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산티아고, 1973년 11월 21일. 쿠데타로부터 두 달 하고 열흘이 지난 날이다.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의 관중석은 거의 비어 있었고, 경찰 악대가 어딘가 처량한 연주를 했고, 흰 유니폼을 입은 칠레 선수 열한 명이 센터서클에 대형을 갖췄다. 맞은편 진영에는 아무도 없었다.
휘슬이 울리자 네 명이 남쪽 골대 쪽으로 공을 몰고 갔다. 막을 사람이 없었으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골키퍼도 수비수도 없는 골문 앞에서 주장 프란시스코 발데스(Francisco Valdés Muñoz; 칠레의 공격형 미드필더, 별명 차마코, 1943-2009)가 공을 세워 두고 잠시 멈췄다. 사진기자들이 자리를 잡을 시간을 준 것이다. 준비가 끝나자 오른쪽에서 공을 찼고, 공은 그물에 닿았다. 전광판에 칠레 1, 소련 0이 떴다.
다시 킥오프할 상대가 없었으므로 경기는 그것으로 끝났다.
필자가 이 장면을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까닭은 우스워서가 아니다. 형식이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졌기 때문이다. 대형을 갖췄고, 휘슬이 울렸고, 득점이 기록됐고, 사진이 남았다. 규칙이 요구하는 절차는 전부 이행됐는데 그 안에 있어야 할 것만 없었다. 그리하여 이 텅 빈 절차가 그해 칠레에서 벌어지던 다른 일들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가 이 글이 따지려는 것이다.
1. ‘정치적 이용’이라는 말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
이 경기에 붙는 가장 흔한 문장은 축구가 정치에 이용당했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허나 이 문장은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해서 결국 아무것도 가려내지 못한다. 정권이 개입한 모든 경기가 여기 해당하고, 반대로 어떤 사실이 나와야 이 설명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은 까닭이다. 반증할 수 없는 설명은 쓰기에 편하지만 쓸모가 적다.
그래서 이 글은 그 한 문장 안에 서로 다른 세 주장이 겹쳐 있다고 보고 셋을 떼어 놓는다. 첫째, 경기 자체가 정권의 선전이었다는 주장이다. 둘째, FIFA가 절차를 통해 정권에 정당성을 빌려주었다는 주장이다. 셋째, 국제 축구의 일정표가 수용소의 운영 일정을 규정했다는 주장이다.
셋은 요구하는 증거가 전혀 다르다. 첫째는 정권 내부의 의도를 보여주는 문서가 있어야 하고, 둘째는 FIFA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했는지 남아 있어야 하며, 셋째는 양쪽 날짜의 선후만 확인하면 된다.
더 중요한 것은 각각이 틀렸다면 어떤 모습이겠느냐는 물음이다. 첫째 주장은 정권이 이 경기를 부담스러워하거나 피하려 한 흔적이 나오면 무너진다. 둘째 주장은 FIFA가 확인 과정에서 수감 여부를 실제로 따져 물었거나 독립적 접근을 요구한 기록이 나오면 무너진다. 셋째 주장은 수용 시설의 운영 종료가 경기 일정과 무관한 시점에, 이를테면 9월 말이나 이듬해에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되면 무너진다. 이렇게 무너지는 조건을 먼저 적어 두면 사료를 읽는 동안 자기 결론에 유리한 것만 집어 오는 일을 조금은 막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사료 앞에서 셋은 서로 다른 운명을 맞는다. 앞의 둘은 절반쯤 서고, 셋째는 생각보다 단단하게 선다.
2. 1938년에 지은 건물이 1973년에 한 일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은 산티아고 뉴뇨아 구 아베니다 그레시아 2001번지에 있다. 1938년에 문을 열었고 1962년 FIFA 월드컵 결승이 이곳에서 열렸으니, 칠레 축구의 중심이자 국가가 대외적으로 내세우던 건축물이었다.[7]
이 건물의 이력에는 우리 서가와 곧장 이어지는 대목이 하나 더 있다. 1948년, 칠레의 콜로콜로와 루이스 발렌수엘라가 조직한 남미 챔피언 오브 챔피언십이 바로 이 경기장에서 열렸다. 남미 일곱 나라의 챔피언 구단이 모인 최초의 대륙 클럽 대회였고, 이 대회가 1955년 유러피언컵과 196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창설에 영감을 주었다.[7] 그 대회의 경과는 1948 남미 챔피언 오브 챔피언십 편에 정리해 두었다.
그러니까 유럽 클럽 대항전의 출발점에 영감을 준 대회가 치러진 바로 그 그라운드가, 스물다섯 해 뒤에 수용소가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1973년 10월에 케저와 다우메이다가 걸어 들어간 건물의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 FIFA 임원들에게 그곳은 자기 대회의 계보가 시작된 자리이기도 했다.
1962년도 짚어 둘 필요가 있다. 그해 칠레는 대지진의 피해를 딛고 월드컵을 치러 내며 세계에 나라를 보여 주었고, 이 경기장은 그 과시의 무대이자 결승전 장소였다.[7] 국제 대회를 유치해 국가의 정상성을 증명하는 방식은 칠레에서 이미 한 차례 시험을 거친 전범이었다. 그로부터 열한 해 뒤 같은 건물에서 같은 논리가 다시 쓰이는데, 이번에 증명해야 할 것은 지진으로부터의 복구에서 쿠데타 이후의 통치로 바뀌어 있었다. 무대도 같고 방법도 같았으며 달라진 것은 감추어야 할 대상뿐이었다.
