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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 칼초 1913
Parma Calcio 1913 Società a responsabilità limitata스타디오 엔니오 타르디니 · 코파 이탈리아 3회 · UEFA컵 2회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1회
파르마 칼초 1913 역대 최고의 전설 열한 명과 2군 스물넷, 서른다섯 개의 이름을 필자의 견해로 골랐다.
작은 도시의 품격, 찬란한 축구의 문장

에밀리아로마냐의 중심, 부드러운 곡선처럼 흐르는 도시 파르마. 이곳은 파르미자노 레자노(Parmigiano Reggiano; 파르마 지방의 치즈)의 고장으로만 불리기엔 너무나 고요히, 아름답고, 깊었다.
그리고 1990년대, 이 도시에 황금빛 잉크를 든 축구의 서예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 축구는 세계 그 자체였다. AC 밀란, 유벤투스, 인테르, 로마, 라치오, 피렌체. 그 화려한 성채들 사이에서 파르마는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그들은 은은한 잘로블루(gialloblù; 노랑과 파랑) 유니폼 속에서 정제된 전술을 꺼내 들었고, 명장 네비오 스칼라(Nevio Scala; 이탈리아 감독, 1947-) 감독과 함께 유럽 정복을 향한 문장을 써 내려갔다.
에르난 크레스포의 탄성 어린 골 결정력, 튀람의 벽 같은 수비, 촐라의 섬세한 패스, 그리고 잔루이지 부폰. 파르마는 가장 강했던 시절조차 언제나 축구를 품격 있게, 가장 고결하게 연주해 냈다.
이 구단을 읽으려면 서로 다른 것 몇 가지를 함께 놓아야 한다.
먼저 도시다. 파르마는 사람이 20만이 안 되는 도시다. 밀라노나 토리노, 로마의 구단들과 견주면 관중석의 크기부터 다르다. 다만 작다고 해서 변두리는 아니었다. 한때 공국의 수도였고, 오페라의 도시이며, 치즈와 햄과 파스타로 이탈리아의 식탁을 채우는 고장이다. 작지만 제 것이 있는 도시가 제 구단을 가진 것이다. 이 도시의 회사들은 축구판에서도 낯설지 않았다. 파르마의 파스타 회사 이름은 오랫동안 AS 로마의 가슴에 붙어 있었다.
둘째는 음악이다. 구단의 뿌리가 작곡가다. 1913년 여름 이 고장이 낳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이탈리아 작곡가, 1813-1901)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려고 베르디 풋볼 클럽이 생겼고, 그 구단은 석 달 만에 사라졌다. 거기서 싹튼 것이 그해 12월 16일의 파르마 풋볼 클럽이다. 첫 셔츠는 흰 바탕에 검은 십자가였다.[1] 사람들은 지금도 이 구단을 크로차티(i Crociati; 십자가를 단 사람들)라 부른다. 노랑과 파랑은 도시의 색이고 십자가는 구단의 색이다. 필자가 디자인한 문장에도 그 둘이 반씩 들어 있다.
집은 처음부터 한 곳이다. 스타디오 엔니오 타르디니는 1922년의 마지막 날에 첫 돌을 놓았다. 경기장을 짓자고 앞장선 초기의 회장 엔니오 타르디니(Ennio Tardini; 파르마의 변호사·구단 회장, 1879-1923)의 이름을 받았다.[1] 그는 경기장이 다 지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타르디니는 도시 밖의 벌판에 있지 않고 주택가 한가운데에 있다. 구시가에서 걸어서 가는 거리다. 유럽의 결승에 오르던 시절에도 선수들은 동네 길을 지나 이 문으로 들어갔다.
셋째는 긴 무명이다. 구단은 처음 일흔일곱 해를 세리에 B와 C와 D 사이에서 보냈다. 1969년에는 돈이 없어 다른 구단과 합쳤고 4부에서 다시 시작했다.[1] 세리에 A에 처음 올라간 것이 1990년이다. 그 마지막 날의 상대가 이웃 도시 레자나였고, 골을 넣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이 글의 2군 명단에 있는 멜리(Alessandro Melli)다. 올라간 첫해에 6위를 해서 곧바로 유럽 대회에 나갔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1990년대 세리에 A의 맨 위를 다툰 일곱 구단을 일곱 자매(le sette sorelle)라 불렀다. 유벤투스, 밀란, 인테르, 로마, 라치오, 피오렌티나, 그리고 파르마다. 일곱 가운데 여섯은 큰 도시의 오랜 구단이고, 하나만 갓 올라온 소도시의 구단이었다.
넷째는 돈이다. 1990년대의 파르마 뒤에는 이 도시의 우유 회사 파르말라트가 있었다. 가슴의 스폰서로 시작해 구단의 주인이 됐고, 그 돈으로 세계의 재능을 사들였다. 그 회사는 축구를 광고판으로 쓸 줄 알았다. 우유를 팔러 들어간 나라마다 구단을 후원했고, 브라질에서는 파우메이라스의 살림을 함께 맡았다. 파르마로 온 남미 선수들 가운데에는 그 길을 따라온 이가 많다. 한 소도시의 구단이 세계 지도를 펴 놓고 선수를 고를 수 있었던 까닭이다. 승격한 뒤 열두 해 동안 트로피가 여덟 개 들어왔다. 코파 이탈리아 셋,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하나, UEFA 슈퍼컵 하나, UEFA컵 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Supercoppa italiana; 리그 우승 팀과 코파 이탈리아 우승 팀이 겨루는 대회) 하나.[1] 스쿠데토(scudetto; 세리에 A 우승 팀이 이듬해 가슴에 다는 작은 방패, 곧 리그 우승)만은 끝내 오지 않았다. 가장 가까웠던 1996-97시즌에 유벤투스에 승점 2점이 모자랐다.
다섯째는 그 돈의 끝이다. 2003년 12월 28일 자 토리노의 신문 1면 머리기사는 「파르말라트: 칼리스토 탄치 수감」이었다.[6] 회사의 장부에 있다던 돈이 없었다. 유럽에서 가장 큰 기업 파산 가운데 하나였고, 구단은 주인을 잃었다. 그 뒤 열 해 남짓을 버텼으나 2015년 3월 19일에 파산 선고를 받고 4부로 내려갔다.[1] 찬란함과 죄가 같은 돈에서 나왔다. 그 사실을 빼고 1990년대의 파르마를 품격이라는 말로만 부를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 돈이 운동장에서 본 축구까지 거짓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둘은 함께 있었다.
여섯째는 돌아온 길이다. 2015년 7월 27일 파르마 사람 일곱이 구단을 다시 세웠다. 4부 리그의 첫 경기에 수천 명이 따라갔다. 구단은 세 시즌에 세 번을 내리 승격해 2018년 5월 18일 세리에 A로 돌아왔다. 구단이 그날에 붙인 말이 「우리 같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다.[1] 그런 그들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이 명단을 처음 짠 것은 2025년 6월이다. 그 뒤 구단은 2025-26시즌 세리에 A를 13위로 마쳤고, 2026년 가을에 감독을 바꿨다. 새 감독은 알베르토 질라르디노(Alberto Gilardino)다. 이 글의 2군 명단에 선수로 이름이 있는 사람이다.
선정 전술 두 번의 파르마를 겹친 3-4-1-2
대형은 3-4-1-2다. 골문에 부폰을 세웠고, 스리백은 왼쪽부터 칸나바로, 센시니, 미노티다. 그 앞 네 줄의 양 끝에 베나리보와 튀람이 서고, 가운데에 크리파와 디노 바조가 선다. 그 위에 브롤린이, 맨 앞에 크레스포와 촐라가 선다.
스리백과 윙백은 파르마의 집안 옷이다. 스칼라는 세리에 B의 파르마를 맡은 날부터 수비를 다섯으로 세웠다. 가운데에 셋을 두고 양옆의 둘을 운동장 끝에서 끝까지 뛰게 하는 축구였다. 큰 구단들이 포백과 지역 방어로 넘어가던 때에 작은 구단이 고른 길이다. 수비수 하나를 더 두어 뒤를 잠그는 대신 양옆의 두 사람이 날개 노릇까지 했으니, 선수층이 얇은 팀이 열한 명을 열세 명처럼 쓰는 방법이었다. 이 글의 베나리보가 그 축구의 왼쪽이고 미노티가 그 한가운데다.
스칼라라는 사람도 이 도시와 닮았다. 베네토의 농가에서 태어나 AC 밀란에서 유러피언컵을 든 미드필더였고, 은퇴한 뒤에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작은 구단들을 맡았다. 1989년 세리에 B의 파르마에 왔을 때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이름값 높은 선수를 사 달라고 하는 대신 가진 선수들에게 맞는 대형을 짰고, 첫 시즌에 승격했으며, 올라간 뒤에도 그 대형을 바꾸지 않았다. 큰 구단의 흉내를 내지 않은 것이 이 작은 구단의 첫 성공이다.
