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 LEGEND

로타어 마테우스(Lothar Matthäus) 프로필·스탯·역대 등번호: 미드필더 계보 올타임 1위, 늑대 사령관

월드컵 5회 출전과 대표팀 150경기, 1990년 발롱도르와 초대 FIFA 올해의 선수. 묀헨글라트바흐·바이언·인테르를 거친 로타어 마테우스의 스탯과 등번호, 우승과 개인 수상 전량을 당대 기록과 인터뷰로 정리한다.
서독 대표팀 트레이닝복을 입고 경기장에 선 로타어 마테우스와 늑대 사령관 문구, 독일 국기
‘늑대 사령관’ 로타어 마테우스.
FIFA 로고

국제축구연맹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독일 국기
DEUTSCHLAND독일 연방 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UEFA 로고

유럽축구연맹Union des Associations Européennes de Football

초록 선 세 갈래가 원을 이루는 독일 축구 협회 기관 로고
#DFB독일 축구 협회Deutscher Fußball-Bund
별 네 개와 독수리가 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
#GER독일 축구 국가대표팀Deutsche Fußballnationalmannschaft | DFB-Team (데에프베 팀)
편집자 평가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중앙 미드필더를 꼽으라면 대부분 서너 명의 이름을 대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필자는 로타어 마테우스를 올타임 1위에 고정한다. 수비형·중앙·공격형 미드필더에 리베로까지, 그가 선 자리는 한 번도 그저 소화한 자리가 아니었다. 모두 그 지역의 대장이 앉는 자리였다. 스무 해에 걸친 대표팀 150경기, 다섯 번의 월드컵, 1990년 발롱도르와 초대 FIFA 올해의 선수. 프란츠 베켄바워가 독일 축구의 황제라면, 마테우스는 그 황제 다음 자리에서 무리를 이끈 늑대 사령관이었다.

로타어 마테우스 플레이멀리서도 골문을 겨누는 미드필더1 / 2

수비벽 너머 먼 거리에서 오른발로 강하게 때린다. 한 번의 킥으로 수비 전체를 넘긴다.

삥이FC 로타어 마테우스 평가

  1. 필자는 역대 중앙 미드필더 계보의 첫 줄에 마테우스를 둔다. 스페인의 차비 에르난데스(Xavier Hernández Creus; 바르셀로나와 스페인 대표팀의 미드필더, 1980-), 브라질의 지지(Waldyr Pereira; 1950년대 브라질의 미드필더, 1928-2001)처럼 같은 자리에서 압도적이라 평가받는 이름과 나란히 놓아도 마테우스가 앞선다고 본다. 핵심은 재능의 크기만큼이나 재능의 개수에 있다. 경기를 조율하는 시야, 볼을 달고 상대 진영까지 밀고 들어가는 추진력, 30미터 밖에서도 골문을 겨누는 킥, 그리고 지치지 않는 체력이 한 몸에 들어 있었다.

  2. 기실 마테우스의 자리는 구단을 옮길 때마다 다시 정의됐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는 상대 플레이메이커를 붙잡는 대인 마크와 8번 자리의 연결을, FC 바이에른 뮌헨(이하 바이언) 1기에서는 공격을 끌고 가는 사령탑을, 인테르에서는 팀 전체의 엔진을, 바이언 2기와 대표팀 말년에는 리베로를 맡았다. 네 자리를 거쳐 갔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저마다 그 지역의 대장이었다. 《키커》(kicker; 1920년 창간한 독일 축구 전문지)는 1983년 그를 올해의 미드필더로, 1994년·1998년·1999년에는 올해의 리베로로 뽑았다. 같은 매체가 한 선수를 서로 다른 두 포지션의 최고로 인정한 셈이다. 볼을 끌고 전진하는 장면만 보면 웬만한 공격수나 윙어의 뺨을 후려칠 퍼포먼스인데, 후방에 서면 또 경기를 조율하는 능력을 타고났다는 찬사를 들을 만큼 침착했다.

  3. 독일에서 프란츠 베켄바워(Franz Anton Beckenbauer; 서독의 리베로, 1974년 월드컵 우승 주장이자 1990년 우승 감독, 1945-2024)는 일개 축구선수 따위의 취급을 넘어 나라를 빛낸 위인으로 존경받는다. 리베로와 센터백, 풀백, 미드필더를 모두 최고 수준으로 해낸 황제급 존재였기 때문이다. 마테우스의 평가는 그보다 한 계단 아래일지언정, 운동 능력과 전술 지능, 멀티성만큼은 베켄바워에 견줄 만하다. 실제로 그는 1993년 베켄바워의 대표팀 최다 출전 기록을 넘어섰고, 은퇴할 때는 유럽 최다 출전 기록까지 품었다.

  4. 허나 이 선수를 찬양만으로 정리하면 곤란하다. 말이 경기보다 앞선다는 핀잔은 열아홉 살 대표팀 데뷔 무렵부터 따라다녔고, 동료와 감독, 바이언 수뇌부와의 불화는 선수 생활 내내 끊이지 않았다. 페널티킥은 월드컵 8강과 4강에서 모두 넣었으면서도 결승에서는 공을 동료에게 넘겼고, 포칼 결승 승부차기에서는 두 번이나 실축했다. 이 모순이 마테우스를 더 흥미로운 인물로 만든다. 그 장면들의 사실관계는 본문에서 하나씩 따져 본다.

  5. 마지막으로 숫자. 월드컵 25경기는 2022년 리오넬 메시(Lionel Andrés Messi; 아르헨티나의 공격수, 1987-)가 넘기 전까지 대회 역사상 최다였고, 대표팀 150경기는 2007년까지 유럽 최다였다. 서른여덟에 독일 올해의 축구선수로 다시 뽑혔고, 서른아홉에 대표팀 마지막 경기를 뛰었다. 한 시대를 지배한 선수는 많지만, 스무 해를 지배한 미드필더는 드물다. 필자가 그를 올타임 1위에 고정하는 가장 단단한 근거가 이 지속성이다.