1973년 9월 11일 쿠데타 다음 날부터 이 건물은 다른 일을 했다. 산티아고의 두 대형 경기장, 곧 에스타디오 나시오날과 에스타디오 칠레(Estadio Chile; 산티아고의 실내 경기장, 현재 이름은 에스타디오 빅토르 하라)가 수감과 고문과 처형의 공간으로 전환됐다. 운영 책임자는 칠레 육군의 호세 에스피노사 대령이었고, 운영 기간은 9월 12일부터 11월 11일까지 두 달이며, 거쳐 간 사람은 약 2만 명으로 추정된다.[2]

그런데 왜 하필 경기장이었을까. 급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학교도 있고 병영도 있고 공장도 있었으니 말이다. 경기장이 선택된 데에는 이 건물이 원래 하도록 설계된 일이 그대로 쓰였다는 사정이 있다.
대형 경기장은 수만 명을 한자리에 모으고, 입구에서 세어 들여보내고, 구역별로 나누어 앉히고, 한 번에 내보내도록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관중석이 사람을 담고, 출입 통로가 흐름을 통제하며, 관중석 아래와 지하의 공간이 보이지 않아야 할 것들을 받아 낸다. 이 기능들은 관중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수감자에게도 똑같이 작동한다. 담장은 이미 높고, 출입구는 이미 몇 개로 제한돼 있으며, 내부는 이미 구획돼 있으니까.
그러니 1973년의 칠레 군부는 수용소를 새로 지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지어져 있는 것을 용도만 바꿔 쓰면 됐다. 쿠데타 이튿날부터 수용이 가능했던 연원이 여기 있다. 축구장은 이미 완성돼 있는 설비였다.
여기에 한 겹이 더 있다. 병영이나 교도소도 사람을 가두도록 지어지지만, 그런 건물은 애초에 가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경기장은 다르다. 이 건물은 사람들이 제 발로, 돈을 내고, 기뻐하며 들어오는 곳으로 설계됐다. 통제 장치가 즐거움의 형식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표를 검사하는 회전문은 관중을 세기 위한 것이고, 구역을 나눈 관중석은 좌석을 배정하기 위한 것이며, 좁은 통로는 안전한 퇴장을 위한 것이다. 이 모든 장치가 목적만 바뀌면 그대로 감시와 분리와 은폐의 도구가 된다.
그리하여 경기장이 수용소가 되는 데에는 건물의 성격이 뒤집히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같은 성격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세우면 그만이었다. 필자가 이 이야기를 축구 밖의 사건으로 넘기지 못하는 연유가 여기 있다. 축구가 대규모 관중을 다루기 위해 발전시킨 기술이, 축구와 무관한 목적에 곧바로 전용될 수 있을 만큼 범용적이었다는 사실이 남기 때문이다.
3. 모스크바에서의 0-0, 그리고 전령이 된 선수들
대륙간 플레이오프 1차전은 쿠데타 보름 뒤인 9월 26일 모스크바 레닌 경기장에서 열렸다. 브라질의 아르만두 마르케스가 주심을 봤고 관중은 48,891명이었으며 경기는 0-0으로 끝났다.[1]
이 0-0에 이르기까지 칠레 선수단이 지나온 길은 평범하지 않았다. 대표팀은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친선경기를 치르느라 나라 밖에 있었고, 그사이 본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 카를로스 카셀리(Carlos Humberto Caszely Garrido; 칠레의 공격수, 콜로콜로의 상징, 1950-)는 멕시코전에서 두 골을 넣었는데도 경기가 끝나자 아무도 축구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대신 칠레의 상황을 물었다고 회고한다. 스위스로 옮겨 가서도 사정은 같아서, 사람들은 다가와 칠레의 소식과 가족의 안부와 사망자 수를 물었다. 선수가 아니라 전령을 대하는 태도였던 셈인데, 정작 그 전령들은 전할 것이 없었다. 본국의 뉴스가 끊겨 있어서 선수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4]
모스크바 공항에서는 여러 선수가 몇 시간 동안 억류됐다. 카셀리의 회고에 따르면 소련 측은 여권 속 인물과 눈앞의 사람이 같은지 확인해야 한다며 입국을 미뤘다. 소련에게 이들은 동의할 수 없는 정부가 보낸 사절이었고, 몇 시간의 억류는 그 사실을 몸으로 알려 주는 절차였다.[4]
경기장 기온은 영하 4도였고 관중석은 가득 찼다. 카셀리는 경기장이 꽉 차면 그 웅성거림이 늘 자기를 향한 것이라 상상해 왔다고 말한다. 벌이 날갯짓하는 것 같은 소리가 피치 아래에서 몸으로 느껴졌다고. 소련은 칠레를 이기지 못했고, 경기가 끝나자 관중이 박수를 보냈다.[4]
그 박수가 무엇을 향한 것이었는지는 기록에 없다. 다만 두 달 뒤 산티아고에서 같은 두 팀이 다시 만나기로 되어 있었고, 그 경기장은 이미 다른 용도로 쓰이는 중이었다.
4. 확인단이 보러 간 것과 볼 수 있었던 것
소련 축구협회는 개최지를 문제 삼아 FIFA에 정식으로 서한을 보냈다. 그들에게 그 경기장은 피로 얼룩진 곳이었고, 군부는 그 규정을 단호히 부인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소련이 경기를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장소를 바꾸자고 했다는 점이다. 소련은 칠레 안의 다른 경기장을 요구했고, 나아가 제3국에서 치르자는 안까지 내놓았다.[1], [10] 경기 자체를 무산시키지 않으면서 개최지 문제만 떼어 내는 길이 이미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었다. 중재를 맡은 FIFA는 그 안을 받지 않고 대신 확인단을 보냈다. 스위스인 사무총장 헬무트 케저(Helmut Käser; FIFA 사무총장, 1961-1981 재임)와 브라질인 부회장 아빌리우 다우메이다(Abilio d’Almeida; FIFA 부회장) 두 사람이 10월 23일 산티아고에 도착해 이튿날 경기장을 둘러봤다.[3]
명목상 확인 항목은 경기 개최 규정의 충족 여부였다. 실질적으로는 그 경기장에서 수감과 고문과 살해가 벌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었다.[4]
며칠 뒤 FIFA가 낸 성명은 이렇다.
