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 · 유러피언컵

1955-56 유러피언컵 베스트 11: 코파·디스테파노, 그리고 득점왕 밀루티노비치

공식 선정이 없던 첫 유러피언컵을 29경기의 출전 명단과 등번호로 다시 읽었다. 우승팀 레알 마드리드와 준우승팀 랭스, 밀란과 뵈뢰시 로보고, 파르티잔에서 고른 삥이FC 회고 베스트 11.
유러피언컵 트로피 배경의 1955-56 시즌 유러피언컵 Best XI 문구와 악수하는 레몽 코파·알프레도 디스테파노
1955-56 시즌 유러피언컵 베스트 11. 레몽 코파와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디자인: 삥이FC.
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제1회유러피언컵

European Champion Clubs’ Cup 1955-56

공식 베스트 11이 없던 첫 대회

대회 기간
1955년 9월 4일-1956년 6월 13일
참가
16개 구단
경기 수
29경기 · 127골
우승
레알 마드리드 CF 스페인 1945-1977년 국기
준우승
스타드 드 랭스 프랑스 국기
4강
AC 밀란 이탈리아 국기 · 히버니언 FC 스코틀랜드 국기
득점왕
밀로시 밀루티노비치 유고슬라비아 국기 · FK 파르티잔 · 8골
득점 공동 2위
펄로타시 페테르 헝가리 국기 · 뵈뢰시 로보고 · 6골
득점 공동 2위
레옹 글로바츠키 프랑스 국기 · 스타드 드 랭스 · 6골
도움 순위
공식 집계 없음

득점 순위는 RSSSF의 경기별 기록 기준이며, 공동 4위는 5골의 르네 블리아르·엑토르 리알·알프레도 디스테파노다. 도움은 1955-56 시즌은 물론 이후 수십 년 동안 대회 공식 기록에 없었다. UEFA가 공식 순위로 공개하는 도움 기록은 2003-04 시즌부터, 데이터 업체 Opta의 집계는 대회가 UEFA 챔피언스 리그로 개편된 1992-93 시즌부터 시작한다. 그 이전 시즌의 도움 숫자는 영상과 보도에서 후대에 재구성한 값이라 이 표에 넣지 않았다. [2][15]

첫 유러피언컵이 남긴 건 엄밀히 따지자면 트로피 하나뿐이었다. 대회 최우수 선수도, 베스트 11도 발표되지 않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신문사 《레키프》가 판을 깔아 준 대회답게 지면의 평은 차고 넘쳤어도 그 평을 명단 한 장으로 묶어 준 곳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70년이 지난 지금 “그해 가장 잘한 열한 명이 누구냐”라고 물으면, 누군가는 직접 판을 다시 벌여야 한다. 필자가 이 시즌을 한 번 더 열어 보기로 한 이유다. 창설 배경과 16강·8강은 1955-56 유러피언컵 본편, 준결승 네 경기는 4강 편, 파리의 4-3은 결승 하이라이트에서 이어진다.

허나 막상 판을 벌이고 보면 함정이 하나 있다. 출전 경기와 득점만 줄 세우면 우승팀 레알 마드리드 선수가 일곱 명쯤 들어가는 명단이 뚝딱 나오는데, 이건 일곱 경기를 치른 결승 진출팀에게는 너무 후하고 네 경기 만에 짐을 싼 팀에게는 처음부터 가혹한 방식이다. 게다가 수비수와 하프백은 득점표에 흔적 따위를 거의 남기지 않으니, 기록이 많은 선수가 곧 잘한 선수라는 등식은 1955년의 빈약한 자료 앞에서 특히 맥없이 무너진다.

