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 ·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1948 남미 챔피언 오브 챔피언십: 참가 구단과 최종 순위

유러피언컵보다 일곱 해 먼저 산티아고에서 열린 남미 클럽 대항전. 콜로콜로가 직접 조직한 일곱 구단의 리그전, 바스쿠 다 가마의 초대 우승, 그리고 이 대회가 유럽에 건넨 영감까지.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의 전신을 경기와 사람으로 읽는다.
1948년 산티아고에서 열린 바스쿠 다 가마와 리버 플레이트의 경기 사진에 0 대 0 스코어를 얹은 표지
1948년 3월 14일, 바스쿠 다 가마와 리버 플레이트의 0-0. 대회의 사실상 결승이었다.
콜로콜로가 주최한 1948년 제1회 남미 챔피언 오브 챔피언십 공식 포스터
대회 공식 포스터
CONMEBOL 리베르타도레스 로고

제1회남미 챔피언 오브 챔피언십

1er Campeonato Sudamericano de Campeones

1948년 2월 11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남미의 일곱 구단이 모였다.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에콰도르, 페루, 우루과이의 챔피언들이 한 도시에 모여 한 달 넘게 리그전을 치른다는 구상이었다. 대회 이름은 남미 챔피언 오브 챔피언십(Campeonato Sudamericano de Campeones; 남미 각국 챔피언들의 대회)이었고, 포르투갈어권에서는 캄페오나투 술아메리카누 지 캄페옹이스(Campeonato Sul-Americano de Campeões)로 불렸다.

필자가 이 대회를 클럽 대항전 서가의 앞자리에 두는 까닭은 단순하다. 유럽이 각국 리그 챔피언을 한자리에 모으는 대회를 만든 것은 1955년 유러피언컵부터다. 산티아고의 이 대회는 그보다 일곱 해가 앞선다. 그리고 유럽에서 그 구상을 밀어붙인 사람들이 참고한 선례가 바로 이것이었다.

1948 남미 챔피언 오브 챔피언십의 주관 협회로 남미 축구 연맹과 콜로콜로를 나란히 적은 표
대회를 주관한 남미 축구 연맹과, 실제로 조직하고 치른 칠레의 콜로콜로.

연맹이 승인하고 한 구단이 차린 대회

대회를 주최하고 조직한 쪽은 연맹이 아니라 구단이었다. 남미 축구 연맹(CONMEBOL; Confederación Sudamericana de Fútbol)의 지원 아래 칠레 최상위 구단 콜로콜로가 대회를 열었다. 그래서 개최지도 칠레 공화국의 수도 산티아고가 됐다. 남미 클럽들이 가진 첫 번째 권위 있는 대회가 이렇게 시작한다.

주최 측의 최대 과제는 참가 구단을 모으고 그것을 대회의 권위로 바꾸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면 각국 챔피언을 부르는 일이 당연해 보이지만, 비행기 삯과 한 달 넘는 원정 일정을 감당하고 자국 리그를 비워 두면서까지 산티아고로 올 이유를 구단마다 설득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알프레도 디스테파노(Alfredo Stéfano Di Stéfano Laulhé;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의 공격수, 1926-2014)를 앞세운 클루브 아틀레티코 리버 플레이트,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CR 바스쿠 다 가마 정도의 세계적 위상을 가진 팀을 섭외했으니 권위를 인정받기에 충분한 성과였다.

일곱 나라, 일곱 구단

1948 남미 챔피언 오브 챔피언십 참가 일곱 구단의 나라와 참가 자격을 적은 표
참가 일곱 구단과 자격. 표에서 데포르티보 무니시팔의 나라를 에콰도르로 적었는데 페루다. 실수했다.. 졸았나봄..

첫 남미 챔피언 결정전에 나선 팀은 모두 일곱이다. 자격은 나라마다 조금씩 달랐다. 리그가 자리 잡은 나라는 전년도 리그 우승팀이 왔고, 아직 전국 리그가 없던 나라는 최대 도시의 챔피언이 왔다.