산티아고에서 보고 들은 바에 근거하여, 다우메이다 씨와 케저 박사는 칠레 수도의 삶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정부 당국이 제시한 보장이 충분하여 칠레와 소련의 경기를 예정대로 11월 21일에 치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두 사람이 근거로 든 관찰도 남아 있다. 거리의 삶이 정상이었고, 자동차와 행인이 많았으며,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고, 상점이 열려 있었다는 것이다.[5]
그런데 그날 그 경기장 안에는 7,000명이 넘는 수감자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열아홉 살로 그곳에 갇혀 있던 호르헤 몬테알레그레(Jorge Montealegre; 칠레의 작가, 1954-)의 증언은 확인단이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를 정확히 알려 준다.
우리는 관중석 위로 올라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라운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볼 수 없도록요. 우리를 아래쪽에, 그러니까 관중석 밑의 벽감이나 통로 같은 데에 숨기듯이 넣어 두었습니다. 그때는 확인단과 함께 기자들이 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두 개의 다른 세계가 있는 것 같았어요.
같은 건물 안에서 한쪽은 경기 규정 충족 여부를 점검하고 다른 한쪽은 총구 앞에서 침묵을 지시받고 있었다. 그러니 확인단이 거짓 보고를 했느냐는 이 대목에서 그리 요긴한 물음이 아니다. 따져야 할 것은 그들이 쓴 확인 방법이 구조적으로 답을 하나밖에 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거리의 자동차 수, 행인의 표정, 상점의 개폐 여부는 도시가 평온한 상태와 경기장 관중석 아래에 사람이 갇혀 있는 상태를 구분하지 못한다. 두 상태 모두에서 똑같은 관찰값이 나오기 때문이다. 구분하려면 다른 것을 봐야 했다. 수감자 명부를 요구하거나, 적십자나 제3자의 독립적 접근을 조건으로 걸거나, 실종 신고 처리 현황을 확인하거나, 최소한 안내받지 않은 경로로 관중석 하부를 걸어 보는 정도는 필요했다. 확인의 기준이 그렇게 설정되지 않았으므로, 이 확인은 시작하기 전에 결론이 정해져 있었다.
여기서 기자단의 존재가 묘하게 작동한다. 몬테알레그레의 증언에 따르면 수감자들을 숨긴 직접적인 이유가 확인단과 함께 온 기자들이었다. 상식적으로는 언론이 동행하면 은폐가 어려워질 것 같은데, 실제로는 반대였다. 기자가 온다는 사실이 은폐를 더 철저하게 만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깨끗한 장면을 기자들이 다시 세계에 전했기 때문이다. 감시하러 온 눈이 정상성의 증인으로 되돌아왔다.
이것은 국제기구의 현장 확인이라는 절차가 일반적으로 안고 있는 약점이기도 하다. 방문 일정이 미리 통보되고, 동선이 안내되고, 확인 항목이 사전에 정해져 있으면, 확인은 상대가 준비한 것을 확인하는 일이 된다. 그럼에도 확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은 남아서 뒤에 오는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된다. 1973년 10월 24일의 열 몇 분이 그 뒤 수십 년 동안 인용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아마 이것이 더 불편한 결론일 것이다.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어서 벌어진 일이라면 그 사람을 지목하면 된다. 그러나 절차가 원래 그렇게 생겨서 벌어진 일이라면, 같은 절차가 남아 있는 한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난다.
받아들여지지 않은 타협안
이 대목을 그냥 지나치면 안 된다. 제3국 개최는 축구에서 드문 방식이 아니다. 안전이나 제재나 외교 문제로 홈경기를 다른 나라에서 치른 사례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있었고, 대회의 형식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분쟁을 푸는 표준 해법에 가깝다. 그런데 FIFA는 이 안을 받지 않았다.[10]
거절의 이유를 밝힌 문서를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동기는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결과가 무엇이었는지는 분명하다. 제3국 개최를 택했다면 FIFA는 경기를 치르면서도 산티아고의 그 경기장에 아무런 보증을 서지 않을 수 있었다. 확인단을 보내 정상이라고 판정하는 길을 택하는 순간, 이 기구는 경기 개최지의 적격성에 더해 그 도시의 상태에 관해서도 공적인 발언을 하게 됐다. 선택지가 있었는데 더 많이 개입하는 쪽을 골랐다는 사실이, 나중에 나온 성명의 무게를 바꾼다.
FIFA는 소련에 11월 11일까지 답하라는 시한을 주었고, 소련이 거부하자 실격 처분을 내렸다.[10] 그런데 이 11월 11일은 앞에서 본 수용 시설의 운영 종료일과 같은 날짜다. 두 사건 사이에 인과를 세울 문서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우연의 일치로 적어 둔다. 다만 같은 날짜에 한쪽에서는 최후 시한이 만료되고 다른 쪽에서는 두 달간의 수용이 정리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해 11월의 칠레에서 축구 일정과 통치 일정이 얼마나 가까이 붙어 돌아갔는지를 보여 준다.
