실베이라의 4경기
| 날짜 | 상대 | 우루과이 기준 결과 | 득점 |
|---|---|---|---|
| 12월 6일 | 에콰도르 |
4-0 승 (83분 중단) | 1골 (1분, 페널티킥) |
| 12월 12일 | 브라질 |
3-0 승 | 0골 |
| 12월 16일 | 아르헨티나 |
5-0 승 | 2골 (9분, 55분, 모두 페널티킥) |
| 12월 22일 | 파라과이 |
1-1 무 | 0골 |
여담
새 경기장을 위해 한 번 더 연 대회
그해 첫 대회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끝난 지 여덟 달 만에 남미축구선수권대회가 또 열렸다. 에콰도르축구연맹이 과야킬에 새로 지은 에스타디오 모델로(Estadio Modelo; 과야킬의 종합 경기장, 오늘날의 에스타디오 모델로 알베르토 스펜세르)에 걸맞은 대회를 남미 연맹에 청했고, 연맹이 이를 받아들여 27번째 대회를 ‘특별’ 대회로 허락한 것이다. 트로피는 걸리지 않았으나 공식 대회로 선언됐다. 한 해에 이 대회가 두 번 열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3]
판은 3월보다 작았다. 볼리비아와 칠레, 콜롬비아, 페루가 빠져 다섯 나라만 모였고, 브라질은 3월의 그 팀 대신 헨치우 카르도주(Gentil Cardoso; 브라질 축구 감독)가 이끄는 페르남부쿠주 선발을 보냈다. 세 구단 선수들로 짠 이 팀의 네 경기를 브라질 쪽 기록은 대표팀 공식 경기로 센다.[1][7]
6위 팀이 반쪽 명단으로 떠났다
우루과이는 기대를 받고 떠난 팀이 아니었다. 1958년 월드컵은 예선에서 떨어져 본선에 나가지 못했고, 3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일곱 나라 가운데 6위였으며, 남은 기억이라고는 브라질과 벌인 난투뿐이었다. 그 난투의 뒤처리가 12월까지 이어졌다. 체력 담당 코치가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쓴 보고서가 경기장 밖의 처신까지 건드리자, 그 코치가 12월 대회에도 따라간다는 소식에 페냐롤이 소속 선수들을 내주지 않겠다고 나선 것이다.[3][8]
새로 지휘봉을 잡은 후안 카를로스 코라소(Juan Carlos Corazzo; 우루과이 축구선수·감독, 1907-1986)는 결국 페냐롤 선수 없이 나시오날과 수드 아메리카를 비롯한 아홉 구단 선수들로 명단을 채웠다. 제대로 된 훈련은 출발 이레 전인 11월 25일에야 처음 했다. 우루과이축구사가연구자협회의 정리에 따르면 나라 안의 기대가 워낙 낮아 따라간 우루과이 기자가 한 명도 없었고, 팬들은 아르헨티나 라디오의 중계를 받아 들으며 대회 소식을 알았다.[3]
1분에 찬 페널티킥, 83분에 멈춘 경기
12월 6일, 개최국과 치른 첫 경기에는 55,000명이 들어찼다. 시작 1분 만에 도밍고 페레스(Domingo Pérez; 우루과이 오른쪽 윙어)의 슈팅을 에콰도르 수비수가 손으로 막았고, 실베이라가 그 페널티킥을 넣었다. 우루과이는 전반에 한 골, 후반 초반에 두 골을 보태 4-0을 만들었다. 이 경기는 끝까지 가지 못했다. 83분에 관중이 그라운드로 쏟아져 들어와 주심이 경기를 멈췄는데, 그 사람들이 달려간 곳은 뜻밖에도 우루과이 선수들이었다. 원정팀에게 환호하려고 넘어온 관중이었다.[1][3]
엿새 뒤 브라질전은 3월과 달리 아무 일 없이 끝났다. 전반을 0-0으로 마친 우루과이는 후반에 기예르모 에스칼라다(Guillermo Escalada; 우루과이 왼쪽 윙어, 1936-2023), 마리오 베르가라(Mario Bergara; 우루과이 공격수), 호세 사시아(José Sasía; 우루과이 공격수, 1933-1996)가 한 골씩 넣어 3-0으로 이겼다. 두 경기에서 일곱 골을 넣고 한 골도 내주지 않은 채, 우루과이는 3월의 우승팀을 만나러 갔다.[1]
12월 16일, 아르헨티나전 5-0
아르헨티나는 3월 대회의 우승팀이었고 벤치에는 호세 마누엘 모레노가 앉아 있었다. 그 팀이 과야킬에서 5-0으로 졌다. 우루과이축구사가연구자협회는 이 점수 차를 남미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루과이가 아르헨티나에 거둔 가장 큰 승리로 적는다.[1][3]