그래서 필자는 순서를 뒤집어 읽었다. 먼저 UEFA가 공개한 29경기의 선발 명단에서 선수마다 어떤 번호를 달았는지부터 모았는데, 고정 등번호가 없던 시절이라 그날의 번호가 곧 그날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RSSSF의 득점 기록과 구단·당사자의 회고를 겹쳐, 누가 어느 자리에서 대회의 흐름을 틀었는지를 따졌다. 우승팀이라고 우대하지 않았고 득점 순위를 기계적으로 옮기지도 않았으며, 대신 레알이 가장 흔들린 경기와 랭스가 가장 많이 넣은 경기, 그리고 탈락팀이 가장 빛난 경기를 같은 저울에 올렸다. [1][2]

열한 명을 읽는 법

전형은 당시 유럽 구단들이 쓰던 WM(WM formation; 수비 3명, 하프 2명, 인사이드 2명과 전방 3명이 W와 M 모양을 이루는 전형)을 따랐다. GK는 골키퍼, FB는 풀백(full-back; 좌우 최후방 수비수), CH는 센터 하프(centre-half; WM에서 상대 센터 포워드를 막는 중앙 수비수), RH·LH는 오른쪽·왼쪽 하프, IL·CF·IR·OR는 인사이드 레프트·센터 포워드·인사이드 라이트·아웃사이드 라이트다. 1954 FIFA 월드컵 베스트 11처럼 현대의 포지션으로 바꾸지 않고 당대 역할어를 그대로 둔다.

아래 전술판은 서로 다른 다섯 구단의 선수를 한 화면에 세운 회고적 배열이라, 어느 한 팀의 실제 선발 대형으로 읽으면 곤란하다. 센터 포워드가 두 명이나 서 있는 것도 그래서다. 디스테파노와 코파는 둘 다 소속팀에서 9번을 달았는데, 기실 한 사람은 골문 앞과 중원을 쉴 새 없이 오간 해결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처진 자리에서 공격을 짜는 설계자였다. 둘 중 하나를 인사이드로 슬쩍 옮겨 적으면 표야 깔끔해지겠지만, 그 순간 1955-56 시즌 두 사람이 실제로 맡았던 역할은 흐려지고 만다.

엑토르 리알IL엑토르 리알레알 · 7경기 5골
레몽 코파CF레몽 코파랭스 · 7경기
알프레도 디스테파노CF알프레도 디스테파노레알 · 7경기 5골
밀로시 밀루티노비치IR밀로시 밀루티노비치파르티잔 · 4경기 8골
레옹 글로바츠키OR레옹 글로바츠키랭스 · 7경기 6골
미셸 르블롱LH미셸 르블롱랭스 · 6경기 4골
닐스 리드홀름RH닐스 리드홀름밀란 · 6경기
런토시 미하이FB런토시 미하이뵈뢰시 로보고 · 4경기 4골
로베르 종케CH로베르 종케랭스 · 7경기 · 주장
체사레 말디니FB체사레 말디니밀란 · 6경기
후안 알론소GK후안 알론소레알 · 7경기 무실점 3회
후안 알론소
GK · 골키퍼후안 알론소Juan Adelarpe Alonso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마드리드 CF 문장 · 7경기 · 무실점 3회

체사레 말디니
FB · 풀백체사레 말디니Cesare Maldini

AC 밀란 AC 밀란 문장 · 6경기

로베르 종케
CH · 센터 하프로베르 종케Robert Jonquet

스타드 드 랭스 스타드 드 랭스 문장 · 7경기 · 주장

런토시 미하이
FB · 풀백런토시 미하이Lantos Mihály

뵈뢰시 로보고 뵈뢰시 로보고 문장 · 4경기 4골

닐스 리드홀름
RH · 라이트 하프닐스 리드홀름Nils Liedholm

AC 밀란 AC 밀란 문장 · 6경기

미셸 르블롱
LH · 레프트 하프미셸 르블롱Michel Leblond

스타드 드 랭스 스타드 드 랭스 문장 · 6경기 4골

레옹 글로바츠키
OR · 아웃사이드 라이트레옹 글로바츠키Léon Glovacki

스타드 드 랭스 스타드 드 랭스 문장 · 7경기 6골

밀로시 밀루티노비치
IR · 인사이드 라이트밀로시 밀루티노비치Miloš Milutinović

FK 파르티잔 FK 파르티잔 문장 · 4경기 8골 · 득점왕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CF · 센터 포워드알프레도 디스테파노Alfredo Di Stéfano Laulhé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마드리드 CF 문장 · 7경기 5골

