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 ·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1955-58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4강과 결승: 바젤 재경기, 스탬퍼드 브리지와 캄 노우
열일곱 살 그리브스가 뒤집은 로잔전, 40분 만에 여섯 골이 터진 세인트 앤드루스와 바젤 재경기, 에레라가 벤치에 앉은 캄 노우의 6-0까지. 첫 페어스컵의 4강 일곱 경기와 우승 CF 바르셀로나, 준우승 런던 XI를 읽는다.


제1회인터시티스 페어스컵
Coupe Internationale des Villes de Foires
1958년 5월 1일, 7만 관중이 들어찬 바르셀로나의 새 경기장 캄 노우(Camp Nou)에서 CF 바르셀로나가 런던 XI를 6-0으로 꺾었다. 경기 시작 8분 만에 두 골이 들어갔고, 네 번째 골을 내준 런던 XI는 골키퍼가 다치는 바람에 공격수에게 골문을 맡긴 채 남은 시간을 버텼다. 1955년 6월 4일 바젤에서 시작한 첫 인터시티스 페어스컵(Inter-Cities Fairs Cup)은 이 경기로 1,062일 만에 우승팀을 가렸다.[1]
참가 도시와 조별리그를 다룬 본선 편이 2년에 걸친 조별리그의 사연을 따라갔다면, 이 편은 네 팀이 남은 1957년 9월부터 결승 2차전까지 일곱 달 반 동안 열린 일곱 경기를 따라간다. 필자가 4강과 결승을 한 편에 묶은 것은 이 짧은 기간에 대회의 성격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경기마다 명단을 새로 짠 도시 선발팀, 원정 다득점 규정이 없어 제3국까지 가서 치른 재경기, 결승 1차전과 2차전 사이에 바뀐 감독, 이제 막 1군에 올라온 열일곱 살 공격수가 모두 이 일곱 경기 안에 있다.
4강 대진과 일곱 경기
4강은 조 1위 네 팀이 두 경기씩 맞붙는 방식이었다. 로잔 스포르와 런던 XI, 버밍엄 시티와 CF 바르셀로나가 대진을 이뤘고, 합계가 같으면 원정 골과 상관없이 중립지에서 재경기를 치렀다. 결승도 한 경기가 아니라 양 팀 안방을 오가는 두 경기 합계로 가렸다.[1][3]
4강·재경기·결승 일곱 경기 기록날짜·홈과 원정·득점자 확인하기펼쳐 보기접기
| 구분 | 날짜 | 홈 | 결과 | 원정 | 득점 |
|---|---|---|---|---|---|
| 4강 1차전 | 1957.09.16 | 로잔 스포르 | 2-1 | 런던 XI | 로잔 스포르본란덴 6분, 74분 런던 XI해버티 70분 |
| 4강 1차전 | 1957.10.23 | 버밍엄 시티 FC | 4-3 | CF 바르셀로나 | 버밍엄 시티 FC브라운 2분, 머피 33분, 60분, 오릿 35분 CF 바르셀로나테하다 12분, 에바리스투 27분, 마르티네스 40분 |
| 4강 2차전 | 1957.10.23 | 런던 XI | 2-0 | 로잔 스포르 | 그리브스 10분, 홀턴 76분 |
| 4강 2차전 | 1957.11.13 | CF 바르셀로나 | 1-0 | 버밍엄 시티 FC | 쿠발라 82분 |
| 4강 재경기 | 1957.11.26 | CF 바르셀로나 | 2-1 | 버밍엄 시티 FC | CF 바르셀로나에바리스투 33분, 쿠발라 83분 버밍엄 시티 FC머피 48분 |
| 결승 1차전 | 1958.03.05 | 런던 XI | 2-2 | CF 바르셀로나 | 런던 XI그리브스 5분, 랭리 88분(페널티킥) CF 바르셀로나테하다 4분, 마르티네스 43분 |
| 결승 2차전 | 1958.05.01 | CF 바르셀로나 | 6-0 | 런던 XI | 수아레스 6분, 8분, 마르티네스 42분, 에바리스투 52분, 75분, 베르제스 63분 |
날짜·득점 시각은 RSSSF 기록을 따른다. 재경기는 스위스 바젤의 장크트 야코프 경기장에서 열렸다. 영어 위키백과의 런던 XI 기록은 결승 1차전 득점을 마르티네스 7분, 그리브스 10분, 테하다 35분으로 적는다.