1998년에 온 알베르토 말레사니(Alberto Malesani; 이탈리아 감독, 1954-)가 그 옷을 다시 꺼냈다. 수비 셋에 윙백 둘, 그 앞에 지휘자 하나와 공격수 둘. 이 글의 대형이 바로 그것이다. 그의 파르마는 1999년 5월에 여드레 사이로 코파 이탈리아와 UEFA컵을 들었다.[5] 그 팀의 골문이 부폰이고, 수비가 튀람과 센시니와 칸나바로이며, 가운데가 디노 바조, 맨 앞이 크레스포다. 열한 명 가운데 여섯이 그 한 팀에서 왔다.
나머지는 스칼라의 팀이다. 미노티와 베나리보, 크리파와 브롤린과 촐라. 웸블리와 그 뒤의 두 해를 만든 사람들이다. 센시니와 디노 바조와 베나리보는 두 팀에 다 걸친다. 스칼라의 파르마가 구단의 문을 열었고 말레사니의 파르마가 가장 높이 올라갔으며, 그 사이의 두 해를 맡은 카를로 안첼로티(Carlo Ancelotti; 이탈리아 축구 감독, 1959-)의 파르마가 스쿠데토에 가장 가까이 갔다. 안첼로티는 파르마 근처 레졸로에서 난 이 고장 사람이고, 선수 생활도 파르마에서 시작했다. 그가 감독으로 처음 맡은 큰 팀이 고향의 구단이었다. 서른일곱의 젊은 감독은 넷, 넷, 둘을 한 치도 바꾸지 않았다. 그래서 촐라를 내보냈고, 이듬해에는 오고 싶다는 로베르토 바조를 받지 않았다. 훗날 그는 두 일을 모두 후회했다고 전한다. 대형에 사람을 맞추던 그 고집이 2위를 만들었고, 2위에서 멈추게도 했다.
튀람을 오른쪽 윙백에 둔 것은 원고의 선택이다. 그는 파르마에서 대개 스리백의 오른쪽에 섰다. 그 자리에서도 그는 풀백처럼 올라갔으니, 한 줄 올려 세워도 하는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대신 뒤의 셋이 전부 센터백으로 채워진다. 칸나바로가 잡고 센시니가 읽고 미노티가 쓸어 낸다. 파르마를 ’수비 학교’라 부른 원고의 말이 이 석 줄에 있다.
앞의 셋은 서로 만난 적이 거의 없다. 브롤린은 1995년에, 촐라는 1996년 가을에 떠났고 크레스포는 그 1996년 여름에 왔다. 촐라와 크레스포가 한 팀이던 것은 몇 달뿐이다. 안첼로티의 넷, 넷, 둘에 10번의 자리가 없어서 촐라가 팔렸기 때문이다. 이 글의 앞줄은 파르마가 실제로는 갖지 못한 조합이다. 작은 구단은 좋은 것을 한꺼번에 오래 쥐지 못한다. 종이 위에서만은 쥐어 본다.
여덟 개의 트로피에 열한 명이 어떻게 걸쳐 있는지를 적어 둔다.
| 해 | 트로피 | 이 글의 열한 명 가운데 |
|---|---|---|
| 1992 | 코파 이탈리아 | 미노티, 베나리보, 브롤린 |
| 1993 |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 미노티, 베나리보, 브롤린 |
| 1993 | UEFA 슈퍼컵 | 미노티, 베나리보, 센시니, 크리파, 브롤린, 촐라 |
| 1995 | UEFA컵 | 미노티, 베나리보, 센시니, 크리파, 디노 바조, 브롤린, 촐라 |
| 1999 | 코파 이탈리아 | 부폰, 칸나바로, 센시니, 튀람, 베나리보, 디노 바조, 크레스포 |
| 1999 | UEFA컵 | 부폰, 칸나바로, 센시니, 튀람, 베나리보, 디노 바조, 크레스포 |
| 1999 |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 부폰, 칸나바로, 튀람, 베나리보, 디노 바조, 크레스포 |
| 2002 | 코파 이탈리아 | 칸나바로, 센시니, 베나리보 |
여덟 줄에 모두 있는 이름은 베나리보 하나다. 1995년까지의 이름과 1999년부터의 이름은 거의 겹치지 않는다. 같은 구단이 다섯 해 사이에 선수단을 통째로 갈고도 또 이겼다. 파르마의 황금기는 한 팀의 것이 아니고 두 팀의 것이다.
1. 잔루이지 부폰 - 골키퍼

디자인 정정 1군에서 처음 뛴 해는 1995년이다. 그가 파르마에서 든 UEFA컵은 1998-99시즌의 한 번이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골키퍼 순위 3위.
전 세계 골키퍼 중 레프 야신과 통틀어 신(神)으로 군림하던 선배 디노 초프를 넘어, 21세기에서는 마누엘 노이어와 함께 2대장으로 분류되는 골키퍼.
1995년 파르마 AC에서 시작해 2023년 파르마 칼초 1913에서 마무리한 경력. 두 개의 이름, 하나의 팀에서 시작과 끝을 마무리한 지지 부폰(Gianluigi Buffon; 이탈리아 골키퍼, 1978-). 그 사이의 열일곱 해는 유벤투스 FC 역대 베스트 11에 적었다. 그는 그 구단의 1번이기도 하다.
열세 살에 파르마의 유소년에 들어왔다. 미드필더였던 아이가 골문으로 간 곳이 여기다. 골키퍼는 집안의 내력이기도 하다. 1950년대 AC 밀란과 이탈리아의 골문을 지킨 로렌초 부폰(Lorenzo Buffon; 이탈리아 골키퍼, 1929-2025)이 그의 먼 친척이다. 1995년 11월 19일, 주전 골키퍼가 다쳐 열일곱 살의 그가 처음 나섰다. 발롱도르 수상자인 조지 웨아, 로베르토 바조 등이 버티던 AC 밀란을 상대하며 데뷔하던 잔루이지 부폰은 ‘무실점’ 기록으로 커리어를 시작하였고, 세계는 전설의 서막을 지켜보게 됐다. 그 주전 골키퍼가 2군 명단의 루카 부치(Luca Bucci)다. 반년 전 UEFA컵을 든 골키퍼의 자리를 고등학생 나이의 후배가 한 시즌 만에 가져갔다. 주전이 된 첫 시즌이 구단이 2위를 한 1996-97시즌이다. 열여덟 살의 골키퍼가 스쿠데토를 다투는 팀의 골문을 맡았고, 그 시즌 파르마는 리그에서 가장 적게 내준 팀 가운데 하나였다. 이탈리아 대표로 처음 선 것도 열아홉 때다. 1997년 10월 모스크바, 눈이 내리는 월드컵 예선 플레이오프에서 다친 선배를 대신해 들어갔다.
파르마는 부폰에게 축구의 뿌리를 안겨 주었고, 부폰은 파르마를 ’전설이 탄생한 땅’으로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가장 완성형 골키퍼로 분류되는 잔루이지 부폰은 골키퍼가 갖춰야 될 반사 신경, 공중볼 장악력, 선방 능력, 볼 캐치 능력이 SS급인 것은 물론 리더십, PK 방어 시 카리스마, 심지어 볼 배급 능력까지 대놓고 월드클래스 수준이었다. 젊은 날의 그는 훗날보다 훨씬 요란한 골키퍼였다. 몸을 날리는 일을 즐겼고, 수비 뒤로 넘어온 공을 벌칙 구역 밖까지 달려 나가 걷어 냈다. 스리백 뒤가 넓게 비는 파르마의 수비에서 그 버릇은 쓸모가 컸다.
1999년 5월 12일 모스크바의 UEFA컵 결승에서 파르마는 마르세유를 3-0으로 이겼다. 이튿날의 신문은 부폰이 제대로 시험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적었다.[5] 눈밭의 데뷔전을 치른 도시에 두 해 만에 돌아온 스물한 살의 골키퍼에게, 이번에는 할 일이 없는 결승이었다. 그 앞에 튀람과 센시니와 칸나바로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2001년 여름 그는 골키퍼에게 매겨진 세계 최고 이적료를 남기고 유벤투스로 갔다. 그리고 스무 해 뒤인 2021년, 마흔셋의 나이로 세리에 B에 있던 파르마에 돌아왔다. 두 시즌을 더 막고 2023년 8월에 장갑을 벗었다. 열세 살에 들어온 문으로 마흔다섯에 나갔다.
2. 로렌초 미노티 - 센터백

파르마 축구사 중 가장 정제된 스타일의 수비수로 득점력 역시 수준급이었다. 파르마의 대서사시를 지탱했던 첫 번째 기둥.