나라구단참가 자격
아르헨티나클루브 아틀레티코 리버 플레이트 문장 클루브 아틀레티코 리버 플레이트1947 리가 프로페시오날 데 푸트볼 우승
볼리비아클루브 데포르티보 리토랄1947 라파스 우승
브라질CR 바스쿠 다 가마1947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
칠레1947년 콜로콜로 문장 콜로콜로1947 프리메라 디비시온 데 푸트볼 데 칠레 우승
에콰도르CS 에멜렉 문장 CS 에멜렉1946 과야킬 지방 챔피언십 우승
페루데포르티보 무니시팔1947 페루 리그 2위
우루과이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문장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1947 캄페오나투 우루과요 데 프리메라 디비시온 프로페시오날 우승

구단 문장은 대회 당시에 가까운 도안을 우선했다. 콜로콜로는 1947년판이다. 데포르티보 무니시팔과 클루브 데포르티보 리토랄은 자유 이용이 가능한 문장 파일을 찾지 못해 이름만 적었다.

브라질 대표로 온 바스쿠 다 가마가 전국 리그 우승팀이 아니라 카리오카, 곧 히우지자네이루주 선수권 우승팀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당시 브라질에는 전국 리그가 없었고 주 선수권이 최상위 대회였다. 그런데 브라질 축구협회가 출전권을 하필 히우지자네이루주 챔피언에게 준 데에는 이유가 있다. 1946년 브라질 주 대표 선수권에서 우승한 주가 히우지자네이루였기 때문이다. 주끼리 겨뤄 이긴 주의 챔피언을 대륙 대회에 내보낸 셈이다.[2]

볼리비아의 리토랄도 전국 리그가 없어 라파스 챔피언 자격으로 왔다. 에콰도르의 에멜렉은 사정이 한 단계 더 앞선다. 당시 에콰도르에는 전국 선수권 자체가 없어서, 기록에 따라 1946년 과야킬 지방 챔피언 자격으로 적기도 하고 초청으로 적기도 한다.[2]

일곱 팀이 여섯 경기씩, 승점 1점 차

1948 남미 챔피언 오브 챔피언십 최종 순위표
일곱 구단이 여섯 경기씩 치른 최종 순위.

토너먼트에 익숙한 한국의 해외축구 팬에게는 생소한 순위표다. 대륙 챔피언스컵이 토너먼트가 아니라 리그로 진행된 사례는 이후로 오랫동안 없었고, 2024-25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가 리그 페이즈를 도입하고 나서야 다시 나왔다. 그 개편을 두고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튼 코파 리베르타도레스(CONMEBOL Libertadores; 1960년 창설된 남미 클럽 대항전)의 전신인 1948년 대회는 일곱 팀이 한 번씩 맞붙는 리그로 치러졌다.

순위 구단 전적 승점 득실
1 CR 바스쿠 다 가마 4승 2무 0패 10 12득점 3실점 (+9)
2 클루브 아틀레티코 리버 플레이트 4승 1무 1패 9 12득점 4실점 (+8)
3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4승 0무 2패 8 16득점 11실점 (+5)
4 데포르티보 무니시팔 3승 0무 3패 6 12득점 11실점 (+1)
5 콜로콜로 2승 2무 2패 6 11득점 11실점 (0)
6 클루브 데포르티보 리토랄 1승 0무 5패 2 9득점 18실점 (-9)
7 CS 에멜렉 0승 1무 5패 1 4득점 18실점 (-14)
1948년 2월 28일 산티아고에서 구단 페넌트를 들고 단체 사진을 찍은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선수단
1948년 2월 28일 산티아고의 나시오날 선수단. 3위로 대회를 마쳤고, 리버 플레이트를 3-0으로 꺾은 팀이다. 《에스타디오》(Estadio; 칠레 스포츠 주간지) 제250호. 사진가 미상. Wikimedia Commons 소장본.

바스쿠 다 가마가 여섯 경기 4승 2무 무패로 승점 10점을 쌓아 초대 우승 구단이 됐다. 디스테파노를 앞세운 라 마키나(La Máquina; 1940년대 리버 플레이트 공격진을 부르던 별칭, 기계) 세대의 리버 플레이트는 4승 1무 1패 승점 9점으로 초대 준우승에 머물렀다.

