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 ·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1958-60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4강과 결승: 안개 낀 세인트 앤드루스, 에레라가 떠난 캄 노우
안개 속 4-2로 잉글랜드 구단 첫 유럽 결승에 오른 버밍엄 시티, 물웅덩이 위의 0-0, 레알에 진 뒤 에레라가 물러나고 쿠벌러와 치보르가 돌아온 캄 노우의 4-1까지. 두 번째 페어스컵의 4강 4경기와 결승 2경기, 우승 CF 바르셀로나와 준우승 버밍엄 시티를 읽는다.


제2회인터시티스 페어스컵
Coupe Internationale des Villes de Foires
1959년 11월 11일 밤, 버밍엄의 세인트 앤드루스(St Andrew’s)에는 짙은 안개가 내려앉았다. 관중석에서는 공이 어디 있는지 보기도 어려웠고, 경기를 끝까지 치를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안개 속에서 버밍엄 시티는 위니옹 생질루아즈를 4-2로 이기고 잉글랜드 구단으로는 처음 유럽 대항전 결승에 올랐다. 반년 뒤 캄 노우에서 그 결승의 승자가 가려졌을 때, 상대 CF 바르셀로나의 벤치에는 일주일 전까지 팀을 이끌던 감독이 없었다.[1][2]
참가팀과 16강·8강을 다룬 본선 편에 이어, 이 편은 1959년 10월부터 1960년 5월까지 열린 4강 네 경기와 결승 두 경기를 따라간다. 결승에 오른 두 팀은 첫 대회 4강에서 바젤 재경기까지 치른 바르셀로나와 버밍엄이다. 2년 반 만의 재회였다.
4강 대진과 6경기
4강은 베오그라드 XI와 바르셀로나, 위니옹과 버밍엄의 대진이었다. 첫 대회와 달리 이번에는 재경기가 필요한 대진이 없었다. 결승도 양 팀 안방을 오가는 두 경기 합계로 가렸다.[1]
4강·결승 여섯 경기 기록날짜·홈과 원정·득점자 확인하기펼쳐 보기접기
| 구분 | 날짜 | 홈 | 결과 | 원정 | 득점 |
|---|---|---|---|---|---|
| 4강 1차전 | 1959.10.07 | 위니옹 생질루아즈 | 2-4 | 버밍엄 시티 FC | 위니옹 생질루아즈얀선스 9분, 판카우벨라르트 46분 버밍엄 시티 FC후퍼 25분, 고든 39분, 테일러 72분, 배럿 79분 |
| 4강 1차전 | 1959.10.28 | 베오그라드 XI | 1-1 | CF 바르셀로나 | 베오그라드 XI코스티치 69분 CF 바르셀로나에바리스투 44분 |
| 4강 2차전 | 1959.11.11 | 버밍엄 시티 FC | 4-2 | 위니옹 생질루아즈 | 버밍엄 시티 FC고든 15분, 63분, 라킨 32분, 후퍼 89분(페널티킥) 위니옹 생질루아즈얀선스 60분, 디릭스 78분(페널티킥) |
| 4강 2차전 | 1959.12.09 | CF 바르셀로나 | 3-1 | 베오그라드 XI | CF 바르셀로나쿠벌러 5분, 에바리스투 57분, 마르티네스 85분 베오그라드 XI미하일로비치 43분 |
| 결승 1차전 | 1960.03.29 | 버밍엄 시티 FC | 0-0 | CF 바르셀로나 | 득점 없음 |
| 결승 2차전 | 1960.05.04 | CF 바르셀로나 | 4-1 | 버밍엄 시티 FC | CF 바르셀로나마르티네스 3분, 치보르 6분, 48분, 콜 78분 버밍엄 시티 FC후퍼 82분 |
날짜·득점 시각·관중은 RSSSF 기록을 따른다. 버밍엄 구단 기록은 결승 2차전을 5월 3일, 관중을 7만 5,000명으로 적는다.