5. 잔디는 완벽했다
증언 가운데 가장 오래 남는 대목은 잔디에 관한 것이다. 수감돼 있던 사람들은 군인들이 자기 무기보다 그라운드를 더 잘 돌봤다고 말한다. 확인단이 왔을 때 피치는 흠 하나 없었다.[4]
이 한 문장 안에 그해 칠레의 통치 방식이 요약돼 있다. 보여 줄 표면은 관리하고, 보이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래로 넣는다. 잔디는 국제기구가 확인하러 올 대상이었으므로 자원이 투입됐고, 관중석 아래의 사람들은 확인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숨기면 그만이었다. 보여지는 것과 보여지지 않는 것 사이의 이 노동 분배가 곧 정권의 기술이었다.
축구 쪽에서 보면 다른 사실도 눈에 띈다. 잔디에 자원을 들이려면 그 경기장에서 경기가 열리리라는 전제가 먼저 서 있어야 한다. 군부는 처음부터 이 경기를 치를 작정이었고, 그렇다면 언젠가 건물을 비워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계산이 다음 절의 날짜에 그대로 드러난다.
6. 경기 며칠 전, 사람들은 사막으로 갔다
여기가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기록상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의 수용 시설은 11월 11일에 운영을 마쳤다.[2] 경기는 11월 21일이었다. 그렇다면 경기 열흘 전에 시설이 닫힌 셈인데, 증언은 여기에 한 겹을 더한다. 사람들은 풀려나지 않았다. 옮겨졌다.
경기를 며칠 앞두고 수감자들은 칠레 북부로 이송됐다. 목적지는 아타카마 사막 한가운데의 초석 광산 도시 차카부코(Chacabuco; 아타카마 사막의 옛 초석 광산 도시, 1973년 수용소로 전용)였다.[4]
이 사실 하나가 문장을 바꾼다. 수용소가 닫혔다고 쓰면 무언가 끝난 것처럼 읽힌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건물이 비워진 것이고, 수용은 1,400킬로미터 북쪽에서 계속됐다. 그리고 건물을 비운 이유는 국제 축구 일정이었다.
차카부코가 어떤 곳인지도 적어 둘 만하다. 20세기 초 아타카마 사막에는 초석을 캐던 회사 도시들이 줄지어 있었다. 사택과 학교와 극장과 광장을 갖춘 정식 마을이었는데, 합성 질소 비료가 나오면서 초석 산업이 무너지자 사람들이 떠나고 건물만 남았다. 차카부코는 그렇게 버려진 유령 도시 가운데 하나다.
차카부코는 1924년 라우타로 초석 회사가 세운 마을이고, 초석 산업이 무너진 뒤 버려졌다가 1930년대에 역사기념물로 지정돼 복원이 시작되던 참이었다. 그런데 1973년 쿠데타 이후 피노체트 정권이 이곳을 수용소로 바꾸어 1974년 말까지 운영했고, 최대 1,800명을 수용했다. 수감자 중에는 의사와 변호사와 예술가와 작가와 교수, 그리고 칠레 전역에서 온 노동자가 많았다. 군이 떠나면서 남긴 지뢰가 아직 100발 가까이 주변에 묻혀 있다.[13]
역사기념물로 지정돼 복원을 기다리던 마을이 수용소가 됐다는 순서도 기록해 둘 만하다. 보존하기로 정해진 장소와 가두기 위해 쓰인 장소가 같았다.
날짜를 겹쳐 보면 연결이 분명해진다.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의 수용 운영이 11월에 끝나고, 차카부코의 수용 운영이 11월에 시작된다. 한쪽이 닫히면서 다른 쪽이 열린 것이다. 이 전환의 한가운데에 11월 21일의 경기가 있다.
여기서 또 한 번 건축이 되풀이된다. 군부는 이번에도 새로 짓지 않았다. 관중을 다루려고 지은 건물을 썼다가, 광부를 살게 하려고 지은 마을을 썼다. 사택과 담장과 한정된 출입구를 갖춘 산업 도시는 경기장과 마찬가지로 이미 사람을 담고 세고 가두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목적으로 지어진 구조물이 계속해서 같은 용도로 전용되는 이 패턴이, 1973년 칠레에서 수용이 얼마나 빠르게 확장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쿠데타 다음 날부터 경기장이 수감·고문 시설로 쓰인다. 두 달 동안 약 2만 명이 거쳐 간다.
축구를 위해 지은 구조가 그대로 수용 기능이 됐다.케저와 다우메이다가 경기장을 둘러본다. 그날 수감자들은 관중석 아래에 숨겨졌다.
며칠 뒤 FIFA가 정상 복귀를 선언한다.경기를 며칠 앞두고 수감자들이 아타카마 사막의 폐광 도시로 옮겨진다.
건물은 비었고 수용은 계속됐다.소련이 나오지 않았고 칠레가 빈 골대에 득점한 뒤 경기가 끝난다.
칠레가 1974 월드컵 본선에 오른다.세 번째 주장이 여기서 선다. 두 달을 채워 온 운영이 하필 그때 정리된 데에는 11월 21일이라는 날짜가 걸려 있었다. 축구가 정치에 끌려간 국면이 아니었다. 국제 축구의 달력이 수용소의 달력을 밀어낸 국면이었다.
몬테알레그레 자신이 그 이유를 정확히 짚는다. 세계가 칠레를 보고 있었고, 수용소가 된 경기장이라는 상징은 독재 정권에 매우 나쁜 선전이었으며, 세계는 그 경기장을 칠레 독재의 은유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4] 그러니 경기를 치르겠다는 결정과 건물을 비우겠다는 결정은 같은 결정의 앞뒤였다.
다만 이 판정에도 경계가 있다. 이송을 지시한 문건 자체를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증언과 날짜의 맞물림까지다.