“아름다운 축구를 위해선 단단한 문턱이 필요하다.” 필자가 지은 이 한 문장은 파르마라는 도시에서 오직 로렌초 미노티(Lorenzo Minotti; 이탈리아 수비수, 1967-)만을 위해 존재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로마냐의 체세나에서 태어나 고향 구단에서 컸고, 스무 살이던 1987년에 세리에 B의 파르마로 왔다. 아홉 시즌을 뛰는 동안 구단은 2부에서 유럽의 결승까지 올라갔다. 그 길의 대부분을 완장을 차고 걸은 사람이다. 첫 트로피는 1992년 5월의 코파 이탈리아다. 결승 상대가 유벤투스였다. 토리노에서 0-1로 지고 돌아와 타르디니에서 2-0으로 뒤집었다. 세리에 A에 올라온 지 두 해 된 구단이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구단을 안방에서 꺾고 처음으로 무언가를 들었다.
185cm라는 크지도, 그렇다고 결코 작지도 않은 체구를 지녔던 미노티는 냉철한 전술 이해도를 바탕으로 상대 공격수의 공격 작업을 선제적으로 커팅하는 데 수준급이었으며, 이탈리아 전통 수비수의 정수를 구현한 리베로(libero; 맡을 사람 없이 수비 뒤를 쓸고 공격의 첫 패스를 내는 자리)였다. 스칼라의 스리백 한가운데에서 그는 양옆의 두 센터백이 사람을 잡으러 나간 뒤를 쓸었고, 공을 잡으면 미드필더처럼 몰고 올라갔다. 354경기에 36골. 맨 뒤의 수비수가 넣은 수로는 놀랍다. 코너킥과 프리킥이 올라올 때면 그는 늘 벌칙 구역에 가 있었다.
1992-93시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전에서는 로열 앤트워프를 상대로 전반 9분 만에 득점을 기록했다. 코너킥이 수비 머리를 맞고 흐른 공을 몸을 눕혀 그대로 찼다. 1993년 5월 12일 런던 웸블리였다. 이튿날 토리노의 신문 1면 제목은 「웸블리에서 파르마가 역사에 들어갔다」였다.[2] 골은 미노티와 멜리와 쿠오기(Stefano Cuoghi; 이탈리아 미드필더, 1959-)가 넣었고, 파르마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을 든 다섯 번째 이탈리아 구단이 됐다. 세리에 A에 올라온 지 세 해 만이다. 그 밤의 라커 룸에서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이 목표는 꿈이 아니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이걸 생각하고 있었다. 4년 전, B에서 A로 올라오던 때부터.
Non era un sogno questo traguardo, da tempo ci pensavamo, da quattro anni, da quando dalla B siamo saliti alla A.
네비오 스칼라, 1993년 5월 12일 웸블리의 라커 룸에서. 『라 스탐파』 1993년 5월 13일 자
같은 기사의 첫 줄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대주주이자 유일한 스폰서인 칼리스토 탄치(Calisto Tanzi; 이탈리아 기업인·파르말라트 창업자, 1938-2022)가 라커 룸의 월풀 욕조에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3] 우유 회사의 주인이 웸블리의 욕조에 몸을 담근 그 장면에서 파르마의 10년이 한눈에 보인다. 열 해 뒤 같은 신문의 1면은 그의 수감을 알린다.
그해에 파르마는 UEFA 슈퍼컵에도 나가 AC 밀란을 상대로 합계 2-1 승리를 거두며 영광의 시즌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단장과 감독의 신뢰를 받으며, 팀의 리더로서 1990년대 중반 파르마의 전성기를 함께한 ’중후장대한 방패’였다. 1995년 UEFA컵도 그가 주장으로 들었다. 이탈리아 대표로는 여덟 경기를 뛰었고 1994년 미국 월드컵의 선수단에 들었으나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다. 그해의 아주리에는 바레시와 말디니와 코스타쿠르타가 있었다. 그가 리베로로 뛰던 세월이 하필 이탈리아에 리베로가 가장 많던 세월이다. 1996년에 칼리아리로 떠났다.
2015년 구단이 4부에서 다시 시작했을 때, 그는 기술 책임자로 돌아왔다. 그때의 회장이 스칼라였다. 웸블리의 감독과 주장이 스물두 해 뒤 세리에 D의 구단에 다시 모인 것이다.
3. 로베르토 센시니 - 센터백

아르헨티나 특유의 투혼과 이탈리아식 지능형 수비의 교차점을 가장 정확하게 수행하던 센터백.
로베르토 센시니(Roberto Néstor Sensini; 아르헨티나 수비수, 1966-), 그 이름은 아르헨티나 축구의 ’개념 수비’를 이탈리아 무대에 정착시킨 존재였다. ACF 피오렌티나에서 뛰던 대선배 다니엘 파사레야를 좇는 자.
산타페주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로사리오의 뉴웰스 올드 보이스에서 컸고, 1989년에 이탈리아의 우디네세로 건너왔다. 파르마에는 1993년 가을에 왔다. 스물일곱의 나이였고, 이미 월드컵 결승을 뛰어 본 수비수였다. 그 겨울의 UEFA 슈퍼컵 2차전, 산 시로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넣은 헤더가 그의 첫 큰 골이다. 그 골로 합계가 같아졌고 연장에서 크리파가 끝냈다.
포지셔닝, 지능적인 압박, 기민한 태클 타이밍으로 1990년대 세리에 A 무대에서 수비 진영의 미학을 체화한 인물이었던 로베르토 센시니는 칸나바로, 튀람과 함께 스리백을 구성했다. 필자는 그 셋을 ’트리콜로레 철벽 라인’이라 부른다. 그의 특징은 딱 한 마디로 정의된다.
“가장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각도로, 정확한 생각으로.”
178cm의 키로는 세리에 A의 9번들과 공중에서 다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가 있었다. 미드필더로도, 풀백으로도 뛰어 본 사람이라 공이 어디로 올지를 수비수의 눈과 미드필더의 눈으로 함께 봤다. 칸나바로가 뛰어올라 걷어 내고 튀람이 달려가 덮는 수비에서 그는 가운데에 서서 둘의 뒤를 맞췄다. 셋 가운데 가장 눈에 덜 띄고 가장 오래 뛰었다. 1995년 산 시로와 1999년 모스크바, 파르마가 UEFA컵을 든 두 번의 결승에 모두 선 수비수이기도 하다. 1996년 여름에는 나이 제한을 넘는 선수로 애틀랜타 올림픽에 나가 은메달을 땄다. 그 팀의 9번이 크레스포였다. 올림픽이 끝나자 크레스포는 선배가 있는 파르마로 왔다. 낯선 나라의 작은 도시에서 야유를 듣던 스물한 살의 공격수 곁에 같은 말을 쓰는 서른의 수비수가 있었다.
그는 파르마에서 코파 이탈리아 우승 2회를 포함 UEFA컵 우승 2회까지 차지하며 메이저 대회의 우승을 연이어 휩쓸었고, 이 시기는 곧 구단의 황금기이기도 하였다. 화려한 이름들 사이에서 그는 여섯 시즌 내내 빠지는 일이 드물었다. 1999년에 라치오로 가서 한 시즌 만에 스쿠데토를 들었고, 이듬해 파르마로 돌아와 2002년 코파 이탈리아를 하나 더 들었다. 파르마가 끝내 갖지 못한 스쿠데토를 그는 한 해 다녀와서 가졌다. 그 한 해 동안 그는 라치오 편의 네스타와 미하일로비치 곁에서 뛰었다.
대표팀에서는 세 번의 FIFA 월드컵(1990, 1994, 1998년)에 참가하였고, 특출한 국가대표 커리어를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늘 신뢰받는 수비수로서 모든 감독의 신임을 얻고는 하였었다. 첫 월드컵의 끝은 썼다. 1990년 로마의 결승에서 종료 몇 분 전 그의 태클에 페널티킥이 불렸고, 아르헨티나는 그 한 골로 졌다. 스물셋의 일이다. 그는 그 뒤로 열여섯 해를 더 뛰어 마흔이 다 되어 우디네세에서 은퇴했다.
4. 파비오 칸나바로 - 센터백

디자인 정정 디자인의 별명 베를린 장벽은 2006년 월드컵 결승 뒤에 붙은 것이다. 파르마에서 뛰던 때의 별명은 아니다.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센터백 순위 8위.
파르마에서 완성된 방패, 21세기 최초의 수비 왕, 2006년 발롱도르 위너.