로타어 마테우스 프로필

독일 국기DEUTSCHLAND독일 연방 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본명
Lothar Herbert Matthäus
등록명
로타어 마테우스(Lothar Matthäus)
출생
1961년 3월 21일
출생지
서독 바이에른주 에를랑겐
신장
174cm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 수비형 미드필더 · 리베로
주요 등번호
10번 · 8번 · 6번
주요 프로 경력
1979-2000년
대표팀
1980-2000년 · 150경기 23골
별명
라이트볼프(Leitwolf;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 늑대)

푸마의 도시에서 온 열여덟 살, 포크츠에게 날린 태클

마테우스는 바이에른주 에를랑겐에서 태어나 헤르초게나우라흐(Herzogenaurach; 아디다스와 푸마 본사가 있는 바이에른주 소도시)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푸마에서 일했고, 그 인연으로 알게 된 푸마 간부이자 전직 프로 선수 한스 노바크(Hans Nowak; 서독 대표 수비수 출신의 푸마 간부)가 묀헨글라트바흐와의 연결을 도왔다. 1978-79 시즌 고향 구단 1. FC 헤르초게나우라흐에서 22경기 20골을 넣고 바이에른 란데스리가 우승을 이끈 소년이,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뵈켈베르크로 향했다.

그 테스트가 전설이 됐다. 상대는 1974년 월드컵 우승 멤버 베르티 포크츠(Berti Vogts; 묀헨글라트바흐의 수비수, 훗날 독일 대표팀 감독, 1946-)였다. 막 정강이뼈와 종아리뼈 골절에서 돌아온 대선배에게 열여덟 살은 거침없이 몸을 부딪쳤다. DFB의 회고에 따르면 이를 본 단장 헬무트 그라스호프(Helmut Grashoff; 묀헨글라트바흐의 단장)는 당장 계약서를 준비하라고 했고, 《11 Freunde》(11 Freunde; 독일 축구 월간지)의 회고는 태클을 받은 포크츠가 오히려 그를 영입하라고 거들었다고 전한다. 첫 월급은 2,500마르크였고, 푸마 쪽은 상징적인 99페니히에 폭스바겐 골프를 넘겨줬다.

DATSUN 로고가 박힌 묀헨글라트바흐 흰 유니폼을 입고 공을 차려는 젊은 로타어 마테우스
1981년 DFB-포칼 SSV 딜렌부르크전의 마테우스. 스무 살의 그는 이미 묀헨글라트바흐의 주전 미드필더였다. 사진: Otto Domes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1979년 9월 22일 카이저슬라우테른전에서 분데스리가에 데뷔한 그는 곧바로 유프 하인케스(Jupp Heynckes; 묀헨글라트바흐 감독, 훗날 바이언의 트레블 감독, 1945-) 감독의 주전이 됐다. 하인케스의 육성법이 흥미롭다. 그는 신인에게 펠릭스 마가트(Felix Magath; 함부르크 SV의 플레이메이커, 1953-)나 한지 뮐러(Hansi Müller; VfB 슈투트가르트의 플레이메이커, 1957-) 같은 리그 최고의 조율자를 대인 마크하게 했다. 상대의 전술적 섬세함을 몸으로 배워 스스로 플레이메이커가 되라는 뜻이었다. 첫 시즌부터 UEFA컵 결승에 올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맞붙었고, 홈 1차전에서 2-2 동점골을 넣었다. 우승은 프랑크푸르트의 몫이었지만, 174cm의 신인이 유럽 결승에서 골을 넣었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한 예고였다.

1981년 포칼 경기에서 딜렌부르크 선수와 공을 다투는 묀헨글라트바흐의 마테우스
1981년 8월 29일 DFB-포칼, 딜렌부르크의 이보 페르코비치와 공을 다투는 마테우스. 묀헨글라트바흐는 7-2로 이겼다. 사진: Otto Domes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유로 1980, 열아홉 살의 데뷔와 “말이 더 많다”는 핀잔

유프 데어발(Jupp Derwall; 1978-1984년 서독 대표팀 감독, 1927-2007) 감독은 A매치 경험이 없는 열아홉 살을 유로 1980 명단에 넣었다. 1980년 6월 14일 나폴리, 네덜란드와의 조별리그에서 3-0으로 앞선 73분에 교체로 들어간 것이 대표팀 데뷔였다. 그리고 6분 뒤 페널티킥을 내줬다. 반칙 지점은 사실 페널티 지역 밖이었는데도 판정은 뒤집히지 않았고, 경기는 3-2로 끝났다. 서독은 그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마테우스의 출전은 이 한 경기가 전부였다. 같은 자리에 베른트 슈스터(Bernd Schuster; 서독의 플레이메이커, 1959-)가 대회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기장 밖은 더 시끄러웠다. 대회 중 로마 올림피코에서 경비원과 몸싸움을 벌였고, 약혼녀와 함께 언론 앞에서 사진을 연출했다. 코치 에리히 리베크(Erich Ribbeck; 서독 대표팀 코치, 훗날 바이언과 독일 대표팀 감독, 1937-)는 그가 뛰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더 많고 자만에 빠져 있다고 꼬집었다. 포크츠는 “스타 행세”를, 데어발은 “내일 당장 사장이 되고 싶어 하는 견습생”을 입에 올렸다. 이 핀잔들은 이후 20년 동안 마테우스를 따라다닌 꼬리표의 첫 문장이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도 그는 조별리그 두 경기에 교체로 나선 것이 전부였다. 데어발과 화해한 파울 브라이트너(Paul Breitner; 바이언의 미드필더, 1974년 월드컵 우승 멤버, 1951-)가 중원을 차지했다. 허나 묀헨글라트바흐에서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고, 1983년 《키커》 올해의 미드필더로 뽑히며 실력으로 입을 막기 시작했다. 유로 1984에서는 마침내 주전 자리를 따냈지만 서독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대회 직전 합숙 중에는 묀헨글라트바흐 동료 한스귄터 브룬스(Hans-Günter Bruns; 묀헨글라트바흐의 수비수, 1954-)와 밤중에 몰래 비스바덴의 술집에 갔다가 들켜, DFB 사상 처음으로 벌금 2,000마르크를 문 선수가 되기도 했다.