7. 최후통첩과 침묵
FIFA의 승인이 나온 뒤, 칠레 축구협회장 프란시스코 플루사(Francisco Fluxá; 1973년 당시 칠레 축구협회장)는 기자회견에서 소련을 향해 직접 말했다.
상황은 당신들 손에 달렸습니다. 21일에 산티아고에서 경기를 하든지, 아니면 월드컵에서 물러나든지. 후자라면 칠레가 자동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소련은 답하지 않았다. 당시 칠레 축구협회 임원이던 알프레도 아스푸라는 소련의 태도를 침묵과 무관심과 무책임한 비협조로 기억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소련 선수단이 터널에 나타날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4]
양쪽 모두에게 이 침묵은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다. 소련은 불참을 공식화하지 않음으로써 규정 위반의 책임을 흐릴 수 있었고, 칠레는 상대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을 끝까지 연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 FIFA는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경기를 예정대로 열었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그라운드에서 절차만 이행됐다.[1], [5]
8. 그라운드에 선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나
이 경기에 관한 서술은 대개 정권과 FIFA 사이에서 끝난다. 그런데 그날 대형을 갖추고 서 있어야 했던 사람들의 말도 남아 있다.
칠레 수비의 중심이던 엘리아스 피게로아(Elías Figueroa; 칠레의 수비수, 남미 올해의 선수 3회, 1946-)는 이렇게 회고한다. FIFA 규칙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 대형을 갖춰야 했고, 이겼다고 하려면 골을 넣어야 했다고. 그리고 아무도 없는 상대 진영으로 공을 몰고 올라가면서 선수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고.[4]
카셀리의 표현은 더 단호하다. 그는 그 경기를 역사상 가장 우스꽝스러운 소극이었다고, 세계적 규모의 우스꽝스러움이었다고 말한다.[4]
이 두 회고를 읽고 나면 앞 절들의 무게가 조금 달라진다. 선수들은 정권의 도구였지만 동시에 그 연출의 안에서 그것이 연출임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 웃음을 동의로 읽기는 어렵다. 연출의 안쪽에서 벌어진 균열에 가깝다. 허나 균열은 그날의 절차를 멈추지 못했다.
나오지 않은 쪽이 치른 값
이 사건의 서술은 대체로 칠레 쪽에서만 이루어진다. 그런데 나오지 않기로 한 쪽도 값을 치렀다.
소련은 직전 대회인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8강까지 올라간 팀이었다. 1973년의 이 결정으로 그들은 본선 진출권을 잃었고, 그 뒤로 1978년 월드컵과 1976년·1980년 UEFA 유러피언 풋볼 챔피언십에서도 본선에 닿지 못하며 긴 침체로 들어간다.[1], [10] 정치적 이유로 월드컵 본선을 스스로 포기한 사례는 이때가 처음이었다.[10]
이 값을 어떻게 읽을지는 간단하지 않다. 냉전의 한복판에서 소련의 결정을 순수한 도덕적 판단으로만 보기는 어렵고, 아옌데 정부를 지지해 온 진영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계산이 있었다는 사실이 판단의 내용을 지우지는 않는다. 소련이 내건 근거, 곧 그 경기장에서 사람들이 고문당하고 죽었다는 주장은 지금까지 확인된 사실 관계와 어긋나지 않는다. 동기가 섞여 있었다는 것과 주장이 틀렸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축구사에서 이 결정이 남긴 자리도 짚어 둘 만하다. 국가대표팀이 상대국의 인권 상황을 이유로 경기를 거부하고 그 대가로 대회 출전권을 잃는 선례가 여기서 만들어졌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이 문제는 되풀이해 등장하는데, 매번 같은 구조가 반복된다. 대회를 주관하는 기구는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개입하지 않겠다는 그 선언이 한쪽에 유리한 결과를 만든다.
9. 파트너 없이 추는 춤
몬테알레그레는 그 경기가 자신과 수감자들에게는 다른 것을 뜻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꺼내는 비유가 이 글의 제목이 됐다.
그건 나라의 은유이기도 했다고 생각해요. 아무하고도 경기하지 않고 이겼다는 것. 유령 경기, 사라진 팀. 실종자를 두고 추는 쿠에카 솔라가 불러내는 것과 비슷하지 않나요.
쿠에카(cueca; 칠레의 국민 춤)는 원래 두 사람이 손수건을 들고 마주 보며 추는 춤이다. 쿠에카 솔라(cueca sola; 홀로 추는 쿠에카)는 실종자 가족들이 만든 형식으로, 파트너가 있어야 할 자리를 비워 둔 채 혼자 춘다. 여자가 홀로 나와, 찾고 있는 사람의 사진을 가슴에 달거나 들고, 원래의 가락과 장단은 그대로 지키면서 가사만 바꾸어 춘다. 비어 있는 쪽이 이 춤의 내용이다.[11]
이 형식의 출생일은 분명하다. 실종자 가족회(AFDD; Agrupación de Familiares de Detenidos Desaparecidos)의 민속 공연단이 1978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산티아고의 테아트로 카우폴리칸 무대에서 처음 선보였고, 가사를 쓴 사람은 갈라 토레스였다.[11]
날짜를 적어 두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쿠에카 솔라는 1978년의 형식이고 경기는 1973년의 일이다. 몬테알레그레가 그 경기를 쿠에카 솔라에 견줄 때, 그는 나중에 생긴 형식을 빌려 앞선 경험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이 원래 그렇다. 사건이 벌어진 순간에는 그것을 담을 말이 없다가, 뒤에 만들어진 형식이 소급해서 이름을 붙여 준다. 1973년 11월의 그 19초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는 5년 뒤 여자들이 무대에 혼자 나와 춤을 추고서야 비로소 정해졌다.