레몽 코파
CF · 센터 포워드레몽 코파Raymond Kopaszewski

스타드 드 랭스 스타드 드 랭스 문장 · 7경기

엑토르 리알
IL · 인사이드 레프트엑토르 리알José Héctor Rial Laguía

레알 마드리드 CF 레알 마드리드 CF 문장 · 7경기 5골

골문과 최후방

골문은 후안 알론소(Juan Adelarpe Alonso; 스페인 골키퍼, 1927-1994)에게 맡겼다. 레알의 일곱 경기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지켰고, 세르베트와의 두 경기와 파르티잔과의 마드리드 1차전까지 세 번의 무실점으로 우승팀의 첫 계단을 받쳤다. 그렇다고 흠 하나 없는 대회였냐 하면 그건 아니다. 결승 10분 장 탕플랭(Jean Templin; 프랑스 측면 공격수, 1928-1980)의 골 장면에서 알론소는 앞으로 뛰쳐나와 몸을 던지고도 공을 멈추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그를 고른 건 베오그라드의 눈밭 때문이다. 마드리드에서 네 골을 벌어 놓고 원정에서 세 골을 얻어맞은 그날, 골문이 한 번만 더 열렸더라면 레알의 다섯 시즌 연속 우승은 시작도 못 하고 끝났을 것이다. 가장 크게 흔들린 90분에 끝내 한 골 차를 남긴 골키퍼라면, 이 자리의 자격은 충분하다. [2][3]

그 앞의 중앙에는 로베르 종케(Robert Jonquet; 프랑스 수비수, 1925-2008)가 선다. 랭스의 3번이자 주장으로, 1951년 하이버리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2-2를 지켜 내 ‘하이버리의 영웅’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중앙 수비수다. 허나 솔직히 말하자면 이 시절 랭스의 수비는 자랑거리가 못 됐다. 결승 선제골의 주인공 미셸 르블롱조차 훗날 수비는 랭스의 장점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을 정도고, 실제로 뵈뢰시 로보고와의 8강에서는 여섯 골을 내줬다. 그런데 바로 그 수비진이 준결승에서는 히버니언을 두 번 만나 180분 동안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팀의 뒷문을 일곱 경기 내내 한 사람이 붙잡고 있었다는 것, 종케의 자리가 실점 숫자보다 무거운 이유다. [4][5]

오른쪽 풀백은 체사레 말디니(Cesare Maldini; 이탈리아 수비수, 1932-2016)다. 밀란의 여섯 경기에 모두 나서 대부분 2번을 달았는데, 기실 밀란의 대회는 수비만 떼어 놓고 보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자르브뤼켄에 안방 산 시로에서 네 골을 내줬고, 마드리드 원정에서도 또 네 골을 잃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5월 1일 산 시로의 준결승 2차전에서는 1차전에 네 명이 골을 나눠 넣었던 레알 공격진이 단 한 골에 묶였다. 합계 한 골 차의 긴장은 그 90분의 버티기에서 나왔고, 대회 내내 이름이 바뀌던 밀란 수비진에서 여섯 경기를 끝까지 지킨 이름이 바로 말디니였다. [1][6]