1984년 포칼 결승, 새 구단 앞에서 넘어간 공

1984년 5월 31일 프랑크푸르트 발트슈타디온. DFB-포칼 결승 상대는 바이언이었다. 문제는 마테우스가 이미 다음 시즌 바이언과 계약하고 이적을 발표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묀헨글라트바흐 팬들은 그를 “유다”라고 불렀다. 경기 전 그는 어느 쪽이든 매우 불편한 오후가 되겠지만, 나중에 하인케스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그는 선제골을 도왔다. 경기는 연장까지 1-1로 끝났고, 포칼 결승 사상 처음으로 승부차기에 들어갔다. 묀헨글라트바흐의 첫 키커로 나선 마테우스의 슈팅은 크로스바를 넘어갔다. 다섯 명씩 찬 뒤 스코어는 4-4, 결국 양 팀 여덟 명씩 찬 끝에 노르베르트 링겔스(Norbert Ringels; 묀헨글라트바흐의 수비수)까지 실축하며 바이언이 7-6으로 우승했다.

이적 확정 선수가 새 구단을 위해 일부러 날렸다는 의심은 지금도 따라다닌다. 엄밀히 따지자면 근거는 없다. 그는 선제골을 만든 선수였고, 첫 번째 키커였으며, 승부를 가른 킥은 한참 뒤에 나왔다. 훗날 마테우스는 킥 자체보다 차고 싶지 않은데도 권유에 떠밀려 나선 것이 실수였다고 돌아봤다. 다만 이적 발표 뒤 친정 팬들 앞에서 가장 먼저 실축했다는 장면의 무게만큼은 어떤 해명으로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별의 뒤끝은 결승 전부터 있었다. 그 시즌 33경기를 풀타임으로 뛴 그를, 하인케스는 시즌 종료 여섯 경기를 남기고 발트호프 만하임전 벤치에 70분 동안 앉혀 뒀다. 1-2로 뒤진 상황에서 들어간 마테우스는 19분 사이 두 골을 넣어 3-2 역전승을 만들었다. 선수는 바이언으로 간다는 이유의 보복이라고 했고, 감독은 로타어가 조금 느슨해져 따끔한 경고가 필요했다고 받아쳤다. 기실 하인케스는 누구보다 그를 아낀 스승이었다. 대표팀 감독들의 비판에서 그를 감쌌고, 사생활의 위기 때마다 곁을 지켰다.

바이언 1기, 3연패와 빈의 뒤꿈치

1984년 여름 바이언은 240만 마르크의 이적료를 내고 마테우스를 데려왔다. 카를하인츠 루메니게(Karl-Heinz Rummenigge; 바이언의 공격수, 훗날 구단 회장, 1955-)가 인테르로 떠나고 브라이트너가 은퇴한 자리를 메우라는 주문이었고, 연봉은 당시 분데스리가 최고 수준이었다. 첫 훈련부터 그는 동료 디터 회네스(Dieter Hoeneß; 바이언의 공격수, 1953-)를 태클로 쓰러뜨려 인대를 끊어 놓았다. 우도 라테크(Udo Lattek; 바이언을 이끈 서독 감독, 1935-2015) 감독 아래에서 그는 경기를 만들고 끌고 가는 국제급 미드필더로 올라섰다.

네 시즌 공식전 151경기 69골. 미드필더의 득점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숫자다. 간접 프리킥을 낮고 정확하게 골문 쪽으로 깔아 차는 것이 그의 장기였다. 바이언은 1984-85 시즌부터 분데스리가 3연패를 달성했고, 1985-86 시즌에는 DFB-포칼까지 더해 더블을 이뤘다. 《키커》가 반기마다 매기는 독일 선수 등급표 랑리스테는 1986년 여름 처음으로 그를 월드클래스에 올렸다.

유럽 정상은 한 걸음 모자랐다. 1987년 5월 27일 빈 프라터슈타디온에서 열린 유러피언컵 결승에서 바이언은 FC 포르투에 1-2로 역전패했다. 라바 마제르(Rabah Madjer; 포르투의 알제리 공격수, 1958-)의 뒤꿈치 동점골이 이 결승의 상징으로 남았다. 그해 7월 28일 초대 DFB-슈퍼컵에서는 주장 완장을 차고 함부르크 SV를 2-1로 꺾어 첫 트로피를 들었다. 대표팀 주장 데뷔는 그보다 넉 달 앞선 3월 25일이었다.

1986년 멕시코, 마라도나를 맡은 스물다섯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의 마테우스는 비로소 대표팀 주전이었다. 베켄바워 감독은 그를 노련한 마가트와 짝지어 중원에 세웠다. 모로코와의 16강에서는 87분 30미터 프리킥으로 1-0 결승골을 넣었다. 그리고 결승에서 베켄바워는 마테우스에게 디에고 마라도나(Diego Armando Maradona; 아르헨티나의 공격형 미드필더, 1960-2020)를 맡겼다. 공격의 엔진을 빼서 상대의 엔진을 끄는 선택이었다. 마라도나는 골을 넣지 못했지만, 서독은 0-2에서 2-2까지 따라붙은 뒤 호르헤 부루차가(Jorge Burruchaga; 아르헨티나의 미드필더, 1962-)의 결승골로 2-3으로 졌다.