브뤼셀의 4-2와 안개 속 4-2
버밍엄은 리그에서 바닥을 기는 채로 4강에 나섰다. 1959-60 시즌 개막 10경기에서 한 번밖에 이기지 못해 1부 리그 맨 아래에 있었다. 팻 비즐리(Pat Beasley; 잉글랜드 감독) 감독은 노팅엄 포리스트에서 짐 배럿(Jim Barrett; 잉글랜드 공격수)을 데려왔고, 이적 첫 경기에서 배럿이 골을 넣었다. 10월 7일 브뤼셀 원정에는 첫 대회 인테르 원정에서도 골문을 지킨 서른일곱 살의 길 메릭(Gil Merrick; 잉글랜드 골키퍼, 1922-2010)이 섰다.[2]
위니옹은 주급 7파운드를 받는 시간제 선수들의 팀이었다. 버밍엄 구단 기록에 따르면 구단은 그해 티를르몽(Tirlemont)에서 300만 프랑을 들여 두 선수를 데려왔고, 그 가운데 국가대표 센터하프 장 클라스(Jean Claes; 벨기에 수비수)는 스물여섯 살의 수학 교수였다. 비즐리는 경기 전 선수들에게 대륙 주심의 판정에 흥분하지 말라고 거듭 일렀고, 경기가 끝난 뒤에는 21개의 파울 판정을 두고, 대륙 주심들을 잉글랜드로 불러 2군 리그 경기를 맡겨 봐야 한다고 불평했다.[2]
경기는 9분 장피에르 얀선스(Jean-Pierre Janssens; 벨기에 윙어)의 프리킥 골로 시작했다. 버밍엄은 25분 해리 후퍼(Harry Hooper; 잉글랜드 윙어, 1933-2020)가 수비수 둘을 제치고 동점골을 넣었고, 39분 후퍼의 패스를 받은 조니 고든(Johnny Gordon; 잉글랜드 인사이드 포워드)이 뒤집었다. 후반 시작 직후 로제 판카우벨라르트(Roger Van Cauwelaert; 벨기에 공격수)가 2-2를 만들었지만, 72분 브라이언 테일러(Brian Taylor; 잉글랜드 윙어)의 개인 돌파와 79분 배럿의 골로 4-2가 됐다. 메릭에게는 이 경기가 버밍엄에서 치른 551번째이자 마지막 공식 경기였다. 그는 이 경기 뒤 독감으로 빠졌고, 시즌이 끝날 무렵에는 1군 감독이 되어 있었다.[1][2]
11월 11일 2차전 날 세인트 앤드루스는 안개에 덮였다. 관중은 1만 4,000명에 그쳤고, 밝은 색 상의를 입은 위니옹 선수들만 그나마 눈에 띄었다고 한다. 15분 고든이 먼저 골을 넣었고 32분 버니 라킨(Bernard “Bunny” Larkin; 잉글랜드 공격수)이 25야드 중거리로 합계를 6-2로 벌렸다. 그 사이 18분에는 테일러가 위니옹의 벨기에 국가대표 앙리 디릭스(Henri Diricx; 벨기에 수비수)와 부딪혀 왼다리가 부러졌다. 개방 골절이었고 테일러는 복귀까지 1년이 걸렸다. 후반에는 안개가 더 짙어져 고든의 두 번째 골과 얀선스의 만회골이 어떻게 들어갔는지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 78분 디릭스가 페널티킥을 넣었고, 마지막 킥은 89분 후퍼의 페널티킥이었다. 합계 8-4였다.[1][2]
4강1958-60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위니옹 생질루아즈 vs 버밍엄 시티 FC


- 4강 1차전
- 2 : 4
- 4강 2차전
- 2 : 4
- 결승 진출
- 버밍엄 시티 FC
위니옹 생질루아즈얀선스 9분, 판카우벨라르트 46분
4강 1차전
버밍엄 시티 FC후퍼 25분, 고든 39분, 테일러 72분, 배럿 79분
위니옹 생질루아즈얀선스 60분, 디릭스 78분 페널티킥
4강 2차전
버밍엄 시티 FC고든 15분 63분, 라킨 32분, 후퍼 89분 페널티킥
브뤼셀과 안개 낀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2번 모두 4-2. 버밍엄이 결승에 올랐다.