파르마 칼초 1913은 ’수비 학교’로서 유럽에서 위상을 다졌다. 그 안에서 파비오 칸나바로(Fabio Cannavaro; 이탈리아 수비수, 1973-)는 SSC 나폴리의 원석에서 파르마 AC의 다이아몬드로 조련되었다. 나폴리에서 나고 그 구단의 볼 보이로 자란 그가 스물하나이던 1995년에 팔려 온 까닭은 고향 구단의 빚이다. SSC 나폴리 역대 베스트 11에서 그는 추가 명단에 있다. 두 해 앞서 촐라도 같은 까닭으로 같은 길을 왔다. 남쪽의 큰 구단이 기울 때 북쪽의 작은 구단이 그 재능을 받았다. 몇 해 뒤에는 여덟 살 아래의 동생 파올로(Paolo Cannavaro; 이탈리아 수비수, 1981-)도 형을 따라 파르마로 왔고, 형제는 두 시즌을 한 수비선에서 뛰었다.
176cm라는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점프력, 공간 감각, 그리고 “선수 간 거리 제어” 능력으로 세리에 A는 물론 유럽 전체 최정상급 센터백으로 도약했던 1990년대의 칸나바로.
그의 플레이는 직관의 연속이었다. 상대의 패스를 예측하고, 볼을 낚아채듯 걷어 내고, 전진 압박까지 연결되는 선형적 수비 전술의 전범(典範)이었다. 제자리에서 뛰어도 머리 하나가 더 올라갔고, 키 큰 공격수가 뛰기 전에 먼저 떠 있었으니 공중에서 지는 일이 드물었다. 땅에서는 더 빨라서, 공격수가 공을 받으려고 몸을 돌리는 그 반 박자에 발이 들어갔다. 태클을 하고 나서도 넘어져 있지 않고 벌떡 일어나 다음 공으로 갔다. 말레사니의 스리백에서 그는 왼쪽에 섰다. 사람을 맡아 끝까지 따라가는 일이 그의 몫이었고, 그가 나가서 비운 자리는 가운데의 센시니가 덮었다. 키가 작은 센터백 둘이 한 수비선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뒤를 그렇게 맡았기 때문이다.
그는 본인보다 큰 스트라이커들을 하나둘 침묵시켰고, 결국 이 능력은 2006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수비수 발롱도르’ 수상으로 이어졌다.
파르마 AC에서 그는 세리에 A 준우승 1회, 코파 이탈리아 우승 2회,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 1회, UEFA컵 우승 1회를 이끌며 황금기의 핵심 멤버가 되었고, 특히 1999년 그는 왕(王)이었다. 모스크바의 결승에서 파르마는 한 골도 내주지 않았다. 그의 옆에 튀람이, 뒤에 부폰이 있었다. 세 사람은 그 무렵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대표팀에서도 뒤를 지켰다. 한 소도시 구단의 수비 셋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두 나라의 수비이기도 했다. 2000년 7월 로테르담의 UEFA 유로 결승이 그 사실을 한 장면으로 보여 준다. 이탈리아의 수비에 칸나바로가, 프랑스의 수비에 튀람이 섰다. 부폰은 대회 직전에 손을 다쳐 나가지 못했다. 파르마의 두 수비수가 유럽의 결승에서 서로의 공격수를 막았고, 연장에서 프랑스가 이겼다.
2002년 여름 그는 인테르로 팔렸다. 구단의 살림이 기울기 시작한 때다. 일곱 시즌 동안 290경기를 뛰었고, 마지막 시즌에는 완장을 차고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파르마의 마지막 트로피다.
5. 안토니오 베나리보 - 레프트백

파르마의 기념비 같은 존재. 강철의 폐, 고요한 발, 정확한 시간 감각.
13시즌 동안 팀에 헌신했던 ’헌신의 아이콘’으로서 파르마를 향해 무한한 애정을 쏟았던 안토니오 베나리보(Antonio Benarrivo; 이탈리아 수비수, 1968-)는 1990년대와 2000년대 팀의 황금기를 정통으로 맞이한 사내였으며, 때문에 트로피 진열장이 그 누구보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기도 하다.
이탈리아의 뒤꿈치인 풀리아의 브린디시에서 태어났다. 파르마 사람들은 그를 베니라 줄여 불렀다. 고향 구단과 파도바를 거쳐 스물둘이던 1991년에 왔다. 파르마가 세리에 A에서 맞은 두 번째 시즌이다.
코파 이탈리아 우승 3회,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우승 1회,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 1회, UEFA컵 우승 2회, UEFA 슈퍼컵 우승 1회를 포함하여 세리에 A 준우승 및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준우승 1회까지 수차례의 결승전을 경험했던 안토니오 베나리보. 이 목록을 세어 보면 여덟이다. 파르마가 구단사에 가진 트로피가 여덟 개이니, 그는 그 전부를 든 사람이다. 1992년의 첫 코파 이탈리아부터 2002년의 마지막 코파 이탈리아까지 한 사람이 다 있었다.
키 170cm의 윙백이었다. 양쪽을 다 뛰었고 왼쪽에서 가장 오래 뛰었다. 스칼라의 축구에서 윙백은 수비수이면서 날개였으니 한 경기에 운동장의 긴 변을 수십 번 오갔다. 원고가 강철의 폐라 적은 것은 그 달리기다. 공을 잡으면 요란하게 제치지 않고 안쪽의 미드필더에게 주고 다시 뛰었다. 그가 올라간 자리를 가운데의 크리파가 메웠고, 그가 내려온 자리로 브롤린과 촐라가 흘러나왔다. 풀백이 날개 노릇까지 하는 것이 지금은 흔하지만 그때의 이탈리아에서는 스칼라의 파르마가 그 본보기였다. 그 반대쪽에서 같은 일을 한 사람이 2군 명단의 디키아라(Alberto Di Chiara)다.
그는 전 세계 센터백 순위 TOP 10에서 평가되는 칸나바로, 전 세계 라이트백 순위 TOP 5에서 평가되는 릴리앙 튀람과 비교하면 보잘것없는 이름값을 지녔으나 파르마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월드클래스였고, 그 누구보다 유명한 수비수였다. 별들은 왔다가 팔려 갔고 그는 남았다. 부폰도 튀람도 칸나바로도 크레스포도 그가 있는 동안 왔다가 그가 있는 동안 떠났다.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도 1994 FIFA 월드컵에서의 고공행진을 빛냈던 존재로서 이탈리아 전통 수비 라인의 한 축이기도 하였다. 그 대회의 결승까지 그는 풀백으로 뛰었다. 16강 나이지리아전의 연장에서 벌칙 구역으로 파고들다 걸려 넘어져 결승 페널티킥을 얻어 낸 사람이 그다. 그 공을 로베르토 바조가 찼다. 2004년에 은퇴했다. 파르말라트가 무너진 바로 다음 여름이다. 구단의 가장 좋은 열세 해가 그의 열세 해와 같은 날 시작해 같은 날 끝났다.
6. 릴리앙 튀람 - 라이트백

필자가 과거에 선정했던 전 세계 역대 라이트백 순위 5위.
브라질의 자우마 산투스, 카를루스 아우베르투 토히스, 카푸 그리고 독일의 베르티 포크츠와 함께 전 세계 축구사 라이트백 계보 다섯 손가락에서 평가되는 “축구사 이래 공수 밸런스가 가장 완벽했던 풀백” 릴리앙 튀람(Ruddy Lilian Thuram-Ulien; 프랑스 수비수, 1972-).
릴리앙 튀람은 파르마가 유럽의 왕좌를 노리던 시절, 수비 라인의 양쪽 끝을 완전히 봉인한 지적이고 강인한 전사였다.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과들루프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어머니를 따라 파리 근교로 건너왔다. 모나코에서 프로가 됐고, 스물넷이던 1996년 여름에 파르마로 왔다. 크레스포가 온 여름이고 안첼로티가 부임한 여름이다.
“축구하는 철학자”라는 말을 듣던 그는 전술의 축, 템포의 조율자, 심리전의 지배자로서 그라운드 위를 누볐는데 체격은 웬만한 센터백보다 컸고, 스피드는 윙어보다 빨랐으며, 머리 회전은 감독보다 빠른 수준이었으니 21세기 초 해외 축구를 보지 못하던 자들도 튀람의 위상은 상상할 수 있다. 파르마에서 그는 스리백의 오른쪽과 포백의 오른쪽을 오갔다. 말레사니의 팀에서 그의 앞을 오르내린 오른쪽 윙백이 라치오 편 서브 명단의 푸세르(Diego Fuser; 이탈리아 미드필더, 1968-)다. 어느 쪽에 서든 하는 일이 같았다. 공격수와 나란히 달려 어깨로 밀어내고, 빼앗은 공을 몰고 운동장 절반을 올라갔다. 달리는 수비수가 드물던 이탈리아에서 그는 수비수가 얼마나 넓은 땅을 맡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책을 읽는 선수로도 알려졌다. 훗날 그는 인종 차별에 맞서는 재단을 세우고 책을 썼다. 이탈리아의 운동장에서 그가 무엇을 들었는지를 생각하면 그 일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98년 여름 그는 파르마의 선수로 세계 챔피언이 됐다. 준결승 크로아티아전에서 프랑스의 두 골을 모두 넣었다. 대표팀 142경기에서 넣은 골이 그 둘뿐이다. 파르마에서도 228경기에 한 골이다. 넣는 일은 그의 일이 아니었고, 그 한 번을 가장 큰 경기에서 했다.