퐁테즈의 두 골과 열일곱 살 그리브스
4강 첫 경기는 1957년 9월 16일 로잔의 스타드 올랭피크 드 라 퐁테즈(Stade Olympique de la Pontaise)에서 열렸다. 로잔 스포르는 조별리그에서 라이프치히 XI와 두 경기 합계 10-9의 난타전을 벌인 팀이다. 이날 로잔의 영웅은 마르셀 본란덴(Marcel Vonlanden; 스위스 공격수)이었다. 6분에 선제골을 넣었고, 70분 아스널 소속 조 해버티(Joe Haverty; 아일랜드 윙어, 1936-2009)에게 동점골을 내준 지 4분 만에 다시 골망을 흔들어 2-1 승리를 만들었다.[1][2]
이 경기에 나선 런던 XI의 명단을 보면 도시 선발팀이 어떤 방식으로 굴러갔는지 알 수 있다. 토트넘 골키퍼 테드 디치번(Ted Ditchburn; 잉글랜드 골키퍼, 1921-2005)과 아스널·첼시 선수들 사이에 당시 3부 리그 사우스에 있던 크리스털 팰리스 선수가 두 명, 2부 리그 레이턴 오리엔트 선수가 두 명 끼어 있었다. 오리엔트의 인사이드 포워드 필 우스넘(Phil Woosnam; 웨일스 인사이드 포워드, 1932-2013)은 훗날 미국으로 건너가 1969년부터 1982년까지 북미사커리그(NASL) 커미셔너를 지낸 인물이다.[2][12]
5주 뒤인 10월 23일 하이버리(Highbury)의 2차전에 나선 런던 XI는 사실상 다른 팀이었다. 1차전 선발 가운데 2차전에도 뛴 선수는 아스널 수비수 스탠 찰턴(Stan Charlton; 잉글랜드 수비수, 1929-2012) 한 명뿐이었다. 골문은 아스널의 잭 켈시(Jack Kelsey; 웨일스 골키퍼, 1929-1992)가 지켰고, 공격에는 풀럼의 조니 헤인스(Johnny Haynes; 잉글랜드 인사이드 포워드, 1934-2005)와 아스널의 클리프 홀턴(Cliff Holton; 잉글랜드 공격수, 1929-1996)이 섰다. 오른쪽 윙어는 풀럼의 로이 드와이트(Roy Dwight; 잉글랜드 윙어)였다. 1959년 FA컵 결승에서 노팅엄 포리스트의 선제골을 넣게 되는 그는 가수 엘턴 존(Sir Elton John, 본명 Reginald Kenneth Dwight; 잉글랜드 가수, 1947-)의 사촌 형이다.[2][9]
합계를 원점으로 돌린 골의 주인공은 첼시의 지미 그리브스(Jimmy Greaves; 잉글랜드 공격수, 1940-2021)였다. 1940년 2월생인 그리브스는 이날 열일곱 살이었고, 두 달 전인 8월 24일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토트넘을 상대로 1부 리그 데뷔전을 치르며 골을 넣은 신예였다. 10분 그리브스의 골로 합계 2-2가 됐고, 76분 홀턴이 결승골을 넣어 런던 XI가 합계 3-2로 결승에 올랐다. 조별리그 바젤 개막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홀턴은 이 골로 대회 네 번째 골을 채웠다.[1][8]
1955-58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 4강
로잔 스포르 vs 런던 XI


- 4강 1차전
- 2 : 1
- 4강 2차전
- 0 : 2
- 결승 진출
- 런던 XI
로잔 스포르본란덴 6분 74분
4강 1차전
런던 XI해버티 70분
로잔 스포르득점 없음
4강 2차전
런던 XI그리브스 10분, 홀턴 76분
퐁테즈에서 1-2로 진 런던 XI가 열일곱 살 그리브스의 선제골로 합계를 뒤집었다.