그날 하프타임에 마테우스는 마라도나와 유니폼을 바꿨다. 그는 이 셔츠를 36년 동안 간직하다가, 그와 맞붙는 것은 언제나 큰 영광이었다는 말과 함께 2022년 8월 25일 마드리드의 아르헨티나 대사관에서 아르헨티나 쪽에 넘겼다. 마라도나는 자서전 《나는 디에고》에서 마테우스를 자신이 만난 최고의 라이벌로 꼽았다. 결승전에서 서로를 지운 두 사람이 평생의 존중으로 끝난 드문 관계다.

인테르의 10번, 산시로의 주인

1988년 봄 마테우스는 인테르 이적을 발표했다. 이적료는 840만 마르크였다. 그 전에 안방에서 열린 유로 1988에서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 주장을 맡았고, 서독은 4강에서 네덜란드에 1-2로 졌다. 인테르에는 바이언 동료 안드레아스 브레메(Andreas Brehme; 서독의 레프트백, 1960-2024)와 함께 입성했다.

조반니 트라파토니(Giovanni Trapattoni; 인테르와 바이언을 이끈 이탈리아 감독, 1939-) 감독 아래에서 첫 시즌 1988-89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했다. 인테르는 34경기 58점으로 18개 팀·승점 2점 시대의 최다 승점 기록을 세웠고, 우승을 확정한 5월 28일 나폴리전 2-1 결승골이 바로 마테우스의 발에서 나왔다. 이듬해 위르겐 클린스만(Jürgen Klinsmann; 서독의 공격수, 1964-)까지 합류하며 인테르의 독일인 삼총사가 완성됐다. 세리에 A가 세계 최고의 리그로 불리던 시기, 그 리그에서 마라도나와 함께 최고의 선수로 꼽힌 이름이 마테우스였다.

산시로 박물관에 전시된 마테우스의 서명이 들어간 인테르 10번 유니폼
산시로 박물관에 걸린 마테우스의 인테르 10번 유니폼. 1988-89 시즌 스쿠데토의 셔츠다. 사진: Дмитрий Кошелев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1990년 이탈리아, 산시로에서 연 인생 경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서독의 조별리그 경기는 마테우스의 홈인 밀라노 산시로에서 열렸다. 6월 10일 유고슬라비아와의 첫 경기에서 주장 마테우스는 두 골을 넣었고 서독은 4-1로 이겼다. 그중 50미터를 홀로 치고 올라가 꽂은 골은 그해 독일 올해의 골로 뽑혔다. 그는 훗날 좋은 경기를 몇 번 했지만 1990년 월드컵 개막전이 모든 것 위에 있다고 말했다. 대회 4골, 중원의 지휘봉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손에 있었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8강, 잉글랜드와의 4강에서 페널티킥 키커로 나서 모두 성공했다. 그리고 7월 8일 로마 올림피코의 결승, 0-0으로 맞선 85분에 서독이 페널티킥을 얻었다. 모두가 마테우스를 바라봤지만 공을 잡은 사람은 브레메였다. 브레메의 오른발 슈팅이 들어갔고 서독은 세 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전담 키커가 가장 큰 킥 앞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입길에 올랐다. 부담감에 도망쳤다는 단정도 나왔다. 마테우스의 설명은 축구화였다. 전반에 한쪽 밑창이 갈라져 하프타임에 길들지 않은 새 축구화로 갈아 신었고, 그 발로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FIFA 인터뷰에서 페널티킥을 얻었을 때 룸메이트였던 안디에게 차라고 했고, 그가 적임자라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결국 키커를 고른 사람도 주장 자신이었다. 도망이라는 단정은 과장이지만, 역사에 남을 킥을 스스로 내려놓았다는 사실 또한 그대로 남는다.

그해 마테우스는 발롱도르 투표에서 137점으로 1위에 올랐고, 월드컵 실버볼과 대회 올스타 팀, 옹즈도르,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IFFHS 세계 최고의 선수, 독일 올해의 축구선수에 유럽 스포츠기자연맹이 뽑는 유럽 올해의 스포츠인까지 휩쓸었다. 연방 대통령은 우승 대표팀에게 독일 최고의 체육 훈장인 은월계수장을 수여했다. 한 해에 받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상이 한 사람에게 모인 해였다.

초대 FIFA 올해의 선수, 그리고 UEFA컵

1991년 FIFA가 처음으로 올해의 선수상을 만들었고, 첫 수상자가 마테우스였다. 발롱도르에서도 데얀 사비체비치(Dejan Savićević; 유고슬라비아의 공격형 미드필더, 1966-)와 함께 공동 2위에 올랐다. 같은 해 5월 8일 산시로에서 열린 UEFA컵 결승 1차전에서는 AS 로마를 상대로 55분 페널티킥 선제골을 넣었다. 인테르는 2-0으로 이겼고, 로마 원정 2차전을 0-1로 막아 합계 2-1로 우승했다. 인테르 올해의 선수상 피라타 도로(Pirata d’Oro; 인테르 올해의 선수상)도 그해 그의 것이었다. 그 봄 레알 마드리드 이적설이 돌았지만, 마테우스는 5월 말 인테르와 2년 재계약했다.

파르마전의 십자인대, 펠레그리니에게 쓴 각서

1992년 봄, 마테우스는 이미 유벤투스와 이적에 합의한 상태였다. 그런데 4월 12일 파르마전에서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졌다. DFB 주장은 유로 1992 출전을 포기해야 했고, 유벤투스는 부상을 이유로 제안을 거둬들였다.