이 도시는 그의 집안에 한 겹이 더 있다. 1997년 8월 파르마에서 그의 맏아들 마르쿠스(Marcus Thuram; 프랑스 공격수, 1997-)가 태어났다. 그 아이는 프랑스 대표 공격수가 되어 지금 인테르에서 뛴다. 네 해 뒤 이웃 도시 레조에밀리아에서 태어난 둘째 케프렌(Khéphren Thuram; 프랑스 미드필더, 2001-)은 유벤투스의 미드필더다. 과들루프에서 온 수비수가 에밀리아의 소도시에서 다섯 해를 뛰는 동안 프랑스의 다음 세대 둘이 그 고장에서 났다.
1996년부터 2001년까지 5년간 활약하는 동안 세리에 A 준우승, 코파 이탈리아 우승, UEFA컵 우승이라는 굵직한 커리어를 누적한 튀람을 필자는 “아성(牙城)“이라 부른다. 2001년 여름 그는 부폰과 함께 유벤투스로 팔려 갔다. 한 여름에 골키퍼와 수비수가 같은 구단으로 갔고, 파르마는 그 값으로 몇 해를 더 버텼다.
7. 디노 바조 - 수비형 미드필더

토리노 FC의 유소년에서 자란 사내였지만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이탈리아 공격수, 1967-)와 함께 유벤투스에서 뛰었고, 이후 파르마에서는 전설이 된 미드필더. 파르마 축구의 핵.
1994 FIFA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의 위상에 공헌했던 미드필더이며, 철인이라 불렸던 디노 바조(Dino Baggio; 이탈리아 미드필더, 1971-).
그의 축구는 화려하지 않았고, 누군가의 눈에 드러나지 않았기에, 심지어 이름마저 ’로베르토 바조’와 같다는 이유로 ’바조 2’라는 꼬리표를 커리어 내내 붙들고 다녀야만 했던 사내였다. 둘은 친척이 아니다. 성이 같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플레이는 기계적이면서도 인간적이었고, 1990년대 이탈리아 대표 수비형 미드필더로 점점 성장하며 “바조 2”가 아닌 “디노 바조”로서 본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베네토의 파도바 근처에서 태어났다. 유벤투스에서 두 시즌을 뛰며 1993년 UEFA컵을 들었고, 그 결승 두 경기에서 세 골을 넣었다. 1994년 여름 미국 월드컵에서 준우승하고 돌아오자 유벤투스가 그를 파르마에 팔았다. 그 월드컵에서 그는 두 골을 넣었다. 골키퍼가 퇴장당해 열 명이 된 노르웨이전의 결승 헤더와 8강 스페인전의 중거리 슛이다. 이탈리아가 떨어질 뻔한 고비마다 두 바조가 번갈아 넣었다. 본인은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188cm의 미드필더였다. 그 키로 가운데를 지키다가 코너킥과 프리킥이 올라오면 벌칙 구역으로 들어갔다. 발로 차는 중거리 슛도 무거웠다. 수비형 미드필더가 큰 경기에서 골을 넣는 일이 그에게는 버릇이었고, 그 버릇이 가장 크게 드러난 것이 1995년 5월이다.
UEFA컵 결승의 상대가 한 해 전까지 제 구단이던 유벤투스였다. 1차전에서 그의 골로 1-0. 2차전에서 유벤투스가 먼저 넣자 그가 머리로 받아 넣어 1-1. 합계 2-1로 파르마가 들었다. 이튿날 토리노의 신문은 1면에 이렇게 썼다.
옛 선수를 믿지 마라. 운명의 사나이는 모습을 바꾸지 않는다. 언제나 디노 바조다.
Mai fidarsi degli ex. L'uomo del destino non cambia sagoma, è sempre Dino Baggio.
로베르토 베칸티니, UEFA컵 결승 2차전의 이튿날 1면 칼럼 「운명의 사나이」. 『라 스탐파』 1995년 5월 18일 자
유벤투스의 도시에서 나오는 신문이 진 날 1면에 상대 선수의 이름을 제목으로 올렸다. 기사는 한 바조가 승부를 정했고 다른 바조, 곧 로베르토가 그것을 빼앗으려 온갖 애를 썼다고 이어 간다.[4] 같은 날 안쪽 면의 제목은 그해의 두 구단을 「끝없는 대결」이라 불렀다.[7] 리그 우승과 코파 이탈리아 결승과 UEFA컵 결승, 세 대회의 끝에서 파르마와 유벤투스가 만난 시즌이다. 유벤투스가 둘을 가져갔고 파르마가 유럽의 것을 가졌다. 그 기사에는 한 줄이 더 있다. 스칼라가 열흘 전 팬들의 항의 때문에 구단을 떠날 뻔했다는 것이다. 유럽의 결승을 앞둔 감독도 이 도시에서는 야유를 들었다. 그날만은 꼬리표가 뒤집혔다. 그는 UEFA컵을 세 번 들었고, 그 가운데 두 번의 결승에서 골을 넣었으며, 한 번은 유벤투스를 위해, 한 번은 유벤투스를 상대로 넣었다.
두 차례의 FIFA 월드컵은 물론 파르마에서도 UEFA컵과 코파 이탈리아 등 모든 대회에서 본인의 위상을 떨치니 그가 트로피를 들어 올렸을 때 가장 기뻐하던 것은 팬들이었다. 1999년의 두 트로피까지 들고 2000년에 라치오로 떠났다. 그 두 번째 UEFA컵으로 가는 길에는 피가 있었다. 1998년 10월 크라쿠프 원정에서 관중석에서 날아온 칼이 그의 머리에 맞았다. 그는 머리를 꿰매고 그 대회를 끝까지 뛰어 모스크바에서 트로피를 들었다. 철인이라는 말이 그해에는 글자 그대로였다.
8. 마시모 크리파 - 중앙 미드필더

1990년대 이탈리아에서 가장 패스를 잘하던 미드필더 중 한 명.
“견고함”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활동했던 미드필더 마시모 크리파(Massimo Crippa; 이탈리아 미드필더, 1965-)는 파르마 전술의 그 자체로서 활약하던 중원의 엔진이었다.
롬바르디아의 세레뇨에서 태어났고, 토리노를 거쳐 1988년에 나폴리로 갔다. 거기서 다섯 시즌을 뛰며 UEFA컵과 스쿠데토를 들었다. 마라도나가 마음대로 앞을 볼 수 있게 그 뒤를 뛰어 메우던 사람 가운데 하나다. 그해 가을에는 이탈리아 올림픽 대표로 서울에 왔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4위를 한 팀의 미드필더다. 스물여덟이던 1993년 여름 촐라와 함께 파르마로 왔다. 가장 화려한 10번의 뒤를 받치던 미드필더가 새 구단에서도 같은 일을 맡았다. 이번에 그의 앞에 선 사람은 촐라와 브롤린과 아스프리야(Faustino Asprilla)다.
상대 진영에 무게를 실어 주는 볼 간수 능력. 2선 압박을 밀어붙이는 파워풀한 드리블. 공간을 덮는 전술적 감각. 이 3박자는 팀의 무게를 잡아 주기에 안정적인 추처럼 활약하는 근원이 되었다.
그는 거친 태클 속에서도 반칙보다는 정당성을 택하던 존재였는데 볼 트래핑 후 전방으로 잇는 짧은 패스나 좌우 공간 스위치 타이밍 등이 기가 막혔으며, 때문에 그의 플레이와 그의 발로부터 시작된 볼 줄기는 템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외려 살리는 플레이를 이어 가기도 했었다. 한 마디로 경기의 ’좋음’과 ’나쁨’을 진단하는 어느 의사의 맥과 같았다.
스칼라의 축구에서 가운데 미드필더는 쉴 틈이 없었다. 윙백이 올라가면 그 뒤를 메우고, 스리백 앞에서 흘러나온 공을 주워야 했다. 그 일을 하면서 그는 벌칙 구역까지 뛰어들 힘을 남겨 두었다. 가장 큰 골이 그렇게 나왔다. 1994년 2월 2일 산 시로의 UEFA 슈퍼컵 2차전, 센시니의 골로 합계가 같아진 뒤 연장 전반에 그가 넣었다. 유럽 챔피언 AC 밀란을 그 안방에서 꺾은 골이다. 파르마가 큰 구단의 운동장에서 큰 구단을 이기는 법을 익힌 밤이다. 한 해 전 같은 운동장에서 2군 명단의 아스프리야가 프리킥 하나로 밀란의 리그 58경기 무패를 끝낸 일이 있었다. 산 시로는 파르마에 운이 따르는 곳이었고, 1995년 UEFA컵 결승 2차전도 거기서 치렀다.