왼쪽 풀백에는 이름보다 기록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선수를 세웠다. 런토시 미하이(Lantos Mihály; 헝가리 레프트 풀백, 1928-1989), 1954년 월드컵 준우승을 이끈 아라니처파트의 레프트 풀백이자 그 대회 대한민국전에서 16분 페널티킥을 넣은 바로 그 선수다. 푸슈카시와 코치시, 히데그쿠티라는 이름이 워낙 크다 보니 한국에서는 그 곁의 수비수까지 기억되기 어려웠지만, 첫 유러피언컵의 기록지를 펼치면 얘기가 달라진다. 뵈뢰시 로보고의 4번을 달고 네 경기에서 네 골. 이게 공격수 기록이었다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주인이 레프트 풀백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팀에는 펄로타시와 히데그쿠티라는, 웬만한 유럽 구단 주전 공격수의 뺨을 후려칠 이름들이 버젓이 있었는데도 페널티킥 키커는 런토시였으니 팀이 그를 단순히 “왼쪽 수비수” 따위로 여기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네 골 중 세 골이 페널티킥이라 필드골 득점력을 과대평가할 순 없겠다만, 1-4로 끌려가던 부다페스트의 8강 2차전에서 74분 킥을 꽂아 끝내 4-4까지 끌고 간 그 담력만큼은 이 대회 어느 수비수도 보여 주지 못한 장면이었다. 안데를레흐트 원정의 필드골, 랭스 원정 77분의 페널티킥, 그리고 같은 2차전 11분의 동점 페널티킥까지 더하면, 대회에서 네 골을 넣은 수비수는 그 하나뿐이다. [2][7]

두 하프

오른쪽 하프는 닐스 리드홀름(Nils Liedholm; 스웨덴 미드필더, 1922-2007)의 몫이다. 군나르 그렌(Gunnar Gren; 스웨덴 인사이드 포워드, 1920-1991), 군나르 노르달(Nils Gunnar Nordahl; 스웨덴 센터 포워드, 1921-1995)과 함께 ‘그레-노-리’로 불리던 그 스웨덴 트리오 말이다. 다만 1955-56 시즌에는 그렌이 이미 밀란을 떠난 뒤였고, 남은 두 사람 가운데 골을 넣는 쪽이 노르달이었다면 공을 나눠 주는 쪽이 리드홀름이었다. 밀란의 여섯 경기에 모두 나선 그의 흔적은 득점표보다 득점자 명단의 모양에서 읽힌다. 라피트 빈과의 8강 2차전에서 터진 일곱 골이 무려 다섯 선수에게 고르게 나뉘었는데, 이건 중원이 한 명의 공격수에게만 공을 몰아주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게다가 대회를 통틀어 레알에게 원정 패배를 안긴 팀은 단 둘, 파르티잔과 밀란뿐이었으니 그 중원의 무게는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2][6]

왼쪽 하프에는 이 대회에서 가장 극적으로 자리를 옮긴 선수가 들어간다. 미셸 르블롱(Michel Leblond; 프랑스 하프백, 1932-2009)은 첫 유러피언컵에서 무려 세 가지 등번호를 달았다. 준결승 1차전까지는 8번과 10번을 단 인사이드 공격수였는데, 준결승 2차전과 결승에서는 5번을 달고 하프 라인으로 내려왔다. 보통 이런 경우 골 냄새부터 옅어지기 마련인데 르블롱은 정반대였다. 뵈뢰시 로보고전 두 골, 히버니언과의 준결승 1차전 67분 결승골, 그리고 1956년 6월 13일 파리에서 첫 유러피언컵 결승의 첫 골까지. 사연을 들으면 더 흥미롭다. 그는 훗날 결승을 두고 가장 큰 문제는 수비였고, 최고의 수비수 아르망 펜베른(Armand Penverne; 프랑스 하프백, 1926-2012)이 그날 빠졌다고 돌아봤다. 그러니까 공격수가 주전의 빈자리를 메우러 하프로 내려왔다가, 그 자리에서 결승의 선제골까지 넣어 버린 셈이다. 코파와 디스테파노의 이름이 걸린 결승에서 첫 골의 주인공을 기억하는 사람이 드문 것도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필자는 왼쪽 인사이드와 하프를 오가던 그의 본래 성향을 살려 레프트 하프에 세웠다. [4][8]