세인트 앤드루스의 일곱 골과 바젤 재경기
그리브스가 하이버리에서 골을 넣은 바로 그날 밤, 버밍엄의 세인트 앤드루스(St Andrew’s)에서는 버밍엄 시티와 바르셀로나의 4강 1차전이 열렸다. 버밍엄 시티는 1956년 여름 이 경기장에 조명탑을 세우고 그해 10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친선 경기로 첫 조명 경기를 치렀다. 해리 모리스(Harry Morris; 버밍엄 시티 회장) 회장은 선수 입장 때 조명을 절반만 켜 두었다가 신호와 함께 전부 켜는 연출로 관중의 탄성을 끌어냈다고 한다. 유럽 대항전을 평일 밤에 치르려면 조명이 필수였고, 이웃 애스턴 빌라가 연합팀 제안을 거절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조명 설치 부담이었다는 해석이 있다.[7]
그 조명 아래서 40분 동안 여섯 골이 터졌다. 2분 에디 브라운(Eddy Brown; 잉글랜드 공격수, 1926-2012)의 선제골로 버밍엄이 앞섰고, 12분 후스토 테하다(Justo Tejada; 스페인 공격수, 1933-2021), 27분 브라질 공격수 에바리스투(Evaristo de Macedo Filho; 브라질 공격수, 1933-)의 연속골로 바르셀로나가 뒤집었다. 33분 피터 머피(Peter Murphy; 잉글랜드 공격수, 1922-1975), 35분 브라이언 오릿(Bryan Orritt; 웨일스 인사이드 포워드, 1937-2014)의 골로 버밍엄이 3-2를 만들자, 40분 에울로히오 마르티네스(Eulogio Martínez; 파라과이 출신 스페인 공격수, 1935-1984)가 다시 3-3을 만들었다. 승부를 가른 골은 60분 머피의 두 번째 골이었다. 1956년 FA컵 결승에서 맨체스터 시티 골키퍼 베르트 트라우트만(Bert Trautmann; 독일 출신 골키퍼, 1923-2013)과 부딪힌 장면으로 기억되는 그 머피다.[1][13]
바르셀로나의 사령탑은 도메네크 발마냐(Domènec Balmanya; 스페인 감독, 1914-2002)였다. 선수 시절 대부분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그는 1957년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을 이끈 감독이다. 에바리스투는 그해 여름 영입한 새 얼굴이었다. 1957년 남미 선수권에서 브라질이 콜롬비아를 9-0으로 꺾은 경기에 다섯 골을 넣어 바르셀로나 기술 담당 조셉 사미티에르(Josep Samitier; 스페인 축구인, 1902-1972)의 눈에 띄었고, 9월 캄 노우의 첫 공식 경기에서 골을 넣었다.[10][14]
11월 13일 2차전은 두 달 전 문을 연 캄 노우에서 열렸다. 버밍엄은 아서 터너(Arthur Turner; 잉글랜드 감독, 1909-1994) 감독 아래 82분까지 0-0으로 버텼지만, 쿠발라 라슬로(Kubala László, 스페인에서는 Ladislao Kubala; 헝가리 출신 공격수, 1927-2002)에게 한 골을 내줬다. 합계 4-4였다. 원정 다득점 규정이 없던 시절이라 두 팀은 제3국 스위스로 향했다.[1][6]
11월 26일 재경기가 열린 곳은 바젤의 장크트 야코프 경기장(St. Jakob-Stadion)이다. 2년 반 전 런던 XI와 바젤 XI가 대회 첫 경기를 치른 바로 그 경기장이다. 33분 에바리스투가 선제골을 넣었고, 48분 머피가 동점골로 버밍엄의 희망을 살렸다. 머피는 4강 세 경기에서 세 골을 넣었다. 83분 쿠발라가 결승골을 넣으면서 바르셀로나가 2-1로 이겼다. 대회가 시작한 경기장에서 잉글랜드 최초의 유럽 대항전 구단의 첫 도전이 끝났다.[1][6]
1955-58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 4강
버밍엄 시티 FC vs CF 바르셀로나


- 4강 1차전
- 4 : 3
- 4강 2차전
- 0 : 1
- 재경기
- 1 : 2
- 결승 진출
- CF 바르셀로나
버밍엄 시티 FC브라운 2분, 머피 33분 60분, 오릿 35분
4강 1차전
CF 바르셀로나테하다 12분, 에바리스투 27분, 마르티네스 40분
버밍엄 시티 FC득점 없음
4강 2차전
CF 바르셀로나쿠발라 82분
버밍엄 시티 FC머피 48분
재경기
CF 바르셀로나에바리스투 33분, 쿠발라 83분
합계 4-4. 바젤 장크트 야코프의 재경기에서 쿠발라가 83분 결승골을 넣었다.