첫 골과 넷째 골이 실베이라의 페널티킥이었다. 9분의 첫 번째는 베르가라가 당한 반칙에서 나왔고, 55분의 두 번째는 그 사이 3-0으로 벌어진 뒤였다. 현지에서 경기를 본 《엘 그라피코》 기자는 첫 페널티킥 장면을 적으며 그를 “우루과이의 6번, 이런 킥의 전문가”(N° 6 uruguayo, especialista en esta clase de tiros)라 불렀다. 베르가라가 15분과 64분에 두 골을 넣었고, 25분의 셋째 골은 에스칼라다와 블라다스 도욱사스(Vladas Douksas; 우루과이 공격수, 1933-2007)를 거친 공을 사시아가 달려들며 때려 넣은 골이었다. 57분에는 아르헨티나의 후안 호세 피수티(Juan José Pizzuti; 아르헨티나 축구선수·감독, 1927-2020)가 퇴장당했다.[4][1]
같은 기사는 이긴 까닭도 적어 두었다. 덩치 큰 10번 도욱사스가 뒤로 처졌다가 오른쪽으로 빠져나가기를 되풀이하며 아르헨티나 수비 라인을 헝클어뜨렸고, 자리를 바꿔 가며 움직이는 우루과이 앞줄 앞에서 아르헨티나의 수비는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25,000명쯤 되는 관중은 우루과이 편이었다. 경기가 끝나자 관중이 청해, 아직 우승이 확정되지도 않은 우루과이 선수들이 경기장을 한 바퀴 돌았다. 기사 한쪽의 작은 제목은 “되살아난 셀레스테”였다.[4][3]
전부 페널티킥이었던 3골
실베이라의 세 골은 모두 11미터 지점에서 나왔다. 여섯 해 뒤 보카 주니어스 선수가 된 그는 《엘 그라피코》 인터뷰에서 그 대회를 이렇게 돌아봤다. “안쪽 6번으로 뛰었고 그 대회에서 페널티킥으로 세 골을 넣었다.”(Jugaba de N° 6 adentro y en ese torneo marqué 3 goles de penal.) 기록표는 그를 주장 오라시오 트로체(Horacio Troche; 우루과이 수비수, 1935-2014)와 함께 맨 뒷줄에 적고, 본인과 당시 기사는 6번이라 부른다. 어느 쪽이든 그는 네 경기 360분 동안 한 골만 내준 수비의 한 축이었고, 팀이 얻은 페널티킥 세 개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5][1]
득점 순위표의 맨 위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아르헨티나의 호세 산필리포(José Francisco Sanfilippo; 아르헨티나 축구선수, 1935-)가 파라과이전과 브라질전에서 세 골씩, 여섯 골을 넣어 득점왕이 됐다. 에콰도르에서는 이 대회로 대표팀에 데뷔한 알베르토 스펜세르(Alberto Pedro Spencer Herrera; 에콰도르 축구선수, 1937-2006)가 마지막 날 파라과이전에서 한 골을 넣었다. 훗날 페냐롤에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통산 최다 득점자가 되는 그 스펜세르이며, 그가 데뷔한 경기장은 지금 그의 이름으로 불린다.[1][3]
88분의 동점골과 새벽 3시 반의 공항
마지막 경기는 12월 22일 파라과이전이었다. 우루과이는 32분에 프리킥으로 먼저 실점했는데, 이것이 골키퍼 소사(Roberto Sosa; 우루과이 골키퍼)가 대회에서 내준 단 한 골이다. 88분에 에스칼라다의 프리킥이 문전에서 몇 번 튀었고, 사시아가 그 공을 강하게 차 넣어 1-1을 만들었다. 승점 7, 이 무승부만으로도 우승에는 충분했다. 승점 6까지 닿을 수 있던 유일한 팀 브라질은 같은 날 아르헨티나에 1-4로 졌다.[1][3]
기자 한 명 보내지 않았던 나라가 돌아오는 길은 달랐다. 선수단이 몬테비데오 카라스코 공항에 내린 것은 성탄절 새벽 세 시 반이었고, 팬 수백 명이 그 시각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엘 그라피코》는 관중 수로 보나 참가국 면면으로 보나 이 대회가 우루과이 축구의 부활을 증명하지는 못한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타이틀은 타이틀이고 이 우승은 정당하다고 적었다.[3][4]
3월의 난투에서 12월의 대표 선수로
역대 대회 대표 선수를 정리한 RSSSF의 후대 목록은 1959년 두 번째 대회의 이름으로 실베이라를 적는다. 우루과이 쪽 자료도 그가 대회 최우수 선수로 뽑혔다고 되풀이하지만 누가 언제 뽑았는지는 밝히지 않으며, 동시대의 시상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 글의 최우수 선수도 앞선 편들처럼 후대 기록이 남긴 대표 선수라는 뜻이다.[2][3]