다섯 시즌 203경기를 뛰었다. 1995년 UEFA컵을 들었고 1996-97시즌 2위 팀의 가운데에 있었다. 스칼라의 다섯 줄 수비에서도, 안첼로티의 넷, 넷, 둘에서도 그의 자리는 그대로였다. 감독이 바뀌고 대형이 바뀌어도 가운데를 뛰어 메우는 사람은 어디서나 필요했다. 필자가 그를 두고 패스가 아름다웠다고 소문난 선수라 적은 것은 그 맥을 짚는 솜씨 때문이다. 마라도나의 뒤에서, 그리고 촐라의 뒤에서 그는 같은 일을 했다. 10번이 빛나는 팀에는 대개 그런 8번이 있다. 눈에 띄는 패스를 하는 사람은 그의 앞에 따로 있었다. 그는 그 사람들에게 공이 좋은 때에 가도록 했다.
9. 토마스 브롤린 - 공격형 미드필더

디자인 정정 위 디자인의 203경기 12골 10도움은 크리파의 숫자다.
1994년 발롱도르 4위에 오르며 자신의 진가를 알렸고, ‘그레-노-리’ 삼총사 그리고 쿠르트 함린과 페예노르트의 오베 킨드발, 벤피카의 글렌 스트룀베리 등 스웨덴 선배들의 권능에 어깨를 나란히 하던 미드필더였다.
1990년대 이탈리아 무대를 밝힌 북유럽의 미드필더였던 토마스 브롤린(Per Tomas Brolin; 스웨덴 공격수·미드필더, 1969-)은 파르마의 황금기, 그 핵심을 이끈 이방의 사내였다.
스웨덴 북쪽의 작은 도시 후딕스발에서 태어났다. 스무 살에 나간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골을 넣었고, 그 여름 파르마가 그를 샀다. 구단이 세리에 A에서 맞은 첫 시즌의 외국인 셋 가운데 하나다. 다른 하나가 2군 명단의 브라질 골키퍼 타파레우(Cláudio Taffarel)다. 그러니 그는 파르마의 1부 리그 역사를 첫날부터 본 사람이다.
유려한 터치, 창의적인 움직임, 감각적인 전진 패스, 세트피스 상황에서의 간단한 킥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고, 때문에 그라운드 4분의 3 지점인 트레콰르티스타(trequartista; 공격수 바로 뒤, 운동장의 4분의 3 지점에서 뛰는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해 내기도 했었다. 브롤린은 2선 지역에서 침투는 물론 하프 스페이스를 장악하고, 역습 전개 시 기점이 되는 플레이의 귀재였는데 몸을 접는 듯한 터닝 드리블은 무척 아름다웠다. 골을 넣으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며 뛰어올랐다.
처음에는 공격수였다. 스칼라가 그를 한 줄 내렸다. 통통한 얼굴의 금발 청년이 공격수 둘의 뒤에서 공을 받아 돌아서면 파르마의 역습이 시작됐다. 그의 앞에는 멜리가 있었고, 1992년부터는 콜롬비아에서 온 아스프리야가 있었다. 스웨덴 사람이 풀고 콜롬비아 사람이 달리고 파르마에서 자란 청년이 넣었다. 승격 세 해 만에 유럽을 든 팀의 앞줄이 그 셋이다. 1992년의 첫 코파 이탈리아와 1993년 웸블리에 그가 있었다. 대표팀에서도 같은 무렵이 절정이다. 1992년 제 나라에서 열린 UEFA 유로에서 잉글랜드를 떨어뜨린 골을 넣고 공동 득점왕이 됐고, 그 골은 지금도 스웨덴 사람들이 가장 자주 돌려 보는 골이다. 동료와 벽 패스를 두 번 주고받으며 수비 한가운데를 가르고 들어가 발등으로 찔러 넣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스웨덴을 3위에 올려놓았다.
그 절정은 한 번의 사고로 꺾였다. 1994년 11월 16일 대표팀 경기에서 발이 부러졌다. 스물다섯을 앞두고 있었다. 돌아온 그는 예전처럼 돌아서지 못했다. 1995년 UEFA컵을 든 뒤 잉글랜드로 떠났고, 1997년에 잠깐 돌아왔다가 스물여덟에 축구를 그만뒀다. 그 뒤로는 식당을 하고, 진공청소기 부품을 팔고, 포커 대회에 나갔다고 전한다. 천재가 일찍 꺾인 뒤의 삶으로는 드물게 유쾌하다.
다섯 시즌이 채 안 되는 전성기였다. 그런데도 파르마 사람들은 1990년대의 얼굴을 꼽을 때 그를 앞에 세운다. 구단이 아무것도 아니던 때에 와서 구단이 무엇인가가 되는 것을 함께 겪은 첫 외국인이기 때문이다.
10. 잔프랑코 촐라 - 세컨드 스트라이커

디자인 정정 디자인의 별명은 훗날 첼시의 팬들이 붙인 영어 별명 매직 박스를 이탈리아 말로 옮긴 것이다. 파르마에서 뛰던 때의 별명은 아니다.
이탈리아와 잉글랜드에서 모두 ’공로훈장’을 수훈했으며, 두 국가에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축구사 이래 몇 안 되는 존재. 짧은 기간, 그러나 가장 긴 기억으로 남은 공격수.
잔프랑코 촐라(Gianfranco Zola; 이탈리아 공격수, 1966-)는 파르마에서 단 3년을 뛰었지만, 그가 남긴 감정의 여운은 그 어떤 ’롱런’보다도 깊었다.
사르데냐섬 안쪽의 산골 마을 올리에나에서 태어났다. 섬의 하부 리그 구단들을 돌다가 스물셋에야 나폴리로 갔고, 거기서 마라도나의 뒤에 앉아 프리킥을 배웠다. 스물일곱이던 1993년 여름 빚에 쪼들리던 나폴리가 그를 파르마에 팔았다. 늦게 핀 선수가 가장 좋은 나이에 온 것이다. 이탈리아는 섬사람을 쉽게 스타로 받아 주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는 키가 작았고 본토의 큰 구단 유소년을 거친 적도 없었다. 첫 시즌에 파르마는 다시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결승에 올랐고, 1994년 5월 코펜하겐에서 아스널에 0-1로 졌다. 그날 그를 막은 것은 런던의 수비수들이다. 두 해 반 뒤에 그는 런던의 선수가 된다.
그는 첼시 FC에서 에덴 아자르 이전의 에덴 아자르, 세리에 A에서는 호나우지뉴 이전의 호나우지뉴라고 불렸을 만큼 감각적인 공격수였고, 두 경기에 한 골 가까이를 넣는 득점의 달인이기도 하였다. 또한, 외모부터 그의 인생 서사, 발재간, 골을 넣는 상징성 모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느낌을 선사하니 팬들은 그를 보면서 축구 따위를 보는 것이 아닌 어느 인간의 인생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아 내고는 하였다.
때문에 그가 머무른 국가, 구단에서는 모두 ‘존경’ 그리고 ’언젠간 넘고 싶은 선배’로서 취급되고 있다. 첼시는 그가 떠난 뒤 그의 등번호를 오랫동안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다.
그는 파르마가 프랑스 보르도의 와인을 닮았던 그 1990년대 중반기에 짧은 스텝, 빠른 방향 전환, 공간을 여는 아웃프런트,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의 ‘회화 같은’ 슈팅으로 팬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으며 겨우 149경기만을 소화했으나 기간 동안 발롱도르 6위에 진입했고, UEFA컵을 지배했다. 키가 168cm다. 수비수 사이의 좁은 틈에서 공을 받아 한 번에 돌아섰고, 벌칙 구역 모서리에서 차는 프리킥은 벽을 넘어 골대 구석으로 떨어졌다. 1994-95시즌에는 리그에서 열아홉 골을 넣었다.
스칼라의 팀에서 그는 공격수 곁에서 마음대로 움직였는데, 그 자유가 1996년에 끝났다. 새 감독 안첼로티의 넷, 넷, 둘에는 그런 사람이 설 자리가 없었고, 그는 왼쪽 미드필더로 밀렸다가 그해 11월 첼시로 떠났다. 안첼로티는 훗날 그 결정을 제 잘못으로 꼽았다고 전한다. 그해 여름 잉글랜드의 UEFA 유로에서 그는 독일을 상대로 페널티킥을 놓쳤고 이탈리아는 조별 리그에서 떨어졌다. 파르마의 10번으로 보낸 마지막 몇 달은 그렇게 어두웠다. 여덟 달 뒤 그는 첼시의 선수로 웸블리에 돌아가 잉글랜드를 상대로 골을 넣는다. 파르마가 스쿠데토에 가장 가까이 간 시즌은 그가 떠난 바로 그 시즌이다. 그가 있었다면 승점 2점이 달라졌을지 필자는 가끔 생각한다.