다섯 공격

오른쪽 끝은 레옹 글로바츠키(Léon Glovacki; 프랑스 공격수, 1928-2009)다. 폴란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네 살에 견습 조립공이 됐고, 정유공장 팀에서 공을 차다가 프로가 된 이력부터가 코파의 그늘에 가리기엔 아까운 사연인데, 첫 유러피언컵에서는 결승을 뺀 모든 라운드에서 골을 넣으며 여섯 골로 득점 공동 2위에 올랐다. 오르후스 원정의 두 골로 첫 관문을 열었고, 에든버러의 준결승 2차전에서는 57분 골로 결승행에 못을 박았다. 코파는 훗날 그와 눈을 감고도 서로를 찾을 만큼 호흡이 잘 맞았다고 회고했는데, 기실 빈말이 아니었던 게 1960년 모나코와 생테티엔을 거친 그를 랭스로 다시 불러 달라고 구단에 고집한 사람이 바로 코파였다. 주로 8번을 달았지만 7번으로 오른쪽을 맡은 경기도 있어 이 배열에서는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세웠다. [2][9][10]

그 안쪽 인사이드 라이트는 이 대회의 초대 득점왕 몫이다. 그런데 한국 팬에게는 밀로시 밀루티노비치(Miloš Milutinović; 유고슬라비아 공격수, 1933-2003)라는 이름보다 그의 동생 이름이 훨씬 익숙할지 모른다. 멕시코·미국·중국 대표팀을 이끌고 월드컵 무대를 누빈 보라 밀루티노비치(Velibor “Bora” Milutinović; 유고슬라비아 출신 축구 감독, 1944-), 바로 그 사람이 동생이다. 허나 1950년대의 형은 동생의 명성 따위에 기댈 필요가 없는 공격수였다. 대회 역사상 첫 경기였던 리스본 원정에서 두 골, 베오그라드의 2차전에서 혼자 네 골을 몰아쳤고, 1956년 1월 29일 눈 덮인 베오그라드에서는 레알을 상대로 24분과 87분에 골망을 흔들었다. 파르티잔은 그날 3-0으로 이겼고, 마드리드에서의 0-4를 한 골 차까지 좁혔다. 네 경기 8골, 경기당 두 골. 훗날 유럽을 다섯 번 연속 제패하는 레알을 가장 벼랑 끝까지 몰아붙인 공격수를, 8강 탈락팀 소속이라는 이유 하나로 뺀다는 건 필자로선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일이다. [2][11]

한가운데는 알프레도 디스테파노(Alfredo Di Stéfano Laulhé; 아르헨티나 출신 센터 포워드, 1926-2014)다. 세르베트전 두 골, 파르티잔전 한 골, 밀란전 한 골에 결승의 추격골까지 다섯 골이니 숫자만 보면 득점왕과 세 골이나 차이가 난다. 허나 이 선수를 득점 순위로 재는 건 애초에 번지수를 잘못 찾은 셈이다. 결승을 보면 안다. 레알이 10분 만에 0-2로 끌려가던 그 절망적인 흐름에서 4분 만에 첫 골을 돌려놓은 게 그였고, 30분 리알의 동점골을 만들어 준 것도 그였다. 대회를 만든 신문 《레키프》의 가브리엘 아노(Gabriel Hanot; 프랑스 축구선수 출신 기자, 1889-1968)는 디스테파노를 자신이 본 가장 완전한 선수라 부르며, 그가 코파를 완전히 가려 버렸다고까지 평한 것으로 전해진다. [4][12]

그리고 바로 그 평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레몽 코파(Raymond Kopaszewski; 프랑스 공격수, 1931-2017)를 디스테파노 옆에 세웠다. 일곱 경기 무득점. 숫자만 보면 명단에 들 이유가 하나도 없는 선수다. 그런데 기실 랭스라는 팀 자체가 코파가 9번을 단 채 뒤로 내려와 공간을 비워 주는 팀이었다. 알베르 바토(Albert Batteux; 프랑스 감독, 1919-2003)의 결승 구상부터가 측면의 미셸 이달고(Michel Hidalgo; 프랑스 공격수, 1933-2020)와 탕플랭이 바깥을 돌아 코파가 움직일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고, 파리의 준결승 1차전에서 《르 몽드》는 공을 끌며 상대를 불러들인 뒤 순간적으로 속도를 바꾸는 코파를 경기의 주인공으로 적었다. 결승 62분 이달고의 골도 코파의 프리킥에서 나왔다. 랭스가 결승까지 일곱 경기에서 한 번도 빠짐없이 골을 넣은 그 공격의 설계도는, 엄밀히 따지자면 득점표 바깥에 그려져 있었던 셈이다. 1954년 베스트 11의 히데그쿠티가 그랬듯, 후퇴형 센터 포워드는 동료의 골로 읽어야 한다. [4][5][13]