그는 미국 콜로라도주 베일로 건너가 무릎 수술의 권위자 리처드 스테드먼(Richard Steadman; 미국의 정형외과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산속에서 남몰래 하루 몇 시간씩 재활했다. 인테르는 빨라야 연말 복귀를 점쳤다. 그 사이 바이언이 420만 마르크를 제시했고, 1992년 8월 친정 복귀가 성사됐다. 조건이 하나 붙었다. 에르네스토 펠레그리니(Ernesto Pellegrini; 1984-1995년 인테르 회장, 1940-) 인테르 회장은 앞으로 다른 이탈리아 구단에서는 뛰지 않겠다는 서면 약속을 받고서야 이적에 동의했다.

부상 다섯 달 뒤인 1992년 9월 19일, 그는 바텐샤이트 09전에서 5만 1천 명 앞에 복귀했다. 감독 리베크의 환영사는 여전히 차가웠다. 로타어가 곧바로 자신이 생각하고 이끄는 사람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두 달 뒤인 11월 21일 레버쿠젠 원정에서 그는 페널티 지역 몇 미터 밖에서 코너킥을 그대로 발리로 받아 크로스바 아래에 꽂았다. 그해 독일 올해의 골이었다.

1995년 사인회장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는 로타어 마테우스
1995년 3월 하노버 CeBIT 사인회의 마테우스. 그해 초 아킬레스건이 끊어져 긴 재활 중이었다. 사진: Übrigens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리베로가 된 미드필더, 황제의 기록을 넘다

1993년 11월 17일 브라질전(2-1 승)이 마테우스의 104번째 A매치였다. 1977년 베켄바워가 세운 대표팀 최다 출전 기록을 넘어선 날이다. 같은 무렵 포크츠 감독은 북미 원정에서 드러난 수비 불안을 이유로 판을 새로 짰다. 마테우스를 중원에서 빼 리베로로 내리고, 그 자리를 안드레아스 묄러(Andreas Möller; 독일의 공격형 미드필더, 1967-)에게 맡겼다. 바이언도 곧 그를 리베로로 썼다.

전향은 성공이었다. 최후방에서도 공격 전개와 역습의 첫 패스를 쥘 수 있었고, 서른을 넘긴 몸으로 중원을 오르내리는 소모는 줄었다. 물론 약점도 드러났다. 뒷걸음질 수비와 공중볼 경합은 나이와 함께 무거워졌다. 그럼에도 1994년 베켄바워가 임시 감독으로 이끈 바이언은 4년 만에 분데스리가를 되찾았고, 《키커》는 그해 그를 올해의 리베로로 뽑았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주장 마테우스는 벨기에와의 16강 3-2 승리 때 부상으로 하프타임에 교체됐다. 그리고 7월 10일 불가리아와의 8강에서 페널티킥 선제골을 넣었지만, 불가리아의 연속골에 무너졌다. 통일 독일의 첫 월드컵은 8강에서 끝났다.

1994년 월드컵 8강 불가리아전에서 페널티킥을 차는 마테우스와 골문
1994년 7월 10일 뉴저지, 불가리아와의 8강에서 페널티킥을 넣는 마테우스. 독일은 이후 두 골을 내주고 1-2로 탈락했다. 사진: Wasted Time R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아킬레스건, 클린스만, 비밀 일기

불운은 끝나지 않았다. 1995년 초 친선전에서 아킬레스건이 끊어졌고, 수비의 우두머리를 잃은 바이언의 1994-95 시즌은 실망으로 끝났다. 서른넷에 두 번째 큰 부상이면 끝이라는 전망이 나왔지만, 그는 1995년 말 돌아와 1996년 지롱댕 드 보르도를 꺾고 두 번째 UEFA컵을 들었다.

대표팀 문은 닫혀 있었다. 은퇴를 선언하지 않았으니 유로 1996 발탁이 당연해 보였지만, 그는 포크츠 감독, 그리고 포크츠의 가장 가까운 신뢰를 받던 새 주장 클린스만과 틀어져 있었다. 인테르에 이어 바이언에서도 한솥밥을 먹던 두 사람의 갈등은 1997년 여름 폭발했다. 마테우스가 타블로이드 《빌트》(Bild; 독일의 대중 일간지)에 클린스만을 겨냥한 팀 내부 사정을 담은 “비밀 일기”를 공개한 것이다. 바이언은 그에게서 주장 완장을 빼앗았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A매치 출전은 0경기였고, 라이너 본호프(Rainer Bonhof; 1972년·1980년 유로 우승 멤버인 서독 미드필더, 1952-)에 이어 유로 두 번 우승자가 될 기회도 그렇게 날아갔다.

허나 그는 비판에 흔들리지 않았다. 1997년 트라파토니와 재회해 분데스리가를 우승했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직전 마티아스 자머(Matthias Sammer; 독일의 리베로, 1996년 발롱도르 수상자, 1967-)가 부상으로 낙마하자 《빌트》의 복귀 캠페인까지 더해져 포크츠가 결국 그를 불렀다. 거의 3년 반 만의 A매치였다. 18년 전 입단 테스트에서 몸을 부딪쳤던 그 선배의 선택이다.

서른일곱의 마테우스는 8번을 달고 다섯 번째 월드컵에 나섰다. 유고슬라비아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0-2로 뒤진 하프타임에 투입돼 2-2 무승부를 끌어냈고, 이란전에 선발로 나섰으며, 멕시코와의 16강에서는 다시 리베로로 섰다. 크로아티아에 0-3으로 진 8강이 그의 25번째이자 마지막 월드컵 경기였다.

독일 대표팀 흰 훈련복을 입고 옆을 바라보는 로타어 마테우스
1999년 무렵 본 인근 독일 대표팀 훈련장의 마테우스. 서른여덟에도 대표팀 리베로였다. 사진: Florian K. ·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캄 노우의 80분, 서른여덟의 올해의 선수

월드컵이 끝나자 새 대표팀 감독이 된 리베크가 그를 설득해 대표팀에 붙잡았다. 18년 전 “말이 더 많다”고 꼬집던 바로 그 코치다. 바이언에서도 새 감독 오트마어 히츠펠트(Ottmar Hitzfeld; 도르트문트와 바이언에서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한 독일 감독, 1949-)가 베테랑을 중심에 뒀다.