11. 에르난 크레스포 - 센터 포워드

디자인 정정 201경기 94골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다시 와서 뛴 것을 더한 기록이다.
파르마의 신화 속 가장 찬란한 결실이라고 불리는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와 비교되는 자.
에르난 크레스포(Hernán Jorge Crespo; 아르헨티나 공격수, 1975-) 빠진 파르마는 ’이빨 빠진 호랑이’와 같았고, ‘레반도프스키 빠진 바이언’ 느낌과 유사했다.
1990년대 후반, 골키퍼는 잔루이지 부폰, 수비진에 칸나바로-센시니-튀람이 나서고, 중원에 디노 바조와 크리파, 푸세르 등이 나서고, 최전방에 엔리코 키에사(Enrico Chiesa)와 함께 서던 존재 에르난 크레스포.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에서 태어나 리버 플레이트에서 컸다. 1996년 그 구단에서 남미 챔피언이 됐고, 그해 여름 애틀랜타 올림픽의 득점왕이 되어 스물하나에 파르마로 왔다. 시작은 나빴다. 몇 달 동안 골이 들어가지 않자 타르디니의 관중이 그에게 야유를 보냈다. 안첼로티는 그를 빼지 않았다. 봄이 되자 골이 터지기 시작했고 그 시즌 파르마는 2위를 했다. 작은 도시의 관중은 참을성이 길지 않았고, 그는 그 관중을 골로 돌려세웠다. 이 도시의 오페라 극장은 맨 위층 관객이 가수에게 야유를 퍼붓기로 이탈리아에서 이름난 곳이다. 타르디니의 관중도 같은 도시 사람들이다. 파르마에서 박수를 받으려면 먼저 그 귀를 넘어야 한다.
위치 선정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고, 높이보다 타이밍으로 헤더를 결정해 수많은 골을 터뜨렸으며, 정교하고 날카로운 슈팅 능력 덕택에 오늘날의 해리 케인이나 라우타로 마르티네스처럼 ‘정확도 높은’ 골 결정력을 자랑했던 크레스포. 발뒤꿈치로, 머리로, 가슴으로 넣었다. 수비수의 눈이 공으로 가는 순간 그의 등 뒤로 돌아 들어갔으니, 크로스가 올라올 때 그는 늘 혼자였다.
1999년 5월 12일 모스크바, UEFA컵 결승의 첫 골이 그의 것이다. 수비수의 백패스가 짧은 것을 보고 달려들어 골키퍼의 키를 넘겼다. 그 한 주 전의 코파 이탈리아 결승에서도 그는 골을 넣었다. 이튿날의 신문은 파르마를 두고 이렇게 적었다. 6년 전 같은 날짜에 ’뜻밖의 신데렐라’로 첫 유럽 트로피를 든 구단이 그 뒤 일곱 시즌에 결승을 네 번 치러 세 번을 이겼다고.[5] 신데렐라가 단골이 되는 데 여섯 해가 걸렸다. 그날 모스크바까지 따라간 파르마의 응원단은 700명이었다고 같은 기사는 적는다. 작은 도시의 구단은 가장 큰 밤에도 작은 도시의 구단이었다.
특히 볼이 없는 상황에서 움직이는 능력만큼은 세리에 A 최강의 스트라이커라 불리기 적절했으며, SS 라치오로 세계 최고의 이적료를 경신하며 떠나던 순간조차 눈물로서 팬들을 맞이했던 ’스타’이기도 했었다. 2000년 여름의 일이다. SS 라치오 역대 베스트 11에서 그는 추가 명단에 있고, 라치오에서의 첫 시즌에 세리에 A 득점왕이 됐다. 파르마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공격수를 판 구단이 됐다. 라치오는 돈에 더해 선수 둘을 얹어 보냈다. 한 해 뒤에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골키퍼를 판 구단이 된다.
이후 라치오, 인테르, 첼시, 밀란 등 수많은 명문을 거쳤으나 크레스포는 오직 파르마의 이름으로만 기억되는 편이다. 그는 서른넷이던 2010년에 돌아와 두 시즌을 더 뛰었다. 파르마에서 넣은 골을 다 더하면 아흔넷이고, 구단 역사에서 그보다 많이 넣은 사람은 없다. 선수 생활을 마친 뒤에는 구단이 쓰러져 가던 2014-15시즌에 파르마의 유소년 팀을 맡았다. 가장 비싼 값에 팔려 나간 사람이 가장 어려운 해에 돌아와 있었다.
십자가는 다시 걸렸다
열한 명은 모두 1990년에서 2002년 사이의 사람들이다. 113년 된 구단의 명단이 열두 해에 다 들어 있다. 다른 구단이라면 치우쳤다는 말을 들을 일이다. 파르마에서는 그것이 사실 그대로다. 구단이 가진 트로피 여덟 개가 전부 그 열두 해에 들어왔다.
그 치우침을 2군 명단이 바로잡는다. 거기에는 금빛 시절보다 앞의 이름들이 있다. 1921년부터 열세 해를 뛴 파르마 사람 마초니(Giovanni Mazzoni), 전쟁 뒤 여덟 시즌에 일흔아홉 골을 넣은 브론초니(William Bronzoni), 세리에 B와 C를 오가던 시절에 300경기를 넘긴 코코니(Ivo Cocconi)와 폴리(Ermes Polli). 폴리는 파르마에서 나고 파르마에서만 뛰었으며 2020년 봄 그 도시를 덮친 감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체코 사람 비츠팔레크(Čestmír Vycpálek)가 있다. 1950년대에 파르마에서 여섯 시즌을 뛴 그는 훗날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스쿠데토를 두 번 들었다. 파르말라트가 오기 훨씬 전에도 이 구단에는 사람이 있었고 관중이 있었다. 구단사는 그 시절의 일요일마다 타르디니의 계단이 찼다고 적는다.[1]
열한 명의 끝은 대개 팔려 간 것이다. 촐라가 1996년에, 크레스포가 2000년에, 부폰과 튀람이 2001년에, 칸나바로가 2002년에 떠났다. 떠난 사람들은 다른 구단의 명단에서 다시 만난다. 2군 명단은 지도가 더 넓다. 브라질의 타파레우와 아드리아누(Adriano), 콜롬비아의 아스프리야, 크로아티아의 스타니치(Mario Stanić), 체코의 비츠팔레크, 오스트레일리아의 브레시아노(Mark Bresciano), 일본의 나카타(中田英寿)가 한 장에 있다. 인구 20만이 안 되는 도시의 구단에 다섯 대륙이 지나갔다. 부폰은 유벤투스의 1번이고, 크레스포는 라치오의 추가 명단에, 칸나바로와 촐라는 나폴리의 추가 명단에 있다. 이 사이트의 세리에 A 여덟 편을 놓고 보면 파르마는 다른 구단들의 명단에 이름을 가장 많이 빌려준 구단이다. 길러서 판 것은 가난해서였고, 팔 만한 것을 그만큼 길렀다는 것은 눈이 좋아서였다.
남은 사람도 있다. 여덟 개를 다 든 베나리보가 있고, 2군의 아폴로니(Luigi Apolloni)와 루카렐리(Alessandro Lucarelli)가 있다. 아폴로니는 웸블리의 수비수였고 2015년 4부에서 다시 시작한 팀의 첫 감독이었다. 루카렐리는 구단이 파산한 뒤에도 떠나지 않고 세리에 D부터 세리에 A까지를 주장으로 올라왔다. 네 개의 리그에서 모두 파르마의 골을 넣은 사람이다. 구단은 그의 6번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는다.
웸블리의 밤으로 한 번 더 돌아간다. 그 라커 룸에서 골을 넣은 멜리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3]
내년에는 스쿠데토를 노려 보겠다. 여기서는 불가능한 게 없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기도 하다.
Proveremo a puntare allo scudetto. Qui niente è impossibile e nella vita le cose più difficili sono anche le più belle.