베오그라드의 1-1과 캄 노우의 3-1
바르셀로나의 4강은 1959년 가을의 빽빽한 일정 속에 끼어 있었다. 10월 28일 베오그라드 원정 1-1 뒤, 11월 4일과 25일에는 유러피언컵 16강에서 AC 밀란을 2-0, 5-1로 연달아 꺾었다. 베오그라드에서는 44분 에바리스투(Evaristo de Macedo Filho; 브라질 공격수, 1933-)가 먼저 골을 넣었고, 69분 보라 코스티치(Borivoje Kostić; 유고슬라비아 왼쪽 윙어, 1930-2011)가 동점골을 넣었다. 코스티치의 대회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골이었다.[1]
12월 9일 캄 노우의 2차전은 5분 쿠벌러 라슬로(Kubala László, 스페인에서는 Ladislao Kubala; 헝가리 출신 공격수, 1927-2002)의 골로 시작했다. 43분 브라니슬라브 미하일로비치(Branislav Mihajlović; 유고슬라비아 공격수)가 합계를 다시 2-2로 맞췄지만, 57분 에바리스투와 85분 에울로히오 마르티네스(Eulogio Martínez; 파라과이 출신 스페인 공격수, 1935-1984)가 골을 넣어 합계 4-2로 끝났다. 바르셀로나는 첫 대회에 이어 두 번째 페어스컵에서도 결승에 올랐고, 마지막까지 남은 도시 선발팀 베오그라드 XI의 대회는 여기서 끝났다.[1]
4강1958-60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베오그라드 XI vs CF 바르셀로나


- 4강 1차전
- 1 : 1
- 4강 2차전
- 1 : 3
- 결승 진출
- CF 바르셀로나
베오그라드 XI코스티치 69분
4강 1차전
CF 바르셀로나에바리스투 44분
베오그라드 XI미하일로비치 43분
4강 2차전
CF 바르셀로나쿠벌러 5분, 에바리스투 57분, 마르티네스 85분
베오그라드 1-1, 캄 노우 3-1. 바르셀로나가 2개 대회 연속 결승에 올랐다.
결승 진출 2개 팀팀별 누적 결승 진출 횟수 확인하기펼쳐 보기접기
| 구단 | 대표 지역 | 결승 진출 |
|---|---|---|
| 잉글랜드 | 통산 첫 결승 진출 | |
| 스페인 | 통산 2번째 결승 진출 |
물웅덩이 위의 0-0
결승 1차전은 넉 달 넘게 지난 1960년 3월 29일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열렸다. 두 팀의 사정은 정반대였다. 버밍엄은 리그 네 경기째 이기지 못해 1부 리그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있었고, 바르셀로나는 직전 리그 경기에서 레알 베티스를 3-0으로 꺾고 1위를 지키고 있었다. 버밍엄 구단 기록은 바르셀로나가 훈련장을 빌려 주겠다는 제안을 사양하고 버밍엄 시내로 쇼핑을 나갔다고 적는다. 2월과 3월 초 바르셀로나는 유러피언컵 8강에서 잉글랜드 챔피언 울버햄프턴 원더러스를 4-0, 5-2로 눌렀다. 몰리뉴의 5-2에서는 코치시 샨도르(Kocsis Sándor; 헝가리 공격수, 1929-1979)가 혼자 네 골을 넣었다.[1][2]

밤사이 내린 비로 경기장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4만 524명이 지켜본 이 경기에서 버밍엄은 바르셀로나 선수들에게 공을 잡을 틈을 주지 않았다. 바르셀로나는 부상한 루이스 수아레스(Luis Suárez Miramontes; 스페인 미드필더, 1935-2023) 없이 코치시와 라몬 비야베르데(Ramón Alberto Villaverde; 우루과이 출신 공격수, 1930-1986)를 앞세웠지만, 골키퍼 조니 스코필드(Johnny Schofield; 잉글랜드 골키퍼, 1931-2006)가 코치시의 헤더와 슈팅, 비야베르데의 슈팅을 막아 냈다. 버밍엄의 가장 큰 기회는 막판에 왔다. 단독으로 빠져나간 돈 웨스턴(Don Weston; 잉글랜드 공격수) 앞에서 공이 물웅덩이에 멈춰 섰고, 웨스턴은 공을 지나쳐 버렸다. 주심은 벨기에의 뤼시앵 판뉘펄(Lucien van Nuffel; 벨기에 심판)이었다.[1][2]