승점 1점 차였고, 두 팀의 맞대결은 3월 14일에 열려 0-0으로 끝났다. 이 글의 표지가 그 경기다. 리버가 이겼다면 순위가 뒤집혔을 경기였으니 사실상의 결승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순위를 실제로 가른 경기는 따로 있었다. 3월 3일, 나시오날이 리버 플레이트를 3-0으로 눌렀다. 리버가 대회에서 당한 유일한 패배이고, 이 한 경기가 승점 3점을 통째로 들어냈다. 같은 날 바스쿠는 쉬어 갔다. 리버는 마지막 경기에서 콜로콜로를 1-0으로 이기며 끝까지 따라붙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2]

바스쿠의 득점은 여러 이름으로 흩어졌다. 리토랄전에서 렐레가 두 골, 나시오날전에서는 아데미르(Ademir Marques de Menezes; 브라질의 공격수, 1950년 월드컵 득점왕, 1922-1996)와 마네카와 다닐루와 프리아사가 한 골씩, 무니시팔전에서는 프리아사가 두 골을 넣었다. 뒷날 1949년 코파 아메리카 최우수 선수가 되는 아데미르가 이 명단에 들어 있다.[2]

주최국 콜로콜로는 승점 6점으로 무니시팔과 같았으나 득실에서 밀려 5위에 놓였다. 개최지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셈인데, 바스쿠를 상대로는 1-1로 비긴 유일한 팀이었다.

1948년 남미 챔피언 클럽 대회 우승팀 바스쿠 다 가마 선수단
초대 우승 구단 바스쿠 다 가마. 《에스타디오》 제255호, 1948년 4월 3일. 사진가 미상. Wikimedia Commons 소장본. 발행일은 촬영일과 구분한다.

유럽이 따라 한 쪽은 남미였다

세계의 앞에 서고자 했던 유럽이, 남미가 해낸 것과 같은 종류의 대회를 만들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유럽에서 대륙 대회를 밀어붙인 사람들은 프랑스의 축구 기자들이었다. 《레키프》(L’Équipe; 1946년 창간한 프랑스 스포츠 일간지)의 가브리엘 아노(Gabriel Hanot; 프랑스의 선수 출신 기자, 유러피언컵 창설을 제안했다, 1889-1968)와 자크 페랑(Jacques Ferran; 프랑스의 축구 기자, 1920-2019)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들이 1955년 유러피언컵을 기획했고, 프랑스와 벨기에와 이탈리아의 행정가들이 유럽 축구 연맹의 틀을 짰으며, 발롱도르 같은 시상이 권위를 얻어 간 과정은 잘 알려져 있다.

덜 알려진 쪽은 그 구상에 직접 영감을 준 선례다. 위의 말을 남긴 사람이 페랑이고, 그가 가리킨 남미의 대회가 1948년 산티아고의 이 대회였다. 유럽이 먼저 만들고 남미가 뒤따랐다는 순서는 사실과 다르다. 순서는 반대였고, 유럽은 자신들이 뒤처졌다는 자각에서 움직였다.

1996년에야 다시 불린 우승

1996년 남미 축구 연맹이 펴낸 『30년간의 열정과 축제』(30 Años de Pasión y Fiesta)에서, 리베르타도레스의 시초가 1960년이 아니라 1948년이라는 서술이 확인됐다. 바스쿠 다 가마 임원진은 이를 근거로 연맹 집행위원회에 구단의 1948년 우승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했고, 집행위원회는 그해 4월 대회의 의미와 권위를 다시 확인하며 그 무게를 인정했다.

다만 인정의 성격은 지금도 깔끔하지 않다. 연맹은 1948년 대회를 리베르타도레스의 전신(antecedente)으로 두면서도 리베르타도레스 공식 우승 횟수에는 넣지 않는다. 그러면서 1997년 수페르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는 바스쿠 다 가마의 출전을 허용했다. 그 대회는 리베르타도레스 우승 구단만 나갈 수 있는 자리였다. 공식 우승으로 세지는 않으면서 우승 구단의 자격은 준 셈이다. FIFA 역시 공식 웹사이트에서 바스쿠를 1948년 남미 챔피언으로 적은 바 있다.

유럽은 1955년을 원년으로 못 박고 해마다 기렸다. 남미는 일곱 해 먼저 해 놓고도 그 대회를 자기 계보의 어디에 둘지 오래 정하지 못했다. 이 글을 서가의 앞자리에 두는 두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