버밍엄과 바르셀로나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다음 대회인 1958-60 페어스컵 결승에서 두 팀은 다시 만났고, 세인트 앤드루스의 1차전은 궂은 날씨 속에 0-0으로 끝났다. 캄 노우의 2차전에서 바르셀로나가 4-1로 이기며 두 대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버밍엄은 유럽 대항전 결승에 오른 첫 잉글랜드 구단으로 기록됐다.[15]
스탬퍼드 브리지의 2-2
결승 1차전은 넉 달 가까이 지난 1958년 3월 5일 첼시의 안방 스탬퍼드 브리지(Stamford Bridge)에서 열렸다. 관중은 4만 5,466명, 주심은 알베르트 두슈(Albert Dusch; 서독 심판, 1912-2002)였다. 2차 세계대전 뒤 국제 경기에 나선 첫 독일 심판으로 알려진 두슈는 1958년과 1962년 월드컵 무대에도 섰다.[1][16]
런던 XI를 이끈 사람은 조별리그 때와 같은 첼시 회장 조 미어스(John “Joe” Mears; 잉글랜드 축구 행정가·첼시 회장, 1905-1966)였다. 선발 11명은 아스널, 첼시, 풀럼, 토트넘, 브렌트퍼드의 다섯 구단에서 왔고, 그 가운데 네 명이 토트넘 선수였다. 주장은 북아일랜드의 하프백 대니 블랜치플라워(Danny Blanchflower; 북아일랜드 하프백, 1926-1993)가 맡았고, 같은 토트넘의 수비수 모리스 노먼(Maurice Norman; 잉글랜드 수비수, 1934-2022)과 공격수 보비 스미스(Bobby Smith; 잉글랜드 공격수, 1933-2010)가 함께 섰다. 세 사람은 3년 뒤인 1960-61 시즌 토트넘의 리그·FA컵 더블을 함께 만든다. 첼시의 피터 실렛(Peter Sillett; 잉글랜드 수비수, 1933-1998)과 헤인스는 1955년 바젤 개막전에 이어 결승에도 선 두 선수였다.[1][2][11]
바르셀로나의 명단에는 4강에서 두 골을 넣은 쿠발라의 이름이 없었다. 주장은 수비수 조안 세가라(Joan Segarra; 스페인 수비수, 1927-2008)였고, 윙어 에스타니슬라우 바소라(Estanislau Basora; 스페인 윙어, 1926-2012)와 우루과이 공격수 라몬 비야베르데(Ramón Alberto Villaverde; 우루과이 공격수, 1930-1986), 테하다, 에바리스투, 마르티네스가 공격을 이뤘다.[1]
경기는 시작부터 요동쳤다. RSSSF 기록으로 4분 테하다가 선제골을 넣었고, 1분 뒤 그리브스가 곧바로 따라붙었다. 43분 마르티네스의 골로 바르셀로나가 다시 앞선 채 경기는 막바지까지 흘렀다. 그대로 끝났다면 런던 XI는 한 골 뒤진 채 캄 노우로 가야 했다. 88분 페널티킥을 얻은 런던 XI에서 풀럼의 수비수 짐 랭리(Jim Langley; 잉글랜드 수비수, 1929-2007)가 키커로 나섰고, 이 골로 경기는 2-2로 끝났다. 4강부터 결승 1차전까지 런던 XI가 넣은 다섯 골 가운데 두 골이 그 사이 열여덟 살이 된 그리브스의 발에서 나왔다.[1][2]
에레라가 앉은 캄 노우의 6-0
두 달 가까이 지난 5월 1일 2차전의 바르셀로나 벤치에는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RSSSF가 2차전 감독으로 기록한 인물은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 아르헨티나 태생 축구감독, 1910-1997)다. 훗날 인테르에서 라 그란데 인테르를 만드는 그 에레라가 결승 1차전과 2차전 사이에 발마냐의 자리를 넘겨받은 것이다. 선발도 세 자리가 바뀌었다. 골문에는 주장 완장을 찬 안토니 라마예츠(Antoni Ramallets; 스페인 골키퍼, 1924-2013)가 섰고, 중원에는 스물세 번째 생일을 하루 앞둔 루이스 수아레스(Luis Suárez Miramontes; 스페인 미드필더, 1935-2023)가 들어왔다.[1][17]