1999년 5월 26일 바르셀로나 캄 노우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바이언은 1-0으로 앞섰고, 마테우스는 80분 토르스텐 핑크(Thorsten Fink; 바이언의 미드필더, 1967-)와 교체돼 나왔다. 그러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추가시간에만 두 골을 넣었다. 독일에서는 승리를 확신한 마테우스가 스스로 교체를 원했다는 이야기가 두고두고 회자됐다. 1987년 빈에 이어 두 번째 유럽 정상 문턱이었다.

한 달 뒤 DFB-포칼 결승에서도 운은 따르지 않았다. 베르더 브레멘과의 승부차기에서 그는 처음 다섯 명 안에 들지 않았다가, 동점이 이어지자 여섯 번째 키커를 자청했다. 골키퍼 프랑크 로스트(Frank Rost; 베르더 브레멘의 골키퍼, 1973-)가 막았다. 1984년에 이어 포칼 결승 승부차기를 두 번 놓친 유일한 선수라는 기록이 남았다. 2005년 미하엘 발라크(Michael Ballack; 독일의 미드필더, 1976-)가 넘어서기 전까지 대표팀 최다 페널티킥 득점자(8골)였던 선수의 아이러니다.

그럼에도 그 시즌 바이언은 분데스리가를 우승했고, 서른여덟의 마테우스는 1990년 이후 9년 만에 독일 올해의 축구선수로 다시 뽑혔다. 같은 해 독일 프로축구선수협회(VDV) 올해의 선수와 독일 축구 올해의 인물까지 받았고, 《키커》 랑리스테는 그를 다섯 번째로 월드클래스에 올렸다. 7월 28일 멕시코 컨페더레이션스컵 뉴질랜드전에서는 38세 128일의 나이로 골을 넣어 독일 대표팀 최고령 득점자가 됐다.

150번째 경기, 그리고 뉴욕

2000년 2월 23일, 마테우스는 144번째 A매치로 토마스 라벨리(Thomas Ravelli; 스웨덴의 골키퍼, 1959-)의 유럽 최다 출전 기록을 넘어섰다. 바이언에서의 마지막 공식전은 3월 8일 UEFA 챔피언스 리그 레알 마드리드전 4-1 승리였다. 그 직후 그는 미국 MLS의 뉴욕/뉴저지 메트로스타즈(NY/NJ MetroStars; 현 뉴욕 레드불스)로 향해 9월까지 뛰었고, 동부 디비전 우승과 플레이오프 진출, MLS 올스타 선정을 경험했다.

마지막 무대는 유로 2000이었다. 그는 대회 뒤 대표팀을 떠나겠다고 미리 밝혔다. 2000년 6월 20일 로테르담에서 독일은 포르투갈에 0-3으로 져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서른아홉 살 마테우스의 150번째 A매치이자 마지막 경기였다. 독일 언론은 미국행이 그의 기량을 무너뜨렸다고 몰아세웠다. 20년 전 나폴리에서 교체로 들어가 페널티킥을 내준 열아홉 살은, 주장 완장을 75번 찬 베테랑이 되어 대표팀을 떠났다. 150경기는 2007년 마르틴 레임(Martin Reim; 에스토니아의 미드필더, 1971-)이 넘기 전까지 유럽 최다였다. DFB는 2001년 4월 27일 그를 대표팀 명예 주장으로 추대했다.

떠돌이 감독과 그린키퍼

2002년 빈 경기장 관중석 앞에서 인터뷰하며 웃는 로타어 마테우스
2002년 1월 빈에서 인터뷰 중인 마테우스. 선수 은퇴 직후 오스트리아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사진: Matzeachmann · Wikimedia Commons (퍼블릭 도메인).

은퇴 뒤의 마테우스는 한곳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2001년 라피드 빈을 시작으로 파르티잔 베오그라드를 맡아 2003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헝가리 대표팀, 아틀레치쿠 파라나엔시, 레드불 잘츠부르크 코치(2007년 오스트리아 리그 우승), 마카비 네타냐, 불가리아 대표팀을 떠돌았다. 선수 시절의 명성에 비하면 지도자 이력은 짧고 흩어져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를 감독으로 오래 쓴 빅클럽은 없었다.

2010년 소피아에서 스카프를 두르고 여행 가방을 끄는 로타어 마테우스
2010년 11월 소피아의 마테우스. 불가리아 대표팀 감독 시절이다. 사진: Biso · Wikimedia Commons (CC BY 3.0).

그런데도 축구화를 완전히 벗지는 않았다. 2005년 5월 13일에는 11부 리그 1. FC 로코모티브 라이프치히 소속으로 시 컵 준결승에 한 경기 나섰고, 2018년 5월 13일에는 쉰일곱의 나이로 고향 구단 1. FC 헤르초게나우라흐의 7부 리그 경기에 선발로 나서 50분을 뛰었다. 마지막 공식 경기는 꼭 유소년 시절의 구단에서 치르고 싶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이 구단은 한 해 전 그를 명예회원으로 추대하고 경기장 하나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친정 바이언과의 관계는 더 복잡했다. 해설자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마테우스를 두고, 울리 회네스(Uli Hoeneß; 바이언의 단장·회장을 지낸 경영자, 1952-)는 2002년 스포츠 토크쇼 《도펠파스》(Doppelpass; 독일 스포츠 채널 DSF의 일요 축구 토크쇼)에서 자신과 루메니게가 발언권을 갖는 한 마테우스는 새 경기장의 그린키퍼도 못 된다고 말했다. 이 한마디는 20년 가까이 두 사람 사이를 상징하는 문장이 됐다.