산드로 멜리, 1993년 5월 12일 웸블리의 라커 룸에서. 『라 스탐파』 1993년 5월 13일 자
같은 날의 1면은 그 밤 파르마의 온 도시가 광장으로 나왔다고 적는다.[2] 감독은 멜리가 얼마나 뛰었는지 보는 자기가 다 지쳤다고 했다. 파르마에서 자란 스물셋의 공격수가 유럽의 트로피를 든 날 밤에 바란 것이 스쿠데토였다. 그 바람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스쿠데토는 지금도 없다. 일곱 자매 가운데 리그를 들어 보지 못한 것은 파르마 하나다. 그 빈자리를 두고 이 도시의 사람들이 무엇이라 말하는지 필자는 다 알지 못한다. 다만 4부로 내려간 구단의 첫 경기에 수천 명이 따라갔다는 구단사의 한 줄이, 우승 여덟 번을 적은 줄보다 이 구단을 더 잘 말해 준다고 생각한다. 2020년에 미국 사람 카일 크라우스(Kyle Krause; 미국 기업인·파르마 회장, 1963-)가 구단을 샀고, 파르마는 한 번 더 내려갔다가 2024년 세리에 B를 우승하고 올라왔다.[1] 2015년에는 여자 팀도 만들었고, 그 팀은 2022년에 세리에 A에 올랐다. 오르내리는 것은 이 구단의 오랜 일이다. 1990년대가 예외였다.
지금 벤치에 앉은 질라르디노에게는 이 구단과 얽힌 날이 하나 있다. 2005년 6월 볼로냐와의 잔류 플레이오프다. 파르말라트가 무너진 뒤의 두 번째 시즌이었다. 안방에서 먼저 지고 간 원정에서 파르마는 2-0으로 뒤집어 세리에 A에 남았고, 그 두 번째 골을 그가 넣었다. 구단사는 그 경기를 잊을 수 없는 잔류라고 적는다.[1] 스물둘에 구단을 붙들어 둔 공격수가 마흔넷에 같은 일을 하러 돌아왔다.
감독 자리는 비워 둔다. 스칼라와 안첼로티와 말레사니, 그리고 지금 벤치에 앉은 질라르디노까지 이 구단의 감독들은 저마다 다른 파르마를 맡았다. 승격한 파르마, 스쿠데토를 다툰 파르마, 유럽을 든 파르마, 그리고 살아남는 것이 일인 지금의 파르마다.
2군 명단, 스물넷
2군 명단 스물넷을 글자로 다시 적되 포지션은 그림에 적은 대로 두었다. 그림에 사진이 없는 마초니는 필자가 쓸 만한 사진을 찾지 못한 선수다.
2군 명단 24인
- 루카 부치Luca Bucci · 골키퍼
구단 유소년 출신으로 세 번에 걸쳐 파르마의 골문을 지켰다. 1995년 UEFA컵의 골키퍼다. 그의 부상으로 부폰이 데뷔했다.
- 클라우디우 타파레우Cláudio Taffarel · 골키퍼
1990년 세리에 A 첫 시즌의 골키퍼다. 세 시즌을 뛰었고 1994년 브라질의 세계 챔피언이 됐다. 2001년에 돌아와 2002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의 골문을 지켰다.
- 세바스티앵 프레Sébastien Frey · 골키퍼
2001년 부폰이 떠난 자리에 와서 네 시즌을 지켰다. 2002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 안토니오 미란테Antonio Mirante · 골키퍼
2009년부터 여섯 시즌을 뛰었다. 구단이 파산한 2015년의 골문이다. 월급이 끊긴 시즌을 끝까지 뛰었다.
- 조반니 마초니Giovanni Mazzoni · 센터백
파르마에서 태어나 1921년부터 열세 해 동안 226경기를 뛰었다. 구단의 첫 세대다.
- 에르메스 폴리Ermes Polli · 센터백
파르마에서 나서 1958년부터 열한 시즌을 파르마에서만 뛰었다. 오랫동안 구단 최다 출전자였다.
- 이보 코코니Ivo Cocconi · 센터백
파르마 근교에서 태어나 1948년부터 열네 해 동안 307경기를 뛰었다.
- 루이지 아폴로니Luigi Apolloni · 센터백
1987년부터 열두 시즌을 뛰었다. 웸블리의 수비수이고 2015년 세리에 D에서 다시 시작한 팀의 첫 감독이다.
- 알레산드로 루카렐리Alessandro Lucarelli · 센터백
2008년부터 열 해를 뛰었다. 파산한 구단에 남아 세리에 D부터 세리에 A까지 주장으로 올라왔다. 6번은 그의 뒤로 비어 있다.
- 알베르토 디키아라Alberto Di Chiara · 레프트백
1991년부터 다섯 시즌을 뛴 스칼라의 왼쪽 윙백이다. 웸블리와 1995년 UEFA컵에 있었다. 로마에서 난 그는 파르마에 오기 전 피오렌티나의 왼쪽이었다.
- 로베르토 무시Roberto Mussi · 라이트백
세리에 C 시절에 한 번, 1994년부터 다섯 시즌을 또 한 번 뛰었다. 1994년 월드컵 결승의 풀백이다.
- 다니엘레 초라토Daniele Zoratto · 수비형 미드필더
1989년부터 다섯 시즌 동안 스칼라의 팀을 가운데에서 지휘했다. 웸블리의 이튿날 신문은 그를 틀리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 적었다.
- 가브리엘레 핀Gabriele Pin · 중앙 미드필더
1991년부터 다섯 시즌을 뛰었다. 첫 코파 이탈리아부터 1995년 UEFA컵까지 가운데에 있었다. 유벤투스와 라치오를 거쳐 온 미드필더다.
- 체스트미르 비츠팔레크Čestmír Vycpálek · 공격형 미드필더
프라하에서 온 미드필더로 1952년부터 여섯 시즌을 뛰었다. 훗날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스쿠데토를 두 번 들었다.
- 나카타 히데토시中田英寿 · 공격형 미드필더
2001년에 와서 두 시즌 반을 뛰었다. 2002년 코파 이탈리아 결승 1차전 유벤투스 원정에서 넣은 골이 우승을 정했다.
- 마크 브레시아노Mark Bresciano · 공격형 미드필더
2002년부터 네 시즌을 뛴 오스트레일리아 미드필더다. 골을 넣고 나면 조각상처럼 꼼짝 않고 서 있었다.
- 마리오 스타니치Mario Stanić · 라이트 윙
1996년부터 네 시즌을 뛴 크로아티아 선수다. 1999년의 두 트로피를 들었다.
- 파우스티노 아스프리야Faustino Asprilla · 세컨드 스트라이커
1992년 콜롬비아에서 왔다. 1993년 3월 산 시로의 프리킥으로 AC 밀란의 리그 58경기 무패를 끝냈다. 웸블리의 결승은 다쳐서 벤치에서 봤다.
- 엔리코 키에사Enrico Chiesa · 세컨드 스트라이커
1996년부터 세 시즌 동안 크레스포의 짝이었다. 모스크바 결승의 세 번째 골이 그의 것이다. 아들 페데리코도 이탈리아 대표 공격수가 됐다.
- 윌리암 브론초니William Bronzoni · 센터 포워드
1945년부터 여덟 시즌에 206경기 79골을 넣었다. 전쟁 뒤 세리에 B 시절의 골잡이다.
- 산드로 멜리Alessandro Melli · 센터 포워드
구단 유소년에서 자랐다. 1990년 승격을 정한 날과 1993년 웸블리에서 모두 골을 넣었다.
- 마르코 디바이오Marco Di Vaio · 센터 포워드
1999년부터 세 시즌을 뛰었다. 크레스포가 떠난 자리를 맡아 2002년 코파 이탈리아를 들었다.
- 아드리아누Adriano · 센터 포워드
2002년 스무 살에 와서 한 시즌 반 동안 두 경기에 한 골꼴로 넣었다. 그 왼발을 본 인테르가 2004년 1월에 다시 데려갔다.
- 알베르토 질라르디노Alberto Gilardino · 센터 포워드
2002년부터 세 시즌을 뛰며 두 시즌 내리 리그 23골을 넣었다. 2026년 가을부터 파르마의 감독이다.
기록을 확인한 곳
- 구단이 적은 구단사 — Parma Calcio 1913 「La Storia del Club」. 베르디 풋볼 클럽과 1913년 12월 16일의 창단, 십자가 셔츠, 1969년의 합병, 1990년의 승격, 트로피 여덟 개, 2015년의 파산과 재창단, 2018년의 복귀.
- 웸블리의 이튿날 1면 — 『라 스탐파』 1993년 5월 13일 자 1면 「A Wembley il Parma nella storia」.
- 웸블리의 라커 룸 — 『라 스탐파』 1993년 5월 13일 자 31면 「E al 90' esplode la festa」. 스칼라의 말, 욕조의 탄치, 초라토와 아스프리야.
- 디노 바조의 결승 — 『라 스탐파』 1995년 5월 18일 자 1면 「L'uomo del destino」.
- 모스크바의 이튿날 — 『라 스탐파』 1999년 5월 13일 자 31면 「Bis del Parma in coppa: dopo l'Italia, l'Uefa」.
- 탄치의 수감 — 『라 스탐파』 2003년 12월 28일 자 1면 「Parmalat: in carcere Calisto Tanzi」.
- 끝없는 대결 — 『라 스탐파』 1995년 5월 18일 자 25면 「Scala respinge l'assalto Ju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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