런던 XI는 1차전 선발에서 일곱 명을 바꿨다. 켈시와 블랜치플라워, 스미스, 아스널의 빅 그로브스(Vic Groves; 잉글랜드 공격수, 1932-2015)만 남았고, 1차전에서 골을 넣은 그리브스와 랭리, 헤인스는 명단에 없었다. 웨스트햄의 아일랜드 수비수 노엘 캔트웰(Noel Cantwell; 아일랜드 수비수, 1932-2005), 아스널의 웨일스 하프백 데이브 보언(Dave Bowen; 웨일스 하프백, 1928-1995)과 인사이드 포워드 지미 블룸필드(Jimmy Bloomfield; 잉글랜드 인사이드 포워드, 1934-1983) 등이 새로 들어왔다. 도시 선발팀이 결승까지 경기마다 명단을 새로 짰다는 사실이 이 한 줄에 드러난다.[1][2]
승부는 8분 만에 사실상 끝났다. 수아레스가 6분과 8분에 연달아 골을 넣었고, 42분 마르티네스가 세 번째 골을 더했다. 후반 52분 에바리스투의 네 번째 골이 들어간 뒤 켈시가 다쳤다. 이 대회는 교체를 전반까지만 허용했기 때문에 런던 XI는 새 골키퍼를 넣을 수 없었고, 공격수 그로브스가 골키퍼 장갑을 꼈다. 그 뒤로도 63분 마르티 베르제스(Martí Vergés; 스페인 미드필더, 1934-2021)와 75분 에바리스투가 두 골을 더 넣었다. 합계 8-2였고, 주심은 1차전과 같은 두슈였다.[1][7]
스페인어 기록은 결승의 바르셀로나가 바르셀로나시의 문장을 달고 청백 유니폼을 입었다고 전한다. 도시의 대회에 도시의 이름으로 나섰다는 표시였다. 스페인 스포츠지 문도 데포르티보(El Mundo Deportivo)는 이튿날 경기 기사와 라커룸 인터뷰를 실으며 “페어스컵을 차지했다(se adjudica la Copa Ciudades en Feria)”고 제목을 달았다.[4]
1955-58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 결승
런던 XI vs CF 바르셀로나


- 결승 1차전
- 2 : 2
- 결승 2차전
- 0 : 6
- 우승
- CF 바르셀로나
런던 XI그리브스 5분, 랭리 88분 페널티킥
결승 1차전
CF 바르셀로나테하다 4분, 마르티네스 43분
런던 XI득점 없음
결승 2차전
CF 바르셀로나수아레스 6분 8분, 마르티네스 42분, 에바리스투 52분 75분, 베르제스 63분
스탬퍼드 브리지 2-2, 캄 노우 6-0. 바르셀로나가 합계 8-2로 첫 페어스컵을 들었다.
우승 CF 바르셀로나, 준우승 런던 XI
우승팀 CF 바르셀로나는 이 대회로 첫 유럽 대항전 트로피를 들었다. 대회 기록에는 바르셀로나 XI로 적혔고 프랑스 기록은 RCD 에스파뇰 선수 한 명이 선수단에 더해졌다고 전하지만, 감독과 선수단의 뼈대는 모두 CF 바르셀로나였다. 대회 득점 공동 1위(4골) 다섯 명 가운데 테하다와 에바리스투 두 명이 바르셀로나 선수였고, 나머지 세 자리는 런던 XI의 홀턴, 버밍엄 시티의 머피, 로잔 스포르의 노르베르 에슈만(Norbert Eschmann; 스위스 공격수, 1933-2009)이 나눠 가졌다. 4강에 오른 네 팀이 모두 득점 공동 1위를 한 명 이상 낸 셈이다.[1][5]
결승의 주역들은 곧 유럽 축구의 다음 장면으로 옮겨 갔다. 수아레스는 1960년 발롱도르를 받았고, 에레라는 1960년, 수아레스는 1961년 인테르로 떠났다. 에바리스투는 1960년 11월 23일 캄 노우에서 다이빙 헤더로 레알 마드리드를 유러피언컵에서 떨어뜨렸고, 바르셀로나는 그 시즌 첫 유러피언컵 결승에 올랐다. 바르셀로나는 에바리스투와 함께 페어스컵을 두 번 들었다.[14][17][18]
준우승팀 런던 XI는 이 결승을 끝으로 해산했다. 다음 대회부터 런던은 첼시가 대표로 나섰다. 벤치를 지킨 미어스는 잉글랜드축구협회 회장이 되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을 준비했고, 그해 3월 줄 리메 트로피 도난 사건이 터졌을 때 협회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는 월드컵 개막을 2주 앞둔 1966년 6월 30일 오슬로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2][11]