비즐리는 바르셀로나가 유러피언컵 4강 레알 마드리드전을 앞두고 힘을 아꼈다는 말을 반박했다.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 아르헨티나 태생 감독, 1910-1997)는 버밍엄의 투지를 칭찬하면서 이 무승부를 승리로 여긴다고 말했다. 이것이 에레라가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치른 마지막 페어스컵 경기가 된다.[2]
에레라가 떠난 캄 노우의 4-1
결승 1차전과 2차전 사이에 바르셀로나는 유러피언컵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다. 4월 21일 베르나베우에서 1-3, 4월 27일 캄 노우에서 다시 1-3이었다. 바르셀로나 구단은 숙적에게 진 직후 에레라를 경질했다고 적는다. 남은 시즌은 에레라의 조수였던 엔리크 라바사(Enric Rabassa; 스페인 감독)가 맡았다. 버밍엄 구단 기록은 에레라가 팬들의 공격과 모욕 때문에 나라를 떠나야 했다고까지 적는다.[1][2][4][5]
감독이 바뀌자 명단도 바뀌었다. 버밍엄 구단 기록에 따르면 에레라와 사이가 틀어져 밀려나 있던 쿠벌러가 곧바로 돌아왔고, 치보르 졸탄(Czibor Zoltán; 헝가리 왼쪽 윙어, 1929-1997)도 다시 선발로 나섰다. 대신 1차전에 뛴 코치시와 부상 중인 수아레스가 빠졌다. 버밍엄은 1차전과 같은 선발에서 한 자리만 바꿨다. 서른여덟 살의 피터 머피(Peter Murphy; 잉글랜드 공격수, 1922-1975)가 브라이언 오릿(Bryan Orritt; 웨일스 인사이드 포워드, 1937-2014)의 자리에 들어왔다. 첫 대회 4강에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세 골을 넣은 그 머피이고, 이 경기가 그의 버밍엄 마지막 경기였다.[1][2]
5월 4일 캄 노우에는 7만 명이 들어찼다. 승부는 6분 만에 기울었다. 3분 루이스 콜(Lluís Coll; 스페인 공격수)의 코너킥을 마르티네스가 머리로 넣었고, 6분 치보르가 페널티 지역 바깥에서 두 번째 골을 넣었다. 후반 48분 치보르의 두 번째 골이 나왔고, 78분에는 콜이 문전에 몰린 선수들 사이로 오른발 슈팅을 꽂았다. 버밍엄은 후퍼의 슈팅이 골대를 맞고 나오는 불운을 겪었고, 82분에야 후퍼가 한 골을 만회했다. 주심은 1차전과 같은 판뉘펄이었다.[1][2]
버밍엄 구단 기록에는 두 구단의 승리 수당이 함께 남아 있다. 버밍엄 선수들이 놓친 수당은 한 사람에 4파운드였고, 바르셀로나 구단은 우승한 선수들에게 한 사람에 218파운드를 줬다.[2]
결승1958-60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버밍엄 시티 FC vs CF 바르셀로나


- 결승 1차전
- 0 : 0
- 결승 2차전
- 1 : 4
- 우승
- CF 바르셀로나
버밍엄 시티 FC득점 없음
결승 1차전
CF 바르셀로나득점 없음
버밍엄 시티 FC후퍼 82분
결승 2차전
CF 바르셀로나마르티네스 3분, 치보르 6분 48분, 콜 78분
세인트 앤드루스 0-0, 캄 노우 4-1. 바르셀로나가 2개 대회 연속 페어스컵을 들었다.