마지막 자리, 인사이드 레프트는 엑토르 리알(José Héctor Rial Laguía; 아르헨티나 출신 인사이드 포워드, 1928-1991)에게 돌아간다. 레알의 10번이었던 그는 세르베트 원정의 89분 골로 레알의 첫 유럽 원정을 매듭지었고, 밀란과의 준결승 1차전에서는 6분 만에 선제골을 넣었다. 허나 리알의 진짜 얼굴은 결승에서 나왔다. 30분 디스테파노의 패스를 받아 2-2를 만들었고, 3-3으로 맞선 79분에는 첫 터치로 수비를 벗겨 낸 뒤 레알의 첫 리드이자 결승골을 꽂았다. 대회 다섯 골 가운데 두 골이 결승, 그것도 한 골은 우승을 결정한 골이었으니 해결사라는 말이 이만큼 들어맞는 선수도 드물다. 디스테파노가 판을 흔들면 리알이 끝을 냈다. 첫 유러피언컵의 레알은 딱 그런 팀이었다. [2][4]

명단 밖에 남은 이름들

솔직히 가장 오래 붙잡고 있던 이름은 펄로타시 페테르(Palotás Péter; 헝가리 센터 포워드, 1929-1967)였다. 안데를레흐트전에서 대회 첫 해트트릭을 기록했고 네 경기에서 여섯 골을 넣었으니, 경기당 득점만 놓고 보면 밀루티노비치 바로 다음이다. 허나 뵈뢰시 로보고는 랭스와의 8강 두 경기에서 여덟 골을 내주고 짐을 쌌고, 그 팀에서 가장 이례적인 방식으로 가장 큰 짐을 진 선수는 풀백 런토시였다. 같은 팀의 히데그쿠티 난도르(Hidegkuti Nándor; 헝가리 센터 포워드, 1922-2002)도 8번을 달고 네 경기 두 골을 넣었지만, 후퇴형 공격이라는 같은 역할의 자리는 결승까지 일곱 경기를 이끈 코파에게 돌아갔다. [14]

아까운 이름은 더 있다. 후안 스키아피노(Juan Alberto Schiaffino; 우루과이 출신 인사이드 포워드, 1925-2002)는 여섯 경기 세 골에 마드리드 원정에서도 골을 넣었고, 르네 블리아르(René Bliard; 프랑스 공격수, 1932-2009)는 일곱 경기 다섯 골로 랭스의 득점을 나눠 짊어졌다. 브란코 제베치(Branko Zebec; 유고슬라비아 센터 하프, 1929-1988)는 레알을 3-0으로 무너뜨린 파르티잔 후방의 5번이었고, 에디 턴불(Edward Hunter Turnbull; 스코틀랜드 공격수, 1923-2011)은 로트바이스 에센 원정의 두 골로 영국 선수 최초의 유럽 클럽 대회 득점자라는 이름을 남겼다.

레알의 주장 미겔 무뇨스(Miguel Muñoz Mozún; 스페인 하프백, 1922-1990)와 결승 67분 동점골의 마르키토스(Marcos Alonso Imaz; 스페인 수비수, 1933-2012)도 끝까지 명단 언저리를 맴돌았다. 우승팀 주장의 상징성도, 수비수가 결승에서 넣은 동점골의 무게도 분명하다. 허나 대회 전체를 같은 저울에 올리겠다고 한 이상, 한 경기의 명장면보다 여러 라운드에 걸친 역할을 먼저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추리고 나니 레알에서 세 명, 랭스에서 네 명, 밀란에서 두 명, 파르티잔과 뵈뢰시 로보고에서 한 명씩이 남았다. 첫 유러피언컵은 두말할 것 없이 레알의 대회였다. 다만 그 대회를 가장 뜨겁게 달군 사람들까지 모두 레알의 흰 유니폼을 입고 있었던 건 아니다.