두 선수의 뒷이야기도 이 대회와 이어진다. 헤인스는 1961년 풋볼리그의 최고 임금제가 폐지된 뒤 주급 100파운드를 받은 첫 선수가 됐다. 그리브스는 같은 해 AC 밀란으로 이적했다가 반년 만인 12월 9만 9,999파운드에 토트넘으로 돌아왔고, 결승 1차전을 함께 뛴 블랜치플라워, 스미스, 노먼과 한 팀에서 1962년 FA컵과 1963년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을 들었다.[8][19]
필자가 첫 페어스컵의 마지막 일곱 경기에서 가장 오래 붙드는 장면은 바젤이다. 박람회 도시들의 친선 경기에서 출발한 대회가 1955년 여름 장크트 야코프에서 첫 경기를 치렀고, 2년 반 뒤 같은 경기장에서 버밍엄과 바르셀로나가 결승 진출권을 두고 세 번째 경기를 치렀다. 그 재경기를 이긴 바르셀로나가 새 경기장 캄 노우에서 도시 문장을 달고 우승했고, 그 벤치에 앉은 에레라와 경기장을 누빈 수아레스는 몇 해 뒤 유러피언컵의 주인공이 됐다. 필자는 도시의 이름으로 시작한 이 대회가 결국 구단의 역사로 흡수되어 가는 과정이 이 일곱 경기 안에 이미 담겨 있다고 본다.
참고 자료
- RSSSF 「Fairs' Cup 1955-58」: 4강·재경기·결승 날짜, 득점자, 결승 선발 명단·감독·주심·관중, 켈시 부상과 그로브스의 골키퍼 기용, 득점 순위
- 런던 XI: 4강 두 경기 명단과 하이버리 2차전, 결승 1차전 득점 시각의 다른 기록, 미어스 감독
- 1955-58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4강 대진과 재경기 규정, 결승 개요
- 스페인어 위키백과 「Copa de Ferias 1955-58」: 바르셀로나의 도시 문장과 청백 유니폼, 문도 데포르티보 기사
- 프랑스어 위키백과 「Coupe des villes de foires 1955-1958」: 바르셀로나 XI에 더해진 RCD 에스파뇰 선수
- 버밍엄 시티의 유럽 대항전 기록: 원정 다득점 규정 없이 바젤에서 치른 재경기
- 버밍엄 시티 구단 「Blues in Europe」: 세인트 앤드루스 조명탑과 첫 조명 경기, 전반까지만 허용한 교체 규정
- 지미 그리브스: 1957년 8월 24일 데뷔전 골, 밀란 이적과 토트넘 복귀
- 로이 드와이트: 하이버리 4강 2차전 출전, 1959년 FA컵 결승 선제골, 엘턴 존과의 관계
- 도메네크 발마냐: 바르셀로나 선수 경력과 1957년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
- 조 미어스: 런던 XI 감독, 잉글랜드축구협회 회장, 줄 리메 트로피 도난 사건, 1966년 오슬로에서의 죽음
- 필 우스넘: 레이턴 오리엔트 시절과 NASL 커미셔너
- 피터 머피: 버밍엄 시티 공격수와 1956년 FA컵 결승
- 에바리스투: 바르셀로나 영입 경위, 캄 노우 첫 공식 경기 골, 1960년 레알 마드리드전 헤더, 페어스컵 두 번 우승
- 1960년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결승: 바르셀로나와 버밍엄 시티의 재회
- 알베르트 두슈: 전후 첫 독일 국제 심판, 1958·1962년 월드컵 주심
- 루이스 수아레스: 바르셀로나 시절, 1960년 발롱도르, 인테르 이적
- 엘레니오 에레라: 바르셀로나와 인테르 감독 경력
- 조니 헤인스: 최고 임금제 폐지 뒤 첫 주급 100파운드 선수
- 머리 그림: «Barcelona vs london xi 1958», 1958년 5월 1일 결승 2차전,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트로피 사진과 각인 판독: «Col·leccions del Museu del FC Barcelona 14», Nicholas Gemini, 위키미디어 공용, CC BY-SA 4.0.
문장 자료: Logopedia(CF 바르셀로나 1949-1960, 버밍엄 시티 1936-1970, 로잔 스포르 1920-1980) · Wikimedia Commons(시티 오브 런던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