우승 CF 바르셀로나, 준우승 버밍엄 시티
우승·준우승페어스컵 누적 우승·준우승 횟수 확인하기펼쳐 보기접기
| 구단 | 대표 지역 | 대회 우승 |
|---|---|---|
| 스페인 | 통산 2번째 페어스컵 우승 |
| 구단 | 대표 지역 | 대회 준우승 |
|---|---|---|
| 잉글랜드 | 통산 첫 페어스컵 준우승 |
바르셀로나는 1955-58 첫 대회에 이어 두 번째 페어스컵도 들었다. 결승 2차전 선발 11명 가운데 골키퍼 안토니 라마예츠(Antoni Ramallets; 스페인 골키퍼, 1924-2013), 페란 올리베야(Ferran Olivella; 스페인 수비수), 조안 세가라(Joan Segarra; 스페인 수비수, 1927-2008), 마르티 베르제스(Martí Vergés; 스페인 미드필더, 1934-2021), 엔리크 리벨레스(Enric Ribelles; 스페인 축구선수), 마르티네스 여섯 명은 첫 대회 결승에도 나선 선수들이다. 쿠벌러는 첫 대회 결승 두 경기에 모두 나서지 않았으니, 그에게는 이것이 첫 페어스컵 결승이었다. 버밍엄은 잉글랜드 구단으로는 처음 유럽 대항전 결승에 선 팀으로 남았다. 첫 대회 결승에 선 런던 XI는 여러 구단 선수를 모은 도시 선발팀이었다.[1][2][6]
| 순위 | 선수 | 클럽 | 출신 | 득점 |
|---|---|---|---|---|
| 1위 | 보라 코스티치Borivoje Kostić | 6골 | ||
| 공동 2위 | 에디 피르마니Eddie Firmani | 5골 | ||
| 공동 2위 | 해리 후퍼Harry Hooper | 5골 | ||
| 공동 2위 | 버니 라킨Bernard “Bunny” Larkin | 5골 | ||
| 공동 5위 | 치보르 졸탄Czibor Zoltán | 4골 | ||
| 공동 5위 | 에바리스투Evaristo de Macedo Filho | 4골 | ||
| 공동 5위 | 에울로히오 마르티네스Eulogio Martínez | 4골 | ||
| 공동 8위 | 디노 다코스타Dino da Costa | 3골 | ||
| 공동 8위 | 조니 고든Johnny Gordon | 3골 | ||
| 공동 8위 | 지미 그리브스Jimmy Greaves | 3골 | ||
| 공동 8위 | 브라니슬라브 미하일로비치Branislav Mihajlović | 3골 | ||
| 공동 8위 | 장피에르 얀선스Jean-Pierre Janssens | 3골 | ||
| 공동 8위 | 로제 판카우벨라르트Roger Van Cauwelaert | 3골 | ||
| 공동 8위 | 폴 판덴베르흐Paul Van den Berg | 3골 | ||
| 공동 8위 | 위베르 판도르말Hubert Van Dormael | 3골 |
득점 순위는 RSSSF 경기별 기록에서 한 골씩 센 값이다. 출전 경기 수는 경기별 명단이 남지 않아 싣지 않는다. 자책골 두 골(우이페슈트의 죄르바리, 코펜하겐 XI의 리스)은 넣지 않았다.