출처와 기록 기준

  1. 「European Champion Clubs’ Cup 1955/56 matches and line-ups」, UEFA 경기 데이터. 29경기의 선발 명단과 선수별 등번호.
  2. 「European Champions’ Cup 1955-56 - Details」, RSSSF. 경기별 득점 시각, 결승 명단, 득점자 목록.
  3. 「Historia 1951-1960」, 레알 마드리드 CF. 베오그라드 원정과 첫 유럽 우승.
  4. 「The stuff Reims were made of」, UEFA, 2006년 5월 15일. 르블롱의 결승 회고와 펜베른의 결장, 코파의 프리킥과 디스테파노의 도움.
  5. 「Il y a 70 ans, Reims était si près du toit de l’Europe」, 스타드 드 랭스. 바토의 측면 운용과 결승 득점 흐름. 「Robert Jonquet」, Wikipédia. 종케의 하이버리 별명과 랭스 주장 경력.
  6. 「Milan 1955-56: gare ufficiali」, Maglia Rossonera. 밀란의 유러피언컵 경기 기록.
  7. 「Vörös Lobogó 4-4 Stade de Reims」, Archives Reims Football. 1955년 12월 28일 8강 2차전 명단과 득점 시각.
  8. 「Michel Leblond」, 프랑스축구협회; 「Michel Leblond」, Wikipédia. 르블롱의 포지션과 선수 경력.
  9. 「Raymond Kopa: en 1954, rien n’a marché」, 프랑스축구협회. 코파가 회고한 글로바츠키와의 호흡.
  10. 「Léon Glovacki」, Wikipédia. 글로바츠키의 출신, 랭스 복귀와 코파의 요청(L’Équipe 2009년 9월 11일 부고 인용).
  11. 「Miloš Milutinović」, Wikipedia(세르비아어). 형제 관계와 파르티잔 소속 유러피언컵 기록.
  12. 「Europe’s Champions: 1955-56 – Real Madrid」, Game of the People. 가브리엘 아노의 디스테파노 평 인용.
  13. 「En demi-finale de la Coupe d’Europe, magnifique succès de Reims」, Le Monde, 1956년 4월 6일. 준결승 1차전의 코파.
  14. 「Palotás Péterre emlékezünk」, MTK 부다페스트. 펄로타시의 대회 첫 해트트릭.
  15. 「All-time player rankings: Most assists」, UEFA; 「Who Has the Most Champions League Assists?」, Opta Analyst, 2023년 10월 12일. UEFA 공식 도움 집계(2003-04 시즌부터)와 Opta 집계(1992-93 시즌부터)의 시작 시점.

1955-56 시즌에는 공식 대회 베스트 11 시상이 없었다. 열한 명은 삥이FC가 2026년 선정한 회고 명단이다. 출전 경기는 UEFA 경기 데이터의 선발 명단, 득점은 RSSSF 경기 기록을 기준으로 하며 당시 대회를 포괄하는 공식 도움 통계는 없어 기록표에 넣지 않았다. 역할어는 선수가 경기마다 단 등번호와 당시 구단의 번호 체계를 따랐다. 헝가리 선수의 한글명은 헝가리어 순서에 따라 성-이름 순으로 표기했다. 체사레 말디니·닐스 리드홀름·로베르 종케·밀로시 밀루티노비치 사진은 Wikimedia Commons 소장본을, 알프레도 디스테파노 사진은 1956년 발롱도르 편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선수 카드의 구단 문장은 국적과 혼동되지 않도록 국기 대신 1955-56 유러피언컵 본편과 같은 시대의 구단 자산을 사용했다.