필자가 눈여겨보는 것은 같은 해 3월과 12월 사이의 거리다. 3월 26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실베이라는 브라질의 아우미르, 자기 팀 골키퍼와 한데 부딪쳤고, 그 충돌이 22분짜리 난투의 시작이었다. 그 대회에서 우루과이는 6위였고 대표 선수는 그와 부딪친 팀의 펠레였다. 아홉 달 뒤 과야킬에서는 같은 선수가 반쪽 명단의 맨 뒤를 지키며 팀의 페널티킥을 도맡았고, 이번에는 그의 이름이 대회의 얼굴로 남았다. 우루과이축구협회 기록으로 그의 대표팀 경력은 1959년의 여덟 경기 세 골이 전부다. 한 해에 두 번 열린 대회가 한 선수의 대표팀 생애를 통째로 담고 있다.[6]

과야킬은 그의 클럽 경력도 바꿔 놓았다. 실베이라의 회고에 따르면 그곳에서 그를 본 기예르모 스타빌레의 추천으로 아르헨티나의 인데펜디엔테가 이적을 제안했고, 수드 아메리카는 그를 팔지 말지를 회원 투표에 부쳤다. 그는 1960년에 인데펜디엔테로 건너가 그해 리그 우승을 했다. 13개월 뒤 《엘 그라피코》 표지에 나란히 선 세 사람 가운데 둘, 실베이라와 도욱사스는 과야킬에서 아르헨티나를 5-0으로 이긴 우루과이의 선수들이었다.[5][9]
출처와 기록 기준
- «Southamerican Championship 1959 (2nd Tournament)», Martín Tabeira, RSSSF. 경기별 명단·교체·득점 시각·퇴장·관중, 최종 순위와 득점 집계, 불참국과 브라질의 페르남부쿠 선발, 참가국 감독.
- «Copa America Best Players», RSSSF. 역대 대회 대표 선수 목록.
- «Copa América 1959: Entre turbulencias, también Uruguay campeón», Aníbal Rey, 우루과이축구사가연구자협회(AHIFU). 대회가 열린 경위와 성격, 우루과이의 준비 과정과 페냐롤 선수 불참, 경기별 경과, 귀국 장면.
- «1959. Uruguay golea a la Argentina por 5 a 0», 《엘 그라피코》. 12월 16일 경기의 현지 기사와 사진 설명.
- «1965. Cacho Silveira. La historia de dos pesos oro», 《엘 그라피코》. 실베이라의 1965년 인터뷰: 과야킬 대회 회고와 인데펜디엔테 이적 경위.
- «Alcides Silveira», 우루과이축구협회. 대표팀 출전 기록(1959년 3월 18일-12월 22일, 8경기 3골)과 생년월일.
- «Seleção Brasileira 1959-1960», RSSSF Brasil. 과야킬 대회 네 경기의 대표팀 공식 경기 분류와 선수 소속 구단.
- «Southamerican Championship 1959 (1st Tournament)», RSSSF. 3월 대회의 우루과이 순위와 3월 26일 경기 기록.
- «Tomás Rolan, Alcides Vicente Silveira y Vladas Douksas (Independiente) - El Gráfico 2155»,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1961년 1월 18일 《엘 그라피코》 표지. 표지 사진도 같은 표지다.
- 머리 그림과 12월 16일 경기 사진: 우루과이축구사가연구자협회의 위 글에 실린 사진이다. 단체 사진의 선수 순서는 같은 글의 사진 설명을 따랐다.
대표 선수는 RSSSF의 후대 정리에 근거하며 동시대 공식 MVP 시상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순위는 승리 2점제다. 대회 회차는 1956년 특별 대회를 포함해 센 순번이다. 실베이라의 생일은 우루과이축구협회의 1938년 3월 18일 말고도 6월 16일, 6월 18일로 적은 자료가 있어 본문에는 생년만 적었다. 득점 시각은 RSSSF를 따랐으며 우루과이 쪽 자료는 에콰도르전과 브라질전의 몇 골을 1-3분 다르게 적는다. 아르헨티나전 관중은 RSSSF가 50,000명, 《엘 그라피코》 현지 기사가 25,000명쯤으로 적어 본문은 현지 기사를 따랐다. 산필리포의 득점은 RSSSF의 경기별 기록으로 여섯 골이고, 다섯 골로 적은 자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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