득점 1위는 6골의 코스티치다. 그는 16강 로잔전 두 경기에서 네 골, 8강 첼시와의 2차전에서 한 골, 4강 1차전 바르셀로나전에서 한 골을 넣었다. 5골 공동 2위는 인테르의 에디 피르마니(Eddie Firmani; 남아프리카 출신 공격수, 1933-)와 버밍엄의 후퍼, 라킨이다. 피르마니는 1955년 6월 바젤에서 열린 첫 페어스컵 개막전에 런던 XI 소속으로 골을 넣은 선수이기도 하다. 4강에 오른 위니옹은 3골을 넣은 선수만 네 명이었다. 두 시즌 동안 30경기에서 120골이 나왔다.[1][6]
버밍엄은 이듬해 1960-61 대회에서 다시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1958-60 8강에서 위니옹에 떨어진 AS 로마였다. 로마는 인테르에서 옮겨 온 안토니오 안젤릴로(Antonio Valentín Angelillo; 아르헨티나 출신 공격수, 1937-2018)와 이번 대회 16강에서 두 골을 넣은 디노 다코스타(Dino da Costa; 브라질 출신 공격수)를 앞세워, 1961년 9월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2-2로 비기고 10월 로마에서 2-0으로 이겼다. 버밍엄의 벤치에는 위니옹 원정을 끝으로 골키퍼 장갑을 벗은 메릭이 감독으로 앉아 있었다.[3]
필자가 두 번째 페어스컵의 결승에서 오래 붙드는 것은 바르셀로나의 벤치다. 첫 대회 결승에서 바르셀로나는 1차전을 도메네크 발마냐(Domènec Balmanya; 스페인 감독, 1914-2002) 감독으로, 2차전을 그사이 부임한 에레라로 치렀다. 두 번째 대회에서는 1차전을 에레라로, 2차전을 그사이 그를 내보낸 뒤 라바사로 치렀다. 1958년 4월 22일 결승 두 경기 사이에 들어온 감독이 1960년 4월 결승 두 경기 사이에 나간 것이다. 에레라는 그해 여름 인테르로 갔고, 수아레스가 1년 뒤 그를 따라갔다. 바르셀로나가 들어 올린 두 개의 페어스컵은 모두 감독이 바뀌는 와중에 완성됐다. 필자는 이것을 바르셀로나 선수단의 두께가 감독 한 사람보다 컸다는 증거로 읽는다.[4][6]
참고 자료
- RSSSF 「European Champions' Cup 1959-60 and Fairs' Cup 1958-60 - Details」: 4강·결승 날짜와 득점, 결승 선발 명단·감독·주심·관중, 득점 순위, 같은 시즌 유러피언컵 경기
- 버밍엄 시티 FC 「Blues in Europe, Part Two 1958-1960」: 위니옹과의 4강, 메릭의 마지막 경기, 결승 두 경기와 양 팀 명단 변화, 승리 수당
- RSSSF 「European Champions' Cup 1960-61 and Fairs' Cup 1960-61 - Details」: 1961년 결승 버밍엄 시티와 AS 로마의 명단과 결과
- FC 바르셀로나 「Helenio Herrera (1958-60, 1980 & 1980-81)」: 1958년 4월 22일 부임과 레알 마드리드에 진 뒤의 경질
- FC 바르셀로나 「Enric Rabassa (1960)」: 에레라의 조수로 시즌 막판 팀을 맡아 페어스컵 우승
- RSSSF 「Fairs' Cup 1955-58」: 첫 대회 결승 명단과 감독, 바젤 개막전 득점자
- 머리 그림: 1960년 5월 4일 결승 2차전 뒤의 CF 바르셀로나(서 있는 줄 라마예츠·올리베야·로드리·그라시아·세가라·베르제스, 앉은 줄 콜·리벨레스·마르티네스·쿠벌러·치보르), «EQUIPOS DE FÚTBOL: CF Barcelona 04/05/1960». 결승 1차전 사진: 데일리 메일 「Jimmy Harris recalls Birmingham City's 1961 Fairs Cup final」(2011-08-17). 트로피 사진: «Col·leccions del Museu del FC Barcelona 14», Nicholas Gemini, 위키미디어 공용, CC BY-SA 4.0.
문장 자료: Logopedia(CF 바르셀로나 1949-1960, 버밍엄 시티 1936-1970, 위니옹 생질루아즈 1897-1970, 인테르 1945-1960, AS 로마 1950-1959) · Wikimedia Commons(베오그라드 도시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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