두 형식을 나란히 놓으면 구조가 같다는 것이 보인다. 축구 규칙이 상대를 전제하듯 쿠에카는 파트너를 전제하고, 두 형식 모두 맞은편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형식은 고스란히 유지된 채 한쪽만 비었다. 쿠에카 솔라가 가락과 장단을 그대로 둔 것처럼, 1973년의 경기도 대형과 킥오프와 득점 기록을 그대로 두었다.
다른 것은 방향이다. 정권은 비어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형식을 유지했다. 빈 골대에 공을 넣어 1-0을 만들고 전광판에 띄우면, 형식이 내용의 부재를 덮어 준다고 믿은 것이다. 가족들은 정확히 반대로 했다. 형식을 유지하되 빈자리를 보이게 만들어서, 없는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를 관객이 계속 쳐다보도록 했다. 같은 빈자리를 두고 한쪽은 가리는 데 쓰고 다른 쪽은 드러내는 데 썼다.
이 비유가 수감되었던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데가 아니다. 그는 이 경기를 부조리극으로 웃어넘기지 않고 자기가 겪은 실종의 문법으로 읽었다. 축구를 정치의 은유로 두는 해석과는 층이 다르다. 그리고 그 견해를 내놓은 사람은 그 경기장 관중석 아래에 갇혀 있었다.
덧붙이자면 이 춤은 칠레 밖으로도 나갔다. 스팅이 1987년에 발표한 「They Dance Alone」이 이 쿠에카 솔라를 노래한 곡이다.[12] 국제 사회가 1973년에 보지 못한 것을 1987년에는 노래로 들었다는 순서도 이 글의 논점과 무관하지 않다. 확인하러 간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나중에 예술이 전했다.
10. 자료가 서로 어긋나는 네 지점
이 사건은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세부가 잘 정리돼 있지 않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정식 경기로 치러지지 않았으니 공식 기록의 항목이 얇고, 당시 칠레 언론은 통제 아래 있었으며, 이 장면을 길게 취재할 외국 기자는 많지 않았다. 남은 것은 몇 줄의 처리 기록과, 수십 년 뒤에 채록된 당사자들의 기억이다. 그래서 이 글은 어긋나는 값을 하나로 합치지 않고 그대로 둔다. 기록이 얇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건의 성격을 말해 주기 때문이다.
| 항목 | 한쪽 기록 | 다른 쪽 기록 | 이 글의 처리 |
|---|---|---|---|
| 경기 지속 시간 | 19초 | 30초 | 확정하지 않고 둘 다 적었다 |
| 주심 | 오스트리아의 에리히 리네마이어 | 칠레인 주심 | 다수 기록을 따르되 증언의 차이를 밝혔다 |
| 수용 시설 종료일 | 11월 11일 | 11월 7일 | 시설을 전담해 기술한 자료를 따랐다 |
| 득점 표기 | 실제 1골 | 몰수 2-0 | 층위가 다른 두 숫자다. 둘 다 적었다 |
마지막 항목은 오기가 아니다. 발데스가 실제로 넣은 것은 한 골이고 전광판에도 1-0이 떴지만, 기록에 남는 2-0은 불참 팀에 적용하는 몰수 스코어다. 한쪽만 적으면 다른 쪽이 사라진다.
주심 항목은 좀 더 흥미롭다. 다수 기록은 오스트리아의 국제 주심 에리히 리네마이어(Erich Linemayr; 오스트리아의 국제 주심, 1933-2015)를 적지만, 현장을 취재한 서술 가운데는 FIFA 주심이 아니라 칠레인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고 적은 것도 있다.[1], [4] 상대가 없는 경기에 국제 주심을 세웠는지 여부는 FIFA가 이 절차를 얼마나 정식 경기로 취급했는지를 보여 주는 지표라 그냥 넘기기 어렵다.
11. 숫자를 만드는 것은 세는 사람의 범주다
칠레의 피해 규모를 말할 때 두 숫자가 나란히 인용된다. 1991년 진실과 화해 국가위원회가 낸 레티그 보고서(Informe Rettig)는 사망·실종 2,279명을 확인했고, 2004년 정치적 구금과 고문에 관한 국가위원회가 낸 발레치 보고서(Informe Valech)는 자의적 구금과 고문 27,255건을 기록했다.[8], [9]
열 배가 넘는 차이를 축소나 과장으로 읽으면 곤란하다. 앞의 위원회는 죽음과 실종을 조사했고 뒤의 위원회는 살아남은 사람의 구금과 고문을 조사했기 때문이다. 조사 범주를 정하는 일이 곧 숫자를 정하는 일이었다.
시차도 그 자체로 정보다. 죽은 사람을 세는 데 1991년이 걸렸고,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겪은 일을 세는 데 2004년이 걸렸다. 후자가 13년 늦은 까닭은 자료가 없어서가 아니다. 국가가 그것을 셀 항목으로 인정하는 데 그만큼이 걸렸다.
12. 12년 뒤, 같은 경기장에 8만 명
이야기가 1973년에서 끝났다면 이 글은 어두운 일화 하나로 남았을 것이다. 허나 같은 건물에서 한 번 더 결정적인 장면이 나온다.