반전은 2021년에 왔다. 마테우스의 예순 살 생일을 맞아 바이언 구단지 《51》이 그를 트랙터에 태워 잔디 깎는 그린키퍼로 촬영한 것이다. 이 기획과 함께 회네스가 그 발언을 바로 다음 날 후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그린키퍼도 못 된다던 선수가 결국 잔디를 깎았고, 그 장면을 구단이 먼저 만들었다.

2019년 분데스리가 경기장에서 목도리를 두르고 해설 중인 로타어 마테우스
2019년 3월 라이프치히, 해설자로 경기장을 찾은 마테우스. 2017년 독일 스포츠기자상은 그를 가장 많이 인용된 축구 전문가로 꼽았다. 사진: Steffen Prößdorf ·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그는 2009년 한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늘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고, 자신에게서는 늘 나쁜 것만 보려 한다고 말했다. 말이 많다는 핀잔으로 시작해 비밀 일기와 그린키퍼 논쟁까지, 경기장 밖의 마테우스는 늘 시끄러웠다. 허나 경기장 안의 기록은 한 번도 시끄럽지 않았다. 스무 해 동안 조용히, 그리고 압도적으로 쌓였을 뿐이다.

역대 클럽·국대 기록

1970-1999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문장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1979-1984200경기 · 51골
공식전 전체
1979-1996년 FC 바이에른 뮌헨 문장FC 바이에른 뮌헨 (1기)1984-1988151경기 · 69골
공식전 전체
1989-1999년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문장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1988-1992154경기 · 53골
공식전 전체
1996-2002년 FC 바이에른 뮌헨 문장FC 바이에른 뮌헨 (2기)1992-2000259경기 · 31골
공식전 전체
1995-2002년 뉴욕/뉴저지 메트로스타즈 문장뉴욕/뉴저지 메트로스타즈200023경기 · 0골
MLS·US 오픈컵
1978-2003년 독일 축구 협회 문장독일 대표팀1980-2000150경기 · 23골
성인 A매치

리그·국내 컵·리그컵·슈퍼컵·유럽 대항전을 합산한 공식전 기록이다. 바이언 두 시기를 합하면 410경기 100골(분데스리가 302경기 85골, DFB-포칼 36경기 7골, DFB-리가포칼 6경기, DFB-슈퍼컵 1987·1994년 2경기, 유럽 대항전 64경기 8골)이다. 묀헨글라트바흐는 분데스리가 162경기 36골, 인테르는 세리에 A 115경기 40골에 코파 이탈리아 18경기 7골, 유럽 대항전 21경기 6골이 더해진다. 메트로스타즈 23경기는 정규리그 16경기, 플레이오프 5경기, US 오픈컵 2경기다. 슈퍼컵과 리가포칼, 1989-90 코파 이탈리아 출전 수를 빠뜨린 자료는 바이언 406경기·인테르 153경기로 적으므로, 해당 경기의 출전 명단과 시즌 기록으로 대조했다. 프로 공식전 통산은 787경기 204골이다. 입단 전 1. FC 헤르초게나우라흐(1978-79 란데스리가 22경기 20골)와 은퇴 뒤 로코모티브 라이프치히(2005)·헤르초게나우라흐(2018) 각 1경기는 카드에서 제외했다. 메트로스타즈는 현재 뉴욕 레드불스이며 구단 문장은 소속 식별용이다. 문장은 마테우스가 뛰던 시기에 각 구단과 대표팀이 쓰던 것이다.

역대 등번호

클럽

소속팀확인 기간등번호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1979-80 · 1981-82~1983-84 시즌6
FC 바이에른 뮌헨1984-85~1987-88 시즌8 · 10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1988-89~1991-92 시즌10
FC 바이에른 뮌헨1992-93~1995-96 시즌10 · 16 · 13
FC 바이에른 뮌헨1996-97~1999-2000 시즌10
뉴욕/뉴저지 메트로스타즈2000년 MLS시즌별 이력 미확인

국가대표팀

대표팀확인 대회등번호
서독UEFA 유로 198018
서독1982 FIFA 월드컵18
서독UEFA 유로 198413
서독1986 FIFA 월드컵8
서독UEFA 유로 19888
서독1990 FIFA 월드컵10
독일1994 FIFA 월드컵10
독일1998 FIFA 월드컵8
독일UEFA 유로 200010

분데스리가와 세리에 A가 시즌 고정 등번호를 도입한 것은 1995-96 시즌이다. 그 전의 클럽 번호는 경기마다 선발 위치에 따라 1-11번을 나눠 달던 시절의 주 번호이며, 트랜스퍼마크트의 시즌별 이력을 따랐다. 실제로 바이언 1기의 1987 DFB-슈퍼컵과 2기의 1994 DFB-슈퍼컵 출전 명단에서 그는 주장 10번이었다. 1996-97·1999-2000 시즌 고정 번호 10번은 시즌 선수단 명단으로 확인했고, 1995-96 시즌은 자료에 따라 13번 기록이 함께 남아 있다. 묀헨글라트바흐의 1980-81 시즌 번호는 확인된 이력이 없다. 대표팀 번호는 각 대회 공식 선수단 명단 기준이며, 1990년 10월 3일 통일 이전 대회는 서독, 이후는 독일로 표기한다. 마테우스는 유로 1988부터 1994년 월드컵까지 대표팀 주장이었다.