먼저 1974년 6월, 서독으로 떠나기 전 피노체트가 대표팀을 불러 인사했다. 카셀리의 회고는 이렇다. 문이 열리고 망토를 두르고 선글라스를 쓰고 모자를 쓴 사람이 뒤에 다섯 명을 달고 들어왔다. 등골이 서늘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 사람이 자기 앞에 왔을 때, 그는 손을 등 뒤로 돌리고 내밀지 않았다.[4]
카셀리의 어머니는 이미 연행돼 고문을 당한 뒤였다.[4], [6]
서독에서 칠레가 들어간 조를 보면 이 이야기가 한 바퀴를 돈다. 1974년 월드컵 1조에는 개최국 서독과 동독이 함께 있었고, 칠레와 오스트레일리아가 나머지 두 자리였다. 두 독일이 나란히 올라가고 칠레와 오스트레일리아가 탈락하는 조였는데, 이 조에서 나온 6월 22일의 동독 1-0 서독은 월드컵 역사에서 가장 정치적인 경기로 꼽힌다. 위르겐 슈파르바서의 늦은 골이었고, 동독이 월드컵 본선에 나온 것은 통일 전까지 그때가 유일했다.[14]
정리하면 이렇다. 소련은 상대국의 인권 상황을 이유로 본선 자리를 포기했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칠레는 하필 냉전이 그라운드 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조에 배정됐다. 소련이 피하려 한 정치가 그들이 비운 자리로 형태를 바꿔 되돌아왔다. 물론 조 추첨은 우연이니 여기에 어떤 의도를 붙일 수는 없다. 다만 1973년 11월 산티아고의 빈 골대와 1974년 6월 함부르크의 슈파르바서 골이 같은 대회의 앞뒤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이 시기 국제 축구가 냉전의 어떤 기능을 떠맡고 있었는지를 압축해서 보여 준다.
칠레는 2무 1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그 대회에서 가장 오래 남은 칠레의 장면은 내밀지 않은 손이다.
그리고 1985년, 카셀리의 은퇴 경기가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에서 열렸다. 시점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1983년부터 칠레에서는 매달 특정한 날에 거리로 나오는 항의의 주기가 만들어지고 있었고, 1985년은 그 흐름이 한창일 때다. 사람이 합법적으로 대규모로 모일 수 있는 자리가 거의 없던 시절에 축구 경기는 예외에 속했다. 표를 사서 경기장에 들어가는 일은 집회가 아니었으므로 막을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봄의 더운 오후였고 8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모였다. 깃발과 손팻말과 함성이 있었고, 그 함성은 한 선수를 향한 것이면서 10년 넘게 이어진 독재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어느 텔레비전 방송도 생중계에 나서지 않았다. 경기가 경기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라디오 코오페라티바만이 중계를 했고, 그 전파에는 관중이 외치던 말이 실렸다. 피노체트는 무너진다, 무너진다, 무너진다.[4]
방송사들의 침묵은 그 자체로 이 사건의 성격을 증언한다. 중계를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미리 알았다는 뜻이고, 알면서도 막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1973년에는 경기장을 비우는 것으로 상황을 관리할 수 있었지만 1985년에는 8만 명이 들어찬 경기장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통제의 기술이 경기장 안에서 한계에 부딪힌 지점이 여기다.
그 자리에 몬테알레그레가 있었다. 수감자로 끌려온 뒤 처음으로 그 경기장에 제 발로 들어간 날이었다. 그는 형과 함께 경기를 보러 다니던 가족의 습관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고, 동시에 일종의 액막이였다고 말한다. 같은 장소 위에 다른 상징을 얹어 그 자리를 되찾는 절차였다.[4]
여기서 이 글의 처음과 끝이 맞물린다. 1973년 11월 21일, 정권은 그 경기장을 비우고 아무도 없는 골대에 공을 넣게 해서 승리를 연출했다. 1985년, 같은 경기장을 8만 명이 채우고 정권이 무너진다고 외쳤다. 같은 건물이고 12년 차이다. 비워서 쓰는 방법과 채워서 쓰는 방법이 있었는데, 나중 것이 더 오래갔다.
13. 지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
에스타디오 나시오날은 현재도 경기가 열리는 경기장이고 동시에 칠레의 국가기념물이다. 국가기념물위원회가 이곳을 역사기념물로 지정한 것은 2003년이고, 2008년에는 스포츠 기자 훌리오 마르티네스 프라다노스의 이름을 붙여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7] 관중석 한 구역인 에스코티야 8(Escotilla 8; 8번 출입 통로)은 당시의 나무 좌석과 구조를 그대로 둔 채 보존돼 있다.
2003년이라는 연도가 말해 주는 것이 있다. 쿠데타로부터 서른 해가 지난 뒤였고, 레티그 보고서가 나온 지 열두 해, 발레치 보고서가 나오기 한 해 전이다. 무엇을 셀지 정하는 일과 어디를 남길지 정하는 일이 한 시기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기억은 저절로 남지 않고 누가 언제 무엇을 지정하느냐에 따라 형태를 갖춘다.

이 보존 방식에서 한 가지를 짚고 싶다. 몬테알레그레의 증언에서 수감자들이 숨겨진 곳이 바로 관중석 아래의 통로, 곧 에스코티야였다. 기념의 대상이 된 공간과 은폐의 도구였던 공간이 같은 곳이다. 칠레는 그 자리를 다른 데로 옮기지도 않고 기념관을 따로 짓지도 않고, 경기가 계속되는 건물 안에 그대로 열어 두기로 했다. 관중이 경기를 보러 들어가는 같은 문으로 그곳을 지나간다.
기억을 다루는 방법은 크게 둘이다. 따로 떼어 내 보존하거나, 일상이 계속되는 자리에 남겨 두거나. 앞의 방법은 훼손을 막기 좋고 뒤의 방법은 잊기 어렵게 만든다. 칠레는 뒤를 골랐다.
14. 세 주장의 최종 판정
처음에 쪼갠 세 주장으로 돌아간다.
첫째, 경기가 정권의 선전이었다는 주장. 정황은 두껍다. 잔디 관리, 확인단 방문에 맞춘 은폐, 협회장의 최후통첩, 신문 1면의 처리까지 한 방향을 가리킨다. 다만 정권 내부에서 이 경기를 선전으로 규정한 문서를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이 글은 여기까지를 정황으로 적고 확정하지는 않는다.
둘째, FIFA가 정권에 정당성을 빌려주었다는 주장.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인의 기준이 문제를 탐지할 수 없는 종류였다는 점, 그리고 그 확인의 결과가 경기 강행이었다는 점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절차의 형식이 결과를 만들었다는 데까지가 이 글의 판정이다.
셋째, 축구 일정이 수용소 일정을 밀어냈다는 주장. 가장 단단하다. 건물은 경기를 위해 비워졌고, 사람들은 풀려나는 대신 사막으로 옮겨졌으며, 그 시점은 경기 며칠 전이었다. 국제 축구의 달력이 다른 영역의 달력을 규정한 사례로 이만큼 선명한 것을 찾기 어렵다.
필자가 이 사건을 축세 서가에 두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축구가 역사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흔하다. 축구의 일정표가 역사의 일정표를 밀어낸 이야기는 흔하지 않다.
끝내 걸리는 것은 규모의 간극이다. 한 경기의 일정이 2만 명이 거쳐 간 시설의 운영 종료 시점을 정했다면, 그것은 축구가 대단해서가 아니다. 그 시기 국제 사회가 칠레를 들여다보는 통로가 그만큼 좁았다. 유엔도 있었고 적십자도 있었고 각국 외교 채널도 있었지만, 군부가 가장 신경 쓴 것은 11월 21일에 세계가 산티아고의 그 경기장을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축구가 국제 여론에서 차지한 자리가 그만큼 컸고, 동시에 다른 감시 장치가 그만큼 작동하지 않았다.
요컨대 이 사건은 축구의 힘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축구 말고는 들여다볼 창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던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둘 중 하나만 들면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놓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적는다. 1973년 11월 21일에 벌어진 일은 형식만 남고 내용이 사라진 경기였다. 규칙대로 대형을 갖췄고 규칙대로 휘슬이 울렸고 규칙대로 득점이 기록됐는데, 맞은편에 아무도 없었다. 발데스는 사진기자를 기다렸다가 공을 찼다. 정당성이라는 것을 연기로 만들어 낼 때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이보다 정확히 보여 주는 장면을 필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 연기가 몇 초였는지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다.
출처와 기록 기준
- 1974 FIFA World Cup qualification (UEFA–CONMEBOL play-off): 1차전 날짜와 관중·주심, 2차전 처리와 몰수 스코어, 수용 시설 종료일을 11월 7일로 적은 서술
- Plan Cóndor, Estadio Nacional de Chile: 수용 시설 운영 기간 9월 12일-11월 11일, 추정 인원 약 2만 명, 소재지와 운영 책임자
- The Ghost Match(발췌): FIFA 확인단의 구성과 10월 23-24일 일정, FIFA 성명 전문
- Radio Ambulante, The Phantom Team: 카셀리·피게로아·몬테알레그레·아스푸라의 증언, 확인단 방문일의 은폐와 7,000명 이상 수감, 잔디 관리, 차카부코 이송, 플루사의 최후통첩, 쿠에카 솔라 비유, 1974년 피노체트 접견과 1985년 은퇴 경기
- Match de football Chili – URSS (1973): 확인단이 근거로 든 관찰 문구, 경기 당일 진행과 FIFA의 법적 판단
- These Football Times, Carlos Caszely: 카셀리의 정치적 위치와 콜로콜로에서의 경력, 가족이 겪은 일
- Estadio Nacional Julio Martínez Prádanos: 1938년 개장, 1948년 남미 챔피언 오브 챔피언십 개최와 유러피언컵·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 준 영감, 1962년 월드컵 결승, 2003년 역사기념물 지정과 2008년 개명
- 1974 FIFA World Cup: 1조의 구성과 칠레·오스트레일리아의 탈락, 1974년 6월 22일 동독 1-0 서독과 슈파르바서의 골, 동독의 유일한 본선 출전
- Chacabuco: 1924년 라우타로 초석 회사의 건설과 유령 도시화, 역사기념물 지정 뒤의 수용소 전용과 1974년 말까지의 운영, 최대 1,800명 규모와 남은 지뢰
- Cueca sola: 1978년 3월 8일 테아트로 카우폴리칸 초연, AFDD 민속 공연단과 갈라 토레스, 홀로 추는 형식과 사진을 드는 방식
- CNN Chile: 스팅의 「They Dance Alone」과 쿠에카 솔라
- HISTORY, Soviet Union refuses to play Chile in World Cup Soccer: FIFA가 소련에 준 11월 11일 시한, 중립국 개최 제안과 그 거절, 실격 처분, 정치적 이유의 첫 월드컵 보이콧이라는 서술, 1970년 8강 이후의 침체
- Rettig Report: 1991년 진실과 화해 국가위원회의 사망·실종 2,279명 확인
- Valech Report: 2004년 정치적 구금·고문 국가위원회의 27,255건 기록
경기 기록과 수용 시설 기록을 다른 계열의 자료로 대조했고, 어긋나는 값은 확정하지 않고 모두 적었다. 증언은 출처 4의 인터뷰를 따랐으며 증언과 문서 기록을 구분해 표시했다. FIFA 확인단의 내부 보고서, 차카부코 이송을 지시한 문건, 소련 축구협회가 FIFA에 보낸 서한 원문은 확인하지 못했다. 수감자의 얼굴이 담긴 기록 사진은 쓰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