대표 우승·준우승 경력

분데스리가Bundesliga

우승 7회: 1984-85, 1985-86, 1986-87, 1993-94, 1996-97, 1998-99, 1999-2000 · FC 바이에른 뮌헨 (1999-2000 시즌 3월 이적)

DFB-포칼DFB-Pokal

우승 3회: 1985-86, 1997-98, 1999-2000 · FC 바이에른 뮌헨 (1999-2000 시즌 3월 이적)

준우승 2회: 1983-84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1998-99 · FC 바이에른 뮌헨

DFB-리가포칼DFB-Ligapokal

우승 3회: 1997, 1998, 1999 · FC 바이에른 뮌헨

DFB-슈퍼컵DFB-Supercup

우승: 1987 · FC 바이에른 뮌헨

준우승: 1994 · FC 바이에른 뮌헨

세리에 ASerie A

우승: 1988-89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Supercoppa Italiana

우승: 1989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출전 없음)

유러피언컵·UEFA 챔피언스 리그European Cup · UEFA Champions League

준우승 2회: 1986-87, 1998-99 · FC 바이에른 뮌헨

UEFA컵UEFA Cup

우승 2회: 1990-91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1995-96 · FC 바이에른 뮌헨

준우승: 1979-80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MLS 동부 디비전MLS Eastern Division

우승: 2000 · 뉴욕/뉴저지 메트로스타즈

FIFA 월드컵FIFA World Cup

우승: 1990년 · 서독

준우승 2회: 1982년, 1986년 · 서독 / 8강: 1994년, 1998년 · 독일

UEFA 유로UEFA European Football Championship

우승: 1980년 · 서독

4강: 1988년 · 서독 / 조별리그: 1984년 · 서독, 2000년 · 독일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FIFA Confederations Cup

조별리그: 1999년 · 독일

US컵U.S. Cup

우승: 1993년 · 독일

로타어 마테우스의 개인 커리어 수상 경력

국가 수훈

독일 연방 대통령 은월계수장Silbernes Lorbeerblatt · 1990년

  • 발롱도르1986년 공동 24위 · 1987년 공동 12위 · 1988년 6위 · 1989년 4위 · 1990년 1위 · 1991년 공동 2위 · 1994년 공동 16위 · 1999년 10위
  • FIFA 올해의 선수FIFA가 1991년 처음 제정한 상의 초대 수상1991년 · 1위
  • 발롱도르 드림팀2020년 · 1군
  • 옹즈도르프랑스 축구지 《옹즈》 독자 선정 유럽 무대 올해의 선수1990년
  • 옹즈 드 브롱즈《옹즈》 독자 선정 유럽 무대 올해의 선수 3위1991년
  • 옹즈 드 옹즈《옹즈》 독자 선정 베스트 111988년 · 1989년 · 1990년 · 1991년
  • 유럽 올해의 스포츠인유럽 스포츠기자연맹(UEPS) 선정, 전 종목 대상1990년
  • FIFA 100FIFA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펠레가 선정한 125인의 축구선수2004년
  • FIFA 월드 11FIFA가 주관한 세계 올스타 경기 선발1996년 · 1997년 · 2001년
  • 골든풋은퇴한 축구 전설 부문2012년
  • IFFHS 세계 최고의 선수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1990년
  • IFFHS 20세기 최고의 선수 투표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세계 15위 · 유럽 32위 · 독일 5위
  • IFFHS 선정 20세기 세계 드림팀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2000년
  • IFFHS 선정 20세기 유럽 드림팀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2000년
  • IFFHS 선정 전 세계 역대 드림팀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2021년 · B팀
  • IFFHS 선정 독일 역대 드림팀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2021년 · 1군 수비형 미드필더
  • IFFHS 레전드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 선정 48인의 전 세계 레전드2016년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영국 축구 전문지 《World Soccer》 선정1990년
  • 월드 사커 20세기 위대한 선수 100인《World Soccer》 독자 투표1999년 · 31위
  • 게린 스포르티보 세계 베스트 11이탈리아 축구지 《Guerin Sportivo》 선정1986년
  • FIFA 월드컵 실버볼1990년
  • FIFA 월드컵 올스타 팀대회 베스트 111990년
  • UEFA 유로 대회 베스트 111988년
  • 독일 올해의 축구선수독일 스포츠기자협회·키커 선정1990년 · 1999년
  • 독일 축구 올해의 인물1999년
  • VDV 올해의 선수독일 프로축구선수협회 선정1999년
  • 독일 올해의 골ARD 《스포츠샤우》 시청자 투표1990년 · 1992년
  • 독일 이달의 골ARD 《스포츠샤우》 시청자 투표1990년 6월 · 1990년 12월 · 1992년 11월 · 1998년 8월
  • 키커 분데스리가 시즌 베스트 11독일 축구지 《키커》 선정1982-83 · 1984-85 · 1987-88 · 1992-93 · 1993-94 시즌
  • 키커 올해의 리베로1994년 · 1998년 · 1999년
  • 키커 올해의 미드필더1983년
  • 키커 올해의 아이돌《키커》 독자가 뽑는 올해의 우상1990년 · 1991년 · 1993년 · 1994년
  • 키커 랑리스테《키커》가 반기마다 매기는 독일 선수 등급월드클래스(WK) 5회 · 인터내셔널 클래스(IK) 20회 · 주목 대상(K) 9회
  • 독일 대표팀 명예 주장DFB 추대2001년
  • 게오르크 폰 오펠상오펠이 사회적 헌신과 투혼의 스포츠인에게 준 상, ‘특별한 투사’ 부문1998년
  • DFL 공로상독일 축구 리그(DFL) 수여2019년
  • 독일 스포츠기자상가장 많이 인용된 축구 전문가 부문2017년
  • FC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 헌액헌액
  • FC 바이에른 뮌헨 세기의 팀바이언 역대 베스트 11 선정선정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명예의 전당 헌액2018년
  • 인테르 올해의 선수피라타 도로(Pirata d'Oro)1991년
  • 바이에른주 공로훈장바이에른주 정부 수여2001년
  • 바이에른주 스포츠 홍보대사바이에른주 정부 위촉2022년
  • 독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2017년
  •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2018년 · 첫 11인
  • MLS 올스타2000년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